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맥구간:백석리도로-631봉-말티재-갈목재
*산행일자:2006. 11. 3일
*소재지 :충북 보은
*산높이 :무명봉631미터
*산행코스:백석리도로-631봉-591봉-말티재
-545.7봉-갈목재
*산행시간:9시45분-17시18분(7시간33분)
*동행 :나홀로
해 떨어지기 전에 이번 산행의 목적지인 갈목재로 내려서 7시간 반의 긴 종주 산행을 마치고 나자 형언할 수 없는 환희가 온 몸에서 용솟음쳤습니다. 작년 9월에 경기 김포의 보구곶에서 한남정맥 종주를 시작한 후 총 45회를 출산하여 한남정맥과 금북정맥, 그리고 한남금북정맥을 차례로 밟아왔습니다. 최종 목적지인 속리산 천황봉을 코앞에 둔 갈목재까지 진출해 이제 한 구간만 더 뛰면 장장 600키로가 넘는 3개 정맥 종주의 대 장정이 끝난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흥분되었습니다. 누가 왜 혼자서 그리 긴 산줄기를 걷느냐고 묻는다면 “너희가 지금 이 기쁨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동안 돈도 안 되는데 뭐가 좋아서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산을 가냐고 자주 질문을 받았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씩 웃곤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힘들여 산행을 마치고 나면 환희에 들떠 다음 산행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쁘고 또 행복했습니다.
환희(Joy)와 쾌락(Pleasure) 모두 행복(Hapiness)의 요소임에 틀림없습니다.
삶의 목적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환희와 쾌락 없이 긴 인생을 살아갈 수 없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이것들을 얻고자 모두가 애쓰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것들을 얻고자 무던히도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등산을 통해서 얻는 것은 쾌락을 뛰어넘는 환희입니다. 환희가 쾌락과 구별되는 점은 고통에 있다합니다. 환희는 고통과 상반되지 않지만 쾌락은 고통과 상반됩니다. 고통이 수반되는 쾌락은 있을 수 없지만 환희는 고통 뒤에 오기에 더욱 기쁜 것입니다. 출산의 환희는 분만의 진통과 더불어 오지만 음주의 쾌락은 술이 깰 때의 골 때리는 고통과 더불어 끝납니다. 사랑이 환희일 수 있는 것은 3분의 믿음에 대하는 7분의 불안이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리가 이렇다면 등산의 기쁨은 당연히 쾌락을 뛰어넘는 환희입니다. 이러한 환희를 통해 삶이 행복해지는데 제가 산행을 마다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쾌락은 돈을 주고 가질 수 있지만 환희는 돈 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고행의 종주 길에 나선 것입니다.
아침 9시45분 백석리마을 도로에서 한남금북정맥 길을 이어갔습니다.
고개마루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서 동쪽 마을로 난 시멘트길로 들어섰습니다. 콩 낟가리를 높이 쌓아 올린 한 농가를 지나며 처음으로 기계로 콩을 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집을 오른 쪽으로 돌아 축사를 지났고 조금 후 삼거리에서 시멘트 길을 버리고 왼쪽 임도로 들어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밭을 거쳐 몇 배미의 천수답 논을 지났고 물이 졸졸 흐르는 수로에 묻어놓은 시멘트 관을 넘어 임도사거리에 다다랐습니다. 사거리에서 왼쪽의 좁은 산길로 들어선 시각이 10시2분이었는데 알바를 하지 않았는데도 물을 건넜다는 사실이 의아하고 찜찜했습니다. 반시간 넘게 된비알의 산 오름을 계속해 631봉 갈림길에 도착하기까지 두 곳의 묘를 지나 낙엽 쌓인 미끄러운 길을 따라 등성이로 올라서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10시40분 마루금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한 631봉을 들렀습니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조금 더 걸어 오른 631봉은 이번 산행에서 오른 연봉 중 가장 높은 봉우리이나 삼각점도 없었고 진달래와 소나무들에 가려 전망도 좋지 않았습니다. 갈림길로 되돌아가 남서쪽을 향해 안부로 내려갔습니다. 정수리에 묘지가 들어선 무명봉을 넘어 내려서는 길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고 나자 낙엽에 묻힌 길을 내려가기가 신경 쓰였습니다. 다시 잘 다듬어진 커다란 산소로 올라 방금 전에 들렀던 631봉을 카메라에 담고 보니 이 산도 어느새 단풍의 절정기가 끝나보였습니다. 535.9봉에 오르는 길에 조용한 산을 뒤흔들어 놓은 전투기의 굉음이 이번만은 시끄럽지 않고 복음소리처럼 믿음직스럽게 들려왔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싸우면서 죽어라고 일해 이 나라의 중흥을 가져온 60-70대의 선배들께 죄송한 것은 그들이 일궈놓은 부는 향유하면서도 고마워하기는커녕 그들을 수구꼴통으로 몰아대는 이들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일 없이 이 나라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애써 키워온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것을 그저 먼발치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631봉에서 40분을 걸어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535.9봉에 다다라 10분을 쉬었습니다.
11시51분 오른 쪽 아래로 구룡저수지가 보이는 554봉을 올라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631봉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나간 마루금이 535.9봉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동쪽으로 향했습니다. 535.9봉에서 내려선 벚나무(?)가 서있는 안부가 수철령으로 왼쪽 아래로 파란 지붕이 보였습니다. 세 네 해는 그대로 쌓였을 발이 푹푹 빠지는 낙엽 길을 걷는 동안 “낙엽 밟는 소리가 좋으냐?”는 구루몽의 시 대신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한 해 쉬는 동안 갈퀴나무를 하러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던 생각이 났습니다. 늦겨울에는 동네 근처 야산에 쌓인 낙엽은 벌써 싹싹 긁어간 터라 멀리 2-3백미터 대의 높은 산으로 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이 다음에 커서는 다시는 산을 오르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마음을 다져 먹었습니다. 나이 들어 거의 매주 산을 찾으며 그때 결심한 것은 나무지게를 지지 않는 것이었지 배낭을 메지 않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핑계 대는 요즈음의 저를 보고 속으로 실소하곤 합니다. 554봉에 올라 오른 쪽 능선을 타고 오르내림이 별로 없는 편안한 낙엽 길을 걸었습니다. 남중한 가을태양이 머리 위에다 쏟아 붓는 햇살이 골바람이 잦아들자 따갑게 느껴졌습니다.
13시 정각 591봉에 올라 김밥을 들었습니다.
554봉에서 540봉에 오르는 18분간은 마지막 4-5분만 오름 길이고 대체로 평탄해 푸르른 잣나무의 방향을 즐기며 모처럼 편안한 길을 걸었습니다. 안부사거리인 구룡치를 12시6분에 지나 임도를 따라 잠시 걷다가 이내 오른 쪽으로 붙어 540봉을 올라선 후 560봉 능선삼거리를 거쳐 576봉에 올랐습니다. 좌우가 낭떠러지인 좁은 능선 길을 지나 삼거리로 급하게 내려섰다가 완만한 능선 길을 따라 올라 591봉에 다다라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자 2시간 20분전에 올랐던 631봉이 겨우 고스락만 살짝 보였습니다. 11분을 쉰 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봉들을 오르내리고자 591봉을 출발했습니다. 철쭉과 싸리들이 얼굴을 때리는 길도 걸으며 몇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려 592봉 바로 밑에까지 갔어도 이렇다할 십자안부를 보지 못해 어느 곳이 새목이재 인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 능선 길 아래로 지형도에 나와 있지 않은 최근에 터널을 뚫고 냈을 왕복2차선의 깔끔한 차도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13시42분에 전망이 별로 좋지 않은 592봉에 올랐다가 바로 왼쪽으로 꺾어 소나무 숲길로 내려섰습니다.
14시37분 해발 430미터의 말티재에 다다랐습니다.
592봉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따라 2개의 580봉을 오르내리면서 봉분이 사라진 이장된 묘지와 전주이공/고령신씨 합장묘를 차례로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속리산이 가까워서인지 5백 미터 아래로 내려서는 안부가 거의 없을 정도로 높은 산줄기만을 오르내렸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묘지가 정맥 길에 안치되었음을 보았습니다. 대다수의 묘지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고 이장하고 남은 묘지 터가 썰렁하게 보여 굳이 이 높은 곳에 선조들을 모셔야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580봉에서 오른 쪽으로 난 급경사 길을 내려서 정자와 유래비가 서있는 말티재로 내려서 맥주 한 캔을 사마시며 찬찬히 주변 풍광을 둘러보았습니다. 저녁 햇살을 받아 붉게 불타고 있는 단풍나무 잎들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보은에서 장재저수지를 거쳐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따라 말티재를 넘었을 때는 엄청 길고 높다 했는데 고개 마루의 높이가 겨우 430미터밖에 안된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신라의 의상대사가 인도에서 돌아와 노새 등에 불경을 실고 넘었으며 고려태조 왕건이 엷은 돌들을 깔았다는 말티재 고개마루에서 5-6분을 쉰 후 차도를 가로질러 다시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15시20분 540봉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말티재를 건너 산길로 들어선 후 13분을 올라 전주이씨 묘를 지났고 조금 후 전망이 좋은 넙적한 바위에 다다르자 속리산 천황봉이 남동쪽으로 확연하게 보여 떨리는 손으로 부지런히 카메라셔터를 눌러댔습니다. 오른 쪽으로 “숲 속의 집” 길이 갈리는 이정표가 세워진 봉우리에서 왼쪽 길로 내려섰다 구릉을 넘어 “숲 속의 집” 이정표가 다시 나타나는 540봉 쉼터에 올라섰습니다. 키가 작은 소나무와 진달래나무가 혼재된 길을 지나 531봉에 올랐다가 가파른 내림 길을 따라 안부로 내려섰습니다. 다시 440봉을 오르내려 420봉에 도착해 사과로 요기를 하며 7-8분을 쉬었습니다.
16시2분 420봉을 출발했습니다.
7분후 북쪽의 갈목리와 남쪽의 황해동을 잇는 화엄이재로 내려서자 국립공원구역을 알려주는 표지기둥이 서 있었습니다. 오른 쪽 남사면이 까까비탈인 완만한 능선 길을 서서히 올라 절애의 기암절벽이 남사면을 받혀주는 545.7봉에 다다랐습니다. 이름을 얻지 못한 꽤 많은 높은 봉우리 중 이번 산행에서 처음으로 삼각점을 확인 한 것이 545.7봉이었습니다. 남쪽 아래 505번 지방도가 지나는 저녁 한 때의 마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난 후 왼쪽으로 확 꺾어 갈목재로 향했습니다. 십수분여 완만한 능선 길을 걷다가 왼쪽으로 난 급경사 길로 내려가 505번 차도가 바로 앞에 보이는 묘지에 도착했습니다. 땀에 젖은 내의를 갈아입고 속리산 주차장의 택시를 부르느라 십수분이 걸렸습니다.
17시18분 505번 지방도가 지나는 해발 390미터의 갈목재로 내려섰습니다.
7시간 반의 “나홀로 종주산행”을 마치고 4-5분간 택시를 기다리는 시간이 가슴 뿌듯한 환희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천황봉을 오르는 마지막 한 구간만 남아 있는데 이 구간은 친구와 같이 하기로 되어 있어 “나홀로 종주”는 이번으로 끝난 셈이어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귀경 길은 기다림에 지쳐 고됐습니다.
17시40분에 속리산을 떠난 버스가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이 10시 18분이었으니 무려 4시간 반이 넘겨 걸렸습니다. 보은읍내와 과 청주터미널에서 대기시간이 반시간이 넘었고 야간 공사로 광주가까이서 40분은 지체되어 버스 안에서 나홀로종주의 기쁨을 되새기지 않았다면 정말 지겨울 뻔 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다음 주의 한남금북 종주산행을 그려보며 이번 산행기를 맺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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