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54. 서울명소 탐방기8(국립서울현충원)

시인마뇽 2025. 1. 14. 11:43

탐방일자: 2024928()

탐방지 : 서울시동작구 소재 국립서울현충원

동행     : 나 홀로

 

  현충일(顯忠日, 66)은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군장병들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정한 법정기념일입니다. 이날이 오면 오전10시를 기해 전국적으로 사이렌이 울리고, 온 국민은 하던 일을 멈추고 묵념을 하면서 순국선열의 영령을 추모합니다.

 

  현충일 날 TV에 가장 많이 방영되는 곳은 단연 서울의 동작동에 자리한 국립서울현충원입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가장 많은 순국선렬들의 유해가 안장된 국립묘지여서 참배하러 찾아오는 유족들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TV에 현충원이 나올 적마다 부끄러웠던 것은 이제껏 단 한 번도 현충원을 다녀오지 않아서였습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작동의 국립서울현충원을 다녀오지 않은 것은 오로지 차일피일 미루는 나쁜 습성 때문이어서, 달리 변명 할 여지가 없습니다.

 

  어제(2024. 9. 28일)는 큰맘 먹고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가 참배했습니다. 서울시내에서 친구들과 만나 점심식사를 함께 한 후 산본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현충원이 생각나 동작역에서 하차했습니다.  벼르고 별러온 국립서울현충원을 늦게라도 찾아가 참배해 그동안 순국선렬분들에 대한 죄송함을 얼마간 덜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국립현충원이 서울과 대전 등 두 곳에 있습니다. 전체 면적은 대전의 유성에 자리한 국립대전현충원이 더 넓지만, 설치연도는 서울의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이 훨씬 빨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충원은 마땅히 국립서울현충원이라 하겠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국립서울현충원은 1953년 국군묘지로 시작하여 1965년 국립묘지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05년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1953년 국군묘지의 부지로 선정된 여기 국립서울현충원은 1954년에 착공된 후 3년에 걸친 정지공사로 약238,017의 묘역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후 연차적으로 확장되어 1968년말 기준으로 광장 99,174, 임야 912,400, 공원행정지역 178,513이 조성되어 전체 면적은 약142(434천평)에 달합니다. 1955년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됨에 따라,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무원이 안장되기 시작했고, 뒤이어 순국선열 및 국가 유공자 안장이 이루어졌으며, 1965년 국립묘지로 바뀌면서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 예비군도 안장되었습니다. 2005년 국립묘지의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고 안장대상자가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로 확대됨에 따라 여기 국립서울현충원이 확실하게 겨레의 성역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이 준공된 것은 1985년입니다. 서울의 동작동에 설치된 국립묘지의 안장 능력이 한계에 이르게 되자, 정부는 1976년 대전국립묘지를 설치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의 전체 면적은 약 322(974천평)으로 국립서울현충원보다 배 이상 넓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순국선렬들의 유해가 안장되기 시작한 것은 대전국립묘지로 불리던 시절인 1982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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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호선을 타고 가다 동작역에서 하차해 8번출구로 나가 몇 분 걷지 않아 국립서울현충원 정문에 다다르자, 이렇게 가까운 데를 이제야 뒤늦게 방문한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정문을 지나 현충문을 보자 저도 모르게 숙연해졌습니다. 현충탑 앞에서 잠시 멈춰 묵념을 올린 위패봉안소를 돌아보고 오른쪽 묘역으로 이동했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의 묘역은 장방형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문에서 남서쪽 서달산 기슭에 자리한 박정희대통령묘역을 잇는 길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오른쪽의 서측 묘역에는 대통령묘역, 장병묘역, 국가유공자묘역, 장군묘역, 경찰관 묘역 등 대부분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고, 왼쪽의 동측묘역에는 또 다른 장병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묘역들을 둘러싼 산이 서달산이며, 가장 높은 곳에 들어선 묘역이 박정희대통령 묘역입니다. 국립서울현충원이 길지라는 것은 문와한인 저도 한번 보고 알았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은 앞이 탁 트인 북쪽 바로 앞으로 한강이 흐르고, 뒤쪽으로는 나지막한 서달산이 자리해 묘역을 감싸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들른 장병묘역에는 수많은 묘비들이 열을 맞추어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군별, 계급과 이름이 새겨진 묘비와 그 옆 석병(石屛)에 꽃힌 조화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장병묘역에는 일반병과 하사관의 유해가 묻혀 있는데, 봉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병묘역이 장군묘역과 다른 점은 봉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장병묘역은 동쪽 묘역에 한 곳이 더 있습니다.

 

  경찰관묘역은 장병묘역 바로 위에 있었습니다. 경찰관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것은 여기 동작동 묘지가 국군묘지에서 국립묘지로 확장되면서부터였습니다. 계급과 성명이 새겨진 묘비와 화병에 꽃이 꽂힌 경찰관의 묘지는 장병의 묘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위쪽 치안감 한 분의 묘에는 봉분이 있고 화병도 3개씩이나 있어 일반 경찰들의 묘와 대비되었습니다.

 

  정문을 출발해 시계반대방향으로 진행하다가 길가에 자리한 경찰충혼탑을 들렀습니다. 이 탑은 1965년 국립묘지의 경찰관 묘역에 안장된 820여 위()의 경찰관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추모하기 위해 부평 경찰전문대학교 교정에 건립된 것을 1967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운 후 1979년에 중건했다고 합니다. 여수 순천 사건 및 구례 토벌작전 등 한국전쟁을 전후해 전사한 경찰관들의 값진 희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이 탑의 중앙에는 박정희대통령이 휘호한 경찰충혼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경찰충혼탑을 지나 찾아간 묘역은 국가유공자 제2묘역입니다. 이 묘역은 광복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으며 건국 후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김홍일 장군, 일제강점기에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최초의 이학박사로 한국과학기술 발전에 큰 공을 세웠던 이태규 박사,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 등 14위를 모신 곳입니다. 박은식선생과 양기탁선생의 묘를 살펴본 후 대한독립군무명용사위령탑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위령탑을 돌아보며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이 된 대한독립군무명용사들께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이번에 들르지 못한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는 아웅산 사건 때 희생된 서석준부총리 등 17위와 진의종 총리, 장택상 총리, 이은상 시인등이 묻혀 있으며, 3묘역에는 박태준총리, 최규식경무관, 남덕우 총리등이 안장되어 있는 것으로 안내책자에 소개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들른 장군제2묘역에는 초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용준 육군 중장, 1976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임충식 육군 대장, 6.25 전쟁 때 9사단장으로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종오 육군 대장, 해군 창설의 주역이면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손원일 해군 중장, 6·25전쟁 중인 1952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신태영 육군중장, 12대 합참의장을 역임한 심흥선 육군 대장 등 6위가 안장되었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이 우리나라 최고의 국립묘지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먼저 세워진 국립묘지라는 역사성과 다른 국립묘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통령들의 묘지가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현충원에 유해가 안장된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대통령, 박정희대통령, 김영삼대통령과 김대중대통령 등 4분입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대통령묘역은 장군제2묘역에서 멀지 않은 김영삼대통령의 묘역입니다. 가파른 진입로를 지나 다다른 김영삼대통령 묘역은 시골 부호들의 묘지보다 커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의 묘지로는 초라해 보일 정도로 봉분이 작은 것은 국립묘지의 규정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봉분은 하나인 것으로 보아 김영삼대통령과 손명순여사는 합장된 것 같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묘역 안내문에 쓰인 대로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해내고자 하는 신념 하나로 일생을 오직 대도무문의 삶을 살다가 서거한 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다만 임기 말 미증유의 금융위기를 불러온 것은 대통령의 실정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찾아간 대통령묘지는 국립서울현충원묘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박정희대통령묘역입니다. 재임 중에 영부인과 대통령이 함께 돌아가신 유일한 대통령인 박정희대통령의 묘는 다른 대통령의 묘와 달리 두 개의 봉분이 자리하고 있고, 묘역도 가장 넓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빈곤을 추방해 오늘처럼 잘살 수 있게 만들어준 박대통령의 업적을 생각하면 봉분이 두 개인 것을 가지고 과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차에 걸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추진으로 산업입국을 다졌고, 근면 · 자조 · 협동을 기본 정신으로 한 새마을운동을 전개해 가난을 극복해 국민적 자신감을 일깨운 덕분에 근대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하고, 대한민국 선진화의 기반을 구축한 최고의 지도자가 바로 박정희대통령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하에서 편히 쉬고 있을 박대통령의 묘지가 빼어난 또 하나는 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살아생전에 이룩한 한강의 기적이 오늘에 재현되기를 간절히 기다리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정희대통령묘역에서 정문쪽으로 내려가면서 김대중대통령묘역을 들렀습니다. 칠엽수길을 지나 다다른 김대중대통령묘역은 김영삼대통령묘역과 같이 봉분이 하나로 규모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굳이 다른 점을 들라면 김대중대통령 묘역은 여러 비에 다양한 글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간결체로 말씀한 김영삼대통령과 나는 내 일생이 고난에 한 일생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걸코 불행한 일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만연체로 말씀한 김대중대통령의 차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김대중대통령은 온갖 정치적 역경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이 땅에 정착시킨 분입니다. 취임 후 외환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것과 분단 55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한반도평화 정착에 기여한 것은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더욱 빛났습니다. 다만 망해가는 독재국가 북한을 대폭적으로 지원해 오늘날 우리나라를 위협하는 핵무기개발에 도움을 준 것은 두고두고  시비가 이어질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른 이승만대통령 묘역은 건국대통령의 묘역으로는 너무 초라해 보였습니다. 현충원에 묻힌 4분의 대통령은 모두 다 이 나라 발전에 헌신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분들입니다. 제가 이승만대통령을 더욱 존경하는 이유는 이 땅에 자유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을 건국해 물려주었기 때문입니다.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준동하는 혼란한 정국에서 자유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는 제 나름 해방전후사를 열심히 공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게 10위권으로 도약할 수 있는 데는 이승만대통령이 우리나라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자유민주주의국가로 건립한 덕분이라는 것이 저의 확고한 소신입니다. 6 ᐧ 25전쟁 후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이야말로 신의 한 수로, 이 조약체결 덕분에 우리나라가 분단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대통령은 외국인과 결혼한 유일한 대통령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도나리 영부인도 이승만대통령과 함께 묻혀 있습니다.

 

  네 분의 대통령묘지를 모두 돌아보는 것으로써 국립서울현충원의 참배를 마쳤습니다. 이번에 못 들른 묘역들은 다시 한 번 찾아가 돌아볼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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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국군묘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군()에서 돌아가신 큰형님께서 동작동의 국군묘지에 묻힐 뻔했던 1962년이었습니다. 큰형님께서는 1961년 동계훈련 중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다가 1962년 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국군묘지에 안장할 생각이었으나 여의치 못해 파주 선산에 모셨습니다.

 

  제대를 한 달가량 앞둔 큰형님은 기갑부대의 병장으로 동계훈련차 야외로 탱크를 몰고 훈련을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중상을 입었습니다. 군부대에서 짚차를 몰고 온 장교 한 분이 어머니를 큰형님이 입원하신 서울의 수도육군병원으로 모시고 가, 큰형님이 크게 다친 것을 알았습니다. 중학교 입학을 기다리고 있던 중 어머니를 따라 큰형님께 병문안을 간 것이 저로서는 최초의 상경이었습니다. 이듬해 큰형님은 부산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어머니도 따라가시어 큰형님을 보살피셨습니다.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도 보람없이 큰형님은 끝내 돌아가시어, 어머니는 아들 유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선산에 묻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때 생전에 자식을 잃는 참척의 슬픔이 얼마나 크고 고통스러운가를 생생히 보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형수님이 비보에 엄청 슬퍼하고 힘들어하시는 것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이내 큰형님의 죽음을 공상으로 처리해 형수님과 딸자식 셋을 군경유가족으로 등록하고 돌아가신 형님을 국군묘지에 안장하는 일을 추진하셨습니다. 이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은 부대장이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해 큰형님이 부상을 입은 것을 공상으로 처리하지 않고 형님의 과실로 처리해서였습니다. 어머니는 큰형님이 훈련 중 공상을 입어 돌아가신 것을 밝혀내고 요로에 진정해 뜻하신 바를 해내셨습니다. 덕분에 유가족인 형수님과 세 딸들은 군경유가족이 되어 국가로부터 지원과 혜택을 받아 넉넉지 못한 형편인데도 딸 셋 모두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군경유가족으로 등록된 후 국군묘지로에의 이장이 논해졌으나 부모님께서 반대해 큰형님께서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큰형수님과 함께 선산에서 편히 쉬고 계십니다.

 

  여기 현충원의 장병묘역에 묻힌 장병들의 죽음도 저의 집과 마찬가지로 가족들에게 크나큰 슬픔과 곤경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남은 유가족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은 경제지원입니다. 박정희대통령이 집권 후 우리나라는 비로소 국가유공자의 유가족을 제대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었으니 오늘의 보훈처인 원호청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만큼, 국가를 위해 희생된 분들의 유가족들을 위해 정부는 꼼꼼하게 챙겨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한 나라가 건국되고 지속되며 번영하는 데는 수많은 국민들의 희생이 따랐고 앞으로도 따를 것입니다. 살아남은 국민들이 국가유공자들의 가족을 보살피는데 힘써야 하는 것은 그리해야 번영된 이 나라에서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