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32(창녕함안보-본포교-수산대교)

시인마뇽 2024. 12. 20. 11:17

탐방구간: 창녕함안보-본포교-수산대교

탐방일자: 2024. 12. 6()

탐방코스: 창녕함안보-노고지리공원-소우정-학포양수장-본포교-수산교

                -수산대교-수산버스정류소

탐방시간: 730-1423(6시간53)

 

 

 

  낙동강을 따라 걷느라 이번에 들른 밀양은 27년 전인 1997년 겨울에 처음 방문한 지방도시입니다. 그해 겨울 제가 단장을 맡았던 배드민턴 선수들이 추위를 피해 햇살이 따사로운 여기 밀양으로 내려와 전지훈련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느라 밀양을 방문하여 하룻밤을 묵은 것이 밀양과의 최초의 인연으로 그 후 등산 길에 몇 번 더 이 지방 도시를 다녀갔습니다.

 

  제가 밀양하면 먼저 햇살부터 떠올리는 것은 27년 전의 동계전지훈련 때의 따뜻한 햇살을 기억해서만은 아닙니다. 밀양(密陽)이 햇살의 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은 2007년에 개최된 칸 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이 출품한 영화밀양(Secret Sun- shine)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부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이청준의 원작 소설 벌레이야기의 탄탄한 줄거리와 주연 여배우 전도연의 절정에 오른 연기 덕분도 컸지만, 이창동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지방도시 밀양(密陽)을 은밀한 햇살, Secret Sunshine의 진원지로 널리 알린 것이 결정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영화  밀양(密陽, Secret Sunshine)을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용서받지 못할 중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참회한다면 누구라도 용서하시고 구원의 햇빛을 주신다는 점을 보았고, 이 구원의 햇빛이 은밀하게 내려졌을 때 배신감을 느끼는 한 어머니의 절망도 보았습니다. 또 평범하지만 진지하게 사는 한 젊은이의 무조건적 사랑이 신에게서 배신당했다며 절망하는 한 여인에 은밀한 구원의 빛이 되고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주었습니다. 은밀한 햇빛이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라면 그 빛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던 구원의 햇빛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영화는 고유명사인 지명  밀양을 은밀한 햇빛이 상징하는 구원임을 보여주어 보통명사로 다시 태어나게 했습니다. 이창동감독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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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같이 일어나 GS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 먹는 것으로써 조반(朝飯)을 대신한 것은 남지 시내에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식당이 없어서였습니다. 창녕군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이런 정도라면 다른 지방의 소도시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기에 저처럼 강을 따라 걷는 여행객들은 아침 식사를 하려면 소도시에서는 편의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모두가 경기가 안 풀려 내수가 진작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으로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오래 갈 것 같아 걱정됩니다.

 

  아침730분 창녕함안보를 출발했습니다. 남지에서 이곳까지는 전날 영지마을을 갈 때 탔던 기사님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창녕함안보를 출발해 바로 낙동강 우안의 노지공원으로 내려섰는데, 해가 뜬 지 얼마 안 되어 아침 공기가 냉랭했습니다. 요란스레 재잘거리는 새들의 합창소리를 듣노라니 십수 년 전에 대간과 정맥 길을 종주하면서 산속에서 들었던 새소리가 생각났습니다. 새소리는 크게 콜(call)과 송(song)로 분류한다고 합니다. 콜은 자기 구역을 방어하기 위해 내는 경계음이고 송은 문자 그대로 재잘거리는 노래라는데, 제가 이번에 들은 새소리는 저를 반겨 부르는 송이 분명한 것 같아 듣기에도 좋았습니다.

 

  강변도로를 따라 걸으며 이번에 처음 본 것은 하천-지하수 수질 측정망입니다. 안내판에 시설명이 창녕좌하 02(GN-CYG-E9-2806)’ 이고, 설치심도가 30m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땅 위의 굵은 관이 30m 깊이로 박혀 있고, 이 관으로 지하수를 뽑아 수질을 측정하며, 이러한 관이 필요한 곳곳에 박혀 있어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옛날 같으면 강가에 제방을 쌓고 양수장과 배수장을 설치해 강물의 양() 관리만 잘하면 되었지만, 강물을 식수로 쓰는 오늘날에는 양 관리 이상으로 질() 관리가 요구되기에 하천-지하수 수질 측정망같은 설비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920분 강변의 정자 소우정을 들렀습니다. 바늘 모양의 푸른 잎들이 적황색으로 변해버린 강변로의 가로수 메타세콰이어와 하천부지를 가득 채운 은백색의 갈대꽃이 대비되는 강변 길을 걸어 제방길이 끝나는 지점에 다다랐습니다. 강변의 누정 소우정은 출입문이 닫혀 있어 정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 밖에서 사진 찍어 왔는데, 가운데 대청마루가 있고 양 옆으로 방을 들인 조촐한 일자(一字) 건물로 보였습니다.

 

  누정 소우정(消憂亭)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소우헌(消憂軒) 이도일(李道一, 1581-1667) 선생의 유적입니다. 선생은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17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의병에 가담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장군을 도와 선공을 세웠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집 창고의 정곡 400석을 군량미로 수송하고, 의병을 모아 싸움터로 보냈습니다. 청국에 항복했다는 비보를 듣고 북벌책을 상소한 선생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로 특제(特除)되었고, 후에 수직(膏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습니다. 만년에 여기 임해진(臨海津) 강가에 소우정을 지어 산수와 더불어 소요자적(逍遙自適)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자전거전용도로가 소우정 앞에서 끝나 구불구불한 차도를 따라 걸어 오르면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조망했습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행복카페 앞에서 강변의 자전거길로 들어섰습니다. 자전거길은 1022번도로와 나란히 뻗어 나가는 데크 길로 바뀌었고, 이 길을 따라 낙동강휴게소와 학포양수장을 차례로 지나 학포수변생태공원으로 들어섰습니다.

 

  1121분 본포교를 건너 창원 땅에 발을 들였습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여기 낙동강에서 살고 있는 대표적인 동물로는 청둥오리, 왜가리, 수달, 멧비둘기, 재두루미 등이 있고 식물로는 물억새와 미나리 등이 있다고 합니다. 금강을 걸을 때는 하구둑 인근에서 겨울 철새 가창오리들이 강가를 새까맣게 덮고 있는 진풍경을 목도했는데, 낙동강을 따라 걸으면서는 아직 떼를 지어 모여 있는 철새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적한 학포수변생태공원길을 벗어나 학포마을 입구에서 차도로 올라선 것은 본포교를 건너기 위해서였습니다. 차들이 많이 지나 차도를 걷는 일에 신경이 많이 쓰였지만 이내 본포교 앞에 다다랐고, 이 다리를 건너 창원시의창구동읍본포리의 본포교 남단에 이르렀습니다. 본포교 남단에서 데크 길로 내려가 굴다리를 지났습니다. 조금 후 길전2제 제방길로 올라섰다가 얼마 걷지 않아 본포수변생태공원으로 내려가 자전거전용도로를 따라 동진했습니다.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참으로 부러운 것은 다른 강보다 엄청 넓은 수변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수변공원이 더 넓다 싶은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강 하구 쪽으로 삼각주가 발달하여 큰비가 내리면 강물이 범람하곤 했는데, 이러한 강물의 범람을 막고자 제방을 강에서 최대한으로 물려 쌓아 하천부지가 넓어졌다는 것입니다. 4대강 정비사업 때 하천부지를 수변생태공원으로 조성한 것 같은데, 과연 그때 조성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본포수변생태공원을 걷는 길에 강변으로 다가가 선착장을 보았습니다. 요트(?)로 보이는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자리가 본포나루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옥정교차로를 지나 길전제 제방길로 올라섰습니다. 왼쪽 아래 강변을 따라 소로가 나 있는데 출입을 금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아래에 대산 취수장이 있어서입니다. 자전거길 오른쪽의 낙동대로 건너 편의 붉은 색 벽돌의 양옥이 여러 채 눈에 띄었고,  원통형의 건물 몇 개가  연이어 자리하고 있는데,  카카오 맵에 건물이름이 나와 있지 않아 무슨 건물인지  더욱 궁금했습니다

 

  1343분 수산대교 남단에 이르렀습니다. 미상의 원통형 건물을 지나 수산교에 이르기까지 낙동강 우안의 강변 숲에 자주 눈길을 준 것은 이 숲이 여태껏 보아온 강변의 어떤 숲보다도 훨씬 우거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숲이 우거진 것은 사람들의 출입을 막은 때문으로, 그 덕분에 그 아래 대산취수장에서 보다 깨끗한 강물을 취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창원에서 밀양으로 넘어가는 수산교에서 1Km 남짓 더 걸어 수산대교에 도착해 32번째 낙동강 따라 걷기를 마치고 수산대교를 건너 수산리 버스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1423분 밀양시하남읍의 수산리버스정류장에 도착해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다리 건너 수산제방길을 따라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이내 수산교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수산리버스정류장에 도착해 31번째 낙동강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이 정류장에서10분여 기다렸다가 밀양행 버스를 타고 반 시간 남짓 달려 밀양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이동해 조선시대 3대 누각으로 꼽히는 밀양강 강변의 영남루를 둘러본 후 밀양역으로 옮겨 귀가 길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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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이 따사로운 햇살의 도시라는 것은 강변 누정(樓亭)인 영남루(嶺南樓)에 올라가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밀양강의 아름다운 풍광과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를 이뤄 우리나라 전통 누각(樓閣)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영남루(嶺南樓)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이름난 정자입니다. 규모가 제법 큰 이 정자는 기둥 사이를 넓게 잡고 굵은 기둥으로 누마루를 높여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주어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1365년 고려의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 김주(金湊)가 영남사(嶺南寺)가 있던 절터에 누각을 짓고 이름 붙인 영남루가 밀양 부사 이인재(李寅在)에 의해 새가 지어진 것은 1844년의 일입니다. 이인재가 새로 지은 현재의 영남루에도 수많은 시문(詩文)의 현판이 걸려 있는 것으로보아 영남루가 한때 '시문(詩文) 현판 전시장'으로 불렸다는 것이 허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2층 누각에 올라서자 바로 아래로 흐르는 밀양강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밀양강이 안온해 보이는 것은 이 강이 막 내려앉기 시작한 저녁 햇살을 어느 하나도 마다하지 않고 몽땅 받아들여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높은 산이 없어 강을 가릴 산 그리메가 보이지 않았고 석양을 가릴 구름도 끼지 않아 밀양의 석양이 온전하게 밀양강을 비추었기에 제가 겨울의 밀양강에서 안온함과 따사로움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