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왜관역-금산휴게소-하빈pmz평화예술센터
탐방일자: 2024. 10. 11일(금)
탐방구간: 왜관역-왜관파크골프장-금산휴게소-하목정-하빈pmz평화예술센터
탐방시간: 10시57분 – 17시7분(6시간10분)
동행 : 나 홀로
이번 낙동강 따라 걷기는 다부동전적기념관의 탐방으로 시작했습니다. 다부동은 한국전쟁 때 한 · 미 연합군이 피로써 막아낸 혈전(血戰)의 전장(戰場)이었습니다. 진작부터 우리나라의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 그리고 4년 전에 타계한 백선엽 장군의 동상이 세워진 이 기념관을 둘러보고 싶었는데, 마침 이 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왜괸역에서 이번 낙동강 따라 걷기를 이어가 큰맘 먹고 다부동전적기념관을 다녀왔습니다.
수원역을 출발한 지 3시간이 조금 넘어 도착한 왜관역에서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다부동으로 향했습니다. 20분가량 내달려 다부동전적지기념관에 도착하자 중앙고속도로 건너편으로 6. 25 전쟁 때 혈전지였던 해발 839m의 유학산이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74년 전인 1950년에 한미연합군이 북한군의 진공을 피로써 방어한 '다부동 전투'에 대해서는 여기 다부동전적기념관의 안내문을 읽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곳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6.25의 참극으로 인해 조국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한 · 미 연합군이 피로써 막아낸 다부동 혈전의 전장이다. 1950년 8월초 북한군은 제3·13·15사단 등 5개 사단 병력을 왜관, 다부동 전선에 집중 투입, 8월 15일까지 대구를 침공할 기세로 발악적인 총공세를 가해왔다. 이때 국군 제1사단과 제8사단이 주축이 되어 미 제1기병사단 장병들과 밀고 밀리기를 수십 차례, 아군은 최후의 일각까지 고귀한 생명을 바쳐 처절한 혈투 끝에 적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그 후에도 북한군은 9월 초에 또 다시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최후의 공세를 재개했으나, 아군은 우세한 화력과 과감한 반격으로 9월 중순경에 적의 주력 부대를 섬멸하고 대구 - 다부동전선을 끝까지 고수, 반격의 보루를 확보하였다. 이 혈전에서 아군은 적 전차 13대 파괴, 적 사상 17,500여명의 대 전과를 거두었으나 아군도 10,000여명의 인적 손실을 입었다. 경찰 또한 낙동강 전투에 15,000여명이 참전하여 그중 전사자 기록에 있는 197명을 비롯한 수많은 경찰이 고귀한 생명을 받쳤으며, 당시 경찰의 "대구사수정신"은 6·25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이곳 다부동전적기념관은 그때 그 현장의 교훈을 알리는 전쟁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81년 11월 30일 국방부에서 건립하여 본 군이 관리를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야외에 전시된 무기와 동상, 그리고 기념관 안에 전시된 여러 전시물을 보고나자 목숨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낸 순국선렬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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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역에서 다부동전적기념관을 다녀오는데 1시간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왜관은 조선 태종 때 왜인을 위한 교역 장소로 이용된 후 1904년부터 왜인의 여관이 늘어나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합니다. 여기 칠곡의 왜관이 유서 깊은 부산의 왜관보다 더 많이 알려진 것은 왜관이 칠곡군 군청소재지의 지명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오전 10시57분 왜관역을 출발했습니다. 왜관역에서 맞은 편으로 보이는 차도를 따라 직진해 만난 강변로를 육교로 건너 낙동강 좌안의 자전거전용도로로 내려섰습니다. 남쪽으로 이어지는 낙동강자전거길에는 변변한 그늘이 없어 한여름이라면 한낮에 걷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길로 내려선 후 이내 만난 것은 길바닥에 버려져 있는 매미(?)의 허물이었습니다. 날씨는 아직도 낮 기온이 섭씨 20도를 넘어 여전히 여름이다 싶은데 여름 한 철 쉬지 않고 울어댄 매미가 허물을 벗어두고 사라진 것으로 보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걸어 왜관나루터를 알리는 표지석 앞에 이르렀습니다. 표지석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여기 왜관나루는 낙동강 유역에서 가장 번창한 나루터 중의 하나였다고 합니다. 20세기 들어 철로가 개설되면서 그 기능을 점차 잃어 1960년대를 끝으로 여기 왜관나루에서 강 건너 강정나루를 오가는 배는 더 이상 운행되지 않았습니다. 제2왜관교를 지나 제방길로 올라서기까지 40분가량 강변의 자전거도로를 따라 걸으며 낙동강에 내려앉기 시작한 가을을 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11시53분 낙동강의 제1지류인 동정천을 건넜습니다. 제방길로 올라선 지 얼마 안 지나 낙동강 제1지류인 동정천을 건너자 왜관파크골프장이 보였습니다. 안동댐을 지나서부터 낙동강 하천부지 곳곳에 들어선 파크골프장은 하나같이 터를 넓게 잡았는데, 이는 하천부지가 사유지가 아니고 공유지여서 가능했을 것입니다. 풍광이 수려하고 공기가 청정한 강변에서 부담 없이 파크골프를 즐길 수 있는 것은 4대강의 종합개발 덕분일 것입니다. 금산1교차로와 금산교차로를 차례로 지나 왼쪽 강변도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이어지는 강변의 자전거 길을 따라 걸으며 조금 답답했던 것은 왼쪽의 제방과 오른쪽 강변의 수목들로 시야가 가려 현재의 제 위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는데, 12시38분 금산휴게소에 이르러서야 카카오맵으로 지도상의 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이 휴게소에서 맥주 1캔을 마시며 쉬어가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어 꾹 참고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13시21분 SK 비쓰리에너지 LPG주유소를 지났습니다. 금산휴게소를 조금 지나 길을 가로막고 있는 사마귀를 만났습니다. 이 사마귀를 보고 고사성어인 ‘당랑거철(螳螂拒轍)’이 생각난 것은 분수를 모르고 덤벼들다 낭패를 보는 사마귀를 비웃는 세상에서는 세르반테스 같은 문호가 이 땅에서 태어났더라도 『돈키호테』 같은 대작을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바람에 맞추어 춤추 듯 출렁거리는 갈대들의 백색 군무를 보자 가을이 곁에 와 있음이 실감됐습니다. 외관이 기능적으로 보이는 큼직한 건물의 물류단지(?)를 지나 올망졸망한 집들이 들어선 ‘일랑일랑애견 캠핑앤카라반’(?)에 이르자 제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참으로 다채롭다 했습니다. 잠시 자전거길에서 벗어나 강가로 가서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의 물흐름을 사진 찍은 후 자전거길로 복귀해 대나무숲 터널을 지났습니다. 얼마 후 발걸음을 멈춘 것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왼쪽의 강변대로 건너 쪽에 자리한 빨간 로고의 SK비쓰리에너지 LPG주유소와 그 옆의 편의점 건물이 눈을 끌어서였습니다.
15시29분 달성 하목정을 탐방했습니다. 금남제 3, 4배수통관을 차례로 지나 단조로운 긴 제방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경북 성주군의 선남면과 대구시달성군의 하빈면을 이어주는 성주대교가 잘 보였습니다. 칠곡군이 달성군으로 바뀌는 지점 인근에서 남서쪽으로 물흐름의 방향을 튼 낙동강은 이 나라 최장의 강답게 강폭이 넓어져 강물의 흐름이 더욱 도도해 보였습니다. 양수장을 지나 성주대교까지 낙동강 좌안을 따라 시멘트 길과 데크 길이 나 있어 바로 아래 낙동강을 내려다 보면서 걸었습니다. 마치 바위로 병풍을 쳐 놓은 듯 절개면이 길게 이어져 있는 옛 채석장(?)을 지나 자전거도로에서 조금 벗어나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달성 하목정을 들렀습니다. 강변 누정인 하목정(霞鶩亭)에 대해서는 안내판에 잘 소개되어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달성 하목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낙포(洛浦) 이종문(李宗文)이 선조 37년(1604년)에 세운 것으로 원래는 주택의 사랑채였으며 안채가 없어진 후 정자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하목정이라는 이름을 이종문의 장남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주었다고 한다.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부연(附椽)을 달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인조의 명으로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이 정자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의 넓은 대청에 방 4칸을 세로로 덧붙여 정자(丁字)의 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조선 중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지붕의 양쪽 추녀를 조금씩 잘라 처마 끝을 둥그스름하게 만든 방구매기 수법이 특징적이다. 건물 내부에는 김명석, 남용익 등 유명 인사들이 쓴 시가 걸려 있다.”
고색이 창연해 보이는 하목정을 둘러본 후 아래 음식점을 들러 시원한 맥주 한 병으로 목을 축였습니다.
17시7분 하빈pmz평화예술센터에 다다라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하목정에서 다시 자전거길로 돌아가 성주대교를 그 아래로 지났습니다. 성주대교를 지나자 꽤 넓은 늪지가 펼쳐졌고 얼마 후 야구장, 축구장, 농구장이 들어선 넓은 운동장에 이르렀습니다. 강변 풍경이 어떠할지 궁금해 오른쪽 강가로 다가가 저녁 햇살이 내려 앉은 강변 풍경은 이제껏 보지 못한 이름 모르는 수초들과 수변식물들이 진풍경을 빚어내 참으로 볼만했습니다. 얼마 후 다다른 삼거리에서 자전거길을 벗어나 찾아간 하빈pmz평화예술센터의 카페를 들러 커피를 사 마시며 20분 넘게 기다렸다가 문양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써 24번 째 낙동강 따라 걷기를 끝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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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땅을 걸으면서 떠올린 인물은 칠곡군이 배출한 걸출한 화가 이쾌대(李快大, 1913-1965)입니다. 제가 이쾌대를 알게 된 것은 지난 4월 미술사가 김인혜의 저서 『살롱 드 경성』을 읽고 나서입니다. 이쾌대를 “격랑의 시대에 수많은 걸작을 남긴 한국의 미켈란젤로” 라고 칭찬을 아까지 않은 김인혜는 이 책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유화 ⌜군상 IV⌟의 사진을 실었습니다. 그림에 문외한인 제가 보아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연상되는 이 그림은 그 크기가 177 x 216cm이라 하니 대작 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버지가 군수로 칠곡의 이름난 부잣집에서 태어난 이쾌대는 도쿄 데이코쿠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1940년대 가장 촉망받는 신예 화가로 성장합니다. 해방 후 미술계가 우익의 ⌜조선미술가협회⌟와 좌익의 ⌜조선프로레탈리아미술동맹⌟으로 나뉘어 극단적으로 대립하자, 이쾌대는 ⌜미술문화협회⌟라는 제3의 단체를 결성했는데, 이를 두고 양 진영에서는 이쾌대를 분열책동의 주동자로 몰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군상 IV⌟입니다. 김인혜는 저서 『살롱 드 경성』에서 “이쾌대는 수많은 인물을 서로 혼란스럽게 뒤엉키듯 배치하면서도 모든 동작과 표정을 해부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정확하게 표현했다.” 라면서 ‘한국의 미켈란자로’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다고 상찬했습니다.
이쾌대는 한국전쟁 때 우왕좌왕 하던 사이 미군에게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1953년 휴전협정 포로교환 때 북한을 택했으나 거의 활약하지 못하다가 1965년 자강도 산간지역 강계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부동 전투의 승리로 이 나라 지켜낸 칠곡군이 이 군(郡)에서 태어난 ‘한국의 미켈란제로’인 화가 이쾌대를 지켜내지 못한 것 또한 한국전쟁의 비극이라 하겠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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