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51. 금강 강변 서원탐방기(용강서원 등 5개소)

시인마뇽 2024. 9. 21. 21:34

탐방일자: 20211224, 2022113, 1123, 2023117, 24

탐방지    : 충남 금산군, 세종자치시, 충남 공주시, 논산시 및 부여군 소재 5개 서원

                     (용강서원, 검담서원, 명탄서원, 창강서원, 죽림서원)

동행       : 나 홀로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강변에 자리한 서원 몇 곳을 둘러보았습니다금강은 전북 장수군의 신무산 산자락에 자리한 뜬봉샘에서 발원해 전북 군산의 금강하구에서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남한에서 3번째로 긴 강으로 유로(流路) 길이는 401Km에 달합니다. 천리 길의 금강은 발원지인 뜬봉샘에서 부강의 계선장에 이르는 전장 268Km의 상류부, 부강에서 강경에 이르는 전장 86Km의 중류부, 강경에서 금강하구까지인 전장47Km의 하류부로 나뉩니다.

 

  금강의 상류부는 산골짜기를 돌아 흐르는 감입곡류가 발달한 데다 다목적댐으로 건설된 용담댐과 대청댐에 저수된 강물이 주변의 산골짜기들을 구석구석 채워 풍광이 참으로 볼만합니다. 이처럼 곳곳이 승지인 금강의 상류부에 이름난 누정들이 자리하고 있는바, 충북영동군의 호서루, 옥천군의 독락정과 청풍정 등 이름난 누정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머지 합수정, 독락정과 수북정은 금강의 중류부에 자리하고 있는데, 금강 하류부의 강변에서는 어떤 누정도 보지 못했습니다. 

 

  서원은 금강 상류부의 강변에서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것이 누정과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 서원은 누정과 달라 경관이 빼어나다는 이유만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들판이 넓고 강물이 많이 흘러야 농사를 짓고, 취락이 들어서고, 서원이 들어설 수 있는데 금강의 상류부는 이렇다 할 평야가 없는 데다 대부분이 감입곡류로 수량이 많지 않아 댐을 축조하기 전에는 큰 마을도 생기지 않아 서원을 만나보기가 더욱 어렵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강을 지나 금강이 중류부에 접어들면서 넓은 평야를 지나고 백제의 수도인 공주와 부여를 관통하면서 강변에 세워진 서원을 비로소 볼 수 있었습니다. 금강의 중류부는 상류부와 달리 배들이 부강까지 올라가 비교적 수운이 활발했습니다. 수운이 가장 활발한 지역은 강경읍을 지나 강 하구에 이르는 금강의 하류부이지만, 거리도 짧고 자연경관이 상류부나 중류부에 미치지 못해서인지 서원은 물론 덕양정 외에는 이렇다 할 누정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들른 강변의 서원은 모두 5곳이었습니다. 금강 강변 서원의 특징을 들라면, 5곳의 서원이 모두 중류부에 위치해 있고, 죽림서원에서 퇴계 이황을 배향하는 것을 빼고는 어느 서원에서도 영남학파 선현들을 배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퇴계 이황이 생전에 기호학파의 기대승과 사단과 칠정에 관해 서신을 주고 받으며 고담준론을 나눴을 만큼 진리탐구에 대해서는 지역과 학파를 넘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왔기에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1.용강서원(龍江書院)

탐방일자: 20211224()

탐방지 : 충남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342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금산의 용강서원을 다녀왔습니다. 금산터미널에서 220번 버스를 타고 가다 용화리에서 하차해, 용강서원을 찾아갔습니다. 조선시대의 사립대학이자 재지사족의 근거지였던 서원이 자리한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여기 용화리가 제법 큰 마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덕 위에 자리해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용강서원은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밖에서 보기에  규모가 제법 커 보였습니다. 이 서원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조치를 피하지 못해 1871년에 훼철되었는데, 1945년 해방을 맞아 지역유림들이 강단을 재건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서원 앞의 안내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헐린 재목의 일부를 모아서 복원한 5칸의 강당이 있고, 중앙의 마루와 그 양쪽에 협실을 들인 이 서원이 금산 제1의 서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김원행과 송명흠 같은 저명한 유학자들이 강학을 맡아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김원행(金元行, 1702-1772)1722년 신임사화 때 조부 김창집(金昌集)이 사사되고 생부와 형들이유배되어 죽임을 당하자, 출사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해 조야(朝野)에 큰 영향력을 미친 유수한 산림의 한 분이었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을 종장(宗匠)으로 받드는 성리학이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던 시대에 김원행은 한원진의 호론에 맞서 이간의 제자 이재와 함께 낙론을 지지했습니다.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은 사화를 피하여 낙향해 살았습니다. 여러 차례의 출사 기회를 모두 사양한 송명흠은 1764년 경연관이 되었으나, 정치문제 발언으로 파직되었습니다. 이재 (李縡) · 민우수(閔遇洙) · 송사능(宋士能) 등과 교유한 송명흠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늑천집(櫟泉集)이 있습니다.

 

  이 서원에는 선현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16(숙종 4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 김원행(金元行) · 유계(兪棨) · 송명흠(宋明欽)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2. 검담서원(黔潭書院)

탐방일자: 2022113()

탐방지 :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금호리712-3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세종시에 위치한 검담서원(黔潭書院)을 들렀습니다. 신탄진역에서 하차해 현도교를 건넌 후 금강을 따라 세종시로 향했습니다. 갑천이 금강에 흘러드는 합수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진행해 아세아제지를 지나기까지 계속해서 금강의 우안의 자전거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아시아제지와 부용교를 차례로 지난 후 자전거 길에서 벗어나 오른쪽 마을 뒤에 자리한 부강(芙江) 보만정(保晩亭) 및 검담서원(黔潭書院)’ 을 찾아갔습니다.

 

  보만정은 조선 후기 기호지방의 대표적 별당 형식을 띤 정자 건축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홑처마이며, 처마 아래 중앙에 보만정(保晩亭)’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앞면 3칸에 측면은 중앙에 넓은 칸과 양쪽에 반 칸을 둔 2칸 규모로 되어 있고, 내부에는 방과 함께 대청마루와 툇마루가 있습니다. 방의 뒷면에는 동춘당 문집 판각(板刻)을 보관했던 서고가 있습니다. 보만정 앞뜰에 자리한 검담서원 묘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여기 보만정(保晩亭)이 터 잡은 곳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07)큰 강이 뜰 아래로 흐르는데 세 개의 절벽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어 시야는 수십 리이고 물이 굽이쳐 싸고 흐르며, 토정 이지함이 소금을 팔려고 장막을 펼쳤던 곳이자 삼남제일강산(三南第一江山)’이라고 칭찬했던 곳이라며 상찬한 승지(勝地)입니다. 보만정과 검단서원은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보지 못하고 담 밖에서 들여다본 바로는 잡초가 무성한 것으로 보아 관리가 제대로 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 마을의 할머니 한 분께서 저를 보고 관에서 내려오신 분 같은데 돌아가서 저렇게 방치할 것 같으면 문화재에서 해제해달라고 이야기 해주세요.” 라고 말씀하신 본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보만정 건물과 검담서원매패소(黔潭書院埋牌所)를 알리는 비석을 사진 찍고 자전거 길로 복귀해 금강 따라 걷기를 이어갔습니다.

 

  검담서원과 보만정에 대해서는 디지탈세종시문화대전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보만정(保晩亭)은 원래 1669(현종 10)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학문을 연구하려고 검담에 세운 정자로 건물 완성은 손자가 맡아 했습니다. 3년 후인 1672(현종 13) 송준길이 별세(別世)하자 후손과 지역 사족들이 함께 보만정을 수호하다가 1694(숙종 20) 송준길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 바로 검담서원(黔潭書院)입니다. 1871년 사액서원인 검담서원은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철폐되었고, 검담서원 묘정비만 남아 오늘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보만정 건물은 1920년대 초 재건된 것으로 그 후 몇 번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 서원에 독향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0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8()의 한 분으로 문묘에 종사된 성리학의 대가입니다. 연기, 문의, 청주, 공주, 회덕의 유림들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여기에 검담서원을 창건한 덕분에 규암 송인수 등과 함께 노봉서원(魯峯書院)에 제향된 송준길이 이 서원으로 이안(移安)되어 독향(獨享)될 수 있었습니다.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兩宋)으로도 불린 송준길은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생으로 율곡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고 예학에 밝았다고 합니다.

 

 

3. 명탄서원(鳴灘書院)

탐방일자: 20221123()

탐방지 : 충남 공주시 월송동 242-2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공주시의 명탄서원을 다녀왔습니다. 공주시의 석장리박물관을 출발해 금강 우안의 자전거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무릉천과의 합류점에서 오른쪽으로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을 들를 수 있는데 시간이 여의치 못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자리한 명탄서원만 들렀습니다.

 

  신공주대교가 지나는 월송교차로 인근에서 잠시 자전거길을 벗어나 들른 이 서원은 강학당인 명탄서원과 사당인 충절사가 울타리 안에 있지 않고 별채로 떨어져 있어 이제까지 보아온 서원들과 조금 달랐습니다. 명탄서원의 구조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어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 8칸의 재실 겸 강당, 6칸의 수호사, 중앙의 신문(神門)과 양옆 협문으로 된 정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명성과 이명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재실 겸 강당은 유생들의 회합과 제향시 제관들의 숙소로, 수호사는 제구의 보관 및 관리인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위 구조를 하나하나 확인하지는 못하고 밖에서 서원과 사당, 그리고 묘지를 보고 사진만 몇 장 찍어왔습니다.

 

  명탄서원은 1490(성종21) 충남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명성(李明誠)과 이명덕(李明德) 형제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기군 금남면의 명탄리에 창건한 사액서원입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 서원을 현 위치로 이전해 복원한 것은 1731(영조 7)의 일입니다. 그 뒤 1871(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1955년 후손들이 복원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명탄서원에 제향된 형 이명성(李明誠, 생몰연도 미상)은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마다하고 두문동에 은거해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킨 데 반해, 아우 이명덕(李明德, 1373-1444)은 조선건국 이후 나라의 기틀을 잡는 데 일생을 바쳤으며, 과거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고 합니다. 형과 동생의 나이 차로 절의를 지킬 나라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 것이기에 후대의 유림들이 두 형제의 충의를 같이 추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4. 창강서원(滄江書院)

탐방일자: 2023117()

탐방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지석리 산 1-1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부여군의 창강서원을 다녀왔습니다. 백제큰길과 나란한 방향으로 놓인 분강교를 건너 부여 땅이 시작되는 나지막한 고개를 넘었습니다. 얼마 후 저석교차로에 이르자 오른쪽 산 아래에 옹기종기 들어선 시골 마을이 보였습니다. 잠시 시골길을 걸어 이 마을의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창강서원 앞에 다다랐습니다.

 

  창강서원은 1629(인조 7)에 조선 중기의 문신인 황신(黃愼, 1560~161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이 지방 유림 들이 뜻을 모아 창건한 서원입니다. 숙종 임금으로부터 창강(滄江)’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된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37년에 복원된 후 1966년 현 위치로 이전해왔다고 서원 앞의 안내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서원에는 황신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된 3칸의 사우(祠宇), 제향 때 유림 들의 숙소 및 원내의 여러 행사 때 회합장소 등으로 사용되는 3칸의 재실(齋室)과 삼문(三門), 그리고 신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사우에는 황신(黃愼)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재실은 제향 때 유림들의 숙소 및 원내의 여러 행사 때 회합장소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창강서원에 제향된  황신(黃愼)은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역임한 중신이었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무탈하지 않았습니다. 1588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황신은 1591년 건저(建儲)문제가 일어나자 정철(鄭澈)의 일파로 몰려 파직당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지평으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접반하였으며, 통신사로 명나라의 사신 양방형(楊邦亨) · 심유경(沈惟敬)을 따라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1612년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으로 봉해졌으나, 다음 해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죄수 정협(鄭浹)의 무고로 관직에서 쫓겨나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가 그 뒤 옹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사망했습니다.

 

  황신이 남긴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는 얼마 전에 한 번 읽었습니다. 이 책은 황신이 임란 중인 1596년 명나라 책봉사(冊封使) 양방형(楊方亨)과 심유경(沈惟敬)을 동행해 겪었던 153일간의 일들을 기록한 사행일기(使行日記)입니다.

 

,,창강서원을 일별한 후 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왕진교로 자리를 옮겨 다시 금강을 따라 걸었습니다.

 

 

 

5. 죽림서원(竹林書院)

탐방일자: 202324()

탐방지 :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100-11

 

 

 

  금강을 따라 걸으며 마지막으로 들른 서원은 논산시 강경읍의 죽림서원입니다.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에서 택시를 타고 찾아간 죽림서원(竹林書院)은 금강과 멀지 않았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소개된 죽림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6()의 제단, 유도문(由道門), 홍문(紅門), 4칸의 족리정(足履亭), 4칸의 팔괘정(八卦亭), 정기비각(亭記碑閣) 등이 있습니다. 제단의 위치는 좌측으로부터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의 순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족리정과 팔괘정은 유림의 회합 및 제관(祭官)의 숙소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보지 못하고 바로 뒤 죽림정에 올라 강당과 서재 및 사우 등을 내려다보면서 터가 좁아 이 서원에 제향된 육현(六賢)께서 답답해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626(인조 4) 창건된 황산서원이 죽림서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665(현종 5) 사액서원이 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일명 육현서원(六賢書院)으로도 불리는 이 서원은 1871(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유허지(遺墟地)에 제단을 마련하여 향사를 계속해오다가 1910년 국권 상실과 함께 중단되었다가 1946년 지방 유림이 옛 제단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죽림서원 뒤 언덕에 자리한 임리정(臨履亭)1626년 사계 김장생이 지은 정자로 정자 이름 임리(臨履)는 시경의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두려워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처럼 하며, 엷은 얼음을 밟는 것처럼 하라)”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거실이 들여진 이 정자의 앞마당에 세워진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에 실린 글은 김상현의 작품입니다. 고색창연한 임리정 뒤쪽의 공원으로 올라서자 어깨를 활짝 편 거목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눈을 끌었습니다. 송시열이 임리정에서 150m가량 떨어진 가까운 곳에 팔괘정을 건립한 것은 스승 김장생 선생에 대한 추모의 염()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참에 이 서원에 배향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71)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김장생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문묘에 종사된 이른바 동방 18현 중의 한 분입니다. 송익필, 이이, 성혼의 문하생인 김장생은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된 저명한 예학자입니다. 함께 에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한 김집(金集)은 김장생의 아들이고, 제가 살고 있는 경기도 군포시에 묘역이 있는 김만기(金萬基)는 숙종의 장인으로 김장생의 증손이며, 소설 구운몽사씨남정기의 저자인 김만중(金萬重)은 김만기의 실제이자 김장생의 증손으로 광산김씨 문중의 명예를 드높인 분들입니다. 사계 김장생의 묘지는 여기 죽림서원에서 멀지 않은 논산시연산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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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들른 금강 강변의 5개 서원에 제향된 조선의 유학자는 다 합해 13명입니다. 김원행(金元行), 김장생(金長生), 성혼(成渾), 송명흠(宋明欽),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유계(兪棨), 이명성(李明成), 이명덕(李明德), 이이(李珥), 이황(李滉), 조광조(趙光祖), 황신(黃愼) 13명의 유학자 중에서 12명은 기호지방 출신이고, 퇴계 이황 한 명 만이 경상도 예안 출신입니다. 서원에 배향할 인물은 대개가 그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영남의 유학자가 퇴계 이황을 빼놓고 아무도 제향되지 않은 것은 기호지방 유학자들과 영남지방 유학자들 간에 학문적 소통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는 기호지방 유림은 서인, 영남지방 유림은 동인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투쟁하느라 학문적 소통이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다고 기호지방 유림들과 영남지방 유림들 간에 학문적 소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경기도에 살면서 퇴계 이황을 존경하고 학문적으로 따르는 유학자들이 있었으니 근기학파로 불리는 미수 허목(許穆, 1595~1682)과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등이 그런 분들입니다.

 

  오늘의 영남과 호남의 동서갈등은 정치적 갈등이지 학문적 갈등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치유가 쉽지 않다는 것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탐방사진>

 

1)용강서원

 

 

 

2)검담서원

 

 

3)명탄서원

 

 

4)창강서원

 

 

5)죽림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