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강창교-중동교-낙동강휴게소
탐방일자: 2024. 5, 21일(화)
탐방코스: 신상정류장-강창교-중동제-낙암서원-공군사격장옆 농지-중동쉼터-중동교
-물량제-낙동강역사이야기관-낙단보-낙동강대교-낙동강휴게소(상행)
탐방시간: 10시정각-17시42분(7시간40분)
동행 : 나 홀로
이번 낙동강 탐방으로 앞으로 상주 땅이 더욱 살갑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2005년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는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산줄기를 따라 걷느라 상주분들을 만난 기억이 별로 없는데, 이번 낙동강 탐방은 상주 땅을 관통하는 낙동강을 따라 걷는 것이어서 농사일을 하거나 산보를 나선 주민들을 만나 길을 묻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명승지와 유적지 몇 곳도 둘러보았습니다. 낙동강역사이야기관을 둘러보고 전시물을 통해 상주와 낙동강에 대해 이모저모를 살펴본 것은 이번 낙동강탐방의 가장 큰 수확입니다.
상주의 옛 이름은 사벌국(沙伐國)으로,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원삼국시대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원삼국시대의 상주 문화 내지는 사벌국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사벌면 금흔리 일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토광묘 유적과 그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이부곡토성을 통해 어느 정도 접근해 볼 수 있다고 이 박물관의 안내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벌국에 대한 기록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사벌국 고성이 병풍산 아래에 있다”는 것과 『삼국사기』에 249년 신라가 사벌국을 정복했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벌주가 상주로 개명된 것은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인 757년의 일이니 상주라는 지명은 1200년 넘게 쓰여 오늘에 이른 우리나라 최장수 브랜드의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유서 깊은 상주가 경주와 더불어 경상도를 대표하는 도시였다는 것은 경상감영이 상주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 8도 체제가 확립되면서 상주목사는 경상도 감사의 직무를 겸하고 또한 상주가 감영이 되었다고 합니다. 경상감영은 조선 초기에 경주에 있다가 상주로 옮겼습니다. 경상도가 좌 · 우로 분리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상주의 경상감영은 선조 34년(1601년)에 대구부로 이동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 상주는 안동과 더불어 영남의 성리학을 주도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성리학은 학문에 대한 탐구가 활발해지면서 여러 학파로 나누어졌으니,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퇴계 학파, 진주 중심의 남명 학파, 개성 중심의 화담학파, 이이를 중심으로 한 율곡학파 등이 그것입니다. 상주는 안동과 같이 퇴계 학파 중심의 남인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영남을 영도하는 위치에 자리했지만, 남명학파의 북인과는 멀어졌습니다. 상주와 관련된 유명한 유학자로 노수신(盧守愼, 1515-1590)과 이만부(李萬敷, 1664-1732) 등이 있습니다. 노수신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으며, 학문에서 주자학과 두시 등 다방면에 걸쳐 정통해 퇴계 선생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만부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식산문집(息山文集)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는데, 저는 그 중 「속리산유산기」 등 기(記) 몇 편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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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주 고속버스가 십수 분 연착했지만, 상주터미널에서 이번 탐방의 출발지인 낙동면의 신상으로 가는 버스를 바로 환승해 다행이었습니다. 지난번에 탐방을 마친 신상정류장에서 하차해 잠시 낙동강탐방을 채비했습니다.
오전 10시2분 신상정류장을 출발했습니다. 정류장에서 4-5백m 떨어진 강창교를 건너 파크골프장이 들어선 낙동강 좌안의 하천부지로 내려섰습니다. 하천부지에 나 있는 강변길이 이내 끝나 중동제로 올라서자 제방길 양옆으로 진황색의 금계국과 연보라색의 갈퀴나물이 활짝 피어 직선의 제방길이 환했습니다. 중동제 끝 지점의 강변에 자리한 ‘활터 충의정’이 ‘정기룡장군활터(국궁장)’라는 것은 하천점용허가 안내판을 보고 알았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정기룡(鄭起龍, 1562-1622) 장군은 1586년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경(趙儆)과 김성일(金誠一) 휘하에서 싸우면서 상주성 탈환 및 경주 · 울산 등의 여러 성을 수복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장군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상호군(慶尙右道兵馬節度使上護軍) 등을 역임한 후 1622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재직 중 진중(陣中)에서 작고했습니다. 장군의 묘소는 충렬사와 신도비와 같이 사벌국면금흔리에 있습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낙암서원(洛嵓書院)을 들렀습니다. 문이 잠겨 안으로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담이 낮아 서원 안을 사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달랑 강당과 사당만 남아 있는 이 서원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서계(西溪) 김담수(金聃壽, 1535-1603) 선생과 두 자제분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고 합니다. 안내문을 읽다가 제가 주목한 것은 남명 조식(曺植) 선생의 문인인 김담수 선생께서 퇴계 이황(李滉)선생의 제자인 정구, 조목, 금남수 등과도 교유한 것입니다. 이는 1564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면서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기에 당파를 초월해 교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낙동강에 가까이 있는 길을 걸으려고 자전거길을 따라 걷기를 중단하고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로 들어섰습니다. 얼마 후 길가에 걸려 있는 ‘사격장 철거공사’ 안내 플래카드를 보고 예비군훈련장의 사격장을 옮기나보다 싶어 그냥 지나쳤습니다. 감자밭, 마늘밭, 가지 밭, 양파 밭과 모내기를 마친 논들이 들어선 농지보다 훨씬 더 넓은 평지가 강가에 공터로 방치되어 있어 이상하다 했는데, 공군에서 사격장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지역은 항공기 사격장이니 무단으로 출입하거나 촬영하지 말라는 공군의 경고문을 읽고 조심해서 걸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이 끊겨 밭에서 일하는 분들께 물어 다른 농로길로 들어섰습니다.
12시31분 중동쉼터 정자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상주가 자랑하는 삼백(三白)에 곶감 및 누에고치와 더불어 쌀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낙동강이 상주 땅에 빚어낸 들판이 넓었기에 상주는 경주와 더불어 경상도를 대표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넓은 들판에 나 있는 농로를 벗어나 야산에 다가가자 막 쓴 듯 붉은 글자의 경고문이 선명해 강가 사격장이 최근까지도 가동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후 다다른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차도 옆에 낸 자전거길을 따라 고갯마루로 향했습니다. 고갯마루에 조금 못 미쳐 중동쉼터에 다다르자 정자가 세워져 있어 여기서 점심을 들면서 20분 가까이 쉬었습니다. 고개 너머 신암리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59번 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중동교 앞에 이르자 상주시 중동의 신암과 낙동의 물량을 이어주는 이 다리가 세워지기 전에는 다리 아래에 토진나루가 있어 나룻배가 운행되었다는 내용의 비문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었습니다.
중동교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꺾어 낙동강 우안의 물량제 제방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며 강 건너를 주시한 것은 강변에 면해 깎아지른 천애의 암벽이 병풍처럼 연이어 서 있어서였습니다. 강 건너 암벽에 상하로 일정 간격을 두고 나무들이 수평으로 줄지어 있는 것은 지층이 아직은 침강이나 횡압력을 받지 않아 습곡이 생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물량제 제방길을 걸으며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이 눈에 익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3년 전에 대구의 참사랑산악회원들괴 함께 오른 나각산이었습니다. 산 정상의 두 봉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다리의 양 끝에 세운 두 기둥은 선명하게 보여 나각산임을 바로 알아챘습니다.
14시38분 나각산의 산자락에 낸 길로 들어섰습니다. 물량제 제방길이 끝나고도 얼마간 시멘트로 포장된 자전거길이 강변을 따라 이어졌습니다. 강변 길을 따라 걸으며 한자리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가 미끼를 물기를 마냥 기다리는 낚시꾼을 가까이에서 보았고, 건너편 산 가까이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유람선(?)의 승객을 먼발치에서 보았습니다. 이들이 시간을 보내는 양태는 정(靜)과 동(動)으로 극명하게 대비되었지만, 공통점은 풍광이 빼어난 낙동강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머리 위로 지나는 당진-영덕 고속도로의 상주낙동강교를 사진 찍고 나서 나각산의 산자락에 낸 길을 따라 걸으며 나지막한 고개를 몇 번 넘었습니다. 얼마 후 서울에 옮겨놓아도 손색이 전혀 없을 만큼 외관이 멋드러진 ‘낙동강역사이야기관’에 다다랐습니다. 3년 전에 둘러 본 이 박물관을 다시 찾아간 것은 낙동강을 둘러싼 역사이야기를 엮은 책자를 구하고 싶어서였는데, 그런 책자는 없다고 해 많이 아쉬웠습니다.
2층 전시관을 휘 둘러보는 중 눈길이 간 것은 낙동강의 나루에 관한 이런저런 전시물이었습니다. 실물 크기(?)의 나룻배와 그 구조도, 그리고 나루에 얽힌 옛 사진 등을 보고, 낙동강의 나루에 관한 소개 글도 꼼꼼히 읽었습니다. 낙동강의 대표적인 6대 나루가 안동의 의촌나루, 상주의 낙동나루, 고령의 개경포나루, 합천의 율지나루, 함안의 악양나루, 부산의 구포나루라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16시5분 낙동강의 두 번째 보(洑)인 낙단보를 건너 의성 땅으로 들어섰습니다. 강 건너 서쪽의 상주시와 달리 의성군에서은 낙동강이 지나는 지역은 다인면과 다밀면 등 2개 면에 불과합니다. 이 보 덕분에 농업용수도 충분히 확보하고, 발전도 하며, 수상레저도 즐길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일진 데 수질이 악화된다면서 4대강의 보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수자원공사와 환경부에서 내 걸은 “보 정상화! 다시 국민의 품으로!”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전(前) 정부에서 5개 보를 개방하거나 해체하자는 국가물관리위원회의 결정이 합리적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낙단보에서 언덕 위에 자리한 관수루(觀水樓)에 올라가 이 정자의 이름이 뜻하는 '강물을 바라보며' 정취를 즐겼습니다. 고려 중엽에 창건되고, 1990년에 마지막으로 중건된 2층 누각의 관수루에 걸려 있는 한시(漢詩)의 편액(扁額)을 보고 고려의 이규보, 조선의 김종직, 김일손, 이황 등 뛰어난 문신들이 이곳을 다녀갔음을 알았습니다. 원래 이 지역은 의성군단밀면, 상주시낙동면과 구미시옥상면이 맞닿아 있는 교통의 요지로 저 아래 낙정나루터가 자리했었는데, 낙단교가 건설되면서 나루터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관수루에서 강가로 내려가 오래된 낙단교에 이르러 지나온 길을 돌아보자 낙단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번 탐방길의 마지막 제방인 기산제로 들어서 곧게 뻗어 나간 낙동강 좌안의 제방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17시42분 낙동강휴게소(상행)에 도착해 20차 낙동강 따라 걷기를 끝마쳤습니다. 기산제 제방길을 따라 걸어 낙단대교를 지나자 왼쪽 저만치로 이번 탐방의 종점인 낙동강의성환승터미널 건물이 보였습니다. 이내 낙동대교를 다리 밑으로 지나 카카오맵이 안내하는 대로 농로를 따라 진행하다 젊은이를 만나 길을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낙동강의성환승터미널은 하행 환승장이며, 서울로 가려면 건너편에 상행 환승장이 있는 낙동강구미휴게소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만, 길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돌아가 젊은이에 다시 물었습니다. 이를 딱히 여긴 젊은이가 고맙게도 자기 차로 낙동강구미휴게소까지 태워주었습니다.
처음 만난 젊은이가 베푼 호의로 편안하게 환승장에 도착하자 아직은 세상인심이 각박하지 않아 살만하다 싶어 흐뭇했습니다. 그리고 상주 땅이 더욱 더 살갑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젊은이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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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洛東江)은 ‘상주(尙州)’의 옛 이름인 ‘상락(上洛)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낙동강이 ‘상락(上洛)’의 동쪽에 있는 강이라 하여 명명된 것은 옛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주의 선비 이준(李埈)은 『임술범월록서(壬戌泛月錄序)』에서 "상주의 동쪽에 와서야 강다운 강이 되므로 낙동강(洛東江)이란 이름이 생겼다"라고 했습니다. 이중환(李重煥)도 『택리지(擇里志)』에서 “용궁(龍宮)· 함창계(咸昌界)에 이르러 비로소 남으로 꺾어 낙동강이 된다”면서, “낙동(洛東)이라는 이름은 상주의 동쪽을 일컬음이다."라고 했습니다. 낙동강역사이야기관의 안내글에는 상주(尙州)의 고호(古號)인 상락(上洛)은 신라 진흥왕 때인 557년에 제정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낙동강의 발원지는 관찬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이나 김정호가 사찬한 『대동지지』 등 옛 지리지에 태백의 황지(黃池)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낙동강은 발원지에서 1,300리를 이동해 남해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으로 남한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낙동강은 처음으로 태백에서 철암천을 만나고, 안동에서 반변천을, 문경과 예천에서 내성천과 금천을, 상주에서 영강과 병성천, 위천을, 구미에서 감천을, 성주에서 백천을, 대구에서 금호강을, 고령에서 회천을, 합천에서 황강을, 함안에서 남강을, 밀양에서 밀양강을, 양산에서 양산천 등 여러 하천(河川)을 받아들여 세(勢)를 불린 후 부산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낙동강은 곳곳에서 여러 병란(兵亂)을 치렀고, 수많은 나루(津)에는 지역 주민의 애환(哀歡)이 서려 있으며, 크고 작은 누정(樓亭) 등 풍류문화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고 여기 역사관의 안내문은 적고 있습니다.
낙동강 뱃길의 종착지는 상주였습니다. 상주는 낙동강 하류에 있는 각 지역 조창(漕倉)의 곡식을 한양으로 실어 나르는 '낙동강 700리'의 마지막 지점으로 영남의 거래문화가 꽃피었던 곳입니다. 낙동강은 경상남북도 어느 시 · 군도 연결되지 않은 곳이 없는 강(江)으로 영남문화의 젖줄이요, 영남물산의 수로로 기능해왔습니다.
제가 이제껏 몰랐던 것은 낙강시회(洛江詩會)입니다. 낙강시회(洛江詩會)는 고려 중기 내로라하는 문인인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가 1196년 낙동강시(洛東江詩)를 창작한 시회(詩會)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낙강시회가 1862년 계당(溪堂) 류주목(柳騎睦)의 시회까지 666년 동안 52회나 강물처럼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상주의 자랑이자 우리나라의 자랑인 것입니다.
의성의 관수루(觀水樓)에 이규보가 낙동강 상류를 지나며 지은 한시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 시가 낙강시회에서 발표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에 올립니다.
過洛東江上流 낙동강 상류를 지나며
百轉靑山裏 청산 속 백번 돌아
閒行過洛東 한가로이 낙동강 지나도다
草深猶有露 숲은 깊고 아직 이슬에 젖어있는데
松靜自無風 소나무 고요해 바람 한점 없도다
秋水鴨頭綠 가을 강물 오리머리처럼 푸르고
曉霞猩血紅 새벽 하늘 성성이 피처럼 붉도다
誰知倦遊客 누가 피곤해 하는 나그네를 알리오
四海一詩翁 온 세상 떠도는 늙은 시인인 줄을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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