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상산(2)
*산행일자:2010. 7. 9일(금)
*소재지 :전북무주
*산높이 :1,034m
*산행코스:서창삼거리-장도바위-향로봉-안렴대-안국사
-사고지-전망대-송대-치목마을
*산행시간:10시36분-18시9분(7시간33분)
*동행 :나홀로
세 해전에 다녀와 산행기를 남긴 적상산을 어제 다시 찾은 것은 그때 못 찍은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아오기 위해서였습니다.중간에 바터리가 나가 이 산 정상과 안국사, 적상산 사고, 전망대 등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해 이번 산행도 조금은 실망스러웠지만, 대신에 적상산사고에서 해설사 권중헌님을 만나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이해도를 높인 것은 제게는 생각지 못한 큰 소득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우리 선조들이 일궈낸 기록문화의 결정판이라면, 사고에서 멀지 않은 양수발전소는 에너지보전법칙을 최대로 활용한 과학문명의 진수를 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양수발전소의 상부댐인 적상호 자리가 안국사 자리로 그 곳에 사고를 지었다가 1992년 발전소건립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화가 문명에 까탈 부리지 않고 자리를 넘겨준 좋은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경과 문화지킴이들의 극렬한 반대가 다반사로 행해지는 요즈음 같았다면 사고지가 그리 쉽게 이전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전10시36분 서창리삼거리의 적상산가든을 출발했습니다. 아침7시40분에 남서울터미널을 출발한 버스가 무주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 반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무주터미널에서 10시20분에 삼유 가는 버스에 오른 지 10분이 지나 서창리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버스에서 같이 내린 서울 사는 두 아가씨는 안국사로 간다는데 그중 한 아가씨는 구두 때문에 고생 좀 할 것 같았습니다. 서창공원지킴센터 위에서 이 아가씨들에 안국사 행 들머리를 알려준 후 제가 먼저 이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내 나무다리를 건너 돌계단 길을 따라 오르면서 때마침 제철을 만난 매미들의 시끄럽기 짝이 없는 합창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 산에 들기 전에는 오름 길이 엄청 가파를 것 같지만 막상 산길로 들어서면 길이 넓고 지그재그로 나있어 산 오름이 생각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오름 길에 만난 덕유산국립공원 직원에 치목마을로 내려가는 하산 길을 알아본 후, 산행초반부터 덥다며 연신 물을 마시는 것으로 보아 물이 곧 동이 날 것 같은 두 아가씨들에 전해주라고 여분의 500ml들이 식수 1팩을 건넸습니다.
11시40분 향로봉1.7Km 전방 지점을 지났습니다. 세 해 전 산행시작 1시간 만에 다다른 이 지점에 이번에는 4분이 더 걸려 도착했는데 커다란 뿌리를 박아 바위를 둘로 갈라놓은 서어나무는 여전히 자기자리를 지켰습니다. 동쪽으로 조금 오르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얼마간 오른 후 다시 동쪽으로 오르는 지그재그 길은 장도바위를 지나 나지막한 적성산성 서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서어나무가 갈라놓은 바위보다 몇 백 배 커 보이는 거암을 둘로 갈라놓은 것은 여말 최영장군의 긴 칼이었다는 설화에 근거해 이 거암을 장도(長刀)바위로 부릅니다. 장도바위에서 7-8분을 올라 만난 서문지를 지나 적성산성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삼국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적성산성을 고려조의 최영 장군이 조정에 축성하자고 건의했다는 것은 새로 성을 쌓는 것이 아니고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자는 것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서문 앞에서 짐을 내려놓고 점심을 들면서 10분여 푹 쉰 후 서쪽으로 이어지는 편안한 길을 따라 안국사 쪽으로 천천히 올랐습니다.
13시10분 해발1,034m의 향로봉에 올랐습니다. 서문 출발 15분 후 올라선 능선삼거리에서 0.5Km 떨어진 향로봉으로 향하고자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10분가량 능선을 따라 걸어 올라선 향로봉은 해발1,034m의 고도를 알리는 표지판만 달랑 서 있을 뿐 그 흔한 표지석이나 삼각점이 보이지 않아 여기가 과연 정상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서쪽으로 고속도로 건너 산만 보일 뿐 전망이 별로여서 이내 오던 길로 되돌아가 안렴대로 향했습니다. 능선삼거리를 지나 SK기지국 봉우리를 올라간 것은 제가 가지고 간 지형도에는 이 산의 정상이 해발1,034m로 여기 어디쯤이고 앞서 오른 향로봉은 해발고도가 1,024m로 나와 있어서였는데 이 봉우리 또한 아무런 표지가 없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안국사로 내려가는 길이 왼쪽으로 갈리는 삼거리를 지나 안렴대에 올라서자 사방이 탁 트여 덕유산의 향적봉과 앞서 오른 향로봉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14시18분 안국사를 들렀습니다. 안렴대에서 학송대를 거쳐 안시내로 하산하는 길이 폐쇄되어 안국사 갈림길로 되돌아갔습니다. 종주산행과는 달리 명산탐방은 길 잃을 염려가 거의 없고 종종 졸음을 느낄 정도로 산행이 넉넉하고 여유로워 좋아하는데 이번 적상산 산행도 그러했습니다. 되돌아온 갈림길에서 10여분 쉰 후 폐타이어로 만든 계단을 따라 남쪽 바로 아래 안국사로 내려갔습니다. 경내로 들어서자 대웅전을 대신한 극락전이 돋보였습니다. 법당 중앙에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봉안한 극락전을 중심으로 오른 쪽 아래에 법고가 배치되었고 좌우로 천불전과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조 충렬왕 3년인 1277년에 월인대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을 광해군 6년에 중수해 관군과 승병들로 하여금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게 했다합니다. 3년 전에 한 번 들른 일이 있어 눈에 많이 익은 이 절을 이번에도 카메라에 담아가지 못한 것은 장도바위를 찍고 나서 바터리가 다나갔기 때문입니다. 청하루(淸霞樓)를 거쳐 “國土第一淨土道場”이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빠져나가 아스팔트길을 따라 내려가다 길 왼쪽의 적상산(赤裳山) 사고(史庫)를 들렀습니다.
실록각과 선원각의 한 옥 건물 두 채가 들어선 적상산사고에서 50분 가까이 머물렀습니다. 향로봉 남쪽 아래에 자리한 적상산 사고는 후금의 침략위협이 높아지자 묘향산사고에서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고자 설치한 것으로, 광해군 때 실록각을, 인조 때 선원각을 건립했으며 원래는 지금의 적상호 자리에 지었는데 1992년 양수발전소 건립으로 그 위편인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전란 중 부산에 옮겨놓은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북한에서 몰래 몽땅 빼갔다 하니, 같이 보관한 허준의 동의보감이 남아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간의 사정이 이러하니 이곳에 보관된 실록은 당연히 정본이 아니고 영인본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조선조의 빼어난 기록문화를 체감하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조선조를 세운 태조부터 태종까지는 필사본이고, 세종실록부터 인쇄본이라 합니다. 인조실록부터 표지가 청색에서 황색으로 바뀐 것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고생한 효종이 청나라를 상징하는 청색을 하도 싫어한 나머지 황토색으로 바꾸었다는 후문입니다. 조청전쟁 때 잡혀간 아녀자를 환국시키는데 돈을 많이 들어가 광해군 실록은 끝내 인쇄를 하지 못했으며, 고종과 순종의 실록은 일본사람들이 쓴 것이어서 조선왕조실록에서 제외된다는 등 이제껏 몰랐던 것들을 무주군의 관광해설사로 일하시는 권중헌님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실록각에서 선원각으로 옮겨가 전시물들을 일별했습니다. 선원각이라 해서 조선왕실 족보인 선원만 전시된 것은 아니고 실록과 관련한 자료들도 여러 점이 같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16시5분 적상호 전망대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적상산 사고에서 전망대에 이르는 길은 25분 거리로 적상호를 왼쪽으로 끼고 도는 땡볕 차도이어서 얼굴이 후끈거렸습니다. 둥근 원형의 흰색 건물인 전망대는 여느 전망대처럼 주변 경관을 멀리 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고 양수발전을 위해 만든 것임을 여기 와서 알았습니다. 해발860m에 위치한 상부댐인 적상호에 전기사용량이 떨어지는 야간에 해발278m의 하부댐인 무주호에서 끌어올려 물을 채운 후, 전기사용량이 늘어나는 낮 시간에 물을 낙하시켜 해발201m에 설치한 지하발전소의 터빈 2대를 돌리는데 터빈 1대의 발전용량이 30만Kw라 합니다. 대용량의 물을 낙하시키다가 어느 시점에서 멈추면 물이 상부로 치켜 올라 상부댐을 강타하게 되는 데 이를 막고자 90m 높이의 수직 수로를 중간에 하나 만들어 놓았고 그 상단부분이 바로 전망대인 것입니다. 전망대에서 제가 본 것은 덕유산의 향적봉과 바로 아래 무주호만이 아니었고 수시로 전환되면서도 그 양이 변하지 않는 에너지보전의 법칙이 작동되는 현장도 같이 보았습니다. 위치에너지 0의 하부댐인 무주호의 물을 전기에너지를 사용해 표고차가 582m인 상부댐 적상호로 끌어올려 위치에너지를 증대시켰다가 다시 저수된 물을 하부댐으로 낙하시키면서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어 지하의 터빈을 돌립니다. 이때 운동에너지가 전기에너지로 전환되면서 우리가 원하는 전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전망대에서 내려가 다시 사고지로 향했습니다. 사고지 왼쪽 길 건너에서 치목마을로 내려서는 길로 들어선 시각은 16시28분이었습니다.
17시18분 송대를 지났습니다. 사고지 옆 들머리에서 3.2Km거리의 치목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남쪽으로 이어졌습니다. 조금 내려가 철제계단과 목제다리로 적상산 남쪽 계곡을 왔다 갔다 하다가 이 계곡의 동쪽 능선을 타고 내려갔습니다. 오른 쪽 아래가 경사가 급한 사면이어서 낭간을 해놓은 산허리를 에돌아 능선 길의 묘지에 다다르자 길이 좌우로 갈렸습니다. 오른 쪽 길을 따라 내려가 다리를 건너자 철제 난간을 해놓은 낭떠러지 바위가 나타났고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아 다시 묘지삼거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는 왼쪽 길로 따라 내려갔는데 이내 오른 쪽 길과 합류해 당황했습니다. 조금 내려가자 왼쪽으로 희미하게 사람 다닌 흔적이 보여 이 길을 따라 7-8분을 진행하다가 아무래도 길이 아닌 것 같아 다시 돌아가 낭떠러지난간까지 내려갔습니다. 이번에도 길을 찾지 못하면 사고지로 되올라가기로 마음먹고 내려갔는데 난간 왼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보여 그러면 그렇지 하고 안도했습니다. 왼쪽 아래 마른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 오른 쪽으로 조금 옮겨 치목마을 1.6Km 전방에 자리한 깊은 계곡의 송대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제 길로 들어선 것이 확실하다 싶어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어갔습니다.
18시9분 치목마을로 내려가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송대에서 치목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편했습니다. 계곡에서 오른 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산 허리 길은 난간을 핸 놓을 만큼 왼쪽 사면이 낭떠러지였지만 일단 능선으로 올라서자 그 다음부터는 서창에서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만은 못해도 웬만큼 속도를 내도 좋을 만큼 길이 편했습니다. 묘지에서 잠시 쉬며 팬티를 갈아입은 후 치목마을로 내려섰는데 개 짖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처음에는 유령의 마을을 지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스팔트 포장이 다 된 동네 길을 따라 내려가 경로당 건물을 보자 이 동네가 참으로 깨끗하고 넉넉한 마을이다 싶었습니다. 삼베 짜는 공동작업장 건물도 큼직했고 골목길도 모두 포장이 되어 깨끗했습니다. 마을 어른 말씀대로 가게가 없어 맥주를 사마시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18시30분 발 무주행 버스에 오르려 20분가량 기다리는 동안 바터리가 되살아나 동네 곳곳을 사진 찍었습니다.
귀가 길은 멀었습니다. 무주읍내로 나가자 서울 가는 차가 끊어져 버스로 대전을 거쳐 천안까지 갔습니다. 천안의 버스터미널에서 천안역으로 옮겨 전철 타고 산본으로 가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집에 도착한 시각이 23시20분경이었으니 무주의 치목마을에서 산본 집까지 5시간이 거의 다 걸린 셈입니다. 긴 시간 귀가 길이 느긋하게 느껴진 것은 적상산사고를 들러 조선왕조5백년을 실록으로 남긴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의 체취를 맡은 덕분일 것입니다. 당쟁에 골몰하다 끝내 나라를 잃은 조선조가 이토록 자랑스러운 실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조선왕조에 대한 후세의 비난은 지금보다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댓글>
- 2010.07.12 22:19
- 오래 전에 무주여행- 양수 발전소, 적상호, 적상산사고, 적상산성, 성보박물관,전망대 모두 기억속에 그리움으로만 남아있었는데 이렇게 자세한 기록과 함께 산행기를 올려주시니 공부도 많이 되네요. 그때 산행하시는 분들을 부러워했던 기억이 나요. 공기도 맑고 한산했었지요. 적상산사고는 참 잘 만들어졌지요? 사고라는 걸 그때 처음 보았어요. 가끔씩 보고싶어질 때가 있는데 일대의 모습을 디카에 담아오지 못하셨다니 아쉽습니다. 이 글을 소중하게 모셔갑니다.
- 시인마뇽
- 2010.07.13 16:26
- 관광해설사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습니다. 얼마나 흥이 나서 말씀을 하는 지 중간에 말씀을 끊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고맙습니다.
- 저그노
- 2010.09.01 18:4
- 상세한 정보 감사합니다. 내고향 적상산을 좀 더 알리는데 잘 활용하겠습니다.
- 2010.09.02 13:49
- 제대로 사진 찍고자 다시 한 번 오를 뜻입니다. 고맙습니다.
<산행사진>
적상산 (1)
*산행일자:2007. 9. 29일
*소재지 :전북 무주
*산높이 :1,034m
*산행코스:서창리 적상산가든-장도바위-향로봉-적상산
-안렴대-안국사-덕유산국립공원적상분소
*산행시간:11시38분-16시34분(4시간56분)
*동행 :나홀로
어제는 오랜만에 덕유산 북쪽에 자리한 적상산을 다시 찾아 올랐습니다.
다섯해 전 과천시산악연맹 회원들과 함께 이 산을 올랐을 때는 목디스크 악화로 어깨쭉지가 잘려나가는 것처럼 아파 무척 힘들었습니다. 산에서 돌아오자마자 입원수속을 밟고 며칠 후 대수술을 받고나서 얼마동안 목에 기부스를 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수술받은 그 주를 빼고는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석달여 기부스를 한 채 산을 오르내리며 스스로 제 산 욕심이 참으로 끈질기다 했습니다. 백두대간 종주 중에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지나며 층상암벽이 허리 띠를 해 두른 듯한 적상산의 서쪽사면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곧추 선 저 암벽이 끈질기게 받들지 않았다면 그 위의 향로봉이 수백만년 동안 건재할 수 있었을까 싶어 언제고 이 산을 다시 찾아 은근과 끈기를 한번 배워가고 싶었습니다.
기대했던 대로 적상산 도처에서 끈질김의 현장을 만나보았습니다.
서창리 도로에서 산행을 시작한지 한시간만에 다다른 샘터(?)가 첫 번째 현장이었습니다. 커다란 바위에 뿌리를 내려 종국에 그 바위를 둘로 갈라 놓은 큰 나무를 보고 이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에 놀랐습니다. 낙숫물이 툇돌에 구멍을 내기보다 더 힘들게 느껴진 것은 낙숫물은 중력의 도움을 받지만 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그 바위를 가르는 것은 순전히 자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현장은 샘터에서 조금 올라 만난 장도바위였습니다. 민란을 평정하고 개선길에 오른 여말 명장 최 영 장군께서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를 장도로 내리치자 이 바위가 둘로 갈라져 길을 열어주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과연 한 사람은 충분히 지날 만큼 틈새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최영장군의 고려조에 대한 애국충정을 기리고자 누군가가 지어냈을 이 이야기가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음은, 공간을 뛰어넘는 오늘 날의 휴대폰보다 시간을 뛰어넘은 옛 설화의 생명력이 훨씬 더 끈질긴 덕분입니다. 마지막 현장은 이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사고지였습니다. 차시간을 대느라 밑으로 지나가며 눈길만 주었지만 왕조의 역사를 가감없이 그대로 후손들에 전해주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끈질긴 역사의식이 없었다면 이같은 깊은 산골짜기 여러 곳에 사고를 지어 분산 보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 전 큰아들이 제게 이르기를 이순신장군이 원균장군보다 또 하나 뛰어난 점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꼬박꼬박 일기를 써 “난중일기를 남겼다는 점이라 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철저한 기록정신과 이를 후세들에 온전히 넘겨주겠다는 끈질긴 역사의식이 오늘날 막강한 국력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전 11시38분 서창리를 지나는 19번 도로변의 적상산가든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아침6시반 경에 산본 집을 나와 천안까지는 전철로, 다시 무궁화호로 영동역까지 갔습니다.
반시간 남짓 기다려 직행버승에 올라 무주에 도착한 시각이 11시 10분 경으로 돌아오는 차편을 확인한 후 안성가는 군내버스에 올라 10분 후 서창리에서 하차했습니다. 날씨가 쾌청해 차도를 건너 시멘트도로를 따라 얼마고 오르는 동안 목덜미가 따가웠습니다. 시멘트 길이 끝나는 서창마을에 다다르기까지 전에 없던 팬션들이 보였습니다. 마을 끝 서창리통제소에에서 조금 더 가 5년전에 시산제를 지냈던 적상산 제단을 들렀습니다. 입구에 세워진 익살 스레 보이는 화강암의 장승들에 적상산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12시 7분 향로봉3.1Km의 표지목이 세워진 오른 쪽 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목덜미를 따갑게 비춘 햇살이 나뭇 잎에 가려지자 비로소 가을의 냉랭함이 느껴졌습니다. 공원에서 정성스레 손질한 조용한 돌길을 몇 분 걸어 계곡을 건넜습니다. 그리 굵지않은 통나무 몇개를 엮어 만든 나무다리가 시멘트다리보다 훨씬 정감있어 보였습니다. 계곡을 따라 오르던 길은 향로봉 2.7km전방에서 계곡과 헤어지고 잘 다듬어진 돌길을 따라 산오름을 계속했습니다. 고속도로에 면한 이 산의 서쪽사면은 거의 깍아지른 듯 경사가 급해 똑바로 길을 내지 못하고 지그재그로 길을 만들어 산길을 걷는 운치가 더했습니다. 향로봉2.3km 전방에서 오른 쪽 옆 계곡에서 벗어나 왼쪽 위로 난 돌계단을 따라 걸어 올랐습니다.
12시33분 향로봉1.7Km 전방의 샘터(?)에서 복숭아를 꺼내 들며 10분 여 쉬었습니다.
좁은 폭의 너덜겅 사이로 흐르는 아주 작은 물줄기가 샘물로 일컬어지는 것이 아닌가해 손바닥으로 물을 조금 받아 마셔보니 물맛이 여느 샘물보다 훨씬 못해 샘터로 부르기는 영 아니다 싶었습니다. 바로 그 때 제 눈을 끈 것은 바위를 가르고 뿌리를 내린 커다란 서어나무였습니다. 단순히 바위에 뿌리를 내린 정도가 아니고 바위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습니다. 과연 나무는 위대했습니다. 길고 긴 세월을 단단한 암반에 뿌리를 박고 서서히 틈을 벌여나가 급기야 바위를 가른 힘은 바로 저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무생물에 대비되는 생명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아, 그래서 미국의 시인 조이스킬머가 시는 나같은 엉터리 시인이 짓지만 나무는 하느님이 만드신다고 읊었구나 싶었습니다.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본격적인 지그자그 흙길인데다 넓은 폭에 경사도 완만하고 활엽수가 하늘을 가려 나이든 부부들이 두 손 잡고 함께 걷기는 딱 좋아 친지들에 한번 이 산을 권해볼 생각입니다.
13시31분 장도바위를 지났습니다.
앞 길을 가로막는 거암을 장도로 내리쳐 길을 냈다는 최영 장군은 고려조의 충성스러운 맹장으로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일파에 죽음을 당했지만 그를 숭모하는 백성들은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 민초들 중 누군가가 지어냈을 장군에 관한 설화는 이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민초들의 끈질긴 삶을 통해 이러한 설화들이 대대로 전해져왔기에 설화의 끈질긴 생명력은 바로 민초들의 끈질긴 삶에 기초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5분 후 서문지를 지나 적성산성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삼국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적성산성은 그 길이가 8km가 넘는 석성으로 나중에 최영 장군도 축성을 건의했다 합니다. 이곳 서문지를 비롯한 4개문지에 2층의 문루가 세워졌고, 산성 서쪽에 미창과 군기창을 겸한 창고가 세워졌다하여 아랫마을이 서창(西倉)으로 불린다 합니다.
14시6분 해발1,024m의 향로봉을 올랐습니다.
서문지에서 20분 남짓 이어진 평탄한 남진 길은 능선 삼거리에서 끝났습니다. 능선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10분간 북진해 향로봉을 오르자 조망이 일품이었습니다. 저 멀리 남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연봉들이 혹시 백두대간이 아닐까 했지만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네 다섯평 넓이의 공터에 덕유산국립공원에서 세운 표지목에는 이 봉우리의 해발고도가 1,034m로 표기되어 있습니다만 지도에 나와 있는 1,034m의 정상봉은 이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1km 가량 떨어져 있는 이동통신사 기지국이 들어서 있는 봉우리이기에 바로잡습니다. 향로봉에서 능선삼거리로 다시 돌아가 정상봉으로 직진했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15분간 남진해 올라선 정상봉에는 기지국만 들어서 있고 삼각점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바로 하산해 다시 7-8분을 남진해 철제낭간이 세워진 바위 안렴대에 올랐습니다. 이곳 또한 전망이 좋아 40분 전에 올랐던 향로봉의 다소곳한 자태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덕유산 향적봉을 끝내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15시3분 안국사 경내에 들어섰습니다.
안렴대에서 안국사로 내려서는 능선삼거리로 돌아와 점심을 들었습니다. 안국사를 거쳐 내북창 버스정류장까지 16시30분안에 닿아야 하기에 점심을 미루었는데 시간안에 도착할 것 같아 준비해간 떡을 후다닥 들고 나서 동쪽의 목제계단 길을 따라 안국사로 내려갔습니다. 고려 충렬왕 3년 월인대화상이 창건한 안국사에는 여느 가람과는 달리 대웅전이 보이지 않았고 그 자리에 극락전이 들어앉아 독특했습니다. 좌우로 천불전과 지장전을 배치한 극락전에서 흘러나오는 차분한 음악소리가 바로 아래 보이는 적상호와 더불어 향로봉과 안렴대를 정신없이 내달은 저를 잠시나마 마음 편히 쉬도록 했습니다. 광해군 6년에 세웠다는 실록과 선원록을 보관해온 사고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버스시간에 쫓겨 들르지를 못하고 내북창 버스정류장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16시34분 덕유산국립공원 적성분소에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안국사의 일주문을 나선지 1시간 20분만에 적성분소에 다다르기까지 아스팔트 찻길은 계속해 지그재그길이어서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습니다. 적상호 삼거리에 닿기 직전 오른 쪽 치목마을로 들어서는 샛길로 들어섰다가 다시 원위치하느라 5-6분을 까먹고 나서 정신없이 걸어내려가느라 양수발전을 위해 물을 가둬둔 적상호에 제대로 눈길한번 주지 못했습니다. 향로봉-정상봉 주 능선의 동쪽 사면도 서쪽 사면과 마찬가지로 급경사여서 지그재그로 길을 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서쪽 사면의 흙길에 비해 동쪽사면의 아스팔트 길은서둘러 뛰다 싶이 걸어내려가기에는 훨씬 더 발바닥이 아프고 무릎에 오는 충격도 컸습니다. 고얀 길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내려왔어도 이미 적성분소에 16시30분을 넘겨 도착해 하루 2대 밖에 없는 내북창 발 막 버스를 놓쳐버렸습니다.
잠시 숨을 돌린 후 내북창을 지나 노선버스가 다니는 727번 도로상의 외북창까지 걸어가겠다고 제가 갖고 있는 마지막 끈질김을 동원하려는 차에 의외의 한 분이 저를 도와 주었습니다. 서울에서 무주리조트로 내려왔다가 짬을 내어 안국사를 들러 본 후 다시 리조트로 돌아간다는 50대 초반의 한 부부가 차를 세우고 제게 동승을 권했습니다. 일부러 손을 흔들어도 그냥 지나는 차들이 거의 다인데 손도 흔들지 않은 저를 태운 분은 1970년대 후반 몇 해동안 록크라이밍에 빠졌던 산꾼으로 요즈음은 부인이 더 산에 열심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산꾼이 아니고서야 후질구레한 모습의 하산객을 차에 태워 줄 리가 만무하다는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편히 무주에 다다랐고, 영동역에서 예정보다 30분을 당겨 서울가는 기차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존함도 여쭙지 못한 두 분에 이렇게나마 감사 말씀 올립니다.
10월이면 절정에 이른 단풍이 붉은 치마를 해 두른 듯 하다하여 적상산(赤裳山)의 이름을 얻은 이 산에서 끈질감의 현장을 찾아보며 은근과 끈기를 배워갖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바테리 충전기가 고장 나 끈질감의 현장들을 카메라에 담아 오지 못해 아쉽습니다만, 가슴 속에 담아온 은근과 끈기는 산행의 모토이기에 오래오래 담아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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