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34(삼랑진역- 가야진사-물금역)

시인마뇽 2024. 12. 25. 10:49

탐방구간: 삼랑진역-가야진사-물금역

탐방일자: 20241214()

탐방코스: 삼랑진역-작원관지-가야진사-서룡공원 -물문화전시관-물금역

탐방시간: 72-1410(7시간8)

동행       : 나 홀로

 

 

 

  이번 낙동강 따라 걷기는 삼랑진역에서 시작해 물금역에서 마쳤습니다. 물금역은 기차로 수차례 지난바 있지만, 물금 땅을 걸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는 이제껏 물금은 강물과 관련된 우리 고유의 한글지명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한자 지명인 勿禁이었습니다. “금해서는 안 된다는 뜻의 물금(勿禁)이 지명으로 쓰인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는 것은 물금역의 안내문 이야기로 보는 양산의 지명 - 물금을 읽고 알았습니다. 그 까닭이라는 것이 신라와 가야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습니다.

 

  옛날 경상남도 양산에는 신라와 금관가야 두 나라의 관리들이 상주하면서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과 물품을 조사하고 검문하던 물고미(勿古味)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있어 물금진(勿禁津)으로도 알려진 물고미에서 조사와 검문이 심해지자 불만이 점점 높아져 신라를 버리고 부유한 금관가야로 밀입국하는 신라 백성들이 늘어났습니다. 이에 신라왕 혜안은 신하들에게 대책을 세워 상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신라의 신하 원진이 “"가야는 철광석을 캐기 위해 밀입국하는 신라 백성을 용인하는 만큼 이를 합법화하는 것이 계책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처 명지로부터 듣고 의아해 다시 묻자, 원진의 처 명지는 "물고미 일대를 신라와 가야 백성들이 자유롭게 출입을 할 수 있게 합법화하면 백성들의 불평과 불만은 사라지고 또한 신라를 버리고 밀입국하는 사람들도 줄어들 게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했습니다.

 

  원진은 신라왕께 아내 명지의 계책을 고하고 왕의 허락을 받아 서력 48년에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왕을 알현해 물고미 일대를 양국의 백성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자는 신라 왕 혜안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수로왕의 둘째 딸 묘견공주는 "가야에 철을 만드는 숯 생산량이 줄어 숯을 수입해야 하는데 신라는 많은 고급 숯을 생산하고 있다. 가야의 미래를 위해 양국 백성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지역이 필요하고, 세금을 징수하면 손해도 없어 원진의 제안을 수용해야 한다."고 간청했습니다. 이에 원진은 물품 거래를 금하지 말자는 뜻으로 물금이라는 지역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수로왕은 이를 받아들여 물금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 위 안내문의 요지였습니다.

 

  이후 물금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지대가 되었으며, 철과 비단이 거래되는 국제교역 장소가 되었습니다. '물금'을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낸 신라의 명지는 남편 원진을 지혜로 잘 섬겨 신라에 공을 세운 훌륭한 인재로 이끌어냈고, 금관가야의 묘건공주는 거북배를 타고 일본 규슈 구마모토 지역으로 건너가 가야의 선진문물을 전파하고 '히비코'라는 이름으로 일본 최초의 여신이 되어 지금은 야스시로 신사에 모셔져 있다고 안내문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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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72분 삼랑진역 인근의 부강장 여관을 출발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삼랑진역 건너편의 CU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데워 먹은 후 여관으로 돌아가 짐을 챙겨 낙동강 따라 걷기에 나섰습니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랜턴으로 길을 밝혔습니다. 영진카서비스 앞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철로 아래 굴다리를 건넜습니다.

 

  낙동강 좌안의 강변에 넓게 자리한 삼랑진생태문화공원으로 들어서 다시 만난 자전거길을 따라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춰 낙동 3경으로 선정된 낙동강 딴섬 생태누리의 안내문을 읽었습니다. 안내문의 요지는 낙동강과 밀양강이 흐르는 삼랑진 연안에 충적토가 쌓여 임천, 안태, 송지, 율곡리 마을 앞에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가 조성되었고, 안태리의 천태산 기슭에 낙동강 물을 끌어 올려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대한 발전소를 건설함으로써 이 일대가 빼어난 관광지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떼를 지어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들이 꾸륵꾸륵 소리 내며 반가워하는 환영 인사에 그들의 비상(飛翔)을 사진 찍어주는 것으로써 답했습니다. 또 하나 찍은 사진은 처자교의 발굴지점입니다. 조선 시대 숙종 임금 때 축조된 아치형의 홍예교인 처자교가 발굴된 것은 4대강 사업이 진행되던 2011년이었습니다. 여기서 발굴된 처자교는 훼손 및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다시 묻어 보존하고 있다고 안내판은 적고 있습니다.

 

  작원관(鵲院關)이 최초에 자리한 작원관지(鵲院關址)를 지난 시각은 812분이었습니다. 처자교 발굴지를 출발해 왼쪽으로 작원관지 길이 갈리는 지점을 지났습니다. 조선 시대 작원관의 옛터인 작원관지는 본래 부산과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의 중로 구간 중 험한 벼랑길인 작원잔도(鵲院棧道) 북쪽에 자리했었습니다. 작원관은 문루형 관문으로 아래층에 관문인 한남문을 두고 그 상부에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의 당당한 팔작 기와지붕의 문루를 지었으며, 한남문의 좌우에는 돌로 성벽을 쌓아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고 합니다. 1936년 대홍수 때 헐린 작원관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된 것은 1995년의 일입니다.

 

  작원나루를 지나자 꽤 긴 데크 길의 잔도가 시작됐습니다. 이 길옆에 작원잔도 안내판이 세워진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의 작원잔도(鵲院棧道)도 제가 걷고 있는 잔도의 바로 위 벼랑에 낸 것 같습니다. 영남대로 상의 3대 잔도는 현재 물금읍의 황산역에서 원동에 어르는 낙동강변가의 절벽에 만들어진 황산잔도, 양산 원동(용당리)의 하주막에서 밀양의 삼랑진에 이르는 작원잔도(또는 작천잔도), 그리고 점촌-문경 간의 토끼벼루 등입니다. 이 중에서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가치가 매우 큰 것은 여기 작원잔도라고 합니다.

 

  938분 가야진사를 둘러보았습니다. 푸르른 대나무 숲길을 지나 이어지는 강 위의 데크 길을 걸으면서 낙동강이 흐르는 물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작원관의 원래 터를 지나 양산시로 접어들자 이내 데크 길은 끝났고 시멘트길로 이어졌습니다. 자전거와 일반차량의 통행이 같이 허용되는 길지 않은 겸용도로가 끝나자 엄청 넓은 갈대밭이 펼쳐졌고 이어지는 파크골프장에는 골퍼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왼쪽 굴다리로 배내골 길이 갈리는 사거리에서 낙동강 강가로 다가가 가야진사를 들렀습니다. 가야진사에 대해서는 안내판의 소개 글에 잘 요약되어 여기에 옮겨 싣습니다.

 

  “가야진사(伽倻津祀)는 나루터신(津神)을 모시고 있는 제당(祭堂)으로 삼국사기에 가야진에서 중사(中祀)에 해당하는 국가제례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해마다 나라에서는 가야진사에 향축(香祝)과 칙사(勅使)를 보내 제사를 올려 국가의 무운(武運)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사당은 앞면 1, 옆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 2011년 정비된 가야진사 앞 제단은 조선시대(1788) 편찬된 춘관통고에 기록된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것으로 제단의 너비는 23(690cm), 제단의 높이는 27(81cm)이며, 계단은 제단의 동 · · 남 북에 각 1개씩 배치한 형태이다. 현재에도 매해 5월 낙동강의 용신(龍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가야진용신제가 봉행된다.”

 

  가야진용신제에 대해서는 직원분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어 고마웠습니다. 가야진 건너편에 자리한 용산의 밑을 흐르는 물에 낙동강에서 가장 깊다는 용소가 있는데, 주민들은 소용돌이가 심한 이 용소에 용이 살고 있다고 믿어 용신제를 지내왔습니다. 부정가시기-칙사영접굿-용신제례-용소풀이-사신풀이 순으로 진행되는 가야진용신제는 국가제의로 지내오다가 1908년 막을 내린 것을 지역민들이 민간신앙으로서 제의를 면면히 이어와 1997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1127분 서룡공원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가야진사를 둘러본 후 자전거길로 복귀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원동천을 건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동역을 지났습니다. 이어지는 자전거길은 서룡공원에 이르기까지 철로와 낙동강 사이로 이어져 마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100여 차례 여러 강을 따라 걸어 보았지만, 몇 시간씩 강가에 바짝 붙어 강물과 벗하며 걸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서룡공원으로 들어서자 바늘잎이 반 이상 낙엽이 되어 떨어진 황적색의 메타세콰이어와 은백색의 갈대꽃이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공원 중앙의 자전거정비소를 지나 남서쪽으로 진행하면서 마주한 산은 해발533m의 오봉산으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자태는 참으로 의젓해 보였습니다. 이번에 겨울철인데도 자전거길이 바이커들로 붐빈다 싶었던 것은 자전거를 타고 강변길을 여행하는 것이 젊은이들에는 새로운 야외스포츠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왼쪽으로 화제마을 길이 갈리는 사거리를 지나 발걸음을 멈춘 곳은 부산이 낳은 작가 김정한(金廷漢, 1908~1996)의 소설 작품 수라도(修羅道)기리는 비석이었습니다. 소설 수라도修羅道는 일제강점기에서 광복에 이르는 전환기의 전통 양반가인 허진사댁의 변모를 민족문제와 결부시킨 김정한의 대표작입니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는 가야부인은 유교와 불교의 조화,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인간애, 남녀평등의 실천 등을 통해 "한국문학이 창조한 가장 매력적인 형상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고 비문은 적고 있습니다. 이런 비석이 이곳에 세워진 것은 여기 원동면 화제리가 소설 수라도(修羅道)의 주무대이어서였습니다.

 

  1245분 물문화전시관을 지났습니다. 화제천을 건너 만난 원동취수장)에서 물금취수장까지의 자전거길이 황산강베랑길로 명명된 것은 2012년 이 길이 조성되면서 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이 길은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황산잔도 구간으로 당대로는 주민들의 왕래가 잦았다고 합니다. 1900년대 초에 철로가 건설되고 인근에 다리가 놓이면서 폐기된 길이 다시 열린 것은 4대강 정비사업 덕분인 것 같은데 과연 그런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황산강이란 낙동강의 삼국시대 명칭이며, 베랑길은 벼랑길의 경상도 방언임을 첨언합니다.

 

  낙동강 위에 설치된 데크 길인 황산강베랑길을 걸으면서 본 안내문은 신라 시대 고운 최치원이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겼던 '입경대' , 조선 고종 때 선비 정임교가 시를 짓던 '경파대 , 보물 제491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있는 '용화사', 행동래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 등입니다. 이 모두가 철로 건너 쪽에 있어 찾아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원동취수장을 지나서부터 강 건너 쪽으로 눈길이 자주 간 것은 2011년 종주를 끝낸 낙남정맥이 끝나는 지점을 다시 한번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낙남정맥은 낙동정맥과 및 백두대간과 더불어 낙동강에 물을 대는 남쪽의 둘레산줄기입니다. 도상거리 기준으로 전장이 약226Km에 달하는 낙남정맥은 지리산의 영신봉에서 시작되어 김해시상동면매리의 낙동강 강변에서 끝나는데, 집에 돌아와 지도를 자세히 보니 물문화전시관과 서부주차장의 중간지점에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동취수장과 물금취수장이 카카오맵에 나와 있지 않은 것은 경비를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수자원공사도 같은 뜻에서 본 시설물은 국가의 주요시설로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안내문을 공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취수장은 접근이 불허되어도 물문화관은 개방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월, , 공휴일은 휴관이어서 관람하지 못했습니다.

 

  1410분 물금역에 도착해 34회 낙동강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물금취수장을 지나 황산공원으로 들어서자 넓은 쭉 뻗은 메타세콰이어길이 시원스레 펼쳐졌습니다. 중부광장에서 육교를 건너 물금역에 도착하기까지 7시간을 넘게 걸었는데도 온전하게 강을 따라 걸어서인지 별반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시간 반을 넘게 기다려 수원행 무궁화호에 탑승해 하루 걷기를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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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금이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지대라는 안내문을 읽고서 떠오른 것은 마산자유무역지역이었습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여기 물금에서 멀지 않은 마산에 자유무역지역을 조성한 것이 혹시 2천 년 전 신라와 가야가 뜻을 모아 여기 물금을 자유무역지대로 조성한 것에 착안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퍼뜩 났습니다.

 

  대한민국 최초로 1970년에 외국인투자 유치 및 투자 전진기지로 출발한 마산자유무역지역은 투자유치 및 수출진흥을 위해 입주업체에 대해 외국인투자신고, 공장건축허가, 수출입 승인 등 모든 행정업무를 산업통상자원부 마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에서 일괄처리하는 One-Stop Service 체제를 구축하여 편의를 제공하고 있으며 외국인 투자에 대해서는 관련 법령의 일부배제, 조세감면, 저렴한 임대료 및 지원시설 등 각종 혜택을 부여하고 있으며 특히 비관세지역으로서 어느 지역보다도 수출입 활동이 편리한 지역이라고 홈피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1970년에 시작된 마산자유무역지역은 생산 중심의 수출자유지역(Free Export Zone)으로 운영되다가, 20007월부터 생산은 물론 무역물류유통정보처리서비스업 등의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 자유무역지역(Free Trade Zone)으로 확대 개편되어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물금이 자유무역지대로 선정된데는 신라의 여인 명지와 가야의 여인 묘견공주의 공이 컸지만 금관가야의 김수로왕과 신라의 혜안왕이 결단해 가능했다면, 마산의 자우무역지역 지정과 발전은 박정희 대통령의 자유무역의 장점을 꿰뚫어 본 지혜와 과감한 결단력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습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은 그들의 공저인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에서 한 나라가 경제적 번영의 길을 가려면 무엇보다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신라 시대의 물금이나 1970년대의 마산은 우리나라가 포용적인 사회로 한 걸음 다가가는 시작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