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영아지마을입구-남지철교-창녕함안보
탐방일자: 2024. 112. 5일(목)
탐방코스: 영아지마을입구-낙동강남지개비리길-남지수변공원-남지체육공원-남지교
-강나루생태공원-낙동대교-밀포섬-창녕함안보
탐방시간: 10시20분-16시44분(6시간24분)
동행 : 나 홀로
경남 창녕 땅의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6 . 25전쟁 때 격전지였던 낙동강 전투의 역사적 현장을 지났습니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 ᐧ 25 전쟁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다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해 마지막 교두보인 낙동강교두보를 지켜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이란 낙동강을 따라 설정한 방어선으로 미(美) 8군사령관 워커(Walker) 장군이 지정한 최후의 방어선이라 하여 ‘워커 라인(Walker Line)’ 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낙동강 방어선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낙동강 교두보’ 또는 ‘부산교두보’ 라고 하는데, 이 교두보는 남쪽의 마산, 서쪽에서 북쪽으로 남지, 왜관, 낙정리를 거쳐 동으로 영덕으로 이어지는 방어선과 남해 및 동해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모양의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다고 온창일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민족 전쟁사』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상주를 지나서 제가 이제껏 낙동강을 따라 걸어온 길이 바로 서쪽의 낙동강 방어선이었다는 것은 이번에 확실히 알았습니다. 제가 걸은 낙동강 방어선이 한국전쟁을 수행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위 책 『한국민족 전쟁사』를 다시 읽어 확인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의 의미는 첫째 값비싼 희생 위에 확보한 최후의 저지선이었고, 둘째 한국군과 유엔군이 반격하는데 필요한 공간적 기반이 되었고, 셋째 연결된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됨으로써 북한군의 전술효용이 크게 떨어져 한국군과 유엔군이 최초로 전술교범상의 방어선을 가지게 되었으며, 넷째 강과 산이라는 자연장애물을 이용하여 천연적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다섯째 신속한 보급지원과 기동 예비대를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는 내선작전(內線作戰)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는 것 등입니다.
현풍에서 남강이 합류하는 남지까지의 낙동강은 하폭이 300-400m이고 수심이 2-4m로 굴곡이 심한 S자 모양으로 흐르고 있으며 하천길이가 60Km에 달합니다. 이 지역은 여러 곳에 돌출부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여 ‘낙동강 돌출부지역’이라 불렸습니다. 8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을 받은 북한군은 8월5일 낙동강 도하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낙동강돌출부의 전황이 악화되자 미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했습니다만, 북한군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미군은 8월18일에 이르러 낙동강돌출부의 북한군을 축출해 낙동강 돌출부에서의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창녕 ᐧ 영산 지역에서의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지난 남지에서 치러진 남지전투도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하기 위해 수행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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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터미널에서 하차해 이번 탐방의 출발점인 영아지마을 입구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택시기사분이 마분산 산자락에 낙동강 강변을 따라 영아지마을입구에서 남지수변공원으로 이어지는 ‘창녕남지 개비리’ 길이 나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어 이 길을 따라 걸었는데, 자전거길을 걸은 것보다 약 4Km를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창녕남지 개비리길은 용산마을에서 영아지마을까지 이르는 낙동강의 좌안에 나 있는 옛길로 그 길이가 2.7Km가량 됩니다. 개비리는 '개가 다닌 절벽 (비리)'또는 강가(개) 절벽(비리)에 난 길'을 뜻한다고 합니다. 소금과 젓갈을 등에 진 등짐장수와 인근 지역민들의 생활 길로 애용된 이 길은 조선 시대 고지도와 일제강점기 지형도에도 옛길의 경로가 기록되어 있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여기 개비리길은의 벼랑길에서 조망되는 낙동강의 경관과 소나무, 참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식생이 옛길과 어우러져 자연경관이 빼어나 명승지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개비리길 주변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전투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창녕 남지철교(국가등록문화유산) 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으로 2021년12월8일 국가지정유산 명승으로 지정되었다고 안내판은 전하고 있습니다.
오전 10시40분 영아지마을입구를 출발해 ‘창녕남지개비리길’로 들어섰습니다. 낙동강 좌안의 개비리길을 걸으며 3년전에 금강을 따라 걷느라 지났던 전북무주의 금강벼룻길이 생각났습니다. 금강 우안의 조항산 자락에 낸 1.5km의 농로를 손보아 낸 벼룻길에서 가장 기억나는 곳은 아래 쪽에 굴을 뚫어 길을 낸 각시바위였습니다. 여기 낙동강의 개비리 길은 금강의 벼룻굴처럼 굴을 뚫어 낸 곳이 없을 뿐더러 노면도 고르고 길이 비교적 넓은 편이어서 걷기에 훨씬 좋았습니다. 개비리길에서 인상적인 곳은 죽림쉼터였습니다. 영산강 상류에 자리한 전남 담양의 죽녹원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강변에 이토록 우거진 대나무 숲이 넓게 자리 잡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강변에 자리한 죽림쉼터, 곧게 뻗어 올라간 대나무 들이 빽빽이 들어선 죽림에 낸 산책로, 연리지와 돌탑, 금천교와 동천교 등의 나무 다리, 옹달샘 쉼터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1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습니다. 여름철에 이곳을 찾아왔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쌀쌀한 겨울철에 들러 청량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죽림쉼터보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강변에 나 있는 개비리길 그 자체였습니다. 낙엽들이 살짝 내려 앉은 개비리길에는 아직 단풍이 그대로 남아 있어 늦가을에 산길을 걷는 느낌이 짙게 들었습니다.. 1시간 25분을 걸어 도착한 용산마을의 개비리길 끝점을 지나 남지수변공원으로 내려섰습니다.
11시53분 남지수변억새전망대에 올라 경북의성군과 경남함안군을 경계 짓는 남강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합류점과 기강나루터데크를 사진찍었습니다. 11년 전인 2011년 3월에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습니다. 낙남정맥을 종주하는 길에 함안군의 가야읍을 들러 ‘도항리/말산리 고분군’을 둘러본 후 택시를 대절해 합강정으로 향했는데, 기사분의 실수로 정자는 가보지 못하고 강 건너 여기 제방에서 합수점과 정자 합수정을 바라만 보고. 가야읍으로 돌아갔는데, 그 길에 남강 강변의 ‘악양루’와 그 근처 ‘처녀뱃사공 노래비’를 찾아간 13년 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남강은 경남함양군서상면의 덕유산에서 발원해 진주를 거쳐 여기 전망대 앞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낙동강의 제1지류로 유로길이가 186Km에 달하는 꽤나 긴 강입니다. 남강과 인연을 맺고 있는 노래 중 제가 아는 것은 ‘진주난봉가’로도 불리는 ‘진주낭군가’와 ‘처녀뱃사공’ 등 두 곡입니다. 옛 여인들이 부르던 서사 민요의 하나인 ‘진주난봉가’는 대학 다닐 때 즐겨 부른 노래이고,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9년에 가수 황정자가 노래해 인기곡이 된 ‘처녀뱃사공’은 언제 배웠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처녀 뱃사공>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 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낙동강 강바람이 앞 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보내며
어머니 그 말씀에 수줍어 질 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제가 올라선 전망대 일대는 격전지로 이름난 곳입니다. 창녕남지 개비릿길에 땅을 내준 마분산(馬墳山)은 임진왜란(1592년) 때에 천강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마분산(馬墳山)에 토성을 쌓아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왜적을 맞아 신출귀몰하게 싸워 백전백승한 곳이라고 합니다. 곽재우 장군은 모든 것이 열세인 의병이 전면 전투로는 승산이 없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말에 벌통을 매달아 적진으로 돌격하게 하였으며, 벌떼의 공격을 받은 적군의 혼란을 틈탄 기습 공격으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장군은 적탄에 맞아 자신의 말이 사살되자 그 공을 높이는 뜻으로 토성 안 의병의 무덤 뒤에 말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로 인하여 이 산 이름을 '창진산(倉津山)'에서 '말 무덤 산(馬墳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6 ᐧ 25전쟁 때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기음강전투전적지가 바로 이 일대입니다. 1950년 8월31일 - 9월1일 중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발생한 바로 이곳에서, 미 육군 제2 보병사단 소속 M26 퍼싱 전차 지휘관인 어니스트 R. 코우마 상사는 주변 부대가 모두 퇴각한 상황에서 9시간 동안 퍼싱 전차 1대, 권총, 수류탄으로 무려 250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3개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해 낙동강을 건너려는 북한군을 저지하고 낙동강 제2방어선으로 복귀했습니다. 미국 의회는 그의 전공을 기리고자 명예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남지철교로 가는 길에 수변공원에 자리한 꽤 넓은 유채단지를 들렀습니다. 저는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유채가 꽃을 피울 수 있는 곳은 따뜻한 제주도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3년 전 영산강을 따라 걸으며 하천부지에 조성된 유채단지를 보고 제주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자랄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유채는 유럽이 원산지로 십자화과에 속하는 두해살이 풀입니다. 가을에 심어서 푸성귀가 귀한 엄동설한과 겨울을 넘긴 초봄채소로 가꾸어 겉절이, 김치나물무침, 전, 유채비빔밥을등으로 만들어 먹었으며, 4월 초순부터 샛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면 그 향기를 쫓아 동면에서 막 깨어난 벌들이 모여들어 꿀을 모은다는 것은 안내판의 소개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13시47분 남지철교를 건너 함안 땅에 발을 들였습니다. 남지수변공원에서 제방으로 올라서 도로를 따라 걷다가 남지철교를 건넜습니다. 이 다리는 창녕과 함안 사이의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근대식 트러스구조의 철교로 교량의 길이는 391.4m입니다. 1933년에 개통해 1994년까지 60여 년간 이용되다가 새로운 다리가 건설되면서 지금은 인도교로 쓰이고 있습니다. 남지교를 건너 '아라가야 냉면' 이라는 간판을 내걸은 음식점을 보자 먼 옛날 아라가야가 터잡은 함안 땅에 발을 들인 것이 실감됐습니다. 낙동강 우안에 자리한 가람 능가사를 둘러보았습니다. 이 절은 칠성각에 불교회화인 칠성탱을 모시고 있어 이름이 알려진 것으로 알고 잇는데,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남지교남단 삼거리를 거쳐 용미리터널을 지난서 낙동강 우안의 계내재 제방길로 올라섰습니다. 짧은 제방 길은 이내 끝났고 꽤 넓은 연꽃 못을 지나 다시 제방길로 올라섰습니다.
15시14분 낙동대교를 그 아래로 지났습니다. 낙동강 하구둑을 98.5Km 남겨 놓은 진동1제제방길로 올라 낙동강 따라 걷기를 이어갔습니다. 우리병원을 거쳐 남지대교를 밑으로 지나자 저만치 앞으로 낙동대교가 보였습니다. 강변을 따라 낸 길을 따라 걸어 함안군칠서정수장수원지를 지나 함안강나루 생태공원 앞에 도착했습니다. 피크닉 존(zone), 캠핑 존(zone), 스포츠 존(zone)과 관찰학습 존(zone) 등으로 구성된 생태공원에서 사람들이 북적대는 공간은 스포츠 존입니다. 스포츠 존의 야구장이나 축구장은 텅 비어 있는데 파크골프장은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것을 보면, 파크골프가 빠른 속도로 대중화되어가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닉동대교를 다리 아래로 지나 낙동강하구둑을 95km를 남겨 놓은 지점에서 제방길로 올라섰습니다. 파릇파릇한 풀들로 가득찬 넓은 초원을 바라보며 건넌 다리는 광려천 위에 놓인 소랑교로 이 다리 위에서 S자를 그리며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광려천의 그림같은 물흐름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16시44분 창녕함안보 다리를 건너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소랑교를 건너 덕촌 마을을 지난 지 한참 후 데크길로 들어섰습니다. 오후 4시가 지나자 찬바람이 세게 불어 기온이 급하게 떨어지면서 땀이 식자 금새 등 뒤가 서늘해졌습니다. 길가에 방치된 슬레이트 지붕의 폐가를 보면서 어렸을 때 제가 살던 시골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싶었습니다. 길쭉해 보이는 밀포섬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창녕함안보 다리를 건너면서 알았습니다. 측면에서 보았을때는 길쭉해 보였는데 정면에서 보자 둥그런 타원처럼 보였습니다. 같은 사물이나 사건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해석이나 평가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크 길을 걸어 다다른 창녕함안보 다리를 건너 다시 창녕 땅으로 들어섰습니다. 아침에 탔던 택시를 불러 남지읍으로 이동해 시외버스정류장 인근의 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창녕군에서 창녕 다음으로 큰 도시가 여기 남지라고 하는데 해가 떨어지자 영업을 하는 점포들이 별로 없어 거리가 어두웠습니다. 인근 편의점을 둘러 아침 6시에 문을 연다는 것을 확인하고 저녁을 사든 후 모텔로 돌아가 이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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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하여 창녕군에서 치러진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됐는가는 남지수변공원의 한 안내판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어 여기에 옮겨 적습니다.
“마분산(馬境山)과 남지 개비리길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남지철교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곳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2개월도 못 되어 낙등강 북쪽이 모두 점령당하여 정부는 서울에서 대전 그리고 대구로 다시 부산으로 옮겨 국운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급한 상황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구축하여 창녕과 남지지역 방어를 맡은 미 제24사단은 낙동강 박진나루를 중심으로 적과 대치하였다. 당시 북한의 최정예부대인 제4사단은 8월 15일까지 '부산점령 이라는 시한부 임무수행 목표를 세우고 남지 박진 -영산-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직선 최단거리 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합천에 집결하였고, 8월 6일 야간을 틈타 박진나루를 도강하여 은밀히 기습 침투함으로써 강변을 방어하고 있던 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8월 11일에는 영산면까지 침공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군은 9월 15일까지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였다. 낙동강 남지 전투로 9월 8일에는 남지철교(국가등록문화재) 중앙부가 폭파되었으며 치열한 전투로 낙동강 물이 핏빛으로 붉게 들었다고 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어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특작전’ 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전사에 길이 빛날 격전지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남지 박진에는 ‘박진전쟁기념관’과 ‘박진지구전적비’ 가 세워져 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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