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16 (하리자전거길쉼터 –병산서원 –광덕교)

시인마뇽 2024. 4. 11. 01:28

탐방구간: 하리자전거길쉼터 병산서원 광덕교

탐방일자: 2024. 4. 8()

탐방코스: 풍산장터-하리자전거길쉼터-풍산배수장-병산서원-유교문화길  -하회제

                -하회세계탈박물관-하회교차로-광덕교-서안동농협주유소 건너편 정류장

탐방시간: 935-171(7시간26)

동행       : 나 홀로

 

 

  안동문화를 대표하는 최고의 유적지라면 단연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나라 서원 중에서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서원은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병산서원, 도동서원, 무성사원과 돈암서원 등 모두 9개 서원입니다. 이 중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안동 땅에 자리하고 있고, 나머지 중 소수서원은 경북영주에, 남계서원은 경남함양에, 옥산서원은 경북경주에, 필암서원은 전남장성에, 도동서원은 대구달성에, 무성서원은 전북정읍에, 돈암서원은 충남논산에 위치해 있습니다.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15년 전인 2009년에 모두 탐방했던 곳으로, 다녀와서 탐방기를 작성해 제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지난 1월에 낙동강을 따라 걸으면서 도산서원을 들르지 못한 것은 이 서원이 제가 걷는 길에서 강 건너에 있어서였는데, 병산서원은 제가 걷는 길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어 십수분 남짓 짬을 내 부지런히 둘러 보았습니다.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이 자리한 안동이 오늘날 정신문화의 수도로 자처하고 나선 것은 충분히 그리할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조선조 영조 때의 실학자인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영남에서 가장 많은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곳이 바로 안동이라고 합니다. 중종 때의 문신이자 시조시인인 농암 이현보 선생이 안동분이었고, 조선조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선생을 비롯해 선생의 문하생인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 등 빼어난 학자들 모두가 안동이 배출한 유학자들입니다. 퇴계선생께서 집대성한 성리학은 안동 출신 문하생들은 물론하고, 호남의 기대승이나 경기의 김취려 같은 다른 지역 문하생들도 각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널리 퍼뜨렸습니다. 그 결실로 여기 선생의 고향인 안동이 조선 성리학의 본산으로 자리 잡았고 공자와 맹자의 고향에 견주어 이 나라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안동이 이 나라 정신문화의 수도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일조한 또 하나는 안동양반들의 투철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식과 그 실천입니다. 조선조 19대 임금인 숙종 이후에는 관직다운 관직을 가져본 적이 없는 안동 양반들이 1894년 갑오경장 때 일본과 맞서고자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갑오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같은 해 조선을 여행한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이사벨라 비숍여사가 당시의 양반들을 면허받은 흡혈귀라고 비난한 것에 비추어본다면 안동이 일제 침략과 식민지지배에 맞서 싸운 의병과 독립운동가를 어느 지역보다 가장 많이 배출한 것은 안동 유림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식의 발현이라 하겠습니다. 안동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들은 전국 시군 평균 80여명의 3배에 해당하는 257명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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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터미널에서 풍산 가는 212번 버스를 바로 타서, 생각보다 일찍 풍산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장이 서는 날이라서 풍산장터는 지난번과는 달리 왁자지껄해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의 5일장은 상품교환의 장()이자 정보소통의 장()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5일장을 기다렸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채소를 이고 가서 파시고 생활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사 오셨는데, 그때마다 빼놓지 않은 것은 육전소설(?)이었습니다. 장에 가셔서 장화홍련전이나 숙영낭자전같은 이야기책을 사 오시거나 빌려 오신 것으로 보아 어머니께서는 5일장을 이동도서관으로 활용했던 셈입니다.

 

  935분 풍산장터를 출발했습니다. 장터를 지나 하리교에 이르러 풍산제 제방길로 들어서자 지난번에 건넌 세월교가 가까이 보였습니다. 풍산천 우안의 풍산제를 따라 걸어 세월교 우안 둑에 이르자 자전거를 끌고 나온 아주머니 두 분이 봄을 맞아 자전거길 쉼터의 정자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낙동강하구까지 남은 낙동강종주 자전거길이 295Km라는 것은 표지물을 보고 알았습니다.

 

  107분 하리자전거길쉼터를 출발했습니다. 기온이 20도 가까이 급상승해 풍산제 둑길의 벚꽃이 만개하지 않았다면 봄이 그새 지나갔나 하고 착각할 뻔했습니다. 봄과 가을이 짧아졌다 싶은 것은 한반도의 기후가 온대에서 아열대로 서서히 변화해가서가 아닌가 합니다. 짧아진 봄을 놓칠세라 여러 분들이 벚꽃의 제방길로 봄나들이를 나섰 습니다. 잠시 멈춰서서 스마트폰을 꺼내 벚꽃 사진을 찍는 이분들을 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풍천제 동쪽으로 드넓은 평야에 비닐하우스가 들어서 연중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것은 풍천제 서쪽으로 낙동강이 흘러 가능할 것입니다. 남쪽으로 이어지는 제방 길이 오른 쪽으로 휘어지는 풍산천/낙동강의 합류점을 지나 유로가 좁은 신역천을 세월교로 건너 중리제 둑길로 올라서자 낙동강 양가에 들어선 습지가 꽤 넓어 보였습니다.

 

  115분 풍천배수장을 지났습니다. 직선에 까까운 중리제를 걸어 풍천배수장에 이르자 배수문과 소류지가 보였습니다. 바로 앞 삼거리에서 2.6Km 거리의 병산서원까지는 15년 전 관광버스를 타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언제고 낙동강을 따라 이 길을 걸어보겠다고 생각했는데 늦게나마 뜻한 바를 이루게 되어 가슴 뿌듯했습니다. 경사가 완만한 차도를 따라 걸어 올라가 조선 중기 안동의 효자로 알려진 김세상(金世商, 1527 ~ ?)이 세운 정자 어락정(魚樂亭) 앞에 다다랐습니다. 정면 3, 측면 1칸의 어락정은 문이 닫혀 담 너머로 보았는데, 잠시 쉬어가는 여타 정자들과 달리 방을 들인 것으로 보아 오래들 기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병산서원이 가까워지자 강 건너 우뚝 선 병산이 저를 반겼습니다. 암석이 차곡차곡 쌓여 수평 방향으로 층을 이루고 있는 층리(層理)가 잘 발달한 병산(屛山)의 검은 바위 띠가 바로 아래 낙동강의 강물 색 및 강 건너에 넓게 자리한 모래밭의 모래색과 잘 대비되어 병산의 위용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12시 정각 병산서원에 도착했습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선생을 배향하는 병산서원은 화산(花山)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낙동강을 임수(臨水)로 하며, 강 건너 병산(屛山)을 안산(案山)으로 하는 전형적인 길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당 존덕사 아래에 입교당이 위치했는데 이것이 바로 강학당입니다. 기숙사인 동제와 서제는 입교당 아래 양옆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을 통과해 만대루(晩對樓)를 만났습니다. 병산서원이 다른 서원보다 건축미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일곱 칸의 단순한 건물인 만대루(晩對樓) 덕분이라는데, 이는 만대루를 통해 임수(臨水)인 낙동강과 안산(案山)인 병산을 건축적으로 끌어들여 자연공간을 건축공간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15년 전에는 만대루에 올라가 낙동강과 병산을 조망했었는데, 이번에는 출입을 막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복례문으로 들어가 문이 닫힌 존덕사, 만대루와 입교당, 동제와 서제를 서둘러 둘러보고 나와, 강변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병산서원을 출발해 하회마을까지 4Km 거리의 길은 낙동강 우안의 강변과 화산의 산자락에 낸 유교문화길로 이어졌습니다. 낙동강수계 매수토지의 생태복원을 위해 조성한 숲을 지나자 오른쪽 화산으로 나 있는 길이 보였습니다. 데크 길을 올라서 급경사의 산자락에 낸 좁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 길을 걸어 데크 길로 내려서기까지 방호가드가 설치되었는데도 마음을 놓지 못했습니다. 데크길을 따라내려갔다가 다시 오른 유교문화길은 경사도 완만하고 차들이 지나가도 될 만큼 길이 넓어 봄을 즐기며 걷기에 딱 좋았습니다. 이 길을 따라 올라 무명의 정자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조금 내려가자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하회마을 역시 10년 전인 2014년 봄에 탐방한 바 있어 이번에는 낙동강을 따라 제방길을 걸을 목적으로 하회마을을 들르지 않았습니다.

 

  1349분 하회제의 제방 길로 들어섰습니다. 무명의 정자에서 내려선 삼거리에서 직진하는 하회마을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이동해 하회제 제방길에 이르자 하얀 벚꽃이 활짝 피어 온 길이 화사했습니다. 2인용 자전거를 같이 타고 제방길을 달리는 커플이 제법 많이 보였는데,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하회마을을 가운데 두고 제방길을 따라 시계반대방향으로 한참 동안 진행해 곱디고운 모래들이 넓게 자리 잡은 모래밭을 지나자 송림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푸르른 소나무들과 강 건너 점잖게 정좌한 부용대를 보노라니 10년 전에 함께 왔던 방송대 학우들이 생각났습니다. 솔밭의 소나무들도 그대로이고 강 건너 부용대도 여전한데 함께 왔던 학우들은 소식이 없어 10년간 소리 없이 흘러간 세월이 아주 멀게 느껴졌습니다.

 

  이번에 들르지 못한 하회마을은 풍산유씨가 600년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동성마을로 기와집과 초가집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2010년 유네스코에서 하회마을을 한국의 역사마을로 등재한데 이어 2022년에 하회별산굿탈놀이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것은 안동이 고유의 문화를 잘 보존해온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하회마을종합안내소를 출발해 차도를 따라걷다가 이내 왼쪽의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도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걸으며 멀리 보이는 광덕교와 낙동강의 물흐름을 찍은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내 하회마을을 왕복하는 셔틀버스승강장에 이르러 짧은 길의 산길 산행을 끝냈습니다.

 

  1524분 하회세계탈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제가 하회마을을 돌아보는 대신 택한 것은 하회장터를 둘러보고 하회세계탈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이었습니다. 월요일인데도 문을 열어 하회세계탈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189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탈 전문박물관인 이 박물관은 세계 50개국의 약3천여점의 탈을 소장하고 있고, 그중 8백여점의 탈을 전시하고 있다고 박물관의 홍보용 안내전단은 적고 있습니다. 익살스러운 모습의 각종 탈을 보면서 제 나름 느낀 것은 상민들에 의해 연희(演戲)되어 온 하회별산굿탈놀이가 양반문화의 중심지인 안동에서 꽃 피운 것 자체가 익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회마을의 하회탈, 황해도의 봉산 · 강령 · 은율 탈, 서울 · 경기도의 산대 탈, 경상도의 야류, 오광대의 탈 등 우리나라 각종 지역의 놀이용 탈과 의식용 탈 등 우리나라 옛 탈들이 나란히 전시된 것을 보면서 방송대에서 배운 각종 탈놀이를 오랜만에 복습했습니다.

 

  1651분에 광덕교에 도착해 16번째 낙동강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하회세계탈박물관에서 차도를 따라 고개를 넘어 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이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안쪽 동네로 이어지는 유교문화길로 들어섰으나 지나는 마을이 폐가들이 즐비한 폐촌마을(?)이어서인지 길을 안내하는 표지물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5만분의 1 척도의 지형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유교문화길을 무리하게 찾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이어서 보다 확실한 차도로 복귀했습니다. 하회교차로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차도를 따라 걸어 풍천의 서안동농협을주유소앞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10분 거리의 광덕교에 다다라 후딱 광덕교와 낙동강을 사진 찍는 것으로 16번째 낙동강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곧바로 서안동농협주유소로 돌아가 건너편 정류장에서 반 시간 남짓 기다려 1737분에 도착한 211번 버스에 올라 안동터미널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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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이 유교문화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사립대학교 역할을 해낸 서원이 많아서만은 아닙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확인한 안동의 서원만도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외에 묵계서원, 화산서원 등 19개소가 더 있습니다. 안동을 안동답게 만들어 온 또 다른 것은 수많은 종택과 누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수 많은 종택과 누정들을 일일이 들르지 못한 것은 그러다가는 언제 안동을 벗어날지 가늠이 안되어서였습니다. 제가 들른 종택은 농암종택, 성성재 종택, , 삼산종택과 우송정 등이고, 누정은 고산정과 어락정에 불과하지만 인터넷을 뒤지면 안동에는 종택과 정자가 몇 십개소가 더 있습니다. 안동 땅 어디를 가더라도 서원이나 종택 또는 누정을   만나게 되어 유교문화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한데 조선 시대에는 오죽했으랴 싶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양반문화로 대표되는 안동의 유교문화는 안동의 상민들에게는  따르기에 힘에 부치는 문화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유교문화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자 상민들이 연희에 빠져든 것이라면 그 연희는 양반들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익살스러운 탈춤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저 역시 낙동강을 탐방하느라  총 10회 안동 땅을 걸었는데  저도 모르게 얼마간 유교문화에  주눅들은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탐방사진>

 

시인마뇽 2024. 4. 11. 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