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일자: 2021년 1월27일 - 4월1일
탐방지 : 전라남도 담양군, 나주시, 무안군 소재 5개 누정
-담양군: 송강정
-나주시: 기오정, 영모정, 금강정
-무안군: 식영정
동행 : 나 홀로
영산강을 따라 걷는 길에 이 강의 강변에 자리한 누정들을 탐승했습니다. 영산강(榮山江)은 전남 담양의 용추봉에서 발원해 영산강 하구언(河口堰)에서 남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을 이릅니다. 영산강은 남한에서 낙동강, 한강, 금강, 섬진강 다음으로 긴 강이지만 강 길이는 150Km에 불과해 섬진강의 반이 조금 넘는 비교적 짧은 강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영산강을 주목하는 것은 이 강이 ‘남도의 젖줄’로 기능해왔고, 지금도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서입니다. 이 ‘남도의 젖줄’이 영산강(榮山江)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밝힌 바와 같이 고려 말 외적들의 노략질을 피해 나주의 이 강가에 집단으로 피란해온 흑산도 사람들이 이곳을 그들 고향의 이름을 따 영산현(榮山縣)이라 불렀기 때문이라 합니다. 조진상님은 『강과 한국인의 삶』에 실린 글 「영산강」에서 구한말 개항과 더불어 영산포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강의 이름도 영산강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영산강이 우리나라의 여타 강과 다른 점은 감입곡류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강의 대부분이 산속이 아닌 평야를 흐르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대형 댐이 넓은 평야가 시작되는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댐의 물 상당량이 농업용수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강마다 발원지에서 댐까지 길이가 다른 것은 평야가 그 강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평야가 있어야 농작물의 재배가 가능해져 평야의 유무는 마을이 들어서는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정자도 이와 다르지 않아 정자가 세워지려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가 가까이 있는 취락이 있어야 합니다.
영산강 강가에 소재한 정자들 대부분이 영산강이 흐르는 넓은 평야에서 가까이 접해 있습니다. 송강정은 담양 벌에, 기오정과 영강모정 및 금강정은 나주벌에, 식영정은 무안벌에 인접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대분분의 큰 마을들이 평야를 끼고 흐르는 강가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임을 영산강을 따라 걸으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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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송강정(松江亭)
탐방일자: 2021년1월27일(수)
탐방지 :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동행 : 나 홀로
영산강을 따라 걷는 길에 전남담양군의 송강정을 탐방했습니다. 담양교에서 시작한 섬진강 따라 걷기의 3구간 탐방은 봉산면삼지리의 영산강/증암천의 합수점에서 종료하고, 고산면송강정로에 자리한 송강정으로 향했습니다. 삼지리의 합수점에서 증암천 남쪽의 제방 길을 따라 동진하다가 양지삼거리로 옮겼습니다. 양지삼거리에서 29번 도로를 따라 남진해 송강정주차장에 도착하자 바로 앞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송강정이 보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서 단숨에 돌계단을 올라가 송강정에 이르렀습니다.
전라남도기념물1호로 지정된 송강정(松江亭)은 「무등산권유네스코지정세계지질공원 담양군역사문화명소」로 소개되었다고 정자 앞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팔작지붕에 여닫이문을 해달은 송강정의 또 다른 이름은 죽록정(竹綠亭)으로, 이 정자에는 이름이 다른 두 개의 현판과 여러 개의 한문 편액이 걸려 있었습니다. 담양안내지도에 송강정은 “1584년(선조17) 송강 정철이 대사헌을 지내다 당쟁으로 물러난 후 창평으로 내려와 4년가량 머물면서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긴 곳”으로 송강가사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정자 앞 안내문에 실린 아래 글은 송강정을 잘 소개하고 있어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조선 선조 때인 1584년 대사헌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은 동인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 청평으로 내려와 죽록정(竹綠亭)이라는 초막에 은거했다. 그는 우의정이 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갈 때까지 이곳에서 4년간 머물면서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을 지었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1770년 세운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송강정(松江亭)이라 일컬었다. 정면에는 송강정, 측면에는 죽록정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 옆에는 1955년에 건립된 사미인곡(思美人曲) 시비(詩碑)가 서 있다.”
송강정의 주인공인 정철은 16세(1551년)에 담양의 창평으로 이주해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 년을 보냅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 · 김인후(金麟厚) · 송순(宋純) · 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웁니다. 25세(1560) 때 창평으로 다시 내려와 김성원을 위해 성산별곡을 지었고, 50세인 1585년에 또 내려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으니 과연 창평은 송강가사의 산실이라 하겠습니다.
정철이 탄핵을 받은 것은 1584년이고, 청평에 내려간 것은 다음 해인 1585년입니다. 1584년 절친한 지우인 율곡 이이와 사별한 정철은 대사헌으로 제수됩니다. 그해 12월 동인의 탄핵을 받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직을 유지합니다. 다음해 8월 양사의 논척을 받고 고양에 우거하다가 곧 창평으로 내려갑니다. 큰아들이 죽어 장사를 지내기 위해 청평에서 고양으로 이전한 것은 1589년의 일이니 창평에서 4년간 머무른 셈입니다.
청평에 머물면서 지은 가사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외에 성산별곡이 있습니다. 50세(1585)에 내려와 여기 죽녹정에 기거하면서 지은 가사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입니다. 성산별곡은 25세(1560)가 되어 정계에서 물러나 창평에 머무르면서 먼저 지었습니다. 이 가사는 성산(星山) 기슭에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린 것이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가사(歌辭)란 조선 초기에 나타난 시가와 산문 중간 형태의 문학을 이르는 것으로, 주로 4음보의 율문(律文)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대부는 물론 여성들도 지을 만큼 폭넓게 창작되고 향유된 가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저서 『서포만필』에서 “이 세편(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의 별곡은 천기(天機)가 스스로 발한 것을 담고 있되, 이속(夷俗)의 비리함은 없으니,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참 문장은 이 세 편뿐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김만중은 「사미인곡」이나 「관동별곡」은 여전히 한자어를 빌려 윤색한 것이어서 「속미인곡」에 못 미친다며 속미인곡을 으뜸으로 쳤습니다. 여기 송강정의 시비에는 보다 널리 알려진 사미인곡이 새겨져 있습니다.
송강 정철에게는 여기 담양의 청평이 마음의 고향이었을 것입니다. 태어난 고향은 한양이지만, 한양은 치열한 정쟁의 현장이었지 마음 붙이고 편히 쉴 만한 고향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양에서 물러나 산 곳은 청평이었지만, 정작 죽어서는 창평 땅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숱하게 우여곡절을 겪은 정철은 58세인 1593년 12월에 강화에서 불운하게 병사합니다. 이듬해인 1594년 봄 정철의 유해는 서울근교 고양으로 옮겨져 묻혔다가, 70여년이 지난 1665년 충북 진천으로 이장됩니다.
2. 기오정(寄傲亭)
탐방일자: 2021년3월5일(금)
탐방지 :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영산강을 따라 걷는 길에 전남 나주시의 정자 기오정을 들렀습니다. 나주 역에서 하차해 이번 걷기의 출발점인 나주대교까지는 버스로 이동했습니다. 나주대교를 건너 영산강 좌안의 제방길을 따라 영산포의 영산교에 이르기까지 2시간 반가량 걸었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둔치체육공원 위의 제방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미수 허목을 배향하는 미천서원을 지나 13시 정각 오른쪽으로 다시로 가는 길이 갈리는 구진교차로를 지났습니다. 회진교를 건너 10분여 진행하다 길 건너 언덕 위의 기오정(寄傲亭)에 다다랐습니다.
기오정은 1669년(현종 10) 반남박씨의 시조 묘가 있는 나주 회진에 시거(始居)한 박세해(朴世楷, 1615-1698)가 건립한 정자입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기오정은 서쪽 2칸은 마루이며 동쪽 2칸은 방과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81년에 마지막 세 번째로 중수된 이 정자 안에는 2개의 중수기문과 9개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현판은 이광사의 친필로 전해지며 정자 이름은 중국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가오정이 건립된 곳은 영산강 우안의 높직한 언덕으로 주변 경관을 완상하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따뜻한 햇볕을 쪼이며 바로 아래로 흐르는 강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바라보노라니 봄이 성큼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 정자의 주인공인 박세해는 4살 때 모친을 여의고, 23세 때 중병을 얻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에 박세해는 세거지인 양주를 떠나 요양 차 이곳 나주 회진으로 이주하여 정자를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고 합니다. 박세해의 인물됨이 어떠했는 가는 1693년의 회혼연 때 최석정, 이건명, 재종제인 박세채, 삼종제인 박세당 등 쟁쟁한 문신들이 시를 지어 축하해준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자가 문인 교류와 후학 강학의 장소로 쓰일 수 있었던 것도 박세해의 넉넉한 인품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기오정을 둘러보고 옆 자리의 영모정으로 이동했습니다.
3. 영모정(永慕亭)
탐방일자: 2021년3월5일(금)
탐방지 :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기오정을 둘러보고 자리를 옮긴 곳은 기오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영모정입니다.
영모정은 1520년(중종 15)에 조선 전기의 문신인 임붕(林鵬, 1486~1553)이 창건한 정자입니다. 임붕은 호가 귀래당(歸來堂)으로 별시 문과에 급제해 삼사를 두루 거쳤으며, 벼슬은 승지와 병사로 끝낸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를 구출하고자 애를 많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모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집으로, 바로 전에 둘러본 기오정(寄傲亭)보다 한 세기 반이나 앞서 창건된 오래된 정자입니다. 처음에는 건립자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歸來亭)으로 불렀다가, 1555년(명종 10) 후손이 개수하면서 영모정(永慕亭)으로 개칭했다고 합니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에 중창한 것으로 고색창연함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바로 앞으로 영산강이 내려다보이고 주위에 4백 년을 넘긴 팽나무와 괴목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이 정자의 주변 경관 또한 바로 옆 기오정에 못지않다 싶었습니다.
이 정자 아래에 창립자 임붕의 유허비인 ‘歸來亭羅州林公鵬遺墟碑(귀래정나주임공붕유허비)’와 조선전기 명문장가인 백호(白湖) 임제를 기리는 ‘白湖林悌先生紀念碑(백호임제선생기념비)’, 그리고 백호임제선생시비(白湖林悌先生詩碑)가 함께 세워졌습니다.
4. 금강정(錦岡亭)
탐방일자: 2021년3월18일(목)
탐방지 : 전남 나주시 공산면 신곡리
영산강을 따라 걷는 길에 나주시의 정자 금강정을 들렀습니다. 나주역에서 하차해 나주읍성과 금성관을 돌아본 후 버스를 타고 죽산보로 이동했습니다. 10시45분 죽산보를 출발해 영산강 좌안의 왕곡제 제방길을 따라 걸어 산 위의 나주영상테마파크가 가깝게 보이는 다야선착장에 이르자 강물을 가르고 쾌속으로 운항하는 작은 배가 눈에 띄었습니다. 33만평 규모의 드넓은 다야뜰생태공원을 꽉 채운 갈대밭을 지나 강 건너로 석관정(石串亭)이 잘 보이는 금강정에 이르렀습니다.
금강정은 광산김씨(光山金氏)인 봉곡(蓬谷) 김시중(金時中)의 아들 김상수(金相洙)가 19세기 경에 부친의 노년 휴식을 위하여 영산강 좌안에 세운 정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산강 죄안의 야산 초입에 자리하고 있어 계단을 걸어 올라가 만난 이 정자는 단층 팔작지붕의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칭형구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금강정에 오르자 안내문에 소개된 대로 함평(咸平) 이민선(李敏璿)의 기문(記文)과 평택(平澤) 임철주(林鐵周)의 상량문(上樑文). 그리고 14수의 원영시가 실린 편액들이 보였습니다.
놓친 고기가 커 보인다고 강 건너편에 있어 가보지 못한 석관정이 금강정보다 훨씬 풍광이 뛰어나 보였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안에 세워진 두 정자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석관정은 조선시대 무인이었던 함평 이씨 석관(石串) 이진충이 퇴임 후 1530년에 세운 정자입니다. 이 정자는 고막원천이 합수되는 영산강 우안(右岸)의 절벽 위에 자리해 풍광이 빼어나고, 배들이 돌아와 정박할 수 있는 ‘석관귀범(石串歸帆)’의 나루터가 있어 영산강 제3경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정자와 인접한 이별바위는 전쟁 중 소집된 남편이나 연인을 따라온 여인네들이 합류점의 넓어진 강을 건너지 못하고 이별하거나 강물로 투신했다고 합니다.
금강정에서 내려가 들어선 공산제 제방길을 걸으며 동강교로 향했습니다.
5. 식영정((息營亭)
탐방일자: 2021년4월1일(목)
탐방지 :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영산강을 따라 걷는 길에 전남 무안의 누정인 식영정 탐승했습니다. 무안역에서 하차해 이번 걷기의 출발점인 석진천교까지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석진천이 영산강과 합류되는 합수점 위에 놓인 석진천교를 건너 차도를 따라 남진해 이산터널을 지나자 황토랑팬션의 날렵한 외관이 눈을 끌었습니다. 항토랑팬션을 지나 한참 후에 도착한 늘러지교차로에서 825번 도로를 따라 걸어 이산1교차로에 이르렀습니다. 이산1교차로를 막 지나 배뫼당촌의 표지석이 서 있는 왼쪽 길로 접어들어 찾아간 곳이 바로 식영정(息營亭)입니다.
식영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한호(閒好) 임연(林堜, 1589-1648)이 1630년에 지은 정자입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이 얹힌 식영정은 1983년과 2004년에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중앙에 들인 방과 이를 둘러싼 마루로 구성되어 있어 정자 안에서도 정면으로 펼쳐진 영산강 풍경과 멀리 들판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연분홍의 복숭아꽃과 진적색의 동백꽃이 만발한 데다 여러 그루의 팽나무와 수조나무로 500년 이상 된 팽나무와 수조나무들이 수호신이 되어 이 정자를 지켜주는 듯 했습니다.
주변 경관이 이러하니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28명의 묵객들이 지은 시(詩)만도 92편이라 합니다. 이 시들은 언덕아래 영산강이 흐르고 강 건너로 꽤 넓은 갈대밭이 펼쳐진 것을 바라본 묵객들이 절로 시흥을 느껴 자연스럽게 읊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문적인 측면만 본다면 식영정은 과연 영산강 유역의 제1정자로 모자람이 없다고 봅니다. 정자 아래 ‘소망의 숲’ 가까이에 작은 배 두 척이 정박해 있고 소설가 문순태 님의 「타오르는 강」에서 일부를 옮겨 적은 큰 비석의 다른 한 면에는 “영산강 제2경 몽탄노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몽탄노적(夢灘蘆笛)’이 몽탄의 갈대피리를 일컫는 것이라면 강 건너 갈대밭이 노적의 적지가 아닌가 합니다.
이 정자를 지은 한호 임연은 1613년 증광문과에 합격해 좌우승지를 거쳐 남원부사를 역임했습니다.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와 어찌 다르랴” 면서 고뇌하던 임연은 끝내 관직을 버리고 영산강을 선유하다가 1630년 가을에 이곳을 찾아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임연은 국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을 지키는 일을 맡아 하다가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여기 식영정에서 풍류를 즐기다 1648년에 여생을 마쳤습니다.
몽탄면의 늘어지교차로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떨어진 늘어지마을의 커다란 한옥이 눈에 띄어 사진 몇 컷을 찍어왔는데, 사진 속의 한옥 바로 뒤 야산에 최부(崔溥, 1454-1504)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뒤적이다 알았습니다.
최부는 1487년 제주추쇄경차관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정월 부친상을 듣고 도해하려고 제주를 출발합니다. 14일간 표류 끝에 중국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계의 우두외양에 표착해 우여곡절 끝에 그해 7월 조선에 귀국했습니다. 최부는 성종임금의 명을 받고 바다에서의 표류생활과 중국 땅에 표착한 후 조선으로 귀국하기까지 겪었던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표해록』을 저술해 이 땅에 해양문학을 연 문인이기도 합니다. 이 정자가 더 일찍 세워졌다면 최부도 식영정을 둘러 시한 수 남겼음직한데 최부가 사망한 후 식영정이 세워져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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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강에 물을 대주는 저수고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머금고 있는 산은 계속해서 계곡에 물을 대주고, 이 물을 받은 계곡은 고도가 낮은 지역으로 흘러가면서 지천의 물을 받아 세를 불려 나갑니다. 졸졸 흐르는 골짜기가 수량이 늘어 하천이 되고 하천이 지천의 물을 받아 강으로 발전합니다.
강이 다른 강과 물을 섞을 수 없는 것은 산줄기가 가로막아 두 강이 서로 만날 수 없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영산강과 섬진강이 섞이지 않는 것은 호남정맥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고, 섬진강과 낙동강이 섞이지 않는 것은 백두대간이 두 강을 떼어 놓기 때문이며, 금강과 한강이 만나지 못하는 것은 그 사이에 한남정맥이 가로 놓여 있어서입니다.
산줄기가 가로막은 것은 강만이 아닙니다. 조선시대에는 어떤 강의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강의 유역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려면 두 강을 가로막고 있는 산줄기를 넘어야 가능했습니다. 교통이 발달한 요즘에는 문제돨 것이 전혀 없지만, 조선 시대에는 몸소 걸어서 높은 산을 넘어야 가능해 엄청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렇다 할만한 교통수단이 갖춰지지 못한 조선 시대에 유역이 다른 주민들이 유역을 넘어 소통하는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영산강 강변의 정자에 영남 유림의 시(詩)가 편액으로 걸려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고, 낙동강 강가의 정자에 호남의 유학자들 기(記)가 편액으로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 강 단위의 내륙 수운이 발전하고 각각의 강을 연결해주는 근해 해운이 발달했다면 굳이 산을 넘지 않아도 물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조선은 근해 해운를 불허해 물적 소통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조선 사회가 개방적이지 못하고 폐쇄적이었던 것에는 고산준령을 넘는 교통수단이 달리 없는데도 근해 운수를 막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래저래 영남과 호남의 인적, 물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는 형편이어서 영산강 강변의 정자에서 영남 유림들의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이번에 확인했습니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어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오늘의 우리나라가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탐방사진>
1.송강정
2.기오정
3. 영모정
4.금강정
5. 식영정
'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 > 국내명소 탐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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