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19(상풍교-경천대-강창교)

시인마뇽 2024. 5. 12. 04:07

탐방구간: 상풍교-경천대-강창교

탐방일자: 2024. 5. 9()

탐방코스: 상풍교-매호제-경천대-상주자전거박물관-국립낙동강생물지원관-도남서원

                 -상주보-중동제-강창교-신상정류장

탐방시간: 1020-1652(6시간32)

동행       : 나 홀로

 

 

 

  이번에 낙동강을 따라 걷느라 발을 들인 상주 땅이 낯설지 않은 것은 2005년 여름 추풍령에서 속리산에 이르는 구간의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 상주 땅에 자리한 국수봉(763m), 백학산(615m), 무지개산(438m),  윤지미산(538m), 봉황산(741m), 형제봉(829m), 속리산(1,058m) 등을 올라서였습니다. 그해 여름 윤지미산 부근을 지날 때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무섭게 쳐 혹시라도 벼락을 맞을까 두려워 스틱을 멀리 던져버리고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적도 있었습니다.

 

  상주 땅의 산줄기는 몇 차례 따라 걸었지만, 강줄기는 이번에 상풍교-경천대-강창교 구간의 낙동강을 따라 걸은 것이 처음입니다. 상주 땅을 흐르는 하천은 낙동강 외에도, 이 강의 제1지류인 영강과 병성천, 2지류인 북천, 이안천과 동천이 있습니다. 상주가 우리나라 최고의 자전거 도시로 자리매김할 만큼 들판이 넓은 것은 낙동강과 지류들이 세월과 싸워가며 만들어낸 충적평야가 넓게 자리 잡은 덕분일 것입니다.

 

  상주하면 제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조선 전기 문신인 채수(蔡壽, 1439-1515) 선생입니다. 대사성과 호조참판에 오른 선생은  중종반정에 가담한 공신으로 인천군(仁川君)에 봉해졌습니다. 선생께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한문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내로라하는 사대부가 점잖은 내용의 시문(詩文)이 아닌 귀신이 몸 안으로 드나드는 빙의소설(憑依小說)(?)을 지었으니 도학 정치를 시행하려는 조선 전기의 사대부들이 채수 선생을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에 등장하는 설공찬은 이미 죽은 몸이지만, 혼령만은 사촌 동생 공침의 몸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설공찬의 혼령이 빙의한 공침은 기이한 행동을 하고, 병이 나기도 하며, 이승에서 한 행실로 저승에 가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공찬이 전해준 저승 소식은 저승이 순창에서 40리 거리인 바닷가에 있다는 것, 이승에서 선하게 살았으면 저승에서도 잘 지내고, 악하게 살았으면 고생하며 지내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 죽은 사람의 영혼을 처리하는 것은 염라대왕의 고유한 권한으로 지상의 황제도 개입할 수 없다는 것 등입니다. 이 소설에서 문제가 된 것은 그 내용이 유교에서 금한 윤회화복지설(輪回禍福之說)을 담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승에서 임금 노릇을 했어도 반역자는 지옥으로 떨어진다면서 군주의 권위를 격하시킨 것도 문제가 되기에 충분했을 것 같습니다. 1511년 사헌부에 고발되어 이 소설은 전부 수거해 소각되었고, 저자 채수는 도학강경파들이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지만 국왕 중종의 배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할 수 있었습니다.

 

  한문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이 시중에서 누린 인기가 정말 대단했다 싶은 것은 한문본의 필사본이 생기고, 한글번역본이 유통되어 널리 읽힌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관들도 설공찬전(薛公瓚傳)이 문제가 된 내력을 왕조실록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새벽같이 서둘러 경부고속터미널을 아침 7시에 출발하는 상주행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9시반경 상주터미널에 도착해 10분여 기다렸다가 945분에 시내버스로 환승해 상풍교로 향했습니다. 시골길을 반 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물갓매호 정류장에서 하차해 지근거리의 상풍교로 이동했습니다.

 

  1020분 상주시의 사벌국면과 예천군의 풍양면을 이어주는 상풍교를 출발해 낙동강 우안의 제방인 매협제로 들어섰습니다. 6곳에 배수문이 설치되어 있는 매협제 제방 길은 반쯤은 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가다 오른쪽으로 크게 휘어 이어졌습니다제방 오른쪽 들판에는 모내기에 앞서 물을 대어 논을 평평하게 만드는 써레질이 한창이었습니다. 논을 써는 일은 트랙터가 도맡아 해, 소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들이 옛날처럼 우공(牛公)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농기계에 일을 뺏겨서였을 진데, 일자리를 잃는 두려움은 사람이나 소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호 제6배수문을 지나 낙동강제방길이 끝나는 삼거리에 이르러 왼쪽으로 꺾어 낙동강강바람길로 접어들었습니다.

 

  1240분 경천대에 올라섰습니다. 경천대를 1.7Km 앞둔 삼거리에서 시작된 낙동강 강바람길은 산길로 이어졌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자전거 길을 벗어나 데크 길로 들어섰습니다. 잠시 옥주봉전망대를 들러 이제껏 걸어온 낙동강의 물흐름과 제방길을 조망했습니다. 데크 계단을 지나 해발195m의 무지산(無知山) 정상에 설치된 3층 건물의 경천대전망대에 올라서자 강 건너 시원스레 펼쳐진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들판은 감입곡류 안쪽에 토사(土砂) 쌓여 만들어진 충적평야로 반원 모양을 하고 있어 보기에도 아름다웠습니다.

 

  경천대전망대에서 내려가 낙동강변의 경천대에 오르자 시계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휘어져 흐르는 낙동강과 강변에 곧추서 있는 깎아지른 절벽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예로부터 낙동강 1300리 물길 중 경관이 가장 빼어나 낙동강의 제1경으로 알려진 이곳은 우담 채득기(蔡得沂, 1604-1647) 선생이 하늘을 떠받친다는 뜻에서 경천대로 이름을 바꿔 짓기까지 하늘이 스스로 만들었다 하여 자천대(自天臺)로 불렸다고 합니다. 자갈이 듬성듬성 박힌 역암(礫巖)이 뚜렷하게 보이는 경천대에서 내려가 바로 아래 단출하게 서 있는 정자 무우정(舞雩亭)을 들렀습니다. 이 정자를 여기에 세운  채득기 선생은 병자호란 때 심양으로 붙들려 간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수행해 왕자들을 보살피다 환국한 후 여기 낙동강변의 경천대 아래 무우정에 은거했다고 합니다. 무우정 앞 소공원에서 점심을 든 후 바로 옆 드라마 상도의 촬영장은 입구에서 눈길만 주고 오후 탐방을 이어갔습니다.

 

  1423분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을 관람했습니다. 경천대를 떠나 고개를 넘자 낙동강 우안의 자전거길이 보여 그 길로 들어섰습니다. 길옆에 활짝 핀 백색의 찔레꽃을 보자 어렸을 때 찔렛대를 꺾어 먹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상주보캠프촌 휴를 지나 상주시자전거박물관을 들렀습니다. 상주는 대부분이 오르막과 내리막이 별로 없는 평지로 이루어진 분지여서 누구나 쉽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가구당 2대꼴로 자전거를 보유하고 있으며 자전거를 타는 시민들이 모두 다 시민자전거 보험에 가입했다고 알려졌을 만큼 자전거의 도시로 이름난 상주의 도원동에 우리나라 최초로 자전거박물관이 세워진 것은 2002년의 일이고, 여기 도남동으로 확장해 이전한 것은 2010년의 일입니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건설된 이 박물관은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5G VR 체험존 등을 갖추었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넉넉지 못해 1층과 2층의 상설전시장만 주마간산 격으로 휘둘러 보았습니다. 1925년 상주역광장에서 열린 조선8도 자전거대회에서 상주 출신의 박상헌 선수가 우승해 우리 민족의 한을 풀어준 것은 여기서 처음 알았고, 세계 최초의 자전거로 프랑스의 콩트 메데드 시브락이 1790년대에 나무로 제작한 셀러리페르를 여기 상설전시실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자전거박물관을 나와 경천교와 상주보오토캠핑장을 차례로 지나 다다른 곳은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입니다.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은 2015년에 설립된 환경부 산하 담수생물자원 전문 연구기관으로 생물의 다양성을 보전하고, 생물자원을 조사 발굴하고 생물자원을 활용하는 것을 주요 테마로 해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먼저 들른 곳은 유리 건물의 날렵해 보이는 전시온실입니다. 전시온실로 들어서자 산골짜기를 압축해 옮겨놓은 듯한 물길과 다양한 종류의 수목들이 온실을 채우고 있어 유리천정이 없었다면 골짜기로 놀러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할 뻔했습니다. 전시온실을 나가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의 본관이라 할만한 생물누리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3층으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의 생물누리관은 공간이 넓어 시원시원해 보였습니다. 2천여종에 이르는 전시물의 99%가 실물표본이라는데, 제가 보고 반가워한 표본은 수달이었습니다. 2년전 겨울에 금강을 따라 걸을 때 얼음 위에서 놀고 있는 수달(?)을 먼발치에서 사진을 찍은 적은 있지만 실물 표본은 이번에 처음 보았는데, 제게는 수달이 귀엽게 보였습니다. 수달은 주로 밤에 먹이를 찾고 낮에는 보금자리에서 쉰다는데 제가 금강에서 수달을 본 것은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 앉은 직후였습니다.

 

  누리생물관을 나와 경천섬 입구에 이르자 경천섬으로 들어가는 범월교 다리가 보였습니다. 경천섬은 낙동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형성된 섬으로 그 넓이가 20m2에 이른다고 합니다. 다리 건너 경천섬을 둘러보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잠재우고 상주보로 향했습니다.

 

  1541분 상주보를 건넜습니다. 경천섬 입구를 지나 상주보에 이르기 전에 먼저 들른 곳은 도남서원(道南書院)입니다. 1606년에 창립되어 숙종2년인 1676년에 사액된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피하지 못해 1871년에 훼철되기도 했습니다. 1992년 향토유림에서 강당 등 일부를 건립한 데 이어 경상북도의 도움으로 동 · 서재를 복원하고 2002년에 이르러서야 정허루와 장판각, 입덕문 등을 건립해 옛 위상을 되찾았습니다. 수백 년간 영남의 으뜸 서원으로 자리를 지켜온 도남서원이 배향하는 인물은 정몽주, 김광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노수신, 유성룡, 정경세와 이준 등 모두 아홉 분입니다. 정문인 입덕문이 닫혀 있어 쪽문인 영귀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병산서원의 만루대에 비할만한 정허루는 규모가 크고 앞이 탁 트여 낙동강을 조망하기에 좋았 습니다. 그 뒤로 강당과 양 옆의 의재(義齋)와 경재(敬齋)가 자리했고, 강당 뒤편의 사당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보다 훨씬 넓게 자리를 잡아 서원 안이 시원스레 보였지만, 지어진 지 얼마 안되어 고색창연한 멋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도남서원에서 나와 상주시 도남동과 중동면 사이에 위치한 상주보로 이동했습니다. 낙동강의 수위관리와 농업용수 확보, 하천 정비 등의 목적으로 낙동강에 설치된 8개의 보() 중에서 가장 상류에 자리한 상주보는 총공사비로 약 2,187억원을 투입해 2011년에 완공한 다목적 보입니다. 길이가 335m에 달하는 상주보에는 3개의 수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 보의 왼쪽에 3KW급의 소수력발전소와 친환경수변생태공원, 전망대가 있으며, 낙동강의 강변을 따라 4대강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여기 상주보의 소수력발전소에서 생산하는 전력은 연간 1,534KWH14,000명이 일년 간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상주보 다리를 건너다 잠시 멈춰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자 낙동강 강물로 둘러싸인 경천섬이 확연하게 보였습니다.

 

  1652분 신상정류장에서 19번째 낙동강 탐방을 마쳤습니다. 상주보를 출발해 나지막한 고개를 넘었습니다. 이내 중동제 제방으로 다가가 상주보를 돌아보았습니다.  열어놓은 1개의 수문으로 강물이  콸콸 흘러내리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힘이 솟는 듯했습니다. 강 건너 서쪽으로는 상주 시내를 관통해 흐르는 북천을 받아들인  병성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제가 걷고 있는 중동제 아래 강변 부지에는 여러 개의 축구장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중동제를 사이에 두고 강 쪽으로는 풀밭의 부지에 파크골프장을 조성하느라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그 반대쪽 넓은 들판은 모를 옮겨 심을 논을 써느라 트랙터가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트랙터가 다가가도 좀처럼 자리를 옮기지 않는 백로들을 보고 어느새 백로와 트랙터가 친구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주시의 중동면과 낙동면을 이어주는 강창교를 건너 신상정류장에사 3-4분 가량 기다렸다가 버스에 올라 상주터미널로 이동했습니다.

 

  상주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공갈못을 들렀다가 상주역으로 옮겨 김천으로 가는 경북선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공갈못과 경북선 열차탑승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김천역에서 itx 열차로 갈아 타 수원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10시40분이 되어서야 산본 집으로 돌아와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

 

  상주(尙州)는 경주(慶州)와 더불어 경상도(慶尙道)를 상징하는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두대간과 낙동강이 어우러져 빚어낸 유서 깊은 상주에서 배출한 훌륭한 분들은  상주문화원에서 펴낸 상주의 인물』에 실려 있습니다. 

 

  제가 공검지역사관의 채순철 선생으로부터 받아 읽은 상주의 인물은 제5집으로, 이 책은 역사적으로 상주를 높이 빛낸 김사우(金師禹) 34분의 생애와 업적을 담고 있습니다. 1집에서 5집까지 상주의 인물을 펴낸 상주문화원에 따르면 1집에 30, 2집에 23, 3집에 38, 4집에 30, 5집에 34분 등 145분이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상주문화원장은 상주의 인물5집의 발간사에서 상주는 워낙 출중한 인물들이 많기때문에 지금까지의 실적은 1/10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이 언급이 설사 상주를 사랑하는 충정에서 얼마간 과장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주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이념으로 건국된 국가입니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해온 조선 사회에서는 충효와 정절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습니다. 그러기에 조선 시대에 훌륭한 인물로 찬양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충신과 효자, 정절을 지킨 정녀(貞女)들이었습니다. 상주는 안동과 더불어 유교문화가 꽃을 피운 지역입니다.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상주의 인물로 소개된 145분 중 많은 분들이 충신 또는 효자이거나 정녀들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제가 상주의 인물로 채수(蔡壽) 선생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선생을 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은 작가로 기억하고 있어서였습니다. 채수 선생이 유명해진 것은 그의 충절이나 효심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가 이름을 알린 것은 소설을 써서 귀신이 실제로 있다고 믿도록 했으며, 여성들을 옹호하고 임금의 권위에 도전하는 글을 남겼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처럼 사고가 자유로운 인물이라면 상주의 인물로 기억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채수의 증손인 채유희(蔡有喜, 1558-1593)와 채유종(蔡有終, 1561-1606) 형제들이 임진왜란으로 상주성이 함락된 후 1592510일 함창의 황령사에서 창의문(倡義文)을 지어 함창현에서 처음으로 거의(擧義)를 주창한 것입니다. 두 형제는 청주에 사는 외숙부 이봉(李逢)을 대장으로 모셔와 730일에 상주지역에서 최초로 창의군을 조직했다는 내용이 상주의 인물5집에 적혀 있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