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22(금오서원-매학정일원-산호대교)

시인마뇽 2024. 6. 30. 11:59

탐방구간: 금오서원-매학정일원-산호대교

탐방일자: 2024. 6. 25()

탐방코스: 금오서원-낙동강/감천 합류점-백마제-고아제-강정배수장-매학정-숭선대교

                -해평가마솥국밥-해평제-해평정수장/취수장-해평자현편의점-양호제

                -산호대교-벽산아파트정류장

탐방시간: 1126-1842(7시간16)

동행       : 나 홀로

 

 

 

  최근 4년간 제가 따라 걸은 강은 섬진강, 영산강, 금강, 임진강, 낙동강과 한강 등 7개 강입니다. 섬진강, 영산강과 금강은 발원지에서 강 하구까지 다 걸었고, 임진강은 남한 땅만 걸었습니다. 한강은 태백시의 검룡소에서 시작해 영월군까지, 낙동강은 태백시의 너덜샘에서 시작해 구미시까지 진행해, 아직도 강 하구까지 갈 길이 멉니다.

 

  그동안 여러 강을 따라 걸으면서 알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강을 이용한 수운(水運)은 조선 시대보다 퇴보했다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수운이 어떠했는가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저서 택리지(擇里志)를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중환은 재물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땅이 기름진다는 것이 제일이고,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곳이 그 다음이다.”  라면서 물류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이중환은 이어서 물류에서 배가 얼마나 유용한 가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물자를 옮기고 바꾸는 방법은 신농(神農) 성인이 만들었으며 이것이 없다면 재물이 생길 수 없다. 그러나 물자를 옮기는데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 수레가 다니기에 불편하므로 온 나라의 장사치는 모두 말에다 화물을 싣는다. 그러나 목적지가 멀면 노자가 많아 허비되면서 소득은 적다. 그러므로 배에 물자를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이익보다 못하다.”

 

  18세기 조선에서는 삼면이 모두 바다로 배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배로 내왕하는 장사꾼은 반드시 강과 바다가 서로 통하는 곳에서 이득을 얻고 외상으로 거래를 했다고도 합니다. 다시 말해 제가 이미 걸었거나 걷고 있는 강들은 모두 하구에서 바다와 만나 아래와 같이 수운의 길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경상도는 김해 칠성포가 낙동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길목이 된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상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서쪽으로는 낙동강의 제1지류인 남강을 진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김해가 출입구를 관할한다. 전라도는 나주의 영산강과 영광의 법성포, 흥덕의 사진포, 전주의 사탄이 비록 짧은 강이나 모두 조수가 통하므로 장삿배가 모인다. 충청도는 금강 하나로 비록 근원은 멀지만, 공주 동쪽은 물이 얕고 여울이 많아 배가 통하지 못한다. 부여와 은진에서 비로소 바다 조수와 통하여 백마강 이하 진강 일대는 모두 배편이 통한다. 그런데 은진과 강경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금강 남쪽들 하나의 큰 도회가 되었다.”

 

  제가 확인한 바로도 조선 시대 수운이 요즘보다 훨씬 활발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시대에는 육로가 제대로 나 있지 않아 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내륙의 큰 강과 근해에 배를 띄워 한양으로 실어날랐습니다. 배가 운항했던 구간은 각 강의 하구에서 낙동강은 상주까지, 한강은 충주까지, 금강은 부강까지, 영산강은 나주까지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위키백과에서 확인한 각 강의 가항 거리는 낙동강 343Km, 한강 330Km, 금강 130Km, 영산강 48Km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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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역에서 내려 상모동에 자리한 박정희대통령생가를 들러 몇 곳을 둘러본 후, 선산읍의 금오서원으로 이동해 낙동강 따라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구미역에서 생가까지, 그리고 생가에서 금오서원까지 두 번 다 택시로 이동해 오전에 낙동강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여말선초의 성리학자인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을 배향하는 금오서원은 20일 전에 둘러본 바 있어, 사진 한 장 찍고 바로 낙동강 따라 걷기에 나섰습니다.

 

  1126분 구미시선산읍의 금오서원을 출발했습니다. 33번도로를 고가(高架) 밑으로 지나 남천교를 건넜습니다. 낙동강의 제1지류인 감천 위에 놓인 남천교를 건넌 다음 왼쪽으로 꺾어 감천 우안의 뚝방 길을 몇 분 걸어 낙동강과 감천의 합류점에 이르렀습니다. 33번 고가도로를 또다시 지나 다다른 낙동강 우안의 자전거 쉼터에서 먼저 와 쉬고 있는 바이커 한 분과 만나 박정희대통령의 공과 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보다 한 살 연하인 이분과 생각을 같이 한 것은 박정희대통령은 과보다 공이 훨씬 큰 분이라는 것입니다. 자전거쉼터에서 매학정으로 이어지는 백마제 제방길이 33번도로와 나란히 나 있어 차 소리가 시끄러웠습니다. 제방 왼쪽의 하천부지가 엄청 넓어 그 안에 낙동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소로가 보였지만, 시간이 넉넉지 않아 지름길인 제방길을 따라 걸으며 노란 꽃이 활짝 핀 모감주나무를 보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가지 끝의 커다란 원추꽃차례에 자잘한 노랑 꽃이 촘촘히 모여 피어 이채로운 이 나무는 둥근 씨로 염주를 만들기 때문에 염주나무로도 불립니다.

 

  1343분 매학정일원에 도착했습니다. 백마제를 따라 걷다가 낙동강의 제1지류인 대망천을 건너 들어선 제방은 고아제인데, 이 제방길은 이내 왼쪽으로 휘어서 이어져 33번 도로와 멀어졌습니다. 왼쪽 아래 하천부지에 조성된 소공원(?)을 사진 찍은 후 강정배수장을 지나 고아제가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들어서자 버드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데크 길이 이어졌습니다. 이번 탐방 처음으로 낙동강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는 데크 길을 지나 매학정(梅鶴亭)에 이르자 숭선대교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넉넉하고 안온해 보였습니다.

 

  매학정은 조선 중기의 명필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67) 선생이 시문을 쓰며 쉬던 정자입니다. 중종 28년인 1533년에 지은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두 차례 중수를 거쳐 1970년대에 전면적으로 보수했다고 합니다. 영남학파였을 선생한테서 이 정자를 물려받은 사위 이우(李瑀)가 기호학파의 태두인 율곡 이이 선생의 실제(實弟)인 것으로 보아 당시는 당쟁이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했으면서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정자를 짓고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아들 삼아(梅妻鶴子)'  자연에 파묻혀 글씨 하나로 평생을 살아 김구(金絿)ㆍ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초서의 제1인자라는 평을 받고 있는 조선의 명필 황기로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은사(隱士)라 하겠습니다.

 

  바로 옆 강변하우스 카페에서 물냉면을 시켜 들어 속을 식힌 후 숭선대교를 건너 낙동강 좌안의 자전거길로 들어섰습니다. 자전거길 양쪽으로 초록색 철망의 펜스가 쳐 있었는데, 왼쪽 펜스 너머로는 농수로를 따라 물이 콸콸 흘렀고, 오른쪽 펜스 너머로는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자전거길을 따라 25번 도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진행해 해평습지를 지난 후 낙동강 제1지류인 습운천 앞에 이르렀습니다.

 

  1548K-Water 구미권지사 해평정수장/해평취수장을 지났습니다. 습운천 앞에서 왼쪽 굴다리로 25번 도로를 통과하자 길 건너 2층의 해평가마솥국밥집이 눈을 끌었습니다. 습운천을 건너 낙동강 교량건설로 주변이 어수선한 공사현장을 지나 해평제 제방길로 들어서자 강 건너 남서쪽으로 몇 번 오른 금오산이 가깝게 보여 반가웠습니다.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철새 도래지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여기 해평철새도래지는 겨울이면 재두루미, 흑두루미, 고니, 기러기, 오리류 등이 찾아오고, 텃새로는 독수리, 원앙, 왜가리, 백로 등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특히 여기 철새도래지는 강원도 철원 이외의 내륙에서 유일하게 두루미를는 관찰할 수 있는 곳입니다. 겨울철이 아니어서인지 철새든 텃새든 어떤 새도 보이지 않아 안내판이 설치되지 않았다면 이곳이 철새도래지인지를 모르고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해평철새도래지를 조금 지나 해평정수장/취수장 앞에 다다랐습니다. 이제껏 보아온 배수장이나 양수장은 한국농어촌공사에서 관리하는데, 이번에 처음 본 정수장과 취수장은 한국수자원공사(K-water)가 관리하는데, 규모도 크고 건물이 산뜻해 보였습니다. 배수장과 양수장은 농업용수를 관리하는 곳이어서 양적관리가 중요하겠지만, 취수장과 정수장은 상수도를 공급하고 수질을 관리하는 곳이어서 양적 · 질적 관리가 모두 중요할 것 같습니다. UN에서 물부족 국가로 분류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무엇보다  모든 국민들이 물을 소중한 자원으로 여겨  아껴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752분 산호대교에 이르렀습니다. 해평취수장/정수장을 지나서는 상수원보호구역이 해제되어서인지 초록색 펜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평제를 가운데 두고 왼쪽 아래 넓은 들판은 초록색 농작물로 뒤덮였고, 오른 쪽 하천부지는 갈대와 수변 수목들이 가득 들어서 녹색의 향연이 펼쳐진 듯 했습니다. 성수천을 건너 낙동강 우안의 강물 위에 놓은 다리를 따라 걸으며 여러 차례 역동적인 강물의 흐름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강 다리를 지나 올라선 제방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자하현편의점을 들러 시원한 콜라를 마시고 나자 더위에 지친 몸이 생기를 되찾은 듯 했습니다. 제방길을 따라 걸으며 길가 꽃잎에 앉아 있는 나비를 사진 찍었는데, 이는 실로 오랜 만의 일로 나비가 저의 접근을 허용해 가능했습니다. 나비가 더위에 지쳐 잠시 쉬고 싶었거나 혼자 땀 흘리며 걷고 있는 저를 측은히 여겨 저의 접근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다시 강물 위에 놓인 커브 길의 다리를 걸어 양호대교를 지나자 양호제 제방길이 이어졌습니다. 제방길에서 만난 별노랑이꽃은 꽃 모양이 별을 닮아 그 이름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호대교에 이르러 저녁나절 시원한 강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 낙동강을 건넜습니다.

 

  1843분 비산네거리에서 멀지 않은 벽산아파트정류장에서 구미역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오름으로써 22번째 낙동강 따라 걷기를 모두 마쳤습니다. 산호대교를 건너 비산네거리에서 왼쪽 낙동강변로를 따라 걷다가 한동안 버스정류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분께 길을 물어 찾아간 벽산아파트정류장에서 이내 도착한 190번 버스를 타고 구미역으로 이동해 1923분발 itx 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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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내륙의 강을 따라 운송하는 수운은 철로와 고속도로의 출현으로 급속히 육운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 땅에 최초의 철로인 경인선이 개통된 것은 구한말인 1899년의 일이고,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선과 서울-수원간의 경부선이 개통된 것은 박정희대통령이 집권했던 1969년의 일입니다.

 

  조선 시대에 도로 사정이 좋았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선 조정이 길을 내는 일을 얼마나 꺼려했는 가를 잘 알고 있어서입니다. 숙종 임금은 함경도관찰사 남구만이 후주에 설치한 진과 이어지는 도로를 만들도록 윤허해 달라고 올린 상소문을 보고, “길을 닦는 일은 병가가 지극히 꺼리는 바(治道兵家之大忌)” 라면서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도로가 최악의 상태를 맞은 것은 6. 25전쟁 때였습니다. 이 전쟁으로 9,450Km의 국도와 12,980Km의 지방도, 그리고 100개이던 교량 중 절반이 넘는 54개의 다리가 파괴되었다고 금수재 님은 저서 박정희와 고속도로에서 밝혔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을 견인한 것은 고속도로의 건설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속도로 건설은 자동차산업을 발전시켰고 자동차산업의 발전으로 철강산업의 발전기반이 구축되었습니다. 철강산업의 발전으로 기계공업이 활성화되는 등 고속도로 건설의 전후방효과가 상당하다는 것을 꿰뚫어본 정치지도자가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이번에 둘러본 구미 생가에서 태어난  박정희대통령입니다.

 

  박정희대통령이 고속도로 건설구상을 밝히자 반대여론이 빗발쳤습니다. 당시로는 많은 국민들이 우물 안 개구리여서 앞날을 내다보고 미리 대비하기에는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이 점은 당대의 야당의 정치인들도 다르지 않아 재벌들이 골프치러 가는 길을 닦는다고 고속도로 건설을 앞장서 반대했습니다. 야당이 그때 반대한 것은 잘 모르고 한 일이어서 크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때부터 무조건 반대하는 경향이 점점 심해져 우리 사회가 부담하지 않아도 될 사회통합 비용을 계속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라 하겠습니다.

 

  강을 따라 걸으면서 제 나름 느낀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열었듯이, 내륙 수운의 시대를 열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운하를 건설해 내륙 수운의 시대를 열고자 시도했으나 반대가 심해 포기한 바 있어, 좀처럼 다시 공론화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배들이 다니지 않아 텅 빈 강을 보자 유럽처럼 내륙의 강을 이용해 수운(水運)을 활성화하는 것은 어떠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몇 글자 적었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