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50. 금강 강변 누정탐방기(청풍정 등 6개소)

시인마뇽 2024. 9. 10. 12:06

탐방일자: 202212(), 42(). 418(), 113(), 1123()

                 2023년2월4일(토)

탐방지   : 충북영동군 호서루, 옥천군 독락정 및 청풍정, 세종시 합강정 및 독락정

                충남부여군 수북정

동행      : 나 홀로

 

 

 

  금강을 따라 걸으며 조선 풍류(風流)의 현장인 누정(樓亭)을 몇 곳 들러 쉬어가곤 했습니다풍류란 자연과 예술이 만나고 각박한 현실을 뛰어넘는 멋을 이릅니다. 일찍이 신라의 문인 최치원(崔致遠, 857-?)은 그의 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풍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습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것을 풍류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실로 유불선 3교를 포함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과 만나 관계를 맺으며 변화한다. 들어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요, 무위(無爲)의 일을 추구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이며, 모든 악()을 행하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

 

  경북대 정우락교수는 그의 논고 조선조 선비들의 여가와 풍류에서 신라의 화랑들은 위 글에서처럼 유불선 3교를 포함하는 회통적 풍류의식에 근간하여 명산을 유람하면서 몸과 마음을 수련하였고 시를 읊조리며 세계에 대한 건강한 비전을 제시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신라의 회통성(會通性)으로 시작해 고려의 방탕성(放蕩性)과 조선의 온돈성(溫敦性)을 차례로 거치며 역사적 변천을 겪어온 풍류는 혼자 즐기는 독락(獨樂)과 함께 즐기는 여락(與樂)으로 발전했습니다.

 

  독락의 장소로 자연 속에서 자적할 수 있는 정원을 들 수 있다면, 여락의 장소로는 누정이 적소입니다. 누정이 많은 지역이 경상도인 것은 경상도에서 문신들을 가장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1929년 이병연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누정조에 따르면 누정이 경상도는 1,295개소, 전라도는 1,070개소인데, 충청도는 219개소, 강원도는 174개소, 제주도는 6개소에 불과합니다. 자연경관이 빼어난 강원도의 누정이 174개소에 불과한데,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누정이 1,070개소나 되는 것은 전라도에서 강원도보다 훨씬 많은 사대부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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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이 흐르는 충청도에 누정이 많지 않다는 것은 금강을 따라 걸으면서 실감했습니다. 제가 들른 금강 변의 누정은 모두 6개소로 이 들 누정에서 누정시회가 열렸는지는 앞으로 조사해볼 생각입니다. 조선시대 경상도의 문인들은 낙동강에 배를 띄워 선유시회를 꽤 오래 열었는데 충청도의 문인들이 금강에 배를 띄워 선유시회를 열었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들어본 바 없습니다.

 

 

1. 호서루(湖西樓)

탐방일자: 202212()

탐방지   : 충북영동군심천면금정리 소재 호서루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충북 영동의 호서루(湖西樓)를 다녀왔습니다. 호서루란 금강과 영동천의 합수점에 건립한 누정을 이릅니다.

 

  호서루에 다다른 시각은 해 떨어지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금호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4번 도로를 따라 걸어 S-오일 주유소 앞에 이르렀습니다. 차도를 건너 잘 지은 한옥이 밀양박씨(密陽朴氏) 세덕사(世德祀)임을 확인한 후 4번 국도가 지나는 고당교를 건너지 않고 왼쪽 좁은 차도를 따라 걷자 이내 난계국악박물관과 영동문학관이 보였습니다. 가게에서 길을 물어 바로 앞 양강교를 건넌 후 둑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반 시간 정도 걸려 심천역에 이른 다는 것을 안내받고 나자 어둡기 전에 심천역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비로소 안도했습니다.

 

  양강교를 건너 금강과 영동천이 만나는 합수점의 언덕에 자리한 2층 누각의 호서루(湖西樓)에 이르렀습니다. 영동군 향토유적 제37호로 지정된 2층 누각의 호서루는 안내판에 아래와 같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읍청(挹清) 박사종(朴嗣宗)이 호호정 (浩浩亭)을 금정리 장승산(長承山)에 지어 일명 마산정 (馬山亭)이라고도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밀양박씨 종중에서 1959년 이곳에다 다시 짓고 호서루로 이름을 바꿨으며 금탄(錦灘) 박시호(朴時浩)가 기문을 지었다. 둥근 기둥의 목조기와 2층 누각으로 99.2제곱미터(30)이며, 정면 3, 측면 2칸의 활작집이다.”

 

  조선 중기 시인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의 시문집인 옥봉시집상권에 박사종이 호호정(浩浩亭, 지금의 호서루)을 노래한 칠언절구(七言絶句) 浩浩亭이 실려 있습니다.

 

<浩浩亭>

 

千年王子紫鸞簫    천년 왕자 신선이 자란소 피리 불어

一弄寒城月滿霄    한번 희롱하니 외진 성 하늘에 달빛 가득하도다

江上有臺人不見    강가 누대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夜深歸路海迢迢    밤 깊어 돌아가는 길 은하수가 멀고도 멀도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한  박사종 (朴嗣宗, 1513-1580)은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출사의 뜻을 접고 충북 영동의 고당(高塘)으로 귀향했습니다.  산수 좋은 곳에 집을 짓고 더럽고 치사한 벼슬을 사양하다는 의미의 읍청(揖淸)으로 편액했다고 합니다. 박사종은 제자인 민욱(閔昱, 1559-1625)이 세운 회곡서원(晦谷書院)에 난계(蘭溪) 박연(朴堧, 1378-1458)과 함께 향사(享祀)되었는데, 나중에 이 서원이 옮겨져 재건된 것이 바로 초강서원(草江書院)입니다.

 

  호서루를 출발해 영동천 위에 놓인 초강교를 건너 초강과의 합류점에 이르기까지 거의 직선 으로 이어지는 제방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5시 반 경에 둑 아래 금강을 조망하다가 수달로 보이는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을 보고 얼른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초강과의 합류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몇 분을 걸어가 심천교에 다다르자 어둠이 빠른 속도로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2.독락정(獨樂亭)

탐방일자: 202242()

탐방지    : 충북옥천군연남면연주리 소재 독락정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충북옥천군연남면의 연주리에 자리한 독락정(獨樂亭)을 들렀습니다.독락정(獨樂亭)1607(선조40) 독락옹(獨樂翁) 주몽득(周夢得)이 여기 연주리의 금강 강변에 세운 조선 중기의 정자입니다.

 

  지난 번에 시간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독락정을 둘러보고자 연주리정류장에서 하차해 독락정으로 향했습니다. 연남초교를 지나자 저만치 앞에 안남천이 금강에 합류되는 합수점이 보였습니다. 독락마을에 도착한 후 오른쪽의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한 독락정의 집안으로 들어가 이모 저모를 살펴보았습니다.

 

  독락정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지어진 정자입니다. 아쉬웠던 것은 이 정자는 여느 정자와 달리 울타리로 담장을 쌓았고 출입문을 설치했으며, 양 측면은 툇마루를 설치하기 위해 내부를 4칸으로 만들고, 온돌방을 들여 정자로서의 개방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래가 안남천이 금강에 합류되는 합수점이고, 이 금강이 한반도지형을 휘돌아 흐르는 지점이어서 조망은 더할 수 없이 빼어난 데, 누구나 쉽게 와서 쉴 수 있도록 개방하지 않은 것은 나중에 이 정자를 서당(書堂)으로 사용해서라고 합니다. 독락정이 마을 이름으로도 불리는 까닭은 이 마을이 초계주씨의 집성촌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독락정과 가까운 곳에 사당 영모사(永慕社)가 자리 잡았고, 길가 입구에는 공덕비, 열녀비, 세거비, 위령비 등 초계주씨와 관련된 비석이 여럿 세워져 있어 초계주씨의 집성촌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독락정에서 아주 가깝게 조망되는 안남천과 금강의 합류점은 낚시꾼들로 붐볐습니다.

 

  독락정을 세운 독락옹(獨樂翁) 주몽득(周夢得, 1573-1658)은 임진왜란 때 추령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고, 1607년 일본에 건너가 조선인 포로 1,000여명을 송환했으며,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을 진압해 절충장군과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독락정을 둘러본 후 얼마간  금강을 따라 걸었습니다. 독락정마을 끝자리에 위치한 농어촌개발공사영동지사 건물을 지나서부터는 포장이 안 된 울퉁불퉁한 길이어서 걷기에도 불편했습니다. ‘한반도지형의 남해안을 에돌아 남쪽으로 흘러가는 금강을 바라보며 이 강에 살포시 내려앉은 봄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성큼 다가선 봄이 강물을 꽁꽁 얼어붙게 한 겨울을 몰아낸 덕분에  물고기를 낚는 강태공들이 이 강에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3.청풍정(淸風亭)

탐방일자: 2022418()

탐방지    : 충북옥천군군북면석호리 소재 청풍정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대청호의 호반에 자리한 청풍정을 들러 구한말의 풍운아인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을 만나보았습니다. 여행의 기쁨 중 하나는 역사적 인물을 현지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것인데, 이번에는 김옥균이 머물렀다는 누정 청풍정을 들러 저 세상의 인물인 김옥균을 만났습니다.

 

  김옥균은 개항기에 이조참의, 호조참의, 외아문협판 등을 역임한 정치인으로, 1884년 조선을 개혁하고자 갑신정변을 일으킨 혁명가이기도 합니다. 김옥균이 개화사상을 갖게 된 것은 다른 청년들과 함께 1870년 전후부터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면서 부터인 것 같습니다. 스승 박규수는 북학파를 이끈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오경석(吳慶錫) · 유홍기(劉鴻基) 등과 더불어 근대적 개혁을 추구한 선각자였습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김옥균은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성취하여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개화당은 정권을 장악하자 “125일 저녁부터 6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열어서 김옥균의 주도 하에 혁신정강(革新政綱)을 제정해 실행을 서둘렀습니다. 청군을 등에 업은 민씨 수구파에 밀려 끝내는 혁명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18943월 민비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상해동화양행(東和洋行) 객실에서 암살당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것으로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은 적고 있습니다.

 

  심하게 휘어진 꼬부랑길을 따라 내려가 강가에 자리한 대청호의 명소인 청풍정(淸風亭)에 다다랐습니다. 조선 말기 개화파를 이끈 김옥균이 명기 명월과 사랑을 나눈 곳으로 알려진 청풍정에 올라 대청호의 빼어난 경관을 탄상(歎賞)했습니다. 들쭉날쭉한 대청호의 강안선(江岸))을 바라보노라니, 마치 비상을 앞둔 거대한 용이 꿈틀대는 것 같았습니다. 김옥균이 명월과 은근하게 사랑을 나누었을 구한말에는 청풍정 아래로 흐르는 금강이 산골짜기를 따라 굽이져 흐르는 큰 내와 같아서, 앞이 탁 트여 시원스레 조망되는 오늘의 대청호와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청풍정을 둘러본 후 진걸마을의 선착장으로 향했습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평탄한 차도가 이어져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청풍정 출발 30분이 지나 진걸마을의 선착장에 도착하자 강 건너 강안선이 선명하게 눈에 잡혔습니다.

 

  대청호 호반에 자리한 청풍정(淸風亭)’은 조선 말엽 김옥균이 낙향하여 기생 명월과 함께 소일하며 지낸 곳으로 안내문에 적혀 있습니다. “기생 명월이 국가를 개혁할 인물인 김옥균이 외진 곳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장부의 큰 뜻을 펴길 바라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애틋한 이야기가 마치 참이라는 듯이 청풍정 뒤 편의 큰 바위에  明月岩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과연 김옥균이 여기 옥천에 내려와 청풍정에서 기생 명월과 사랑을 나눈 것이 사실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 명기들의 작품이나 행적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능화((李能和, 1869-1943)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김옥균이나 명월의 이야기가 전혀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명월은 명기가 아니거나 전설상의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혁의 주체세력인 김옥균이 옥천으로 내려와 여기 청풍정에서 연정을 나눈 기생 명월이 국가를 개혁할 인물이 외진 곳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장부의 큰 뜻을 펴길 바라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는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혁명가 김옥균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서 지어낸 것이다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김옥균과 명월의 러브 스토리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하고 싶지 않은 것은 김옥균이 아무리 강철 같은 사나이라도 냉혈한이 아니라면 애증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되어서입니다. 실제로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가서 일본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19세기의 풍운아 김옥균이 설사 갑신정변을 일으켜 국왕 앞에서 정적의 목을 치는 과단성을 지닌 사나이라 해도 때때로 여인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은 평범한 졸부와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청풍정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그 진위와 관계없이 강인한 인물로 알려진 김옥균도 여인네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나이였음을 보여주는 훈훈한 스토리다 싶어 사족을 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20세기의 풍운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랑을 나눈 육영수여사도 옥천 분입니다. 김옥균과 박정희 두 사나이는 총탄에 맞아 암살되었습니다. 이분들과 사랑을 나눈 기생 명월은 강으로 몸을 날려 자살했다 하고, 육영수여사는 괴한의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두 사나이와 두 여인 모두 제 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공통점일진 데, 역사는 이렇게 반복되는가 싶어 씁쓰레하기도 합니다.

 

 

4.합강정(合江亭)

탐방일자: 2022113()

탐방지   :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동 소재 합강정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미호강이 급강에 합류되는 합수점에 세워진 누정 합강정(合江亭)을 올랐습니다.

 

  도시바람길 조성공사로 어수선한 합강공원 끝머리의 구릉에 세워진 2층 누정의 합강정(合江亭)에 오르자 미호강과 금강의 합수점이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충북음성군의 보현산(해발482m) 북쪽 계곡에서 발원한 미호강은 청주와 조치원을 거쳐 저 아래 합수점에서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금강의 제1지류로, 그 길이는 89Km에 이릅니다. 22년전 합강정을 들른 신정일님은 저서 우리 강 따라 걷기 금강 401Km 에서 대전 아랫부분까지 0.511ppm으로 흐르던 금강이 이곳 미호강을 지나며 3급수로 전락한다.”고 개탄했는데, 먼발치서 보아서인지 미호강은 그다지 탁해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합강정에 올라 세종시 쪽으로 흘러내려가는 금강을 조망하자 오른쪽 먼발치로 진월산이, 강 건너 왼쪽으로 세종시청이 들어선 아파트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만한 경승지에 산수를 즐기는 조선의 문인들이 발걸음을 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송준길, 남용익, 조지겸, 채팽윤, 윤순, 이재 등 문인들이 이 정자를 찾아 올랐고, 정조 때 명재상인 채제공(蔡濟恭)을 종손으로 둔 중기(仲耆)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은 합강의 경관에 감탄해 한시 합강정(合江亭)을 남겼습니다. 아래 시 合江亭의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에 실린 希菴先生集卷之十六 詩 峴山錄() 蔡彭胤仲耆甫著에서 옮겨왔고, 번역문은 참마음님의 블로그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에서 따왔는데, 이 블로그는 溪雲 金正坤선생께서 번역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合江亭

 

峽坼雙流合    탁 트인 골짜기 두 줄기를 모아

無情如有情    무정이 유정인 듯

紅亭出其上    붉은 정자 위에 솟아

縹緲揷空明    어렴풋이 달그림자로 꽂혔네

列峀丹靑活    늘어선 봉우리 울긋불긋

飛波日夜鳴    물결 날며 밤낮 울어대니

征途困煩鬱    가는 길 울적한 마음

到此十分淸    여기 이르자 선명히 맑아지네

 

  채팽윤은 위 시에서 가는 길 울적한 마음여기 이르자 선명히 맑아지네라고 합강정에 오른 소회를 밝혔는데 저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합강정에서 내려가 미호강 위 무명교를 건넜습니다. 강변에 바짝 붙여 낸 인도를 따라 걷다가 이내 자전거길로 복귀한 후 세종시의 햇무리교까지 걸어가 택시를 타고 조치원역으로 이동했습니다.

 

 

5.독락정(獨樂亭)

탐방일자: 20221123()

탐방지    : 세종특별자치시연기면세종리 소재 독락정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세종시에 자리한 누정 독락정(獨樂亭)을 둘러보았습니다. 이 정자는 임난수(林蘭秀, 1342-1407) 장군의 불사이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를 지낸 둘째 아들 임목이 창건한 정자입니다.

 

  세종시의 금남교와 힌두리교를 차례로 지나 나리진나루터의 언덕에 자리한 정자 독락정에 올랐습니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이 정자는 그동안 여러 차례 고쳐 지어서인지 단청의 색상이 바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어습니다. 담으로 둘러싸인 독락정은 출입구인 일각문이 닫혀 있어 담밖에서 사진만 찍어 왔습니다. 여러 그루의 큰 소나무가 자리한 독락정은  넓은 들 가운데 있는 나성을 등지고 있었고, 앞 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있어 이만하면 누정시회를 열만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정자를 찾아온 후손들이 대청에 들인 방에서 공부도 하고 쉬다가 내려다보았을 금강 또한 6백여 년 전에는 오늘과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세종시가 행정수도가 되어 오늘과 같이 도시로 변화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이 누정의 주인공인 임난수(林蘭秀, 1342~1407)1374(공민왕 23) 32세에 최영 장군의 탐라 정벌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운 고려의 충신입니다. 당시 적에 맞서 싸우다 오른쪽 팔이 잘렸지만 잘린 팔을 화살통에 꽂고 계속해서 싸워 승리했습니다. 공조전서에 오른 임난수가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공주목의 삼기촌에 낙향해 1407(태종 7)에 생을 마감한 것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임금으로 섬길 수 없어서였습니다. 1682년에야 비석이 세워졌는데, 비명(碑銘)은 송시열이 찬()하고 박태유가 서()하였으며, 민유중이 전서(篆書)를 썼다고 하니 임난수의 충절을 기리는 쟁쟁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1710년에 이르러 임난수를 제향(祭享)하는 기호서사가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6. 수북정(水北亭)

탐방일자: 2023년2월4()

탐방지   : 충남부여군규암면규암리 소재 수북정

 

 

 

  금강을 따라 걷는 길에 부여의 백제교를 건너면서 수북정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부여터미널을 출발하는 오산행 버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수북정을 들르지 못하고 길 건너서 사진만 찍었습니다. 이번에 정림사지와 수북정을 묶어 탐방에 나선 것은 따로 짬을 내 다시 찾아오기가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이동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이고자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대절해 정림사지를 들러 둘러본 후 백제교를 건너 여기 수북정으로 이동했습니다.

 

   돌계단을 걸어올라 언덕에 이르자 팔작지붕의 수북정이 두 팔을 벌려 저를 반기는 듯 했습니다. 언덕 마루에 자리 잡은 수북정에 올라서자 시야가 탁 트여 조망이 일품이었습니다. 바로 아래 백마강과 이 강 위에 놓인 백마교, 강 건너 부소산과 구드래 일원이 한 눈에 잡혔습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수북정 건물의 특징은 기둥배치가 외부 기둥과 내부 기둥을 가로줄에 맞추지 않았고, 내부는 별도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 모습이다. 천정도 가운데 기둥 부분의 서까래를 감춘 우물천정이고, 주변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정이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았고, 지붕은 겹치마 팔작지붕이다.”라는 것입니다. 안내문의 글이 복잡하기는 해도 수북정에 올라가 찬찬히 살펴보니 과연 그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자에 올라서자 한시가 쓰여진 편액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현장에서 한시를 해독할 정도에는 제 한문 실력이 못 미쳐 집에서 다시 보고자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수북정(水北亭)은 부여팔경의 하나로 백마강변의 자온대 위에 세워진 정자를 이릅니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정자이름을 조선 광해군 때 문신인 김흥국(金興國, 1557-1623)의 호를 따서 지은 것으로 보아 광해군 때 지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589(선조 22)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김흥국은 1596년 북평사(北評事) 등을 거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602년 형조정랑이 되었습니다. 1605년 한산·양주 등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모두 선정을 베풀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유현(遺賢)으로 천거되어 부제학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습니다. 낙향해서는 백마강가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동지(同志)와 더불어 글과 술로 소일하였으며, 스스로를 강상풍월주인(江上風月主人)이라 칭하였다고 합니다. 김흥국이 교유한 인물은 김장생(金長生신흠(申欽황신(黃愼서성(徐渻) 등의 이름난 거유였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수북정에서 내려가 대기 중인 택시로 강을 건너자마자 하차해 금강 따라 걷기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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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께서 제나라 선왕에게 혼자 음악을 연주하며 즐기는 것과,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음악을 연주하여 즐기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즐겁습니까? (獨樂樂 與人樂樂 孰樂)” 라고 묻자, 선왕은 “(독락이) 남과 함께 하는 것만 못합니다(不若如人).”라고 답했습니다. 위 글로 보아 공자와 맹자를 섬기는 조선의 선비들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는 여락(與樂)의 풍류를 더욱 즐겼을 것 같습니다.

 

  조선 시대 여락의 풍류는 시회(詩會)를 통해 적극적으로 시현되었으니, 누정시회(樓亭詩會)와 선유시회(船遊詩會)가 바로 그것입니다. 강변의 누정과 강에 띄운 범선은 여락의 풍류를 즐긴 곳입니다. 저는 누정시회가 열린 낙동강 강변의 정자 몇 곳을 들르고, 선유시회가 열린 범선을 띄웠을 낙동강의 강변을 여러 차례 따라 걸었습니다. 그 덕분에 여락의 시회가 어떠했을까 대강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아쉽게도 금강을 따라 걸으면서는 누정시회나 선유시회의 흔적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관련 자료를 조사해 금강의 시회가 낙동강의 시회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금강과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알게 된 것은 이름난 정자는 많은 수가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풍류의 멋이 유흥상경(遊興相景)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탐방사진>

 

1.영동 호서루

 

 

2. 옥천 독락정

 

3. 옥천 청풍정

 

 

 

4. 세종시 합강정

 

 

 

5. 세종시 독락정

 

 

6)수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