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55. 양주명소 탐방기1(양주회암사지)

시인마뇽 2025. 2. 8. 12:57

탐방일자: 2024. 9. 3()

탐방지   : 경기도양주군 회암사지

동행      나 홀로

 

 

 

  어제는 예정에 없던  양주의 회암사지 (檜巖寺 址) 를 탐방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연천군의 중면행복센터에서 황산리마을회관까지 걸어 남한 땅의 임진강 따라 걷기를 끝마치는 것이었는데, 제가 따라 걷고자 하는 구간이 민통선 안에 있어 10분 남짓 걷고 중단했습니다. 군부대 초소에서 출입급지구역이어서 더 이상은 못 걸어간다며 길을 막아 허탕 치고 산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덕정역에서 하차해 양주회암사지를 다녀왔습니다.

 

  양주회암사는 고려말 조선초 최대의 왕실사찰이자 대표적인 선종사원이었습니다. 회암사의 창건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2세기부터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인도의 승려 지공(?~1363)의 말씀에 따라 왕사 나옹(1320~1376)14세기 말 262칸으로 중창한 이 절에 조선시대의 왕사 무학(1327~1405)이 머물렀고, 태조 이성계(1335~1408)가 자주 행차했으며,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 궁실(宮室)을 짓고 머무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절은 그 후에도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 등 왕실 인물들의 대대적인 후원으로 융성했었으나, 16세기 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에서 펴낸 안내전단 양주회암사지유적에 적혀 있습니다.

 

 

....................................................................................................................................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을 맞아 남한 땅 임진강의 마지막 구간을 마저 걸으려고 연천으로 향했습니다. 재작년 가을 연천군의 군남댐에서 중면행복센터까지 임진강을 따라 걸은 바가 있습니다. 이제 중면행복센터에서 황산리마을회관까지 걸으면 남한 땅 임진강 따라 걷기는 끝마칠 수 있겠다 싶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연천으로 향했습니다. 연천역에서 하차해 연천의 명소인 통수관을 둘러본 후 택시를 잡아타고 중면행복센터로 이동했습니다.

 

  중면행복센터를 출발해 차도를 따라 10여 분 걸어 군부대초소에 이르자, 초병들이 여기서부터 민통선 지역이어서 더 이상은 걸어갈 수 없다면서 길을 막았습니다. 버스 종점인 황산리마을회관까지는 차도를 따라 걸어갈 수 있지 않느냐고 묻자, 현지 주민이 아니면 통행이 안 된다고 해 별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기왕에 길을 나선 김에 임진강을 따라 걷는 대신 연천 시내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고 도로를 따라 9Km 남짓 걸어 연천역으로 되돌아갔습니다.

 

  1516분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앞에서 하차해 회암사지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연천역을 출발해 서울로 가는 길에 회암사지가 생각나 덕정역에서 하차하여, 택시로 양주회암사지까지 이동했습니다. 회암사지를 둘러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눈앞의 박물관을 들르지 않고 곧 바로 회암사지를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회암사지는  기단과 주춧돌만 남아 있어 융성했던 화엄사의 옛 모습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1376년 나옹이 회암사를 중창한 후 당시의 모습을 기록한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가 남아 있어 옛 회암사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박물관을 출발해 회암사로 이어지는 왼쪽 길로 들어섰습니다. 길가에 회암사지의 기억을 테마로 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196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10년 단위로 회암사지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일별했습니다. 양옆으로 많은 기()들이 나란히 서있는 넓은 길을 통과해 아직도 기세가 등등한 마지막 여름 더위를 피해 그늘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잠시 쉬어갔습니다. 예술공작소를 지나 잔디밭 광장으로 가는 길에 해맑게 웃고 있는 구절초(?)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서 새하얀 꽃송이들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초록색의 잔디밭 광장 앞에 이르자 잔디밭 너머로 제 14차 발굴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회암사지와 그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천보산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2008년 한북왕방지맥을 종주하는 길에 해발423m의 천보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이 산에서 난을 피한 조선의 한 임금께서 하늘 밑에 보배로운 산이라 하여 이름 지은 천보산을 오르는 길에  회암사약수터로 내려가는 길을 보고 저 아래 폐사지인 회암사지를 꼭 둘러보겠다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16년 만에 그때 마음 먹은 것을 이렇게 실행에 옮긴다 싶어지자 가슴뿌듯했습니다.

 

  여러 차례 발굴로 밝혀진 회암사지의 배치와 출토유물 등에 관해서는 회암사지 당간지주 앞의 안내판에 상세하게 적혀 있어, 그 전문을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양주회암사지는 천보산 남쪽의 완만한 경사면에 조성된 평지성 가람이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 가면서 계단식으로 조성하여 전체적으로 8개의 단지로 구성되며, 2~8단지 외곽으로 담장이 둘려져 있다. 1997년부터 2015년까지 12차에 걸쳐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건물지는 약 70개소 이상으로 그 중 약 35개소 이상에서 다양한 형태의 구들시설이 확인되었다. 구들의 구조 및 배치, 처리기법 등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는 최대의 온돌유적이며, 사역 외곽에서 별원지, 창고지 등도 확인되었다.

 

  각 건물군은 크게 네 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2~6단지의 중심축을 따라 중정식(中庭式)으로 배치된 종교적인 영역, 2~4단지 동서에 각각 밀집 배치된 생활 영역, 그리고 정청을 중심으로 한 7~8단지 일곽의 정치적인 영역을 이루고 있다. 각 건물 배치는 1~8단지 중심축선을 따라 고대 가람배치 형태를 따르면서도. 7~8단지의 건물들은 궁궐의 편전과 침전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배치한 점이 특징적이다. 특히 8단지 정청, · 서 방장의 배치는 객사의 건축 양식을 적용한 독특한 형태이다. 건물지 외에도 많은 유구들이 확인되는데, 특히 배수체계는 기능적인 면뿐만 아니라 조경적 측면에서도 매우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배수로가 지하와 지상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최종적으로 1단지 남쪽의 연못지로 모두 모이도록 설계되었다.

 

  출토유물로는 기와류, 도자기류, 금속류, 소조품류, 석제품류, 옥류 등 약10만여점 이상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 유물 가운데에는 궁궐에서나 사용하던 용·봉황무늬 기와. 청기와, 용두, 토수, 잡상 등의 기와류, 왕실 전용 자기를 생산하던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도자기류 등이 출토됨으로써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회암사의 높은 사격을 짐작할 수 있다. 양주 회암사지는 고려 말에서 조선전기 최대의 왕실사찰 이자 왕의 별궁역할을 했던 위상과 면모를 동시에 살필 수 있는 유적이다. ”

 

  회암사지가 시작되는 1단지에 이르자 바로 앞  당간지주와 오른 쪽 맨 위의; 8단지에 자리한 부도 (浮屠) 가 우뚝 서 있어 제 눈을 끌었습니다.  양주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된  회암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는 현 위치에서 좌측으로 15m 거리에 있는 담장 지대석 밑에 쓰러져 매몰되어 있던 것을 1981년에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당간지주는 2주가 세트를 이루어 하나로 구성되기 때문에 본래 2쌍으로 모두 4주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주는 아직 찾지 못해서인지 3주만 서 있었습니다. 당간사주를 사진 찍고 왼쪽으로 옮겨가 언덕길로 들어서자 철책이 설치된 벽돌 담에 군부대의 경고문이 부착되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진 촬영과 철책 훼손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한글과 영어로 병기된 것으로 보아 담 안의 부대는 미군부대인 것 같습니다.

 

  왼쪽 담장에 바짝 붙여 낸 언덕길을 올라 전망대에 이르자 발굴작업현장과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탑인 부도가 보다 가깝게 보였습니다. 미군 부대가 이 땅에 주둔하는 것이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것이라면, 발굴 요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발굴 작업을 하는 것은 조상의 빛난 얼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회암사지는 꽤 넓어 보였습니다. 저 넓은 터를 가득 채웠을 회암사의 융성했던 한창 때를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지금은 아래쪽의 당간지주와 위쪽의 부도만 보이지만, 혹시라도 회암사가 복원이 되면 서울근교 최대의 사찰로 자리매김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내친김에 회암사지가 끝나는 언덕 위에서 산 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 양주회암사를둘러보았습니다. ‘양주천하제일문(楊州天下第一門)’으로 명명된 일주문에는 천보산회암사(天寶山檜巖寺)’의 6글자가 쓰인  현판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양주회암사가 폐사된 후 건립되었을 회암사의 일주문을 지나 무학대사부도와 쌍사자석등을 둘러본 후  대웅전과 관음전, 그리고 삼성각을 둘러보았습니다.

 

  회암사를 둘러본 후 올라온 길로 되내려가 양주회암사지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2층 건물의 박물관에는 상설전시실, 문화체험실과 기획전시실, 영상실 등이 있는데, 그 핵심은 상설전시실에 전시된 유물들입니다. 1층의 상실전시실에는 청동금탁, 토수, 용두, 청기와, 무장형 잡상, 분청사기 향완, 백자 명 발 등이 전시되어 과거 회암사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고, 2층의 전시실에는 용문암막새, 천순경진명 수막새, 백자동자상, 화암사약사삼존도, 백자 명 발 등이 전시되어 조선 왕실이 회암사를 후원한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안내전단에 적혀 있는 것들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이 밖에 제 눈을 끈 것은 왕실행차 추정모형이었는데, 수원시가 화홍문화제 프로그램으로 재현하는 정조의 능행차보다는 조촐해 보였습니다. 

 

  16시23분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덕계역으로 옮겨 서울행 전철에 오르는 것으로써 하루 여정을 끝마쳤습니다.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이치가 이러할진 데 절 또한 다르지 않아 영원히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천년고찰로 알려진 오래된 절들도 이름은 옛 그대로이지만 사찰은 그동안 중창되고 개축되어 개창 당시의 모습이 온전히 보존된 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찰은 물론 이름조차 사라지고 절터만 남아 있는 전국의 폐사지(廢寺址)2020년말 현재 5,738곳이라 합니다. 2021721일자 법보신문의 칼럼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에 따르면, 이토록 많은 폐사지는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데 가장 많은 지역은 1,412곳의 경북이고, 두 번째로 많은 지역이 842곳의 충남이며, 가장 적은 지역은 13곳의 대전으로 밝혀졌습니다. 5,738곳의 폐사지 중에서 문화재청이 중요문화재로 지정한 사적(국가지정문화재)은 모두 40곳으로 경북이 14, 충남이 7곳 등입니다.

 

  제가 이제껏 둘러본 폐사지는 경주의 황룡사지, 감은사지, 분황사지와 부여의 정림사지, 익산의 미륵사지, 합천의 영암사지, 강화의 선원사지와 양주의 회암사지 등 모두 8곳입니다. 전국의 폐사지 중 절터가 가장 넓은 곳은 백제 때 창건된 익산미륵사지로, 그 면적이 무려 12,959m2(3,927천평)에 달합니다. 두 번째로 넓은 폐사지는 경주황룡사자이며 그 넓이는 390m2입니다. 세 번째로 넓은 폐사지는 양주회암사지로 그 넓이는 323m2입니다. 이번에 여말선초에 융성했던 회암사의 폐사지를 다녀옴으로써 규모 면에서 전국 1-3위를 점하는 대표적 폐사지는 모두 탐방한 셈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