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북정맥 종주기 3
*정맥구간:차도고개-백화산-오석산-팔봉중학교
*산행일자:2006. 4. 15일
*소재지 :충남 태안/서산
*산높이 :백화산284미터
*산행코스:차도고개-퇴비산-모래기재-백화산-오석산
-팔봉중학교-어송2리
*산행시간:9시50분-17시22분(7시간32분)
*동행 :나홀로
이번 일요일에는 오랜 동안 몸담았다가 대간 종주로 1년 가까이 나가지 못한 과천시산악연맹의 정기산행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나중에 부활절과 겹친다는 것을 알고 아쉽게도 취소를 했습니다. 산행과 주말미사 중 어느 것 하나 빼 먹을 수가 없어 토요일 날 특전미사를 주로 올린 저로서는 부활절만이라도 일요 미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루를 당겨 토요일 아침 일찍이 충남의 태안반도로 내려가 금북정맥을 종주하고 돌아왔습니다.
토요일 주말산행을 마쳤기에 모처럼 일요일에 미사를 올리며 부활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를 갖는 것은 살아생전 그가 이룩하신 인류사를 빛낼만한 훌륭한 업적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분이 악행만 저지르고 아무런 가르침을 주시지 못했다면 그 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축복이 아니고 재앙이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 분의 모습이 생전의 그 모습이었던 것은 부활이 새로운 탄생이 아니고 위대하신 옛 삶의 되살림임을 반증하는 것이기에 아무나 부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한번 죽으면 그것이 육신이든 영혼이든 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 세상의 로고스는 만들어졌다는 판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무질서와 혼란으로 고통 받을 것입니다. 육신이 모두 부활한다면 이 땅은 과포화상태가 되어 발붙일 곳이 남아 있지 못할 것이고 모든 이들의 영혼이 부활한다면 이 세상을 떠도는 수많은 악령들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기에 예수님 혼자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시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부활절 미사시간에 원하옵건대 부활은 당신의 전유물로 남겨두시고 저희들에게는 잘못을 저지르면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하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이 글은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 카톨릭의 교리와 무관함을 밝혀둡니다.)
아침 9시50분 서해산업 앞 차도고개에서 종주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차도고개나 고개 너머 유득재는 지도상의 지명일 뿐 버스기사나 매표원 모두가 알지를 못해 지도를 보여주며 위치를 확인해주고 나서야 천리포행 시내버스를 타고가다 장례식장에서 내려 조금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안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소원면에서 이정표로 고개 마루에 세운 “노을 그리고 바다”의 표지석이 작달막하고 예쁘장해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서해산업으로 들어가는 차도 왼쪽의 능선 길로 들어섰습니다.
양쪽이 바다인 태안반도를 지키는 주 수종은 단연 소나무입니다.
종주산행 중 대간 길 남쪽의 정령치에서 매요마을까지 이어지는 소나무 숲에 이어 두 번째로 이곳 태안반도에서 긴 소나무 밭을 지났습니다. 이곳의 훤칠한 소나무들이 보호해 온 진달래들이 4월을 맞아 불그스레한 자태를 내보여 저의 눈을 끌었습니다. 잣나무들이라면 그들이 내뿜는 독한 냄새로 그 숲 속에서 살아남을 꽃나무들이 하나도 없었을 터인데 허리만치 자라난 진달래들이 꽃을 피운 이 소나무 숲이 바로 상생의 현장이다 싶어 훈훈하게 느껴졌습니다. 서해산업을 삥 둘러 싼 해발 165미터의 퇴비산의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정맥 길로 되돌아오기까지 9분이 걸렸습니다. 삼각점이 세워진 160봉에 올랐다가 대공사격술 교육장을 지나 군부대정문에 다다르자 금북정맥도 다른 정맥과 마찬가지로 군부대가 점하고 있는 마루금이 적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1시 정각 군부대 정문을 지났습니다.
사격장 출발점으로 내려서자 양쪽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었습니다. 부대 안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기에 별 수 없이 왼쪽의 철조망을 헤집고 통과해 군부대를 빠져나왔습니다. 황토밭 사이를 가르고 난 시멘트 길을 따라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마늘, 무와 목초들과 인사를 나누며 23분을 걷는 동안 비산비야의 여유로운 이 지방 특유의 시골풍경을 감상하면서 여러 컷의 사진을 남겼습니다.
11시45분 태안여고 앞 모래기재에 도착했습니다.
인삼밭에 다다라 군부대 정문에서 시작된 시멘트 길을 버리고 삼포 반대편의 산길로 다시 들어서 90봉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른 후 제1,2 산책로 팻말이 서있는 안부를 지나 잠시 후 태안여고 뒷산인 93봉에 다다랐습니다. 93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하산하는 중 야외수업 차 학교 뒷산을 오르는 여학생들을 만나 정문 앞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았습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 정문 앞 모래기재에 도착해 길을 건너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다오리 음식점에서 우측으로 붙어 장송들이 떼를 이루고 있는 백화산 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12시35분 해발284미터의 백화산 정상에 오르자 남쪽 발밑에 들어선 태안읍이 한눈에 잡혔고 먼발치로 지난번에 지나쳤던 연포 앞바다가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백화산 들머리에서 얼마고 오르자 큰 길이 잘나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오르다 반갑게도 첫 번째 돌무더기 옆 나뭇가지에 걸린 진혁진 님의 표지기를 만났습니다. 군부대로 이어지는 차도를 따라 걸어 큰 바위 백조암을 지나자 얼마 후 차도 오른 쪽 밑으로 여러 채의 사찰이 보였습니다. 일개 암자인 태을암이 저리 클 수는 없다고 판단해 그냥 지나치고 부대 정문 직전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능선 길로 들어선 것이 6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삼존불인 태을암의 마애삼존불을 그냥 지나친 경위였습니다. 태안반도의 다른 육산들과는 달리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들어서있는 백화산은 태안반도에서 최고로 높은 산이기에 당연 서해의 해넘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최고의 낙조대 일진데 더 이상 머무를 수 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바로 앞의 봉화대지에 올라 태안읍을 내려다보며 십 분을 쉬었습니다. 마루금 상의 서 쪽 봉우리를 점하고 있는 군부대 바로 밑의 울타리까지 갔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급경사의 내림 길로 내려와 13시 정각에 오룡동-냉정골간 시멘트도로를 건넜습니다.
13시18분 240봉에 올라서 짐을 풀고 점심을 들면서 모처럼 긴 시간 휴식을 취했습니다. 안부인 시멘트 도로에서 백화산 다음으로 높은 240봉을 올라서는 길이 가장 가팔라 힘들었습니다. 시꺼멓게 산불에 그을린 소나무들이 몰골사납게 서있는 길을 지나 오른 쪽으로 내려서자 그 다음부터는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은 호젓한 산길이 이어져 걷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수피가 매끈한 이름모를 훤칠한 활엽수들이 도열해 있는 길을 지나며 마루금 맞은편 오른 쪽에 자리한 진초록의 소나무들을 보고 능선을 사이에 놓고 수종들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삼밭을 지나 적송들이 들어서있는 제나리 안부로 알려진 원산후-고일간시멘트 도로에 내려선 것은 240봉 출발 26분이 지나서였습니다.
15시 정각 산불감시초소가 서 있는 해발 169미터의 오석산에서 귤을 까들며 잠시 쉬었습니다. 제나리 안부에서 비탈길을 올라 130봉에 오르는 동안 꿩의 바람꽃등 야생화들이 눈인사를 건네 왔고 새들의 지저귐도 저를 반기는 듯해 힘든 줄 몰랐습니다. 130봉에서 십자안부로 내려서기 까지 중간에 길을 잘 못 들어 처음으로 알바를 했으나 바로 제 길로 들어섰고 십자안부에서 묘지를 지나 오석산에 오르는 동안 2주전에 백두대간을 같이 마친 천자봉님의 표지기가 눈에 띄어 반가웠습니다. 삼각점이 세워진 오석산 정상에는 나무들이 베어져 바로 비치는 햇살이 따갑게 느껴졌습니다. 정상에서 붉은재로 내려서기까지 길이 분명치 않아 마루금을 이어가기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수원백공의 큰 묘지가 안치된 사거리에서 160봉을 지나는 능선을 걸으며 왼쪽으로 펼쳐진 서해바다와 해안선 그리고 작은 섬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몇 번이고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오석산 정상을 출발한지 30분 후 넓은 공터를 막 지나 붉은재에 도착했습니다. 붉은재에서 10분 남짓 걸어 다다른 도내2리(북창)버스 정류장가까이의 한 슈퍼에서 맥주 한 캔을 사들고 나서 왼쪽-오른쪽으로 꺾어 다시 아스팔트길로 되돌아와 큰 도랑을 오른쪽에 끼고 계속해 걸어 인평3리 다목적 회관에 닿기까지 45분을 걸었습니다. 밭가를 걸으며 살랑살랑 불어대는 봄바람에 팔랑이는 하얀 나비들의 날개 짓이 보기 좋아 몇 차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보고자 시도했으나 순간포착능력이 떨어져 실패했습니다. 살갗을 감미롭게 매만져 주는 봄바람에 마냥 심취해 있다가는 비닐로 재배하는 농작물을 자칫 잘 못 건사해 말려 죽이기가 십상이기에 조심해야 함을 33년 전 시골에서 무를 기르며 체험했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16시47분 SKT통신탑을 막 지나 다다른 삼거리 묘지에서 짐을 풀고 1시간 14분 동안 아스팔트 길과 시멘트 길을 걷느라 아파하는 두 다리와 양 어깨를 달래느라 십수분간 쉬었습니다. 인평3리 다목적 회관 출발 3분 후 태안군 태안읍과 서산군 팔봉면을 경계 짓는 굴포운하지를 지났습니다. 가로림만 상류인 팔봉면 이송리와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흥인천 사이의 약 3키로를 굴착해 수로로 연결해 3남지방의 세곡 조운을 용이하게 하고자 고려 인조 때인 1134년부터 약 550년간 시도한 몇 차례의 운하 굴착은 실패했고 이조 현종 때인 1668년 인근 여러 곳에 조창을 지어 운하의 기능을 대신하게 했다는 안내문을 읽고나서 세계 최초의 운하건설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아쉬움보다는 그 옛날에 운하를 내겠다는 발상의 위대함이 새삼 존경스러웠습니다. 실패한 운하는 굴포운하 만이 아닙니다. 완공을 해보았자 경제성이 없다하여 몇 해 전에 중단한 경인운하는 훗날 어떻게 안내문에 적힐지 벌써부터 궁금했습니다. 굴포운하지를 지나 도내1리 중말정류장에서 잘못 판단해 왔다 갔다 하다가 왼쪽으로 난 시멘트 길로 들어섰습니다. 사과밭과 인삼밭을 지나고 다시 삼원조경을 지나 SKT통신탑에 이르자 양어깨가 쑤셔 시멘트길이 끝나는 삼거리 묘지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습니다.
17시6분 내달려가면 십수분이면 닿을 듯한 팔봉산이 바로 보이는 팔봉중학교 정문에 도착해 7시간16분 동안의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삼거리묘지에서 우측의 묘지를 질러 산길을 잠간 걷자 팔봉중학교 건물이 나타났습니다. 후문이 따로 없는 학교 안으로 바로 들어가 운동장을 거쳐 정문으로 나왔습니다. 학교정문에서 다음 산행의 들머리로 이어지는 32번국도 밑의 지하도 위치를 확인한 후 어송 2리 버스정류장으로 옮겨 17시22분에 하루 산행을 매듭짓고 서산행 시내버스에 올라탔습니다.
태을암의 마애삼불을 들러보지 못해 아쉬워하면서 서산 땅에 발을 들였습니다.
제가 금북정맥을 종주하지 않는다면 먼 길을 내려와 태안반도의 산길을 이토록 정겹게 밟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부활절을 즈음하여 주님께서 재림하실 이 땅의 고마움을 되살리고자 한 걸음 한 걸음 정맥 길을 밟아가는 것도 나름대로 뜻이 있겠다 싶어 이글을 올립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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