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백두대간·정맥·기맥/호남정맥 종주기

호남정맥 종주기 14 (곰치-큰덕골재-예재)

시인마뇽 2007. 9. 26. 16:33
                                   호남정맥 종주기 14


                  *정맥구간:곰치-큰덕골재-예재

                  *산행일자:2007. 9. 22-23일   

                  *소재지  :전남화순/장흥/보성    

                  *산높이  :봉미산506m, 군치산412m, 고비산422m, 봉화산427m

                  *산행코스:@22일:곰치-봉미산-큰덕골재-봉화산...(구례리산자락)

                                  @23일:                      (예재)...봉화산-예재

                  *산행시간:@22일:7시37분-18시40분 (총11시간3분)

                                  (구간종주 9시간57분/정맥탈출알바 1시간6분)

                                  @23일:8시8분-9시55분(총1시간47분)

                                  (구간종주 47분/정맥복귀1시간)

                                  @총계:12시간50분(구간종주10시간44분) 

 

              (10월1일 예재의 날머리를 찍은 사진임)


  몇 십 년 만에 산자락에서 혼자 밤을 지새우며 훨훨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보았습니다.

1970년대 초 만해도 어느 시골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반딧불이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공존을 모색하지 않고 홀로 잘 살기를 고집해온 사람들의 욕심 때문일 것입니다. 반딧불로 불을 밝혀 책을 읽어 성공했다는 옛 이야기는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전설 같은 것이기에 반딧불이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고 해도 누가 그리 애틋해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환경운동가만은 그래도 슬퍼하지 않겠는가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이라고 진정 슬퍼서 울기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환경보호운동을 강화는 하겠지만, 진정 반딧불을 사랑해서 오매불망 조가(弔歌)라도 지어 받칠 것으로 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환경보호운동도 결국은 우리 인간들이 영원히 잘 살기 위한 몸짓이지 반딧불 그 곤충의 삶을 위해 벌이는 운동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호남정맥의 산자락에서 만난 반딧불을 제가 진정 반긴 것은 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 더욱 그랬습니다. 정맥 길에서 벗어나 총소리가 연신해서 들리는 골짜기로 잘 못 들어갔다가 산자락으로 피해서 밤을 새야했던 딱한 처지에 놓여 있어서 더 반가웠을 것입니다. 밤새도록 총소리가 계속 나는 데 어느 산짐승이 저와 같이 밤을 새겠다고 나서겠습니까만 반딧불은 총소리가 전혀 무섭지 않는 듯 제 주위를 맴돌며 얼마고 저와 시간을 같이해 주었습니다. 낮 동안 재잘대던 산새들은 숨죽이고 있고 오직 가을살이 풀벌레들만이 간간히 그들 특유의 노래 소리를 들려주는 깜깜한 산 속에서 별안간 넘쳐 나는 밤의 시간을 감내하기가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일정 간격으로 울리는 총소리에 단 십분도 눈을 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날밤을 밝혀야 했던 제게는 시간과 골짜기물만 흐르고 있을 뿐 다른 것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숨죽이고 있는 정지 상태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렸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지 않고도 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별 오만가지 생각으로 고통스럽게 시간을 죽이는 중 반딧불의 출현은 저로 하여금 아련한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해주어 고맙게도 추억을 반추하며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게 고마움을 준 반딧불과 풀벌레들의 생존을 위해 저도 어느 환경운동가들 못지않게 애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곰치고개에서 예재까지 제 걸음으로는 11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아 화순의 이양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곰치고개로 옮겨 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50분만 더 걸으면 목적지인 예재에 닿을 수 있는 봉화산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해 놓고 이 봉화산에서 길을 잘 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내려가다 결국에는 이 산의 한 자락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이튿날 아침 봉화산을 다시 올라 예정했던 곰치-예재 구간의 정맥종주를 마쳤습니다. 생각지 못한 알바로 생고생을 했지만 반딧불과 풀벌레들을 친구로 사귀는 생각지 못한 소득을 얻었으니 이번 호남정맥 종주가 결코 쓸데없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9월22일 아침 7시37분 곰치재를 출발했습니다.

지난 5월  팔공산을  함께 오른 성봉현님과 조부근님을 오랜만에 만나 맥주 몇 잔을 걸친 후 전날 밤 11시  넘어  고속버스에 올랐습니다. 광주로 내려가 광천터미널에서 시간을 보내다 인근 유흥가의 식당에서 해장국을 사든 후 아침5시40분발 이양 가는 화순군 군내버스를 탔습니다. 새벽을 달려 6시10분 경 화순을 들른 버스는 능주와 청풍을 거쳐 7시가 조금 못되어 이양에 도착했습니다. 이양에서 9천원에 택시를 잡아 곰치휴게소로 이동했습니다. 광천터미널에서 곰치가는 7시10분발 첫 버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양에 와서 택시를 탄 것은 곰치-큰덕골재-예재 구간을 한번에 종주하려면 산행시간을 최소한 11시간은 확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두 주전에 내려선 곰치휴게소에서 커피를 빼 든 후 고개마루로 사진을 찍고자 했으나 바테리 충전안되어 헛탕을 쳤습니다. 산행시간도 빡빡한데 오히려 잘됐다 하며  들머리로 올라서자 이슬에 젖은 풀숲길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지자락을 다 적시고 풀숲을 헤치고 나갔는데 이내 길이 끊겨 버려 오른 쪽 능선으로 올라섰습니다. 들머리 출발 10분 후에 제 길을 만나 것으로 보아 들머리에 올라선 후 길을 잘 못 든 것이 분명했습니다. 제 길로 들어선 후로는 오름 새도 완만하고 길도 잘 나있어 속도를 냈습니다. 능선 길을 따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다가 급하게 비알 길을 올라 첫 번째 헬기장 봉우리에 올라섰습니다.


  8시29분 해발506m의 봉미산에 올랐습니다.

삼각점이 세워져 있고 “준. 희” 두 분의 “봉미산” 표지기가 걸려 있어 이 봉우리가 정상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가장 높은 봉미산 정상에 오르자 헬기장이 넓게 들어서 시원했지만 안개가 가시지 않아 주위의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10여분을 쉰 후 봉미산을 출발해 몇 걸음을 옮겨 놓자 바로 앞 구간에서 자취를 감췄던 꼬막 껍질이 다시 보여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피재를 지나서는 바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다시는 눈에 띄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조개껍질이 다시 나타나 저와의 끈질긴 동행이 아직 남아 있다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비교적 편안한 길을 걸어 봉우리를 두개를 넘어 해발494m의 세 번째 헬기장에 도착하자 해가 나기 시작해 지나온 연봉들을 뒤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경사가 아주 급한 내리막길을 20분 가까이 걸어 왼쪽 아래로 길이 갈리는 삼거리 안부에 도착했습니다.


  10시5분 해발496m의 숫개봉에 도착했습니다.

삼거리 안부에서 산길을 따라 가녀린 모습의 연붉은 꽃들이 연이어 피어 있어 꾸준한 오름 길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391.4봉에 올랐어도 삼각점이 없어 소수점아래 한 자리 수까지 적혀있는 지도상의 고도를 믿어야 하는지 의심이 갔습니다. 내림 길은 잠시였고 묘지를 지나 올라선 평평한 능선 길이 한동안 계속 되다가 숫개봉에 다가서자 된비알의 오름 길로 변했습니다. 봉미산에서 이 봉우리까지 지도에 적혀 있는 2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1시간24분만에 도착해 해떨어지기 전에 예재에 이를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이 놓였습니다. 숫개봉이라 써 놓은 글씨가 희미하게 적혀 있는 희뿌연 아크릴판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어 그나마 이 봉우리가 그 봉우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음을 고마워하면서도 이 산을 관리하는 지자체에서는 장흥군처럼 이정목을 세울 수는 없는 것인가 많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10분을 쉬면서 등의 땀을 식힌 후 거의 150도를 확 꺾어 내려서는 길로 들어서자 이제껏 올라온 길로 되 내려가는 것이 아닌 가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임도로 내려서는 길에 맨 흙의 층계를 여러 곳 지나며 걱정했던 대로 엉덩방아를 찧어 바지를 흙 범벅으로 만들었습니다. 풀들이 잘 자란 임도를 따라 오른 쪽으로 잠시 걸어 왼쪽 산길로 들어섰는데 알고 보니 이 길은 366봉을 우회하는 길이었습니다. 깊숙한 산 속에 자리한 묘지에는 대부분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후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만 추석이 가까워도 어느 후손하나 찾아오지 못했던지 4기의 봉분이 들어선 넓은 묘지가 풀밭으로 변해버려 안타까웠습니다. 420봉을 오른 후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얼마고 내려서다가 다시 올라 삼각점이 세워진 431봉에 다다른 시각이 11시15분으로 숫개봉을 출발해 딱 1시간이 걸렸습니다.


  12시12분 해발412m의 군치산에 다다랐습니다.

때맞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숨을 돌린 후 431봉에서 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그리 길지 않은 바위 길을 조심해서 내려섰습니다. 왼쪽 아래에서 들려오는 기차소리가 먼 옛날의  칙칙폭폭 증기기관차 소리는 아니었지만 먼 곳에의 동경으로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싶었습니다. 급하게 내려섰다가 1기의 묘가 있는 봉우리로 올라선 후 땟재로 내려섰습니다. 또 다른 묘지 봉을 지나서 광주K2산악회에서 표지판을 걸어 놓은 군치산에 올랐습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복숭아를 꺼내 든 후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거풍을 즐겼습니다. 나홀로 정맥을 종주하며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특전이 바로 거풍입니다. 두 다리와 발은 주인을 잘 못 만나 생고생을 한다고 아우성이지만 사타구니만은 정반대로 주인을 잘 만나 도시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거풍을 즐길 수 있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돌무더기 안부로 내려섰다가 380봉에 오르기까지 오르내림이 별로 없어 모처럼 산행이 편했습니다.


  13시17분 큰덕골재로 내려서 점심을 들면서 긴 시간 편히 쉬었습니다.

380봉에서 411봉으로 오르는 길도 고도차가 별로 없어 여전히 편안했습니다. 411봉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확 틀어 내려가는 중 오른 쪽 아래로 저수지 복흥제가 보였고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와 장흥의 복흥리와 화순의 초방리를 이어주는 큰덕골재가 멀지 않았다 싶었습니다. 임도로 내려서 왼쪽으로 진행하는 중 비가 내렸습니다. 끈질기게 내리는 비로 하늘의 안색을 살피며 며칠을 미루다가 기상청에서 주말에는 날씨가 좋아진다고 하여 종주 길에 나섰는데  아침부터 태양이 구름 뒤에 숨어서 좀처럼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것이 뭔가 수상쩍다 했습니다. 오후에 접어들자 드디어 하늘이 본색을 드러내고 비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얼마 후 비가 그쳐 죽산 안씨 묘지석만 덜렁 있는 안부사거리 큰덕골재에서 비 맞을 걱정 없이 점심을 들었습니다. 군내버스로 곰치까지 가서 여기 큰덕골재에서 구간종주를 마치겠다는 제 생각을 바꾸어 이양에서 곰치까지 택시를 이용한 것은 일찌감치 곰치를 출발해  차들이 지나다니는 예재까지 한 번에 내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원래대로 큰덕골재에서 마치고 마을로 하산했다가 다시 이 고개로 올라서기가 너무 멀고 불편할 것 같아 계획을 바꾸었는데 예정시간보다 반시간 가량 일찍 도착하고 나자 참 잘 바꾸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남정맥을 가로 지르는 큰덕골재는 길이 제법 넓어 예재로 찻길이 뚫리기 전에는 이 고개를 넘나드는 과객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15시18분 해발422m의 고비산을 올랐습니다.

큰덕골재에서 똑 바로 이어지는 정맥 길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황토 길이었고 길바닥에 가느다란 전선이 늘어져 있어 인근에 군부대가 들어있어 사계정리를 위해 나무들을 베어낸 것으로 생각됐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군부대는 없었습니다. 374봉과 390봉을 거쳐 349봉(?)에 이르자 흙길이 끝나고 풀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내 호남정맥 특유의 무성한 풀 숲길이 나타나 풀숲을 헤치고 이 길을 지나느라 속도가 나지 않았습니다. 큰덕골재 출발 1시간 남짓 지나 397.4봉에 올라섰지만 이렇다 할 표지거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잠시 머물다가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 묘지를 지났고 바로 아래 임도를 따라가 사거리안부에 다다랐습니다. 완만한 오름 새는 어느새 바뀌어 된비알 길을 얼마고 올라 고비산 정상에 섰습니다. 여기까지 산행은 순풍에 돛단 듯이 순조로웠습니다. 고비산에서 남쪽으로 급하게 내려가 오른 쪽 명동마을로 자갈길이 넓게 난 안부를 지났습니다.


  17시24분 해발 427m의 봉화산을 올랐습니다.

자갈밭 길 안부를 지나 봉화산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 50분 동안 불안했던 것은 20-30분 안에 나타나야할 사거리안부 가위재가 보이지 않아서였습니다. 표지기가 계속 붙어 있어 길을 잘 못 든 것은 아닐 터이고 그렇다면 지도가 잘 못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쉬지 않고 시간 반을 내달려도 가위재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제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불안했습니다. 능선 길에서 퍼져 앉아 10분 여 쉬다가 힘들게 오른 440봉에서 20분을 더 걸어 한 봉우리에 서자 “봉화산”의 이름 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마음이 놓였습니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가위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것입니다. 이제 목적지인 예재까지 50분 거리 밖에 안 되어 어둡기 전에는 충분히 마칠 수 있겠다 했는데 잠시 방심을 해서인지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을 잘 못 들어 예재에 닿는데 실패했습니다.


  9월23일 아침9시8분 다시 봉화산에 올라섰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예재에서 거슬러 올라가 하산 길을 잘 못 드는 실수가 반복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았습니다. 아침8시8분에 예재를 출발해 꼭 1시간 만에 386봉을 거쳐 봉화산에 올라 전날 못 마친 짧은 구간 종주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정상에서 오른 쪽 동쪽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을 왼 쪽 북쪽 길로 들어선 것이 전날 알바의 주원인였음을 알았습니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도 이미 맞은 가을을 되 물리지는 못해 길바닥에 나뒹구는 나뭇잎들 대부분이 누런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봉화산 출발 3-4분 후에 시리산으로 이름 붙여진 465.3봉에 오르자 봉화산에도 없는 삼각점이 보였지만 지도에 적혀있는 헬기장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부로 내려서는 길은 완만했고 꽤 길었습니다. 안부에서 올라선 첫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얼마고 걸어 386봉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좋은 길을 놔두고 엉뚱한 길로 들어서 생고생을 했다며 실소하는 사이 어느새 예재에 닿았습니다.


  9시55분 예재에서 이틀에 걸친 14구간 종주를 마쳤습니다.

전날 비를 맞아 쓸린 사타구니가 계속 비를 맞고 산길을 오르내려서인지 심하게 쓰라려와 더 이상 비를 맞으며 산행을 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예재에서 개기재까지 6시간이 채 안걸리는 짧은 구간이어서 이 구간 종주를 마친 후 집에 돌아가겠다고 이양에서 택시를 타고 왔는데 봉화산만 다녀오고 택시를 불러 다시 이양으로 돌아갔습니다. 광주를 거쳐 산본에 도착해 아슬아슬하게 주일미사를 보고나자 파노라마 같은 종주산행이 이제야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알바에서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교훈을 하나 얻었습니다.

길을 잘 못 들었음이 분명하면 아무리 늦더라도 반드시 원위치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저는 이 가르침을 예외 없이 따를 것입니다. 설사 반딧불을 다시 볼 수 있는 아무리 좋은 기회가 온다 해도 과감히 버리고, 저는 원위치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 욕심을 다스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덧 붙이는 글  

  이번 알바의 진상은 이렇습니다.

봉황산 정상에서 비를 맞으며 나침반을 꺼내 지도에 나와 있는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왼쪽 길을 선택해 예재 길로 내려섰습니다. 길이 점점 희미해지는 듯했고 표지기가 보이지 않아 조금은 찜찜했지만 방향이 분명히 맞는데 무슨 문제가 있으랴 싶어 더 빨리 내달려 두 서너 봉을 넘었습니다. 당연히 걸려있을 표지기가 보이지 않아 길을 잘 못 들었음을 직감했습니다. 일단 맞은편 봉우리까지 가서 조망한 후 최종 결정을 하기로 하고 깊숙한 안부로 내려서자 제 길이 아니라는 확신이 섰고 그래서 앞 봉우리로 오르는 것을 멈추고 봉화산으로 되돌아갈 생각으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았습니다. 이미 너무 많이 내려왔다는 생각이 든 데다 다시 봉화산으로 올라가 예재까지 가기는 날이 저물어 쉽지 않겠다 싶어 일단 인근 마을로 하산하고 다음 날 일찍 다시 봉화산을 올라 정맥 길을 이어가기로 최종 결정했습니다. 왼쪽으로 산허리를 지르는 희미한 길을 따라 10분 가까이 옮기자 바로 아래 계곡이 보였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이렇다 할 길도 보이지 않았고,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마을에 다다를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 계곡 시작점으로 내려갔는데 길은 사라지고 온갖 잡풀들이 우거진 덤불숲이 나타나 아연 난망했지만 다른 수가 없어 계곡 안으로 내려가 물속을 텀벙대고 무조건 내려갔습니다. 바위에 무릎이 부딪히고 작은 키의 잡목들이 얼굴을 때려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악전고투 끝에 정글 속 계곡을 빠져 나오자 이번에는 총성이 계속 울려 겁이 덜컥 났습니다. 무슨 군대가 주말에 사격훈련을 실시하나 투덜대면서도 얼마 안 있으면 끝나겠다 싶어 잠시 퍼지고 앉아 쉬었다가 혹시라도 제 목소리가 들린다면 사격을 멈출 것 같아 사람 살리라고 몇 번 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물론 허사였고 총알의 진행하는 길과는 많이 빗겨 있는 것 같아 또 다시 덤불 숲길을 헤치고 내려갔습니다. 구두와 바지 및 배낭 카바가 몽땅 젖었고, 팔다리가 여기 저기 긁혔으며, 벌써 저녁 6시반이 다 되어 어둑어둑하기 시작했어도 얼마 후 논둑에 올라서자 마음이 놓였습니다. 일단 논둑길만 따라 내려가면 분명 동네가 나타날 것이고 그리되면 살았다 싶어지자, 제 고향 파주에서라면 벌써 버려졌을 산골짜기 천수답에서 저토록 실하게 벼들이 익어 넘실대는 것을 보고 인근 농민들이 여름 내내 정성들여 돌보았을 손길이 어렴풋이 느껴졌습니다. 기쁨도 잠시 뿐으로 논둑에 올라서 4-5분을 걷자 그동안 저를 비껴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고 생각한 총알이 바로 옆을 지나는 것 같아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논두렁에 빨간 표지판이 세워진 것을 보고 서둘러 논둑에서 내려서 산속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이내 만난 임도를 따라 몇 걸음을 옮기자 이 임도가 논둑에 바짝 붙어 아래로 내려가 더 이상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논둑 멀리 산자락에서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녁 6시40분부터 사격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주말인데 저녁 8시가 넘어도 사격훈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정이 넘어 일요일이 되었어도 총성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안전지대로 멀리 떨어져 있어 다른 위험은 없었지만 총성이 계속 울려 하산을 포기하고 하염없이 날이 밝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자 정말 난감했습니다. 떡과 복숭아 그리고 남은 쵸코렛을 모두 꺼내 먹고 나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 여벌의 옷들을 갈아입었습니다. 잔뜩 흐린 날씨에 간헐적으로 후드득 뿌리는 빗줄기가 걱정은 됐지만 계속되는 총성으로 멧돼지로부터 공격받을 일은 없겠다 싶었고 그렇다면 제가 바로 이날 밤 이산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지 어디선가 반딧불이 나타나 하늘을 맴돌며 저를 반겼습니다. 그것도 여러 차례를 말입니다. 저를 반겨 맞은 풀벌레들의 노래 소리도 이때가 아니라면 언제 들어볼 까 싶어 한껏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느새 밤의 소리를 음미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어쩔 수 없는 산사람이다 했습니다. 어쩌다가 맞은 산속의 밤이 무섭지 않은 것은 이런 저런 소리들이 저와 밤을 같이 했기 때문입니다. 산속의 식구들을 놀라게 한 총소리는 빼더라도,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 후드득 비 뿌리는 소리, 풀벌레들의 가녀린 노래 소리, 어디에선가 비구름을 몰고 오는 바람소리, 총성에 깜짝 놀라 자지러지는 새소리, 가까운 곳에서 라이트를 비치며 달리는 자동차 소리, 서광주와 진주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경전선 기차소리, 계속해서 가만히 있기가 힘들어 몸을 움직이며 제가 내는 버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면 이 밤을 지내기가 정말 지겹고 무료했을 것입니다. 아니 이 모든 소리들이 사라진다 해도 마지막 지구가 회전하며 내는 소리는 언제고 저와 같이 했을 것입니다. 그 소리는 땅덩이가 움직이는 소리 같이 묵직하기도 하고 바람이 이는 소리처럼 가볍게 들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런 사념들이 모처럼 시간제한을 받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도 지구가 도는 소리에 생각이 끊겨 아쉽기도 했습니다. 밤은 소리와 함께 흘러 가버렸고 드디어 아침이 다가오는 빛이 감지됐습니다.


  아침6시10분 밤이 물러서자 하늘을 가린 시꺼먼 구름만 그대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어둠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사방이 밝아지자 논둑 옆으로 바짝 붙은 오른 쪽 큰 길과 왼 쪽으로 난 넓은 길이 보였습니다. 왼쪽 길은 산허리를 잘라 막 길을 낸 임도로 논에서 한참 떨어져 절대 안전한 길이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십여 분을 걸어 경전선 철길로 내려섰고 철길을 따라 이양 쪽으로 걷다가 차도로 올라섰습니다. 교화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택시를 불러 이양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의문이 생겼습니다.

제가 머무른 산자락 아래에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한 사격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어느 군대가 주말에 밤새도록 사격을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밤의 총성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궁금했습니다. 이양에서 죽 살아온 택시기사분도 이 근처에 사격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며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궁금증이 풀린 것은 사흘 후 추석 성묘를 끝내고 나서였습니다. 선산의 지형이 지난 알바를 한 곳과 비슷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더니 시골 조카가 그 소리는 총소리가 아니고 불빛이 번쩍이고 소리는 크게 나지만 총알이 들어 있지 않은 예광탄을 터뜨리는 소리라고 답해주었습니다. 한 해 농사를 망치지 않도록 최근 급증한 멧돼지나 조류가 난입하는 것을 막고자 논밭에다 일정 시간간격으로 자동으로 터지는 예광탄을 설치한 곳이 꽤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습니다.  총알에 맞을까 겁을 내어 산자락에 주저앉아 밤을 샌 제가 참 어리석은 것으로 밝혀졌지만 알바의 궁금증은 모두 풀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설 같은 알바상황은 모두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