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 2020년 2월4일, 5월10일, 5월14일, 5월21일, 6월25일
탐방지 : 섬진강 강변 누정 6개소
-전북 : 진안군 모운정, 임실군 월파정, 순창군 구암정 및 어은정
-전남 : 곡성군 횡탄정, 광양시 수월정
동행 : 나 홀로(월파정은 이상훈 대학동기와 동행)
2010년 섬진강에 물을 대는 약630Km의 둘레산줄기 환주를 마치면서 제 스스로에 다짐한 것은 이 둘레산줄기로부터 물을 받아 흐르는 섬진강의 본류를 반드시 한 번은 따라 걸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짐 10년 만에 이 강의 발원지인 전북진안의 데미샘을 찾아가 전장 224Km의 섬진강 따라 걷기에 나섰습니다.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백운면 신암리의 팔공산 데미샘에서 발원해 전남광양군진월면망덕리와 경남하동군금성면고포리의 경계인 광양만에서 남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그 길이가 223Km에 달합니다. 고려 우왕 11년인 1385년에 왜구가 이 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울부짖어 광양 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때부터 이 강이 “두꺼비 섬(蟾)”을 붙여 섬진강(蟾津江)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섬진강을 따라 걸으며 강변에 위치한 모운정, 월파정, 구암정, 어은정, 황탄정, 수월정 등 여러 곳의 누정을 둘러보았습니다. 이중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은 횡탄정, 어은정, 수월정 등 3개소이고 나머지 3개 누정은 해방 후에 지어졌습니다.
1.모운정(慕雲亭)
탐방일자: 2020년2월4일(화)
탐방지 : 전북진안군백운면운교리 소재 모운정
동행 : 나 홀로
섬진강을 따라 걷는 길에 전북 진안에 위치한 모운정을 들렀습니다. 덕운교를 건너 왼쪽 아래로 내려가 빨간색 양철지붕의 정미소인 ‘백운면물레방아’를 둘러본 후 북쪽으로 뻗어 나가는 강둑길을 따라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섬진강의 맑디맑은 물의 흐름을 지켜보았습니다. 보(洑)마다 물을 가득 채운 다음 보를 넘어 그 아래 달뿌리 밭에 난 좁은 물길을 따라 졸졸 흘러내려가기를 반복하는 섬진강 상류를 따라 걷다가 원운교에 조금 못 미쳐 자리한 모운정에 다다랐습니다.
단청이 거의 바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여기 모운정은 유서깊은 누정은 아니다 싶었는데 과연 그러했습니다. 이 정자는 1977년 전영태 전 백운면장이 사재를 털어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누대와 난간을 설치하고 팔작기와지붕을 올린 단출한 건물입니다. 이 정자를 창건한 전영태 전 백운면장은 앞서 둘러본 덕운교 아래 물레방아를 물려받은 분이라 합니다. 이 물레방아는 조부께서 직접 물레방아식 연자방아로 개조하여 운영하다가 백부한테 물려주어 50여 년간을 운영한 후 전영태 손자가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모운정(慕雲亭) 편액에 ‘不肖永泰謹書’라고 쓰인 것으로 보아 모운정 편액은 이 정자를 지은 전영태 전 면장이 직접 쓴 것 같습니다.
모운정을 막 지나 마을 앞 원운교다리를 건너는 제게 혼자서 걷느냐며 말을 건네 온 한 할머니한테서 외지 사람들도 반가워하는 외로움이 느껴졌습니다.
2.월파정(月波亭)
탐방일자: 2020년5월10일(일)
탐방지 : 전북임실군덕치면물우리 소재 월파정
동행 : 서울사대 이상훈동문
섬진강을 따라 걷는 길에 전북 임실에 자리한 월파정을 다녀왔습니다. 임실터미널에서 순창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회문삼거리에서 하차했습니다. 바로 옆 강진교로 이동해 강 서쪽 둑을 시멘트로 포장해 조성한 섬진강의 자전거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길을 따라 남진하면서 새하얀 꽃을 활짝 피운 가로수가 이팝나무이고 길가 밭을 뒤덮은 다년생 풀이 작약이라는 것을 야생화와 나무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이 교수가 확인해주었습니다. 강폭은 넓었지만 수로가 좁아서인지 물흐름이 빨랐고 물소리도 제법 크게 들렸습니다. 1시간쯤 걸어 도착한 세월교를 건너 월파정(月波亭)에 다다랐습니다.
이 월파정은 1927년 덕치면 물우리에 거주하던 밀양 박씨 종중에서 선조들의 유덕을 경모하기 위해 건립한 정자입니다. 정자 앞 안내문에 따르면 이정자의 원래 이름은 월회정이었는데, 1966년 대종회에서 박씨의 중시조 계행공이 390년 전 전남 창평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것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호를 따 월파정으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월파정은 1927년 밀양박씨 종중 밀정 부원군피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선조들의 유덕을 경모하기 위하여 정각을 지었고 이를 "월회정"이라는 명칭으로 지었다가, 1966년 대종회에서 박씨들의 중시조 계행공이 390년 전 전남 창평에서 이주 해왔다는 것을 추모하기 위해 계행공의 호를 따서 "월파정" 이라고 했다. 계행공의 15대 후손들이 90년대 초 단청을 새로 했다. 처마의 네 귀를 철재 기둥으로 받쳐 세웠다. 이곳은 뒤로는 천담 계곡이 있고 앞으로는 회문산이 있다. 산 입구에 있는 월파정은 밤에 달이 떠오르면 정자 아래로 잔잔한 물 흐름과 물 위에 비치는 달의 풍경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조선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정자가 정교한 조각과 우아한 선, 화려한 단청이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선경을 빚어놓고 있다고 상찬받는 주된 이유는 그 입지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단청의 고색창연함은 천년고찰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여분산에서 발원한 치천과 백운산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이 정자 앞에서 만나는 데다, 정자가 자리한 들판이 소나무 숲으로 풍광이 빼어납니다. 누구라도 달 밝은 밤에 누각에 올라 잔잔히 흐르는 섬진강 강물을 지켜보면서 한시 몇 수는 지었음 직한데, 정자에 걸려 있는 편액(扁額)들이 그런 시들을 담고 있는지는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막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월파정을 출발해 다시 세월교를 건넌 다음 섬진강이 낳은 김용택시인의 생가로 향했습니다.
3. 구암정(龜巖亭)
탐방일자: 2020년5월14일(목)
탐방지 : 전북순창군동계면구미리 소재 구암정
동행 : 나 홀로
섬진강을 따라 걷는 길에 전북 순창의 정자 구암정을 들렀습니다. 전라선의 오수역에서 하차해 오수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는 데 20분가량 걸렸습니다. 터미널에서 순창행 버스를 타고 가다 동계에서 내려 택시로 갈아탔습니다. 지난번에 섬진강 따라 걷기를 끝낸 구미교에 도착해 섬진강 좌안의 자전거길을 따라 10분가량 남진해 구암정(龜巖亭)에 도착했습니다.
구암정(龜巖亭)은 조선 전기의 유학자인 구암(龜巖) 양배(楊培)의 학문과 덕망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후학들이 1898년에 지은 누정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에 방이 들여져 있고,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지어진 구암정은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삼면을 나지막한 돌담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문이 잠겨 있어 정자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구암정에 대해서는 정자 앞 안내문에 간략하게 잘 소개되어 여기에 옮겨놓습니다.
“구암정은 조선 중종대의 인물인 구암 양배의 덕망을 홍모하여 그의 후손과 후학들이 1898년에 지은 것이다. 양배는 학문과 덕망이 매우 높았으나 몇 차례의 사화로 어진 선비들이 화를 당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아우 양돈과 함께 이곳 적성강 상류 만수탄에서 고기를 낚으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들 형제가 즐겨 앉았다는 만수탄의 바위를 배암, 돈암 또는 형제암이라고 부른다. 그를 기리기 위해 1808년에 후손들이 적성면 지북리에 지계서원을 세웠으나 1868년에 홍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지계서원이 헐린 후 구암정이 세워졌다.”
이 정자의 주인공인 양배(楊培)는 이 지역 순창의 구미에서 태어난 유학자로 학문과 덕망이 높아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로 유림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지켜본 양배는 벼슬을 거부하고 섬진강 강호에 숨어들어 동생 양돈(楊墩)과 함께 여기 적성강 상류 만탄에서 고기를 낚으며 살아갔습니다. 양배는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자손들이 4대 내리 문과에 급제했다고 하니 복 받은 가문 임에 틀림없습니다.
구암정이 들어선 만수탄 일대의 자연경관은 ⌜디지탈순창문화대전⌟에 소개된 아래 글처럼 과연 빼어나 보였습니다.
“구암정 일대의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서술한 「구암정기(龜巖亭記)」를 보면, 맑은 만수탄의 물흐름에 주변의 특출한 세 봉우리가 감지된다. 이러한 경치를 정면으로 굽어볼 수 있는 곳에 구암정의 터를 잡았기 때문에 경치가 매우 뛰어나다. 예전에는 정자 둘레에 수십 그루의 오동나무가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을 뿐이다. 또한 구암정 뒤쪽으로는 두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다.”
구암정을 둘러본 후 섬진강 따라 걷기를 이어갔습니다. 구암정에서 남쪽으로 1Km가량 떨어진 내월교를 지나면서 강 건너서 고기를 낚는 사람과 강 가운데 바위에 앉아 시간을 낚고 있는 두루미를 바라보노라니, 양배가 섬진강으로 숨어든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4. 어은정(漁隱亭)
탐방일자: 2020년5월14일(목)
탐방지 : 전북순창군적성면평남리 소재 어은정
동행 : 나 홀로
섬진강을 따라 걷는 길에 전북 순창의 누정인 어은정을 들렀습니다. 구암정을 출발해 섬진강 좌안길을 따라 2Km가량 남진해 어은정에 도착한 시각은 태양이 남중한 12시 경이었습니다. 목덜미를 내리쬐는 햇살을 피할 겸 1567년 어은 양사형(楊士衡, 1547∼1599)이 분가하면서 지은 어은정(漁隱亭)을 살펴보았습니다.
어은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담장이 쳐져 있어 대문을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습니다. 문이 잠겨 있어 담 밖에서 들여다만 보았는데 정자에 방이 들여져 있는 것과 담을 쌓아 개방하지 않은 것은 앞서 본 구암정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약간 경사가 있는 뒤쪽 담장 밖에서 앞의 섬진강을 바라보면 누정의 지붕선과 앞으로 펼쳐진 드넓은 평야가 멀리까지 조망된다는데 나중에 알아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어은정에 대해서는 정자 앞 안내문에 아래와 같이 소략하게 적혀 있어 여기에 소개합니다.
“어은정(漁隱亭)은 조선 선조 13년(1580)에 양사형(1547~1599)I 친구들과 시주(詩酒)를 즐기던 곳이다. 정자의 원래 이름은 영하정(暎霞亭)이었으나, 1919년 보수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어은이나 영하는 모두 양사형의 호다. 구암 양배의 종손인 양사형은 조선 선조 21년(1588) 과거에 합격한 영광군수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1592)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올랐다. 순칭의 화산서원이 그의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어은정이 들어선 입지가 어떠한 곳인 가는 아래와 같이 ⌜향토문화대전⌟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섬진강과 오수천이 구남 마을 바로 앞에서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는 곳에 어은정이 있다. 풍수 형국을 보면,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북쪽의 용궐산은 용(龍)이 승천하려는 형상이고, 남쪽 무량산(無量山)은 물산을 헤아릴 수 없음을 뜻하지만, 선조들은 예부터 거북 형상, 즉 거북 구(龜), 큰산 악(岳)을 쓰는 ‘구악(龜岳)’으로 불러 왔다. 구남 마을은 금거북이 남수(湳水)로 들어가는 금구 남수(金龜湳水) 형상이다. 거북은 수명이 길고 물에서도 뭍에서도 살기 때문에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특히 금거북은 하늘에 사는 영물로 천지의 기운을 흡수해서 만물을 낳는다고 한다. 거북이 땅속의 기운을 더욱 힘차게 빨아들이므로 집터로 더 바랄 것이 없다. ‘남수’란 서하수(西河水)의 의미로 동계천과 섬진강 원류가 합수되는 지점이자, 섬진 3지맥이 섬진강으로 숨어드는 어은정 앞을 칭한다. 원래의 남수는 중국 산시성[山西省]에 있는 시냇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거북이 남수에 내린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편액들을 제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어은정에 걸려 있는 여러 편액 중에 당시 지방관이던 윤병관이 지은 「題漁隱亭」의 라는 시가 실려 있다는데, 마침 이 시의 전문이 『향토문화대전』에 소개되어 있어 여기에 올립니다.
題漁隱亭 어은정에 제하다
淸風曾不一絲搖 맑은 바람 한 오라기 흔들리지 않았는데
何忍當時訣聖朝 어떻게 차마 당시 성조(聖朝)를 떠나셨을까
山上至今多白日 산 위에는 오늘까지 밝은 햇살이요
水中依舊見丹霞 물속에는 예전처럼 붉은 노을 비춰 있네
虛檻松聲塵夢悟 빈 난간 솔바람 소리엔 세속적인 꿈 깨치우고
滿庭草色客魂消 뜰 가득한 풀빛엔 나그네 마음 녹아지네
人隱古亭亭未隱 사람은 옛 정자에 은둔하였으나 정자는 아직 숨지 못하여
復來遊子每逍遙 뒤에 오는 길손들 매양 이곳을 소요하네
어은정을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수천과 섬진강의 합류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세월교로 섬진강을 건넌 후 우안 길을 따라 섬진강 따라 걷기를 이어갔습니다.
5. 횡탄정(橫灘亭)
탐방일자: 2020년5월21일(목)
탐방지 : 전남곡성군고달면뇌죽리 소재 횡탄정
섬진강을 따라 걷는 길에 전남 곡성의 누정인 횡탄정(橫灘亭)을 둘러보았습니다. 섬진강 최대의 습지인 제월습지를 지날 때는 강 건너 좌안 길을 걷느라 우안에 자리한 함허정을 들르지 못해 많이 아쉬웠는데, 강선습지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횡탄정은 제가 걷고 있는 섬진강 좌안에 위치하고 있어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남원역에서 하차해 섬진강 강변의 가덕리 버스정류장까지는 버스로 이동했습니다. 섬진강의 하중도 중 가장 큰 섬으로 메타세콰이가 빽빽하게 들어선 제월도를 조망한 후 곡성을 향해 섬진강 좌안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청계동교, 신기교와 요천대교를 차례로 지나 곡성 땅에 발을 들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선습지에 이르렀습니다. 강선습지를 지나 이내 다다른 낙동강 좌안의 횡탄정에서 제월습지를 지나면서 함허정을 들르지 못한 아쉬움을 풀었습니다.
1609년에 창건된 횡탄정은 단층 팔작지붕의 대청형 누정으로 방을 들이지 않아 탁 트인 대청마루가 시원해 보였습니다. 걸려 있는 편액은 기문(記文) 1점, 회안(會案) 1점, 시판(詩板) 3점인데, ⌜橫灘文會案⌟(횡탄문회안) 편액에는 횡탄문화계를 결성한 14명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횡탄정은 전란으로 인해 폐정되었다가 1887년 향약 계원 후손들이 모여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횡탄정에 대한 정보로는 정자 앞에 세워진 안내판의 아래 ⌜횡탄정 이야기⌟ 글보다 자세한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횡탄문회계(橫灘文會稽)는 1609년(광해군 원년) 대북파에 의해 국정이 혼란스러워지자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백졸 김선, 칠송정 최상훈, 만오 방원진이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절의가 있고 학력이 뛰어난 남원사대부가의 현사들과 문화계를 결성하여 봄과 가을에 유교적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고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여 서로 상부상조하는 한편 학문을 강마하기 위해 14인이 참여하였다. 문화계에 참여했던 인물은 정주인 진사 김선, 정주인 유학 이이순, 정주인 진사 김집, 흥덕인 진사 장질, 부안인 생원진사 김화, 해주인 참봉 오정식, 삭녕인 생원진사 최상훈, 삭녕인 무과 부사 최보, 장연인 참봉 변상익, 삭녕인 문과 좌윤 최연, 남양인 생원 찰방 방원진, 경주인 선교랑 김영진, 청주인 생원진사 판관 한경생, 창원인 유학 정수이다. 이들 14인은 남전여씨 향약규범에 따라 덕업상권, 과실상규, 신의상교, 환난상휼의 4개 강목을 정하여 매년 4월4일과 9월9일 향음주례를 개최하였으며 자연경관이 뛰어난 남원군 고달방(전남곡성군고달면뇌연리뇌연) 순자강 변에 횡탄정을 짓고 시문학을 즐겼다. 횡탄문화계는 14가(家) 자손들이 매년 4월4일 횡탄정에서 문화계를 개최하여 선인들의 위업을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다.”
횡탄정은 마침 가까이에 섬진강횡탄정인증센터가 자리하고 있어 섬진강을 따라 달리는 자전거라이더들이 쉬어가는 곳입니다. 횡탄정을 지나는 과객들을 붙잡아 잠시 쉬어가게 하는 데는 바료 옆의 정자 보인정(輔仁亭)과 눈 앞에 펼쳐진 섬진강의 승경이 큰 몫을 했을 것 같습니다.
6. 수월정(水月亭)
탐방일자: 2020년6월25일
탐방지 : 전남광양시다압면도사리 소재 수월정
섬진강을 따라 걷는 길에 마지막으로 들른 강변의 정자는 전남 광양의 누정인 수월정(水月亭)입니다.
15회에 걸친 섬진강 따라 걷기의 마지막 구간은 광양시 다압면의 항동버스정류장에서 망덕포구까지로, 7시간여 내내 빗속을 걸었습니다. 구례구역에서 하차해 버스터미널까지는 택시로 이동해 간신히 화개장터로 가는 버스에 승차할 수 있었습니다. 하동행 버스로 갈아타 항동마을정류장에서 도착한 시각은 12시13분으로, 비가 줄기차게 내려 우산을 받쳐 들고 섬진강 따라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관동마을의 송정공원을 지나 꽤 긴 도사제방길을 따라 걸으며 비가 내리는 섬진강과 강 건너 백사장을 조망했습니다. 항동정류장을 출발한 지 약 2시간 후인 14시15분에 섬진강 우안의 언덕에 위치한 수월정에 도착했습니다.
여기 섬진강 언덕에 수월정을 지은 정설(鄭渫, 1542-미상)은 조선 시대 진경산수화의 화가로 유명한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고조부입니다. 수월정은 조선 선조 때 나주 목사를 지낸 정설(鄭渫)이 만년을 보내기 위해 1573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고 정자 앞 안내문은 적고 있습니다. 이 정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에 중도리, 초익공, 사모정, 모임지붕을 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정자 건물의 특색을 든다면 주변 지형과 바람의 영향을 적절히 고려하여 지붕 위에 기와를 깔고 용마루 중앙에 찰주(擦柱)를 설치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수월정에 올라 섬진강을 내려다보자 강의 한가운데에서 재첩을 채취하는 작은 배들이 몇 척 보였습니다. 봄에 왔다면 매화꽃이 날려 저 아래 강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많이 아쉬웠습니다. 비를 맞고 재첩을 잡는 어부들이 타고 있는 작은 어선을 바라보노라니, 겸제 정선을 불러 고즈넉한 저 풍경을 그려내도록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수월정의 주변 풍광에 감탄한 것은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송강 정철은 그의 기문(記文) ⌜수월정기(水月亭記)⌟에서 수월정의 빼어남을 아래와 같이 노래했습니다.
浮光躍金 달빛이 비추니 금빛이 출렁이며
靜影沈璧 그림자는 잠겨서 둥근 옥과 같으니
而水得月而益清 물은 달을 얻어 더욱 맑고
月得 水而益白 달은 물을 얻어 더욱 희니
直與侯之胸次 곧 후(정설)의 가슴이
瑩澈同符焉 맑고 투명한 것과 같다.
수월정을 출발해 섬진강 우안의 강가 길을 따라 걸으며 맑게 갠 날 수월정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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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제가 알고 있는 누정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본 대다수의 정자들은 울타리나 출입문이 따로 없어 저도 가끔 쉬어가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조선 시대에 지어진 정자들이 양반이 아닌 양인들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신분의 차별이 분명했던 조선 시대에는 양반들이 즐겨 시가를 지어 부르는 누정에 상민들은 가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양인들이 즐겨 찾는 정자로는 짚이나 새 따위로 지붕을 인 허름한 모정(茅亭)이 따로 있었었습니다. 이런 정자들은 울타리나 대문이 없어 누구라도 쉽게 가서 쉴 수 있었습니다.
누정에 대한 이런 제 생각이 깨진 것은 섬진강 강변에 자리한 누정들을 가보고 나서였습니다. 섬진강을 따라 걸으며 알게 된 것은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지은 누정인 구암정, 어은정은 담을 쌓고 대문을 만들어 출입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고, 일제시대에 건립된 월파정은 계단을 막아놓아 2층 누대로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울타리와 출입문이 없는 정자는 곡성군의 횡탄정과 광양의 수월정이며, 해방 후에 창건된 모운정은 울타리가 없어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누정을 찾아와 쉬아가는 과객들은 거의 없는데 개방을 하면 보전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울타리를 치고 대문을 만들어 잠가 놓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관광을 목적으로 개방한 몇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원도 문을 잠가 놓았는데, 정자도 같은 이유로 그리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과연 그런 것인지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탐방사진>
1)모운정
2)월파정
3)구암정
4)어은정
5)횡탄정
6)수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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