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맥구간:묘치고개-오산-둔병재
*산행일자:2007. 11. 8일
*소재지 :전남화순
*산높이 :오산687m
*산행코스:묘치고개-580봉-오산-어림897번지방도-622.8봉
-둔병재......수만리버스정류장
*산행시간:8시55분-16시20분(총7시간25분/구간종주 6시간30분)
*동행 :나홀로
길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을 보노라면 자연 푸르렀던 저 잎들의 여름날이 떠오르곤 합니다.
낙엽이란 이미 수명을 다한 나뭇잎의 주검들이어서 이들에는 더 이상 미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지나가버린 봄과 여름날의 화사했던 기억뿐입니다. 조락의 계절인 늦가을에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을 지켜보며 저라도 나서서 이들의 화려했던 과거를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사람들이라면 지난날의 삶을 그저 과거지사로 치부하고 세월 속으로 그냥 흘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긁어모아 반드시 역사로 기록해둘 것입니다. 제가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은 나이테 이외에는 달리 소통의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는 나무들이 그들 힘만으로는 푸르렀던 여름날을 역사로 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1월을 맞아 얼마동안만이라도 봄꽃을 다시 피우며 지나간 봄의 역사를 다시 쓰는 꽃나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호남정맥 종주 길에 화사했던 지난날을 재현하고자 애쓰는 나무의 절규를 보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해발 687m의 오산에서 아래로 내려서는 중 어렵사리 몇 송이 꽃을 피운 진달래를 보았습니다. 제 철은 지났지만 몸속에 남아 있는 생명에너지를 모두 짜내서 화려했던 봄날을 잠시라도 재현해 나름대로 자기 역사를 남기고자 하는 진달래나무의 애씀이 더 없이 애절하게 보였습니다. 진달래만 마지막 봄날의 화사함을 재현한 것은 아닙니다. 커다란 갈참나무 옆에서 자라고 있는 연초록 나뭇잎들도 봄을 다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철지나서 뒤늦게 얼마동안만이라도 꽃을 피우고 새잎을 돋게 하는 진달래와 갈참나무의 애틋한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사람들은 그 높은 호남정맥 마루금에 묘지를 앉히고 묘비를 세우는 등 하나라도 더 많은 역사를 남기고자 너무 유난을 떨고 있었습니다. 돗재-묘치고개-둔병재 구간의 호남정맥 길에도 묘들이 하도 많아 일일이 세보지 못 했습니다. 그 중에는 호화분묘도 더러 있었고, 후손들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 볼꼴 사납게 방치된 묘지들도 꽤 있었습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했으니 철지나 꽃을 피우는 정도를 훨씬 넘어 마루금을 끊어 묘지를 앉히고 천년만년이 지나도 깨지지 않을 화강암 묘비를 세워 지워지지 않는 역사를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과유불급이 이를 두고 말하는 것 같아 씁쓰레했습니다.
아침8시55분 묘치고개에서 종주산행을 시작했습니다.
화순읍내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7시31분에 광천터미널을 출발하는 동복행 첫 버스를 읍내 축협 앞에서 20분 넘게 기다려 탔습니다. 217-1번 군내버스가 광산사무소 앞에서 다른 차들의 전복사고로 잠시 멈춘 것을 제외하고는 손님도 별로 없는 시골 길을 20분 남짓 쌩쌩 달려 8시43분에 묘치마을에 도착했습니다. 5-6분을 걸어올라 묘치고개에서 짐을 챙긴 후 왼쪽 길로 조금 내려가 둔병재로 향하는 왼쪽의 들머리로 들어섰습니다. 처음 10분간은 길가에 삼베(?)로 짠 굵은 로프 줄이 쳐져 있는 등 오름 길이 가팔랐습니다. 부글대는 뱃속을 진정시키느라 350봉에서 얼마고 쉰 후 오른 쪽으로 꺾어 키가 큰 소나무들이 들어선 밋밋한 능선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동복호가 점점 가까워지는데도 하루 전 산골짜기를 가득 메운 안개구름이 나타나지 않아 구름 위를 노니는 신선놀음은 역시 사람들이 아닌 신들의 몫이다 했습니다.
10시16분 580봉(?)에서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350봉을 출발해 솔밭 길을 지나 산허리를 에도는 가시밭 길 임도를 따라가다 왼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풀숲 길을 헤치며 나지막한 봉우리에 올라섰다가 안부로 내려서자 땅바닥에 갓 떨어진 노랑 색상의 단풍들이 더할 수 없이 깔끔했고 이 단풍들을 떨어낸 나무들의 수피 또한 말끔해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 날 뒤늦게 가을의 진수를 만나보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습니다. 580봉까지는 얼마 전 올랐던 350봉보다 훨씬 가파르고 긴 비알 길이어서 조금은 힘들었습니다. 한 겨울 눈이 쌓이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삼베(?) 밧줄이 산 중턱에서 거의 꼭대기까지 매여져 있어 몇 번이고 잡고 올랐습니다. 580봉에 오르는 중 내려다본 동백호는 고도가 낮아서인지 전모는 보이지 않고 남쪽 끝자리만 조금 보였습니다. 선채로 지나온 길을 기록한 후 바로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갔다가 곳곳에 억새들이 피어있는 밋밋한 능선을 따라 걸었습니다. 삼각점이 박혀 있을 593.6봉은 왼쪽으로 우회해 산죽 길을 따라 10시 반 조금 넘어 안부로 내려섰습니다.
11시38분 해발 687m의 오산에 올라섰습니다.
593.6봉 아래 안부에서 640봉으로 오르는 길도 가팔랐습니다. 길바닥을 덮고 있는 가지에서 떨어진지 얼마 안 된 참나무 단풍잎은 윤기가 자르르 흘러 여느 낙엽보다 훨씬 부티나 보였습니다. 참나무낙엽이 땅에서 완전히 썩어 없어지는 데는 17.9년이 걸린다 하니 아무려면 나이 든 낙엽보다야 새내기 낙엽의 얼굴색이 윤택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나뭇잎의 주검들 앞에서 나이를 따지는 것 같아 민망했습니다. 삼각점은 없지만 640봉으로 보이는 산봉우리에 올라서자 다음번에 오를 북쪽에 자리한 무등산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살랑대는 미풍에도 견디지 못하고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단풍잎을 바라보면서 따끈한 커피 한잔의 도움으로 오래 잊고 지냈던 시인 박재삼님의 사랑타령을 떠올렸습니다.
산에서
그 곡절 많은 사랑은
기쁘던가 아프던가
젊어 한창때
그냥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기쁨이어든
여름날 헐떡이는 녹음에 묻혀들고
연중들어 간장이 저려 오는 아픔이어든
가을날 울음빛 단풍에 젖어들거라.
진실로 산이 겪는 사철속에
아른히 어린 우리 한 평생
그가 다스리는 시냇물도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엔 시려오느니
사랑을 기쁘다고만 할 것이냐,
아니면 아프다고만 할 것이냐...
간장이 저려오는 아픔을 가을 날 울음 빛 단풍들의 무덤인 낙엽 속에 묻어두고 11시 정각에 640봉을 출발했습니다. 평탄한 능선 길을 얼마고 걷다가 다시 올라 묘지 바로 아래 전망바위에 다다르자 2시 방향으로 동복호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루 전만해도 옆 자리의 주암호와 같이 제우스신을 불러들여 사방을 구름바다로 만들었던 동복호가 산 속 깊은 곳에 다소곳이 들어앉은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보였습니다. 헬기장이 들어선 680봉(?)을 넘어 임도로 내려서는 중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서 있는 일군의 철쭉나무들을 보았습니다. 이들을 똑바로 세우지 않은 것은 바람인지 태양인지 알 수 없지만, 태양이 알알이 익힌 청다래넝굴의 새빨간 열매만은 가시는 숨겨두었을 망정 보기에 참으로 탐스러웠습니다. 임도를 지나 산불감시초소가 세워진 봉우리에 올라 서둘러 사진 몇 커트를 찍었습니다. 이 봉우리보다 조금 높은 바로 앞의 암봉을 자라(鰲)가 납작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오산(鰲山)으로 부른다 합니다. 오산의 정상부인 넓적한 바위에 앉아 쉬면서 자라 등이 거북이등만은 못해도 꽤 넓고 안락하다 싶었습니다.
묘치고개에서 오산까지는 북서쪽으로 진행하며 무등산과의 거리를 좁혀왔습니다만, 오산에서 정맥 길은 한동안 남서쪽으로 뻗어나가 다시 멀어지기에 무등산만 바라보고 넋 놓고 걷다가는 길을 잘 못 들기가 십상입니다. 오산에서 높다란 깃봉을 향해 내려가는 길에 저만치 떨어져 몇 송이 꽃을 피운 진달래를 보았습니다. 사뿐히 지려 밟고 갈만큼 꽃송이가 많지는 않았지만 꼭 3년 전에 금강산에서 만나본 진달래꽃처럼 소월의 영령을 불러내기에는 족했습니다. 안양산의 억새를 맛보기로 보여줄 양 꽤 넓은 공터에 높다란 깃봉을 빙 둘러 서있는 억새가 무성했습니다. 억새밭 사이로 난 큰길로 내려가 만난 사거리에서 임도 따라 한참을 직진해도 표지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난 9월 한번 잘 못 들은 길을 고집부리고 계속 진행하다가 결국에 산 속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일이 있어 이번에는 표지기가 달려 있는 곳까지 군말 않고 되돌아갔습니다. 깃봉 바로 위에서 왼쪽의 억새숲 속으로 희미하게 난 소로를 따라 갔어야 했는데 억새에 넋을 뺏겨 직진하는 바람에 길을 잘 못 들어 20분은 족히 까먹었습니다. 깃봉 바로 위 억새 숲길을 지나고 급경사 길을 내려가 편백나무가 가로수처럼 서있는 넓은 임도로 내려서자 비로소 마음이 놓여 짐을 벗어 놓고 20분을 푹 쉬었습니다. 12시34분 임도를 건너 경사가 매우 급한 비탈길을 내려갔습니다. 안부에서 다시 오른 570봉에서 또 다시 내려섰다가 520봉을 오르기까지 임도출발 반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른 쪽으로 내려가다 장송들이 가득히 들어선 송림을 지나서 897번 지방도에 다다랐습니다.
13시14분 897번 지방도를 건넜습니다.
농로 따라 2-3분을 직진하다 왼쪽 산길로 올라섰습니다. 밭을 지나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죽림 길을 7-8분 걸어 오르자 제가 마치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던 것은그동안 산죽 길은 숱하게 걸었어도 대나무 밭길을 지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나무가 사군자의 반열에 든 것은 그 곧기와 푸르름을 산죽이 결코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라면, 저 같은 속인이 죽림칠현을 닮기를 꿈꾼다는 것은 마치 산죽이 대나무와 견주어 보겠다는 것보다 더 치기어린 짓이다 싶어 슬그머니 그 생각을 거둬들였습니다. 대나무밭에 이어 밤나무 밭을 지나서도 530봉에 오르기까지 한참을 걸어 올랐습니다. 묘지를 지나고 송전탑을 막 지나 오른 쪽으로 꺾어 530봉 바로 밑을 지났습니다. 1-2분 후 방향을 북서쪽으로 돌려 다시 무등산과의 거리를 좁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4시17분 삼각점이 세워진 622.8봉에 올라섰습니다.
북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내려선 임도를 건너 몇 걸음을 옮기자 아주 넓게 자리 잡은 여러 기의 묘지들이 나타났습니다. 잠시 묘역 안으로 들어가 왼쪽 아래 국동리를 둘러 본 후 산 오름을 계속했습니다. 오름 길에 오른 쪽 아래로 안심제 저수지가 보였고 묘지도 몇 곳을 더 만났습니다. 턱밑의 오름길 경사가 만만치 않아 바로 밑 안부에서 622.8봉에 오르기까지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숨을 골랐습니다. 떡을 들어 골린 배를 진정시킨 후 후식으로 사과와 커피를 들고 나자 고고한 쪽빛 하늘도, 도도한 고산의 뾰족 봉도, 냉랭한 저수지 물도 이 순간만은 땀 흘려 오른 저를 반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자연을 벗 삼아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맞고 있어서, 이때 어느 누가 “그 곡절 많은 사랑은 기쁘던가 아프던가”하고 물어왔다면 서슴없이 저는 기쁜 것이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건각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 후 하산 길로 들어섰습니다.
15시25분 둔병재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622.8봉에서 590봉까지 10분가량 지속된 산죽길이 짜증스러웠던 것은 가지들이 얼굴을 때려서만은 아니었고, 두 시간 전에 지나온 대나무 밭길과 너무 대조되어서였습니다. 590봉에서 6-7분간은 넓은잎나무들의 낙엽이 땅을 덮은 전형적인 가을산길이 이어지다가 600봉을 얼마 앞두고 암릉 길로 바뀌었습니다. 600봉을 지나 다시 나타난 산죽들은 편백나무 조림지가 가까워지자 사라졌습니다. 622.8봉 출발 후 반시간 조금 넘어 편백나무 조림지 위 임도를 만났습니다. 왼쪽의 임도를 따라 7-8분을 걸어 다다른 전망대에서 안양산을 일별 한 후 경사 길을 내려가 둔병재 고개 마루에 걸쳐 놓은 출렁다리를 건넜습니다.
16시20분 수만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하루산행을 모두 끝냈습니다.
둔병재 고개마루를 넘어 아스팔트 차도를 따라 서쪽으로 1-2분을 걸어가다 오른 쪽 안양산으로 올라가는 들머리를 만났습니다. 왕복 2차선의 지방도를 따라 청정고을인 들국화마을 앞 수만리버스정류장에 도착하기까지 40분 동안의 걷는 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습니다. 서성리 가는 버스를 타기까지 기다린 1시간도 산본 집까지 갈 길이 멀어서 역시 길고 지루했습니다. 이 버스의 종점인 서성리 하서마을은 그림 같은 서성제 저수지를 끼고 있어 풍광이 뛰어났습니다. 다시 수만리를 지나 화순읍내로 들어가는 이 버스를 타고 광천터미널로 가서 저녁 7시40분에 강남행 일반고속버스를 탔습니다.
여름 내내 길손들을 괴롭혔던 가시투성이의 청미래덩굴이 이토록 견실한 열매를 결실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산길을 걸으며 빨강색 열매가 참으로 예쁘고 탐스럽다 했는데 그 열매가 양팔을 숱하게 찔러댄 청미래덩굴의 열매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둥글고 새빨간 이 열매는 가지에 오랫동안 달려 있어 이듬해 3월에도 산속에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명감” 또는 “망개”라고 불리는 이 열매는 사람들도 먹을 수 있다하니 청미래덩굴은 이 열매 하나로 그동안 의 가학의 역사를 숨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철지나 다시 생기가 오르는 진달래꽃과 연초록 갈참나무 잎, 마루금에다 마구 묘지를 앉히는 사람들, 그리고 새빨간 열매 뒤에 가시를 숨기고 있는 청다래 덩굴들은 지금도 쉬지 않고 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역사를 써나가고 있습니다. 그 옛날을 조심스럽게 재현하거나, 떠들썩하게 과시하거나 또는 슬쩍 비수를 숨기는 것 모두가 나름대로 역사를 써 나가는 방법입니다. 저 역시 글 쓴다는 핑계로 부끄러운 역사를 계속해 써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 종주기를 올리기가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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