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18(풍지교-삼강문화단지-상풍교)

시인마뇽 2024. 5. 7. 08:35

탐방구간: 풍지교-삼강문화단지-상풍교

탐방일자: 2024. 5. 1()

탐방코스: 구마전삼거리-풍지교-삼수정-쌍절암-비룡교-삼강교-청운3리정류장

                 -하풍제-영풍교-와룡제-상풍교-물갓매호 정류장

탐방시간: 1025-1810(7시간45)

동행       : 나 홀로

 

 

  이번에 따라 걸은 낙동강의 풍지교-상풍교 구간에서 풍광이 가장 빼어난 곳을 들라면, 저는 예천군 풍양면의 쌍절암(雙節岩)을 으뜸으로 꼽고자 합니다. 대동산의 서쪽 사면에 자리한 쌍절암은 낙동강쌍절암(삼강주막)생태숲길에서 50m가량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다다를 수 있는 큰 바위로, 그 위에 정자 대동정 (大同亭)이 세워져 편안하게 바로 아래 낙동강의 승경을 완상할 수 있었습니다. 남동쪽 먼발치로 풍지교와 너른 습지가 보이고, 북서쪽으로는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의 물흐름이 조망되는 쌍절암에 올라 십여분을 머물렀습니다. 

 

  쌍절암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주변 풍광이 빼어나서만은 아닙니다.  쌍절암(雙節岩)은 임진왜란 당시 이곳 대동산(大同山) 아래 대대로 이어 살던 동래정씨 19() 사재감 참봉인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의 배위(配位) 유인(孺人) 청주한씨 (消州韓氏)와 그 시누이 정처녀(鄭處女)가 왜적을 피해 정절을 지킨 곳입니다. 왜적이 침공하자 한씨(韓氏)는 그 시누이와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梅塢公)에게 " 적병의 분탕과 노략질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들을 피하기는 어렵고 중도에서 적병의 손에 죽게 될 터인데 어찌 스스로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순절을 온전히 합만 같으리오"라고 말하고서,  적병이 가까이 오자  깎아지른 듯한 쌍절암에서 천길 절벽 아래 검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정절(貞節)을 지켜냈습니다. 조정에서는 조상의 얼이 서린 옛 마을 우망동(憂忘洞) 어귀에 쌍절각(雙節関)을 세우고 돌을 깎아 그 사연을 새겨 쌍절(雙節)을 현양하였는데, 그 쌍절비명(雙節碑銘)은 대사성이이었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짓고 경성판관 매호(梅湖) 조우인(曺友仁)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읽고 화가 난 것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정절이라는 유교적 가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여성들의 자살을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명문가인 동래정씨의 사대부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는 부인과 오누이의 자살을 적극적으로 나서 말리지 않았습니다. 조선 조정은 쌍절각(雙節関)을 세우고 돌을 깎아 그 사연을 새겨 쌍절(雙節)을 현양하였고, 당대의 이름난 문인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비문을 짓고 매호(梅湖) 조우인(曺友仁)이 글씨를 써넣었습니다. 정절을 죽음으로써 지켜낸 조선여성을 조정까지 나서 기린 것은 가문에는 영광이 되었을지 모르나, 조선의 여성들에게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라는 묵시적인 강요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조선시대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여인의 수가 1910년 조선이 패망하고 자살을 택한 사대부들도 훨씬 많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여성들의 정절이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참으로, 이는 요즘 더 이상 그런 여인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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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아침 7시에 경부고속터미널을 출발하는 첫 고속버스를 타고 예천으로 향했습니다. 예천터미널에서 하차해 갈아탄 농촌버스가 지보에 이르자 마침 5일장이 서서인지 거리가 부산했습니다. 지보 면소재지를 지나 구마전삼거리에서 하차, 낙동강 탐방을 채비했습니다.

 

  오전1025분 구마전삼거리를 출발해 예천군의풍양면과 지보면을 이어주는 풍지교로 이동했습니다. 옛날에는 이 다리 아래 문정자 나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리가 오래되어 자전거와 경운기만 통행이 허용되는 풍지교를 건너 의성군 중 낙동강이 지나는 다인면으로 들어섰습니다. 강 건너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의성하천관리사무소를 지나자 이내 의성군다인면은 예천군풍양면으로 바뀌었고 청감제 제방길이 시작됐습니다. 곧게 뻗은 낙동강 좌안의 제방길을 걷다가 노랑 꽃이 무더기로 핀 아기똥풀을 보았습니다. 이름과는 달리 아기똥풀이 어디서 보아도 화사하면서도 아름답다 싶은 것은 꽃이름을 알고 있는 저를 이 풀꽃들이 반겨 맞아서가 아닌가 합니다. 왕버들 등 수변 수목들이 강변을 가득 채워 낙동강의 물길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1152분 삼수정을 들렀습니다. 청감제가 끝나는 곳에서 청곡제가 시작되는 곳까지 짧은 길은 강변 가까이에 데크 길로 이어졌는데, 이 데크 길을 걸으면서 청감제 길을 뒤돌아 보자 지나온 하상의 늪지가 엄청 넓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청곡양수장과 우엉밭을 차례로 지나 청곡제 제방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제방길을 걷다가 고목이 눈길을 끌어 다가간 곳은 삼수정(三樹亭)입니다. 삼수정은 동래 정씨 청곡리 입향조(入鄉祖)인 삼수(三樹) 정귀령(鄭龜鈴)이 조선 세종 7(1425)에 세운 정자로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정귀령은 정자를 세우면서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는데, 제 눈을 끈 것은 남아 있는 노거수(老巨樹) 한 그루였습니다. 제가 보고 있는 삼수정은 1909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과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그 앞에 사주문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전체를 마루로 하고, 가운데 뒤 칸에 마루방을 둔 이 정자의 독특한 평면형식은 영남 지방에서 흔치 않은 사례로 희소가치가 크다고 안내문은 적고 있습니다. 수령이 6백 년은 족히 되었을 노거수 회화나무는 아직도 가지에서 잎이 돋아나 이 나무야말로 노익장을 뽐내고 있다 했습니다.

 

  1245분 쌍절암(雙節岩)을 들렀습니다. 청감제가 끝나는 곳에서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 한 분을 만나 여기서부터 삼강제에 이르기까지 강변을 따라 데크 길이 나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지도에는 이 길이 나와 있지 않아 산길로 대동산을 오르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낙동강쌍절암(삼강주막)생태숲길로 명명된 잔도가 나있어 이 길로 질러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낙동강쌍절암(삼강주막)생태숲길에서 백미는 산 중턱에 자리한 쌍절암에서 내려다보는 낙동강의 빼어난 승경(勝景)입니다. 잔도에서 40-50m 가량 계단을 올라가야 다다를 수 있는 쌍절암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조선 명문가의 며느리와 시누이가 그 아래 낙동강으로 몸을 던진 바위입니다. 이 바위 위에 세운 정자 대동정에  올라  낙동강의 물흐름을 조밍했습니다. 제방길을 걸을 때는 풍지교-청곡제-청감제에 이르기까지 낙동강의 강변은 넓은 습지로, 연초록 나무들에 가려 낙동강의 물흐름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쌍절암에서 내려다본 낙동강은 물줄기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148분 삼강교에 다다랐습니다. 쌍절암에서 내려가 잔도를 따라 걸으며 관세암과 전망대를 차례로 지나며 모처럼 낙동강의 도도한 물흐름을 지근거리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얼마 후 삼강제 제방길로 들어섰고, 회룡포로 길이 이어지는 비룡교를 지나 강문화전시관을 들렀는데, 근로자의 날이라서 휴관해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팝나무의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삼강주막 거리를 둘러보고 삼강교로 가서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삼강의 합수점을 찾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작년 여름 해병대원 채상병이 실종자를 수색하다 안타깝게도 급류에 휩쓸려 숨진 곳이 바로 내성천입니다. 내성천은 봉화군의 선달산(1,236m)에서 발원해 영주시와 예천군을 차례로 지나 강 건너 문경시영순면의 달지리에서 금천과 합류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낙동강의 제1지류로 강 길이가 110Km에 달하는 긴 강입니다. 내성천이 유명해진 데는 예천시 용궁면의 대은리에 자리한 회룡포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회룡포는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물을 휘감아 돌아가는 지형으로, 우리나라에서 감입곡류가 가장 발달한 곳이라 하겠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회룡포를 두고 경관적 가치가 뛰어날 뿐 아니라 하성단구, 하중도, 포인트바, 범람원 등 한눈에 볼 수 있어 침식 및 퇴적지형 연구의 기초자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하천을 둘러싸고 있는 비룡산에는 신라시대 고찰인 장안사 등의 문화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 등의 보존가치가 높은 곳으로 문화재청에서 2005년 명승지로 지정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물 좋기로 소문난 단술의 샘 예천(醴泉)’에서 물이 가장 풍부한 곳이 세 강이 합류하는 여기 삼강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삼강나루터는 내성천과 금천 및 낙동강이 합쳐지는 합류처로 1980년경 나룻배의 운행이 중단되기까지 수륙교통의 요충지로, 서울로 장사하러 가는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릴 때나 선비 또는 장사꾼들이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갈 때 반드시 거쳐 가던 길목이었습니다. 여기 삼강나루터에는 황포돛대를 단 돛단배 두 척이 운행되어 1960년대까지 성황을 이루었던 곳으로, 큰 배는 소와 각종 짐들을 날랐고, 작은 배는 16명까지 사람을 태우고 강을 건너다녔다고 합니다.

 

  낙동강 좌안의 삼강제를 따라 걸어 다리 건너가 문경시영순면인 달봉교에 이르자 낙동강이 시계방향으로 완만하게 휘어져 흘렀습니다. 곡류(曲流) 안쪽으로 꽤 넓게 자리한 모래밭이 보였고, 그 건너편에는 풍양양수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58분 청운3리정류장에 이르렀습니다. 삼강제 제방길은 달봉교 앞에서 끝났고, 자전거길은 용당산의 산 허리에 낸 59번 국도를 따라 이어졌습니다. 이 길을 따라 오르다 전망대에 이르러 잠시 멈춰 시원스레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를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고개를 넘어 내려선 청운3리정류장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얼마간 떨어져 걸은 낙동강 제방 길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정다운 농장을 거쳐 구룡교로 향하는 중 시멘트 수로로 물이 콸콸 흐르는 것을 보고 주민 한 분께 물어 이 물이 산 너머 풍양양수장에서 양수해 공급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지역 주민들이 농사철에 때맞춰 원하는 만큼 농업용수를 쓸 수 있는 것은 낙동강이 가까이 있고 양수장이 같이 있어 가능했을 것입니다.  달봉교를 출발해 1시간 남짓 낙동강과 떨어져 걷다가  넓은 들판을 지나 다시 낙동강 좌안의 하풍제에 이르렀습니다. 이 제방길을   따라 걸어 예천군의 풍양면과 문경시의 영순면을 이어주는 영풍교로 향했습니다.

 

  1628분 영풍교를 지났습니다. 영풍교에서 이번 탐방을 끝내고자 한 원래 계획을 바꾸어 4Km 남짓 떨어진 상풍교까지 진행하기로 한 것은 대동산에 낸 산길 대신 낙동강쌍절암생태숲길로 질러가 시간 여유가 생겨서였습니다. 영풍교를 지나 데크 길로 이어지는 낙동강 좌안의 차도 갓길로 들어섰습니다. 데크 길을 지나 이번 탐방의 마지막 제방길인 와룡제로 올라서자 낙동강의 유로가 넓어지고 물흐름이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와룡제 제방 왼쪽은 넓은 밭이 우엉 잎으로 덮여 푸르렀 ,  오른쪽은 영강이 합류하는 합류점 인근에 풍양파크 골프장이 들어서 역시 푸르렀습니다. 서두르면 1840분에 점촌을 출발하는 서울행 고속버스를 탈 수 있겠다 싶어 쉬지 않고 내달았지만, 고속버스 출발을 1시간 남겨 두고 상풍교에 도착해 예매한 표를 취소하고 1940분에 상주터미널을 출발하는 서울행 고속버스를 예매했습니다.

 

  1810분 상풍교를 건너 상주시의 물갓매호 정류장에서 낙동강탐방을 마쳤습니다. 와룡제가 끝나는 상풍교에 이르러 다리를 건너다 중간에 잠시 멈춰서서 다음번에 따라 걸을 낙동강을 사진 찍는 동안 강바람이 세게 불어 모자를 벗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강 건너 상주 땅에 들어서 사거리에 이르자  오른쪽으로 1.9Km 떨어진 곳에 '낙동강칠백리표지석'이 세워져 있음을 알리는 표지목이 보였습니다.  '낙동강칠백리표지석'은 낙동강이 영강과 합류하는 상주시 사벌국면 퇴강리의 합수점에 세운 비석으로 이 표지석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칠백리라고  합니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마땅히 다녀와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표지석을 카메라에 담아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사거리에서 직진해 바로 위 물갓매호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했습니다. 한참동안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아 상주택시를 불러 상주터미널로 이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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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절암의 비극은 천년 전 낙화암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진 것도 적군에 몸을 더럽힐 까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천 명이 맞느냐 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단 몇 명의 궁녀라도 투신해 죽은 것이 사실일진대, 이 땅에서 여성들의 목숨을 천하게 대한 것은 그 역사가 꽤 깊은 것이 분명합니다.

 

  임진왜란 때 한씨부인과 시누이처럼 강으로 투신해 죽음을 택한 여인들은 몇 명 더 있습니다. 평창군수 권두문의 부실인 강소사(康召史)는 부군과 함께 응암굴로 피난을 갔다가 일본군에 붙잡히게 되자 그 아래 평창강으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정조를 지킨 조선의 여인입니다. 권두문은 811일자 일기에서 강소사의 죽음을 아래와 같이 전했습니다.

 

  “적은 나를 먼저 묶고 강녀(康女)를 잡으니 강녀의 평상시 안색과 말투로 내가 어디 가리오?’ 하며 나를 따라 굴을 내려오다가 왜병이 손을 잡으려 하니 장차 왜병에게 욕볼 것을 미리 짐작하고 사다리에서 천인절벽으로 떨어지니 왜적도 탄식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경상북도 영주시는 구성공원에 정려각을 지어 정절을 지킨 강소사의 죽음을 기리고 있습니다.

 

  논개(論介)의 죽음은 정절만 지킨 것이 아니고 의롭기까지 하여 그녀가 진주 남강으로 뛰어내린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부릅니다. 장수현감 최경회는 아버지를 여의고 힘들게 살고 있는 논개 모녀를 관아로 데려와 돌봐주다가 첫 아내를 잃고 나서 장성한 논개를 내실로 삼았다 하니 논개를 의기(義妓)로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해주최씨 족보에 부실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도 논개는 최경회의 정실은 못되었지만 기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저 또한 학교에서 일개 비천한 기생 신분인 논개가 장하게도 왜장을 껴안고 강으로 뛰어내렸다고 배웠으니 논개가 기생이 아니고 최경회장군의 부실로 밝혀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인 것 같습니다.

 

  1593년에 벌어진 제2차 진주성전투는 왜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최경회 등 조선군 장수들의 머리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도요토미에 보낸 왜군은 촉석루에서 진주성 승전의 축하잔치를 벌였습니다. 논개는 이 잔치에서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촉석루 밑 바위로 꾀어내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려 의롭게 죽었습니다.

 

  1923년 시인 변영로는 잡지 신생활 3호에 시 논개를  발표해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찬했습니다. 변영로는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로 이 시를 시작해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르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 강낭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로 끝맺었습니다. 논개의 충의와 절개가 저절로 읽히는 이 시를 처음 접하고 가슴이 뛰었던 것은 고등학교를 다나던 50여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 이 시를 읽고 마냥 감탄할 수 만은 없는 것은 이 시에도 여인의 죽음을 찬미하는 시인의 뜻이 감지되어서입니다. 이제는 이런 글들이 절개를 지키라면서 조선의 여인들을 자살로 몰아간 것은 아닌지 살펴볼 때다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