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산림청선정 명산100산/명산100산 탐방기

67.금정산 산행기(1-2)

시인마뇽 2007. 2. 15. 21:08

                                                            금정산(2) 

 

                               

                               *산행일자:2011. 7. 25일(월)

                               *소재지   :부산/경남양산

                               *산높이   :금정산802m, 계명봉602m, 갑오봉720m

                               *산행코스:산성고개-제4망루-북문-금정산고당봉-갑오봉-계명봉

                                              -지경고개

                               *산행시간:7시8분-14시40분(7시간32분)

                               *동행      :나홀로

 

 

  낙동정맥 종주 길에 부산의 명산 금정산(金井山)을 올랐습니다. 이번에 오른 금정산을 살펴보는데 도움 되는 키워드는 금정(金井)과 금정산성(金井山城)일 것입니다. 금정은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바위샘으로 금샘으로도 불리며, 금정산성은 금정산에 터 잡은 산성입니다.

 

 

 

 

  금정산 정상 부근에 황금색 물이 가득 차있는 샘이 하나 있는데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梵川)에서 내려와 이 샘에서 놀다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금정산(金井山)이라는 산 이름과 이 산 아래 범어사(梵魚寺)라는 절 이름이 이 전설에서 유래했음은 물론입니다. 이 전설이 생성된 시대를 가늠할 수 있는 단초는 지난 4월에 다녀온 만어산(萬魚山)과 관련한 다음 전설에서 찾아야할 것 같습니다. “옛날에 알이 해변에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당시 나라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는데, 연못에는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萬魚山)에는 나찰녀 다섯 명이 독룡과 오가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따금 번개가 치고 비가 와서 4년이 지나도록 오곡이 영글지 않았다. 왕은 주술을 막고자 했으나 하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에게 청하여 설법을 한 연후에야 나찰녀가 오계(五戒)를 받아 이후로는 폐해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바위로 변하여 골짜기에 가득 찼는데 각기 쇠북과 경쇠소리가 났다.”라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동해의 물고기가 바위덩어리인 너덜로 변한 곳에 세운 절이 바로 만어사(萬魚寺)입니다. 고당봉에서 범어사로 내려가는 길에도 만어산에서 본 것과 같은 너덜이 꽤 넓게 퍼져있고 이 산 아래 부산에 가야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정산도 김수로왕이 세운 가야의 영토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금정산도 만어산과 마찬가지로 가야에는 더할 수 없이 상서로운 산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국토의 70%를 산이 차지하고 있으니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에 산성이 많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중국의 침략을 자주 받아온 고구려는 들판의 곡식을 다 거두어 성안으로 옮겨놓고 성을 지키는 작전으로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들판을 텅 비웠다하여 청야작전으로 알려진 고구려의 방어 전략이 유효했던 것은 산성 안에서 지구전을 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태종이 안시성 성주 양만춘에 패해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도 안시성이라는 견고한 성을 부수지 못해서였습니다. 백제는 말갈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북한산성을 쌓았고 신라는 청주에 상당산성을 축성했으며 고려의 윤관은 천리장성을 쌓고 여진을 성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이번에 조선조 숙종 때 쌓은 금정산성의 성곽 길을 걸으며 유난히도 산성과 인연이 깊은 숙종임금을 떠올렸습니다. 숙종 때 개축되었거나 축성된 산성이 꽤 여럿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청의 재침에 대비해 반 년 만에 후딱 석성으로 개축한 북한산성입니다. 청주의 상당산성도 다시 쌓았고 남한산성에 붙여 쌓은 옹성도 숙종 때 축성한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남한 땅 최장의 금정산성을 여기 금정산에 석성으로 축성한 것도 숙종 때였다 합니다. 숙종임금께서 여기저기에 산성을 이리 많이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조 임금 중 영조 다음으로 오래 집권하면서 왕권을 강화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입니다. 숙종은 장희빈에 놀아난 유약한 임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숙종은 세 번의 환국을 통해 신하들을 물갈이하면서 왕권을 강화했기에 엄청난 역사일 수밖에 없는 산성을 몇 개씩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쌓은 금정산성이 구한말 일본의 침략을 막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은 화력이 강화된 대포가 성을 쓸모없게 만들었고 망해가는 조선의 조정이 전쟁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일본에 항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침7시8분 산성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온천장역 부근의 찜질방 백악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역 건너편 정류장에서 203번 버스를 탔습니다. 도시를 빠져나가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산성고개에서 내려야 할 것을 동문정류장에서 한 정거장 먼저 내려 쓸데없이 10분가량을 걸어 올랐습니다. 출발지인 산성고개의 고도가 해발400m는 넘는 듯해 해발802m의 금정산을 오르는 이번 산행이 그리 힘들 것 같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산성고개에서 금정산의 정상봉인 고당봉에 이르기까지는 금정산성의 성곽을 따라 오르는 완만한 길로 이어져 가파른 길로 해발고도를 500m가깝게 높여야 했던 전날의 백양산 산행보다 훨씬 수월할 것 같았습니다. 첫 번째 멈춰선 동문(東門)은 아치형 대문과 누각 그리고 좌우의 성곽으로 이루어졌는데 일반 성곽에서 보지 못한 여장(女墻)이 여기 성곽에서 보였습니다. 형형색색의 군기가 꽂혀 있는 동문에서 조금 올라가자 작은 옹성을 쌓아도 될 만큼 성곽을 내다 쌓았습니다. 평상이 놓인 소나무 밭 쉼터를 지나 편안한 길을 한참 걸어 샘터에 도착한 시각이 8시5분이었습니다.

 

 

 

 

  8시47분 제4망루에 다다랐습니다. 샘터를 지나서도 오름 길은 여전히 넓고 경사가 완만해 거추장스러운 긴바지를 반바지로 갈아입었습니다. 구름이 가셔 나무가 없는 곳을 지날 때는 햇살이 따갑기도 했지만 때 맞춰 부는 바람 덕분에 그리 덥지 않았습니다. 119조난위치표지판에 금정산제3망루지점으로 표시된 곳을 지났으면서도 길에서 떨어져 있는 제3망루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걸어 나지막한 봉우리에 오르자 제4망루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훤히 보였습니다. 20-30m가량 고도를 낮추었다가 넓은 판 떼기 계단을 올라 서낙동강이 분류되는 지점의 낙동강 물줄기를 내려다보면서 이번 산행으로 낙동강본류와의 동행이 끝이 난다 싶어 아쉬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능선 오른쪽 끝에 쌓은 성곽을 따라 걸어 제4망루에 다다랐습니다. 동쪽 아래 자리한 화정저수지가 선명하게 눈에 잡혔고 서쪽 아래로 뻗어 내려가는 성곽도 잘 보였습니다. 바로 위 의상봉을 왼쪽으로 우회하며 이 산 어딘가에 원효봉도 있을 것이다 했는데 제 추측이 틀리지 않아 9시15분에 해발687m의 원효봉에 도착했습니다.

 

 

 

  금정산성은 성곽의 길이가 17km나 되는 국내 최대의 산성입니다. 이 성 역시 서울의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처럼 계곡을 가운데 두고 능선을 따라 쌓은 포곡식 산성입니다. 이 성은 서문에서 시작하여 시계반대 방향으로 제1망루(상계봉)-남문-제2망루-동문-제3망루-제4망루-북문-고당봉-494m봉을 거쳐 다시 서문으로 이어지는 고구마 모양의 포곡식산성인데 이 성이 다른 산성과 다른 점은 성안에 성을 쌓아 성을 남북으로 양분한 것으로 제4망루와 서문을 잇는 산성이 바로 성안의 성인 것입니다. 이번 낙동정맥 종주로 밟아보는 금정산성은 제2망루에서 고당봉까지 이어지는 동쪽의 성곽으로 그 길이가 전체 성곽의 반쯤 될 것 같습니다. 언제고 나머지 반도 마자 걸어 금정산성탐방기를 써 볼 생각입니다. (이 부분 개념도를 보고 쓴 것이어서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양해 말씀드립니다.)

 

 

 

  10시22분 해발802m의 고당봉에 올라섰습니다. 김유신장군이 낭도들을 원효봉에서 훈련시켰다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틀리지 않다면 그 훈련 과목에 고원이 펼쳐지는 영남알프스의 명산들을 이어 걷는 종주산행이 들어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제4망루보다 화정저수지가 더 가깝게 보이는 북쪽의 원효봉이 고도가 조금 낮은 의상봉과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는 것이 북한산의 원효봉과 의상봉과 다르지 않은 것을 순위를 매기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알고 있다면 요석공주와 연을 맺어 설총을 낳은 원효대사가 홀로 도를 닦은 의상대사보다 한 발 앞선 스님이라고 우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선 안부에 자리한 북문은 앞서 지나온 동문에 비해 조촐했습니다. 네모반듯한 대문과 팔작지붕의 누각이 평범해 보이는 북문을 통과해 오른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옛날부터 범어사주차장으로 이어졌기에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서울서 내려온 독립 운동가들이 물금역에서 내려 북문을 거쳐 청운암으로 갈 때 이 문을 거쳐 갈 수 있었습니다.

 

 

 

  좌우에 자연습지가 들어선 북문을 떠나 고당봉으로 향하는 길이 300m가량 고도를 높여야 할 만큼 가팔랐습니다. 오름 길 중간에 오른쪽으로 0.5Km 떨어진 금정(금샘)을 다녀가지 못하고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안전한 길을 따라 고당봉을 오르자 시야가 탁 트여 낙동강과 그 언저리 산과 들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김해의 신어산과 동신어산, 그리고 지난 4월 종주를 마친 낙남정맥의 끝자리에 자리한 매리마을, 양산천이 낙동강에 합류되는 합수점, 서낙동강이 분기되는 지점의 낙동강 다리들이 선명하게 보여 이제껏 보아온 낙동강의 부분들을 모두 모아 놓은 것 같았습니다.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는 금정산성이 따랐고 저는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마루금을 쫓았습니다. 고당봉에서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가 이른 안부에서 북쪽으로 조금 진행해 왼쪽으로 호포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를 10시45분에 지났습니다.

 

 

 

 

  11시41분 해발720m의 갑오봉에 올랐습니다. 호포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낮은 키의 산죽 길을 지나 금정산정상에서 0.7Km 거리의 “가산/금정산성/계석마을”의 삼거리에 이르러 4년 이 산을 오를 때 출발지로 삼았던 양산의 계석마을이 6.6Km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목을 보았습니다. 계석마을 방향으로 그대로 직진해 진행하다 솔밭을 만나 점심을 들었습니다. 이번 산행은 코스가 짧아 오후 3시 안에 종주산행을 모두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좀 이르기는 하지만 점심을 들면서 모처럼 20분 가까이 긴 시간 편히 쉰 후 11시15분에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마루금 능선을 왼쪽으로 에돌아 다시 능선에 합류한 후 조금 내려가자 오른 쪽으로 범어사 길이 갈리는 안부삼거리에 내려섰습니다. 그대로 직진해 산 중턱의 샘터를 지났고 다시 만난 삼거리에서 장군봉으로 오르는 왼쪽 길로 올라갔습니다. 장군봉을 지척에 두고 글자가 흐릿한 표지목이 서있는 삼거리에서 오른 쪽 길로 걸어 능선으로 올라섰습니다. 장군봉과 그 서쪽의 갑오봉에 이르는 장군평전을 지나면서 이 길을 한 번 지난 4년 전의 산행을 하나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머리로 다시 공부를 해보겠다고 방송대에 입학을 했으니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지형도에 나와 있지 않은 갑오봉에 앙증맞은 정상석이 서 있어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13시35분 해발602m의 계명봉에 올랐습니다. 갑오봉에서 서쪽으로 빤히 보이는 계명봉을 오르기 위해 300m 가량 고도가 낮은 안부로 내려서야하는데 이 길도 적지 아니 가팔라 조심해서 내려갔습니다. 갑오봉 출발 1시간이 조금 지난 12시45분에 안부삼거리에 이르러 잠시 숨을 돌린 후 가파른 계명봉 길로 올라섰습니다. 고도차가 200m가량 되고 걸어 올라야 할 길이 400m로, 대략 계산한 빗변 대 높이의 비율인 사인(sine) 값이 1/2이기에 기울기가 30도 가량 될 텐데 체감되는 경사는 그보다 훨씬 더 가팔라 반 쯤 올라가 한번을 쉬었습니다. 길 양옆으로 나일론 줄을 매어놓은 통나무계단 길을 걸어 계명봉에 올라서자 “산새들의 합창” 산악회(?)가 세운 깔끔한 정상석이 환히 웃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 바위로 자리를 옮겨 마치 항공촬영을 하듯이 금정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대찰 범어사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는데 참으로 포근해 보였습니다.

 

 

 

 

  14시40분 지경고개에 도착했습니다. 북문에서 시작된 범어사를 오른 쪽으로 끼고도는 능선종주는 계명봉에서 끝났고 정맥 길은 범어사와 반대방향인 북동쪽으로 이어가면서 부산시와 경상남도를 남북으로 갈랐습니다. 제2망루에서 시작된 금정산성은 고당봉에서 끝났지만 이 산이 낳은 명찰 범어사로 내려가는 길은 고당봉에서 계명봉에 이르는 안부마다 오른쪽으로 나 있어 하루 종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 여느 정맥 길과는 달리 평일인데도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계명봉에서 지경고개로 내려가면서 뒤늦게 진짜 정맥 길에 들었다 싶었던 것은 비실이부부 등 낙동정맥 종주꾼들이 걸어놓은 반가운 표지기가 길 안내를 해주었고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대신해서였습니다. 계명봉에서 반시간 이상 내려가 잡초들이 무성한 휴경지 밭가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이 길 지난 한분의 산행기에 풀밭 길을 지난 것으로 나와 있어 긴 바지를 갈아입고 들어섰다가 혹시라도 풀독이 오를까 걱정되어 장마 뒤 끝에 졸졸 물이 흐르는 왼쪽 물길을 건너 큰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견공들의 습관성 합창에 주눅 들지 않고 시멘트도로를 따라 내려가 1077번 도로가 지나는 지경고개에 도착해 4구간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고개 마루에서 오른 쪽 아래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가 16번 버스를 탔습니다. 몇 분 안 걸려 다다른 범어사역에서 하차해 부산역으로 이동해 귀가했습니다.

 

 

 

 

  이번 종주산행으로 부산과 양산의 시계까지 진출했습니다. 그간 네 번에 걸친 종주산행 덕분에 부산의 명산을 여럿 올랐습니다. 몰운대에서 금정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오르내리며 왼쪽 산자락에 바짝 붙어 흐르는 낙동강과 그 분류인 서낙동강도 보았습니다. 낙동강의 도도한 물 흐름을 지켜본 것은 저만이 아닙니다. 낙동강을 지켜보는 영원한 강지기는 제가 아니고 금정산입니다. 대하소설 “조선총독부”의 작가 유주현 선생은 “천년을 한가지로 흐르면서 세월을 셈하는 것은 오로지 강물뿐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천년을 한가지로 흐르면서 금정산이 겪어낸 세월을 바로 낙동강이 셈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금샘에 어린 범어의 전설과 금정산성을 쌓느라 고초를 겪었을 민초들의 애환을 증언해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낙동강 뿐입니다. 이런 낙동강을 금정산이 나 몰라라하고 고개를 외로 꼬고 앉아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강 건너 서쪽의 동신어산과 손잡고 낙동강을 지켜온 것이 금정산일 것입니다. 낙동강이 하구에 키우고 있는 크고 작은 속등들을 잘 지켜 등으로 현신시키고, 물 위로 드러난 등들을 보살펴 을숙도처럼 덩치를 키우도록 보살피며, 강 건너 동신어산에 부탁해 서쪽으로 새끼 친 서낙동강이 막힘없이 흐르도록 지켜주는 일들 모두가 금정산이 맡아 해왔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강에 물좀 댄다고 산을 강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산행사진>

 

 

 

 

 

 

 

 

 

 

 

 

 

 

 

 

 

 

 

 

 

 

 

 

 

 

 

 

 

 

 

 

 

 

 

 

 

 

 

 

 

 

 

 

 

 

 

                                          금정산(1)

 

                              *산행일자:2007. 2. 11일

                              *소재지  :경남양산/부산시

                              *산높이  :802미터

                              *산행코스:계석마을 -장군봉-금정산-북문-범어사주차장

                              *소요시간:12시10분-16시50분(4시간40분)

                              *동행       :소나무산악회

 


  하루 종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때가 허다한 정맥 길을 저 혼자서 종주하다보면 사람이 그리워져 수많은 인파로 북적대는 이름난 산을 찾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제도 그래서 산림청에서 선정한 “명산 100산”을 올랐습니다. 지난 수요일 금남정맥에 들어선 지 거의 9시간이 다 되어 종주산행을 마치고 나자  또 다시 명산100산을 다녀와야겠다는 충동이 일었습니다. 고등학교 친구가 이미 3년 전에 마친 명산100산 탐방을 저도 한번 끝내보겠다고 뒤늦게 나선 것은 한 십년 동안 이산 저산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오르내린 결과 작년 말로 명산 100산 중 77산을 올랐고 산행기를 쓴 명산만도 65산이나 되어 앞으로 2-3년이면 나머지 산들도 모두 올라 명산100산 탐방기를 남길 수 있겠다는 욕심이 동해서였습니다.


  거리가 너무 멀어 혼자서는 도저히 하루에 다녀올 수 없는 부산의 금정산을 올라 어제로 명산 100산 중 78산의 탐방을 마쳤습니다. 거의 모든 안내산악회들이 이미 오른 적이 있는 태백산, 계방산, 선자령이나 덕유산 등 눈꽃이 볼 만한 명산으로 코스를 잡았는데, 마침 서울의 한 산악회가 이제껏 오르지 못한 부산의 금정산을 가겠다고 해 주저하지 않고 이 산악회의 산 나들이에 합류했습니다. 명산 100산 중 아직도 오르지 못한 산은 거의 다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의 산들이어서 이번 같은 호기를 놓쳐서는 명산탐방의 뜻을 이루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낮 12시10분 양산시내 표지석이 서있는 금정산 북쪽 기슭의 계석마을에서 하루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전날 밤 짐을 꾸려 놓았기에 망정이지 밤새 설친 잠이 뒤늦게 들어 아침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중간에 택시로 바꿔 타지 않았으면 버스를 타지 못할 뻔 했습니다. 택시로도 버스시간을 댈 수 없다는 생각에서 산악회에 전화를 했더니 경부고속도로변 만남의 광장에서 잠시 정차하겠으니 서초구청으로 오지 말고 바로 그곳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말씀을 해주어 고마웠습니다. 경부-영동-내륙고속도로 순으로 2시간 가까이 달려 충주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지 아침에 눈뜨고 나서부터 계속 서두른 데다 간신히 버스에 올라서인지 정신이 멍했습니다. 김천에서 다시 경부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내달리다가 양산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이번 산행의 출발지인 계석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계석마을 출발해서 5-6분 후 소나무와 편백나무(?)들이 주종을 이룬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가파른 길을 따라 산소가 들어앉은 무명봉에 오르기 까지  20분 동안 해발 고도를 230미터가량 높이느라 다리 밸이 많이 당겼습니다. 묘지봉에서 장송 숲을 지나 넓은 임도가 지나는 안부로 내려섰다가 계단 길을 올라 활엽수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13시44분 두 번째 묘지봉에 올라섰습니다.

임도 안부에서 된비알의 오름길을 반시간 가량 올라 동쪽 사면을 받쳐주는 깎아지른 암벽과 옆자리의 평평한 암봉에 올라 봄을 기다리는 두 분의 여심을 함께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두 번째 묘지봉으로 향하는 동안 물오른 초록색의 나뭇잎들이 눈길을 끌었는데 이 밖에는 이렇다 할 봄의 징후를 찾아 볼 수 없어 남도의 봄소식을 당겨 듣고자 천리 길을 내달려온 저로서는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1990년대에 한 회사의 충호남 영업부장으로 일하면서 이 맘 때쯤이면 목포-완도-여수로 이어지는 남도의 해안 길을 자주 지나곤 했습니다. 길섶에 파릇파릇 돋아난 풀잎들을 보면서 서울보다 두서너 주 먼저 찾아오는 이 봄이 이 지방 사람들의 혼을 일깨워 남도예술을 만들었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뛰었는데 이번에는 이런 감흥이 전혀 일지 않았습니다. 묘지봉을 막지나 일행 분들과 함께 점심을 들었습니다. 혼자서 정맥 길을 종주할 때에는 시간을 절약하고자 인절미나 김밥 등 행동식을 서서 먹곤 해온 제게는 다른 분들이 준비해온 쑥떡과 과일을 함께 앉아서 든다는 것이 참으로 고맙고 호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 3개를 넘어 멀찌감치 비껴 보이는 암봉이 정상임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두 번째 묘지봉을 출발해 20분 가깝게 오르자 본격적인 암릉길이 시작됐습니다. 10여분을 아슬아슬한 암릉길을 걸어 돌탑이 세워진 726.7봉에 오르자 전망이 일품이었습니다. 산 아래 오른 쪽으로는 양산천의 물을 받아 태평양으로 내달리는 낙동강 줄기가 한눈에 잡혔고 왼쪽 아래로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14시44분 해발 735미터의 장군봉에 올랐습니다.

돌탑봉에서 내려섰다가 20분 가까이 걸어 표지석이 서있는 장군봉에 오르자 황금빛의 넓은 억새밭이 시원스레 눈앞에 전개되었습니다. 낙동정맥 길은 억새밭을 가로 질러 곧바로 나 있고 줄곧 앞장섰던 회장분이 억새밭 삼거리에서 저희 후미를 기다려 안내해준 정상 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졌습니다. 잣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 겨우 내내 생기를 잃었던 산죽들의  푸르름을 보고서야 비로소 이 봄의 문지방을 넘어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군봉 출발 46분 후에 두 개의 봉우리를 왼쪽으로 에돌아 정상 바로 앞의 평평한 안부사거리에 다다랐습니다.


  15시42분 해발802미터의 금성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안부사거리에서 정상을 옆 질러 범어사로 가는 왼쪽 길을 버리고 곧바로 산 오름을 계속했습니다. 로프를 붙잡고 바위 길을 올라 정상석이 세워진 이 산의 정수리에 올라서자 금성산성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성도 분명 사람들이 만든 인공축조물이 분명한데도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오랜 세월 산식구들과 벗하는 동안 자연의 때가 많이 끼었기 때문입니다. 해양도시 부산에 사는 시민들이 공휴일에 즐겨 찾는 곳이 산 말고도 바다가 더 있어서인지 부산의 진산 금정산의 정상이 생각보다 붐비지 않았습니다.


  16시10분 금성산성 북문을 지났습니다.

정상에서 하산하여 고모당과 세심정을 차례로 지나 20분 후에 여기 산성의 북문에 당도했습니다. 정상에서 시계방향으로 정상-의상봉-548봉-상계봉-494봉-정상을 잇는 고구마모양의 금정산성은 그 둘레가 장장 17키로나 되는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으로 이조 숙종 29년인 1,703년에 축성된 석성입니다. 계곡에다 만든 서문을 비롯해 능선 상의 동문, 남문, 북문 등 모두 4개의 문이 있고 현재는 4키로의 성곽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합니다. 한 때 요염한 희빈 장씨에 빠져 인현왕후를 내쫓았던 숙종은 재위 중에 금정산성 외에도 북한산성과 상당산성을 더 축성한 것으로 보아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었던 바와는 달리 강력한 군주였나 봅니다. 북문을 중심해서 성 안 밖으로 늪지를 보호하고자 쳐 놓은 줄을 보고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천성산의 늪지에 살고 있는 도롱뇽이 생각났습니다. 도롱뇽의 생존권 수호를 위해 천성산 밑으로 고속전철이 지나는 터널을 뚫는다고 어떤 시민단체는 도룡뇽을 대신해 공사착공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어떤 여 스님은 의학적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100일 단식을 감행해  터널공사를 막았습니다. 대법원에 의해 터널공사를 계속해도 좋다는 최종판결이 내려졌지만 몇몇 정신 나간 시민단체나 특정인에 의해 국가의 대역사가 저지되어 엄청난 규모의 국민세금이 낭비되는 어리석은 일은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범어사로 내려서며 왼쪽 골짜기를 바위덩어리들이 꽉 메운  너덜겅(Block Stream)을 보았습니다. 가야의 김수로왕 때 용왕의 아들을 따라온 일만 마리의 물고기들이 변해서 너덜겅이 생겼고 그래서 절 이름을 만어사로 정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밀양의 만어사 너덜겅에 비해 규모는 훨씬 작겠지만 암괴 하나하나의 크기는 대단했습니다. 이 산 꼭대기에 황금색 물이 가득 차있는 우물이 있었는데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놀다 갔다는 데서 금정산의 산 이름과 범어사의 절 이름이 유래했다는 전설의 기본 틀은 만어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6시30분 범어사 돌담길을 지났습니다.

위 터의 절 아래에 쌓은 돌담과  아래 터 절위로 쌓은 돌담사이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돌담길이 그 길이는 짧았지만 산에서 내려와 이 절을 지나는 뭇 중생들에 대웅전의 부처님을 뵙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낸 길 같아서 눈길이 갔습니다. 웅장한 범어사를 서둘러 돌아보며  대웅전과 석탑을 카메라에 옮겨 담아 왔습니다.


  16시50분 범어사 바로 아래 주차장에서 하루산행을 마쳤습니다.

금성산의 진수인 금성산성을 돌아보지 못하고 산행을 마쳐 아쉽기는 했어도 이 멀리 금정산으로 산행지를 잡아 또 하나의 명산을 탐방할 수 있도록 안내해준 산악회가 고마웠습니다.


  상경 길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분이 제게 부처님이 여러 분 계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기독교나 무슬림교에서 한 분의 절대자만을 모시고 있듯이 불교에서도 당연 석가모니 한 분만을 부처님으로 모시는 줄 알았는데 석가모니를 주불로 그리고 양 옆으로 약사님과 비로자나님 등 3분의 부처를 모시는 곳이 대웅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부처의 참 뜻이 “먼저 깨달은 사람”일진데 이 세상에 부처님이 여러분 계시다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을 이제껏 저만 몰랐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분들이 성불해 이 땅을 서방정토로 만든다면 또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범천에서 내려와 이 땅에서 놀다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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