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 33(수산대교-한림배수장-삼랑진역)

시인마뇽 2024. 12. 21. 13:11

탐방구간수산대교-한림배수장-삼랑진역

탐방일자:  20241213()

탐방코스: 수산대교-서원사-가동교차로-한림배수문-삼강서원-삼랑진역

탐방시간:  916-1631(7시간15)

동행       :  나 홀로

 

 

 

  이번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하룻밤을 묵은 곳은 삼랑진읍(三浪津)입니다. 제가 삼랑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경부선과 경전선이 나뉘는 철도교통의 요지라는 것과 너덜에서 종소리가 난다 하여 유명해진 만어사가 삼랑진읍의 만어산에 자리하고 있다는 정도였습니다. 1977년 봄에 군항제가 열리는 진해로 신혼여행을 갈 때 삼랑진역을 지난 적이 있고, 2011년 봄에 만어산을 오를 때 삼랑진역에서 하차하여 택시를 타고 이 산의 들머리인 관음사까지 이동한 일은 있지만, 삼랑진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번에 낙동강을 따라 걸으면서 알게 된 것은 조선 시대에는 삼랑진이 영남대로와 접속하는 수운의 요충지였다는 것입니다. 영남대로란 한성에서 충주와 문경을 지나고, 낙동나루를 거쳐 대구와 밀양을 넘어 부산에 이르는 길로, 이 길의 총길이는 380Km에 달합니다. 조선 시대 내내 하동(河東)으로 불렸다가 1928년에 오늘의 이름으로 개칭된 삼랑진(三浪津)은 세 갈래 물결이 일렁이는 나루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고 합니다. 삼랑(三浪), 즉 세 갈래 물결이란 낙동강 강물과 이 강에 흘러드는 밀양강 강물, 그리고 낙동강하굿둑이 건설되기 전의 일로 감조하천(感潮河川)이었던 하류의 낙동강을 거슬러 여기 삼랑진까지 역류해 올라오는 바닷물을 뜻합니다.

 

  조선 후기 낙동강의 가장 큰 포구 중의 하나였던 삼랑진에 후조창(後漕倉)인 삼랑창(三浪倉)이 설치된 것은 1765(영조 41)의 일입니다. 이후 삼랑진은 밀양, 현풍, 창녕, 영산, 김해, 양산 등 여섯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수납, 운송하며 물자의 최대 집산지로 성장하였습니다.삼랑진의 번창을 가져온 것이 수운이었다면, 쇠락을 재촉한 것은 철도로 대표되는 육운이었습니다. 1905년 송지에 삼랑진역이 들어서고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번창하면서 삼랑진은 나루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였는데, 김해와 밀양을 이어주는 큰 다리가 여러 개 놓임에 따라 수운이 육운으로 완전히 대체되었습니다.

 

  밀양강과 낙동강의 합류점에서 삼랑진 시내를 벗어나기까지 낙동강 위에 놓인 다리는 무려 4개나 됩니다. 가장 서쪽에 자리한 다리는 경전선 열차가 다니는 철로이고, 그 동쪽의 다리는 제가 걸어서 건넌 삼랑진교로 경차와 자전거, 그리고 사람들만 통행할 수 있어 시끄럽지 않습니다. 그 동쪽 다리는 일반 차량이 다니는 삼랑진교이고, 동쪽 끝 자리에 위치한 마지막 다리는 중앙고속도로가 지나는 낙동대교입니다. 4개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는 제가 건넌 삼랑진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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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역에서 하남읍의 수산대교까지는 걷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하여 택시를 타고 갔습니다. 기차가 10분가량 연착하는 바람에 버스를 탔다가는 수산대교에 도착하는 것이 시간 반가량 늦어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25천원을 들여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916분 수산대교를 출발했습니다. 수산대교 남단의 바로 아래에서 하차해 대산문화체육공원으로 들어섰습니다. 제방 아래 수변공원 길로 이어진 자전거길을 따라 걸어 대산파크골프장을 지났습니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파크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고 확장공사가 진행중인 것으로 보아 파크골프가 낙동강 강변의 지역주민들에게는 야외스포츠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파크골프장을 지나 제방 길로 올라서자 뒤쪽 언덕 위에 자리한 노거수가 제 눈을 끌었습니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았지만 꽤 큰 나무가 언덕 위에 홀로 서 있어 먼 곳에서도 잘 보였습니다.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이 노거수는 제가 즐겨 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했던 창원시북부리의 팽나무였습니다.

 

  20분 남짓 제방길을 걸은 후 대나무 숲길을 지나 서원사에 도착한 시각은 1030분이었습니다. 이 절은 하도 규모가 작아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 앙증맞은 5층석탑이 눈에 띄어 잠시 멈춰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116분 창원시를 벗어나 김해시로 들어섰습니다. 서원사를 지나 올라선 제방길은 대산제로, 이 제방의 3공구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 자리한 커피집 ! 커피다가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잠깐 들러 따끈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곁불을 쬐고 갈 만한 시간 여유가 없어 그냥 지나쳤습니다. 유동종점 버스정류장을 지나 건넌 하천은 주천강으로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10여 년 전에 들렀던 주남저수지를 만나게 됩니다.

 

  주천강을 건너 다다른 유동배수장의 준공비(竣工碑)를 보고 배수장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비문에 따르면 배수장이 설치되기 전에는 2,000ha의 농경지와 3,700세대의 가옥들이 홍수에 의해 피해를 입었는데, 전동기 1,150마력에 2,000m3/min의 배수기 4대가 설치되어 초당 34.5톤의 물을 배수함으로써 침수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북제(상류)에 올라선지 15분이 지나 김해시에 발을 들였습니다. 급커브길을 지나 이북제로 올라가 제방 길을 따라 걸어 가등삼거리를 지났습니다. 제방 아래 가등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4Km 가량 걸어가면 노무현 전대통령의 생가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하는데 갈 길이 바빠 그대로 직진했습니다.

 

  1247분 한림배수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가등삼거리에서 멀지 않은 한림솔뫼파크골프장 입구를 지나 이북제(하류)의 제방길을 따라 진행했습니다. 제방 길이 끝나 마을 길로 걸어가던 중 밭에서 거뜬히 겨울을 나는 넓은 잎의 푸르른 선인장을 보았습니다. 이 겨울에 서울 같으면 온실에서나 키울 수 있는 선인장이 밭에서 자라는 것을 보고 제가 걷고 있는 김해지방이 따뜻한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낙동강 좌안의 솔뫼생태공원은 넓게 분포되어 있어 이북제와 시산제를 모두 아울렀습니다.

 

  시산제를 따라 걸으며 오른 쪽 먼발치로 사장교의 트러스가 보여 그 아래로 흐르는 강이 무슨 강인지 궁금했습니다. 이러한 궁금증은 시산제 끝자리의 한림배수문에 이르러서야 이 하천이 국내 최대의 하천형 배후습지로 알려진 화포천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1지류 화포천이 낙동강에 흘러드는 지점에 설치된 한림배수장은 제가 이제껏 보아온 배수장 중 가장 크다 했는데 알고 보니 이 배수문은 동양최대의 배수장이라고 합니다.

 

  화포천 위 모정교를 건너자 자전거길은 사라지고 나지막한 산을 넘는 산 길이 나 있어 그 길을 따라 고개를 넘었습니다. 생림벧엘교회 기도원을 지나 삼랑진교에 이르기까지 낙동강 좌안의 차도를 따라 걷느라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마사교를 건너 생림오토캠핑장을 지난 후 삼랑진교에 이르러 잠시 쉬어갔습니다.

 

  삼랑진교는 밀양시 삼랑진읍에서 낙동강을 가로질러 김해시 생림면을 잇는 철교입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이 다리는 1935년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되어 일반 다리로 이용되다가 1943년부터 철도 다리로 사용되었습니다. 1964년에 시멘트 등으로 보강작업을 한 후 차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있는 다리로 바뀌었다가, 2008년에는 바로 옆에 신 삼랑진교가 들어서면서 이 다리는 소형차와 자전거로 낙동강을 여행하는 나그네들만 간간이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1442분 삼랑진교를 건넜습니다. 삼랑진교를 건너면서 알게 된 것은 바로 앞 오우진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밀양강의 강폭이 전번에 남지수변공원에서 보았던 남강보다 훨씬 넓다는 것입니다. 이는 울주의 고헌산에서 발원한 밀양강의 유로길이는 96Km로 함양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의 유로길이 186Km1/2 정도로 짧은데 유역면적은 밀양강이 1,476Km2으로 남강의 349Km2보다 4배가량 더 넓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삼랑진교를 건너 오우진 언덕에 자리한 삼강서원을 둘러본 후 낙동강 좌안의 제방길을 따라 삼랑진역으로 향했습니다. 낙동강 좌안의 제방에 낸 자전거길로 들어서자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강바람이 제법 차가웠습니다. 저녁때가 되면 강바람이 강하게 부는  것은 기온이 급작스레 떨어지면서 강과 뭍의 기온 차가 커지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낮 동안 따뜻해진 뭍이 일몰시각이 가까워지면서 기온이 급하게 떨어져 비열이 높은 강의 온도가 뭍의 온도보다 높아집니다. 이에 따라 뭍에서 강으로 바람부는 방향이 바뀌는데, 이 바람을 맞게 되면 몸이 일몰이 멀지 않다는 것을 감지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1631분 삼랑진역에 도착했습니다. 낙동강 좌안의 제방길을 따라 시계반대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진행해 삼랑진 지하차도를 건넜습니다. 이내 도착한 삼랑진역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인근의 여관 부강장에서 일박했습니다. 잠자리가 침대가 아닌 온돌방이어서 조금 불편했지만, 60리를 가깝게 걸어 지쳐서인지 잠자리에 들자 쉽게 잠이 들어 숙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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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에 삼랑진이 번창했다는 것은 후조창(後漕倉)이 들어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후조창은 1765(영조41) 우참찬 이익보(李益輔, 1708~1767)의 주창으로 여기 삼랑진에 설치된 조창(漕倉)으로 경상도 남부지방 3곳에 설치된 조창의 하나입니다.

 

   후조창이 설치된 삼랑진의 하부마을 언덕에 오늘의 지방 사립대학에 상응하는 서원(書院)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삼랑진의 풍요로웠던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다 싶습니다. 밀양강이 낙동강에 합류되는 오우진의 언덕에 자리한 삼강서원은 낙동강가 민씨 오우정(五友亭) 안에 있는 서원으로, 조선 전기의 학자인 민구령(閔九齡), 구소(九韶), 구연(九淵), 구주九疇), 구서(九敍) 5형제를 배향하고 있습니다. 이 서원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인 민구령(閔九齡)1510년경에 삼랑루(三郞樓)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5형제가 함께 기거하면서 학문을 닦은 곳입니다. 1547년 경상도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 찾아와 오우정(五友亭)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었으며, 1563년 정자 안에 오우사(五友祠)를 지어 병향(幷享)하였고, 경내에 따로 기사비(紀事碑)를 세웠습니다. 오우사는 삼강사(三江祠)로 바뀌었고, 다시 삼강서원으로 승격하였습니다. 정자와 사당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가 자손들에 의해 복원되었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습니다. 1897년 민영지(閔泳智)와 민영하(閔泳夏) 등이 큰 집을 새로 짓고 오우정의 현판을 걸어 보존하였으며, 1904에 일부를 중건하였고, 1979년에 14세손 민병태(閔丙兌)의 주선으로 정자의 규모를 확충하고 사당을 다시 지어 삼강서원의 현판을 걸고, 향사림의 주관으로 서원 향사를 받들고 있다고 대한민국 구석구석삼강서원란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