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종주기 17
*정맥구간:돗재-서밧재-묘치고개
*산행일자:2007. 11. 7일
*소재지 :전남화순
*산높이 :천운산602m, 구봉산320m, 천왕산424m
*산행코스:돗재-천운산-서밧재-구봉산-천왕산-묘치고개
*산행시간:7시9분-15시24분(8시간15분)
*동행 :나홀로
이토록 황홀한 구름바다를 산행 중에 만나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제우스신과 산신령이 작심하고 손잡지 않고서는 도저히 빚어 낼 수없는 광활한 운해를 호남정맥의 마루금을 밟으며 두 시간 넘게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이 가을 제일의 행운아였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화순 땅을 동서로 가르는 돗재-천운산-서밧재 구간의 한 가운데 자리한 해발 602m의 천운산을 빙 둘러싼 구름바다는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해발 고도가 300m(?)가 채 안 되는 주위의 모든 산과 평야를 하얀 구름이 깡그리 뒤덮고 있어 도무지 그 넓기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 구름들이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다 하얀 구름위로 솟아 오른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이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모양을 하고 있어 마치 다도해를 지나는 것 같았습니다. 여름 날 이른 아침 깊숙한 골짜기를 가득 메운 높은 산의 구름바다는 햇살이 퍼질 즈음 골바람에 등 떠밀려 능선으로 올라서면 이내 사라지곤 했는데, 이번에 지켜본 구름바다는 산들이 높지 않은 만큼 골바람도 같이 약해서인지, 아니면 늦가을 아침햇살이 한 여름에 비해 그 세가 턱없이 약해서인지 설악산이나 지리산의 운해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보통사람들 눈으로는 아무리 부비고 보아도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에서 미세한 차이를 발견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전문가라고 부릅니다. 구름바다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 눈에는 지리산의 구름바다나 이번에 호남정맥에서 만나본 구름바다나 그저 그게 그걸로 보였는데 기상학자들은 여기에서도 빼놓지 않고 유의미한 차이를 찾아내어 높은 산의 구름바다와 낮은 산의 구름바다를 각각 이름을 달리 지어 불러왔습니다. 바로 층운과 층적운이 그것들입니다. 층운(層雲,Stratus, St)이란 지표면에서 300-600m 상공에 나타나는 하층운으로 지평선과 나란히 층을 이루고 지표면에 가깝게 떠있는 구름을 말하며 우리말로는 안개구름이라 부릅니다. 이번에 호남정맥에서 만난 구름바다는 층운으로 엄밀히 말해서 운해라고 부를 수는 없나봅니다. 제가 젊어서 지리산에서 야영하며 아침 일찍 만나본 구름바다가 바로 운해로 층운이 아니고 층적운이었습니다. 층적운(層積雲, Stratocummulus, Sc)은 높이 2,000m 미만의 상공에서 발생하는 하층운으로 대부분 물방울로 되어 있으며 층쌘구름으로도 불린답니다. 이 구름은 판자모양의 구름 또는 둥근 덩어리 구름이 층을 이루듯이 떠 있다가 아침나절 공기가 뜨거워지면서 부풀어 오른 구름결이 큰 폭포를 이루며 산등을 넘는다 합니다. (이 내용은 대원사에서 발간한 임소혁님의 “하늘에 수놓은 구름이야기”에서 상당 부분을 따왔습니다.)
지리산처럼 높은 산의 구름바다는 층적운이고, 근교 낮은 산의 구름바다는 층운임을 알고 나자 별안간 구름의 신 제우스와 맞대면하고 싶었습니다. 과연 제우스신은 층운과 층적운의 차이를 알고 있었는가, 알고 있었다면 언제 어떻게 알았는가가 두루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지상에는 자기가 낳은 자식들이 학교에 들어가도 몇 학년 몇 반인지를 아는 부모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아무리 오랫동안 천상의 구름 위에서 노닐고 있다 해도 본래 마음 씀이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격신인 제우스가 자기가 만든 그 많은 구름들의 차이를 일일이 다 알고 있지는 못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제우스신이 구름의 신이라 하더라도 화순 땅의 산들을 거의 다 덮을 만큼 그 많은 구름들을 혼자서는 다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산신령과 손잡지 않고서는 어떤 신이라도 독자적으로 이 땅의 산 속에 구름바다를 만들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제가 이번에 만나본 장대하고 광활한 저 구름바다는 제우스신과 산신령의 합작품임에 틀림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제가 만난 구름바다가 바로 하늘과 땅이 만나서, 그리고 서양의 신화와 동양의 설화가 만나서 빚어낸 동서고금 최고의 작품이라는 생각도 같이 들었습니다.
아침7시9분 돗재를 출발했습니다.
새벽1시에 강남터미널을 출발한 버스가 광주에 도착하기까지 3시간 10분밖에 걸리지 않아 버스터미널에서 시간 반을 넘게 기다렸다가 5시40분에 출발하는 능주행 군내버스를 탔습니다. 한 시간 후 하차한 능주에서 택시로 갈아타 돗재로 향했습니다. 능주를 휘감은 짙은 안개가 돗재에 다다르자 거의 다 사라지고 시야가 탁 트여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귀부리가 시려와 자켓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산행을 하다가 얼마 후 햇살이 퍼지자 머리에서도 열이나 바로 벗어 제쳤습니다. 한 달 넘게 정맥 종주를 쉰데다 낙엽이 희미한 길을 덮은 곳이 여러 곳 있어 혹시 길을 잃을 까 염려되어 산행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15분을 걸어 팔각정에 오르자 왼쪽으로 멀찌감치 자리 잡은 골짜기에 가득 찬 구름바다가 선을 보여 놓칠세라 서둘러 사진을 찍었습니다.
8시24분 해발602m의 천운산을 올랐습니다.
팔각정에서 천운산을 오르며 오른 쪽 아래에 포진한 운해를 보고 그 규모에 놀랐습니다. 한 여름이라면 무성한 나뭇잎들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구름바다가 나뭇가지 사이로 분명하게 보여 그 아름다움과 규모의 장대함을 모처럼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암봉을 지나서 왼쪽으로 한천 휴게소로 갈리는 안부삼거리에서 0.5Km를 걸어 무인산불감시초소가 세워진 천운산을 오르자 화순시내방향으로도 꽤 넓은 구름바다가 보여 마치 바다 한 가운데 자리한 섬에 오른 것 같았습니다. 삼각점과 정상석이 함께 세워진 천운산에서 김밥을 꺼내 들은 후 오른 쪽으로 이어진 마루금을 따라 걸어 시야가 탁 트이는 590봉에 올라섰습니다. 정북 방향으로 너 댓 걸음만 내딛으면 발끝이 닿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가깝게 보이는 무등산도 볼만했지만 인근의 주암호와 동복호에서 밤새 피어오른 안개가 구름이 되어 주위의 낮은 산들을 모두 뒤덮은 운해가 나뭇가지에 가리지 않고 생생하게 보여 더욱 좋았습니다. 590봉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 천운산 제2봉인 568봉을 거쳐 9시30분에 540봉에 다다르기까지 몇 곳의 전망바위를 지나며 구름바다를 카메라에 옮겨 담느라 연신 셔터를 눌러 댔습니다.
10시26분 서밧재에 도착했습니다.
540봉에서 얼마고 내려서 해발고도 300m대로 들어서자 땅바닥의 낙엽들이 흥건히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점령군 구름바다가 방금 햇살에 밀려 더 아래로 퇴각한 것 같았습니다. 큰 길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 해발고도가 300m 아래로 떨어지자 이제껏 보아온 구름바다 속으로 내려가 길 앞이 뿌옇게 보였습니다. 제가 비로소 구름바다 속으로 잠수했다 싶었는데 그리 오래가지 않아 안개가 사라지자 서운하다 못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처럼 이 산에서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던 안개가 아침을 데리고 어디론 가 사라져버린 천운산 산자락에 구름바다의 잔흔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바지 밑동과 구두를 적셨습니다만, 이번 호남정맥을 에워 싼 구름바다는 그동안 착실하게 교분을 쌓아 온 제우스신이 제게 내려준 최대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540봉에서 오른 쪽으로 난 급경사 길을 내려가다 이번 산행에서 유일하게 카메라를 들고 천운산을 오르는 젊은이들을 만났는데 좀 더 높은 곳에서 운해를 사진 찍고자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송전탑을 조금 지나 왼쪽 봉우리로 올라선 다음 오른 쪽으로 내려선 사거리 왼쪽 아래로 광주학생교육원이 있었습니다. 임도사거리에서 잠시 직진한 후 오른 쪽의 낮은 봉우리에 올라섰다가 서밧재로 내려섰습니다. 왕복 2차선 차도 위로 왕복 4차선이 교차해 지나는 서밧재에서 구봉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른 쪽으로 조금 내려가 2차선 길을 건너 왼쪽으로 꺾어 4차선 도로를 밑으로 건넜습니다. 문왕석재 앞에서 다시 방향을 꺾어 절개면 상단에 올라서기까지 15분은 족히 걸렸습니다.
11시46분 해발320m의 구봉산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서밧재의 절개면 상단 위로 난 임도에서 왼쪽으로 난 좁은 제 길을 알아채지 못하고 직진해 묘지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와 풀숲이 우거진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얼마 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산딸기가 길 한가운데서 무성하게 자란 임도를 따라가 밤나무 밭을 지났습니다. 요즈음이야 일손이 부족해 밤나무가 효자노릇을 전혀 못하고 있지만, 산간을 개발하고 거기에다 유실수를 심어 농가소득을 올려보겠다는 한 국가지도자의 경국에 대한 열정과 지혜는 밤나무를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첫 번 째 통신탑을 막 지나 올라선 야트막한 구봉산에서 한 숨을 돌렸습니다. 사과를 까먹으며 20여분을 쉰 후 천왕산으로 향했습니다. 구봉산에서 내려와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잠시 걷다가 왼쪽으로 난 경사가 급한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짧은 경사 길을 내려가 만난 밋밋한 능선 길은 15분가량 계속되어 복암교와 영동을 이어주는 안부사거리에서 끝났습니다.
13시4분 해발424m의 천왕산에 다다랐습니다.
차 소리가 들리는 안부사거리에서 시작된 완만한 오름길은 얼마 가지 않아 경사가 다급한 비알 길로 바뀌었고, 비알 길 여러 곳에 마사토가 섞여있어 중간의 한 봉우리에 올라서기까지 몇 번이나 미끄러워 넘어질 뻔 했습니다. 조금 더 오르자 된비알의 바위길이 이어졌는데 그 흔한 로프 줄도 쳐 있지 않아 이번 산행에서 가장 고되게 올라간 것 같습니다. 삼각점 하나만 달랑 박혀 있는 천왕산에서 짐을 내려놓고 가지고 간 인절미로 요기를 했습니다.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모 대학병원의 표지기에 적혀 있는 “내 아직 만나지 못한 그리움을 찾아서”라는 글귀에 눈길이 간 것은 아직도 가보지 못한 먼 곳을 동경하는 그리움이 바로 저 혼자서 정맥길 종주에 나서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점심식사를 하느라 16분을 쉬어서인지 묘치고개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입동을 하루 앞둔 날씨치고는 별로 냉기가 느껴지지 않아 산행을 하기에는 오히려 조금 덥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산상의 날씨도 따뜻했습니다. 천왕봉에서 내려서 봉우리 2개를 넘고 산허리를 에돌아 오른 319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주라치 안부 방향으로 조금 내려갔다가 길이 아닌 듯해 다시 되돌아 올라왔습니다. 지도를 꺼내 보고 제 길임을 확인한 후 다시 그 길로 내려가 안부사거리인 주라치에 도착한 시각이 14시6분이었습니다.
15시24분 묘치고개로 내려서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왼쪽 바로 아래로 15번 국도가 지나는 주라치고개는 넓은 임도가 닿는 안부사거리로 임도 옆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남겨둔 노란 감 몇 개가 매달려 있오 마냥 한가롭게 느껴졌습니다. 2시 방향으로 난 임도로 들어서서 곧 바로 커다란 묘지를 지나며 꼬막껍질을 보았습니다. 한동안 눈에 띄지 않던 조개껍질이 묘지 앞에 무더기로 남겨진 것으로 보아 이 지방에서는 꼬막도 제상에 올려 졌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파르게 370봉을 넘어 삼각점이 세워진 383.5봉에 이르는 길에 고사목 토막들이 길을 자주 막아 걷기가 불편했습니다. 383.5봉에서 330봉으로 가는 길도 한 여름에 지났다면 명감나무가시에 찔려 고생깨나 했을 것입니다. 330봉에서 왼쪽으로 확 꺾어 내려선 묘치고개는 서밧치에서 이어지는 15번 국도가 왼쪽의 동복호로 내려서는 좁은 차도와 오른 쪽의 주암호로 넘어가는 넓은 국도가 갈리는 삼거리 안부로 차들 소통이 많아서인지 아직도 반듯한 음식점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반가웠습니다.
맥주 한 병을 사든 후 5-6분을 왼쪽 아래로 걸어 내려가 묘치마을 버스정류장에서 광주행 군내버스에 오른 것은 17시 15분경이었으니 거의 2시간이 다 되도록 이 고개에서 버스를 기다린 셈입니다. 늦가을에 접어들고부터는 하산 후 젖은 몸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고통스러워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택시를 불러 타곤 했는데 이번에는 전혀 춥지 않아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눈이 스르르 감겼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만났던 장대하고 광활한 구름바다가 황홀하게 펼쳐졌습니다. 한 친구가 지리산의 반야봉에 올라 띄운 반야용선이 피안에 있는 극락의 세계를 향해 지금도 항해 중이라면얼마 후면 반드시 천운산 인근의 구름바다를 지날 것입니다. 바다 물길보다 편안한 길이 바로 구름바다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피안의 세계로 떠나는 반야용선에 몸을 실을 때가 아니어서 천운산에서 이 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하산했습니다. 언제고 때가 되면 이 배에 오르고자 반야봉이든 천운산이든 기꺼이 다시 오를 뜻입니다. 바다 물길은 저 같은 사람들을 태운 범선이 다니는 길이지만 구름바다 길은 신선이나 선녀들을 태운 반야용선이 항해하는 길이기에 더 이상 천상의 천운산에 머무르며 반야용선을 기다리지 않고 사바세계로 하산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오를 호남정맥 종주를 준비했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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