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맥구간:유둔재-노가리재-입석리고개
*산행일자:2008. 3. 12일(수)
*소재지 :전남담양/화순
*산높이 :국수봉558m
*산행코스:유둔재-최고봉-노가리재-활공장-국수봉-입석리고개
*산행시간:10시56분-17시41분(6시간45분)
*동행 :나홀로
넉 달 만에 다시 나선 호남정맥 종주산행은 전남담양의 유둔재에서 시작했습니다. 작년 11월 무등산을 둘러본 후 이 고개에서 호남정맥 종주를 일단 멈춘 것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힘들여 먼 곳까지 내려가 봤자 고작 5-6시간 걷고 나면 해가 넘어가 더 이상 종주 산행을 진행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 후로는 겨우 내내 집에서 가까운 경기도 땅의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에서 갈라져나간 지맥 종주에 주력해오며 산줄기탐방을 이어왔습니다. 임진강 제1지류인 한탄강에서 지맥이 다하는 한북감악지맥과 한북왕방지맥을 종주했고, 팔당 앞 한강에서 산줄기가 다하는 한남검단지맥종주도 이 동안에 마쳤습니다. 이 달 들어 날씨가 많이 푹해졌고 해도 충분히 길어졌다 싶어 어제야 비로소 호남정맥 종주 길에 다시 올랐습니다.
다시 찾은 유둔재에서 한국가사문학관을 에워싼 정맥 길을 오르내리며 송강 정철을 떠올렸습니다. 153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가사문학관을 여기 담양에 지어놓은 것은 아버지를 따라 이곳 담양으로 내려온 후 관직에 있을 때와 귀양살이 동안을 빼놓고는 그가 줄곧 여기 창평에 머무르면서 성산별곡,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을 지어 가사문학을 꽃피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은 송강이 지은 사미인곡, 속미인곡과 관동별곡을 일컬어 “하늘에서 부여받은 천재성이 저절로 펴지고 세속의 더러움이 없어서 예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참된 가사는 이 세편일 뿐이다”라고 극찬했다 합니다. 이들 작품만으로도 과연 그는 조선조를 통 털어 최고의 문학적 천재라는 칭송을 들을 만 했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을 잠시 제쳐놓고 문인 송강이 아닌 정치인 정철을 만나보았습니다. 동시대를 같이 살아온 율곡 이이는 정철을 두고 “충직하고 의로운 선비이나 다만 성격이 편협해 아량이 적은 것이 병폐이다”라고 평했다 합니다. 송강 정철은 당쟁의 한 중심에 서서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처리하며 옥석을 가리지 않고 정적인 동인들을 떼죽음으로 몰고 가 기축사옥을 일으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 후 후계자 선정문제로 선조의 미움을 받아 조정에서 쫓겨나고 창평에 내려와 있는 동안 불후의 명작 사미인곡을 남겼다하여 그의 정치적과오가 씻어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백성을 보지 않고 임금만을 쳐다보며 정치를 권력의 쟁탈로만 인식했다면 그가 남긴 작품들이 문학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칭송받을만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 지난여름 영화 “밀양”을 보았을 때와 똑 같은 당혹감이 느껴졌습니다. 이청준님의 “벌레이야기”를 각색해 연출한 어느 한 감독의 불후의 명작이 바로 여우 전도연을 세계적 스타로 바꿔놓은 영화 “밀양”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노작이다 하면서도 영화감독이 아닌 문화체육부 장관으로서 그가 자꾸 생각났습니다. 한 정권의 문화를 관장하는 부서의 장관으로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한민국 건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부정하는 예술인들을 그가 대표했다는 것이 제 소견이어서 그가 감독한 영화 “밀양”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마음 편히 볼 수는 없었습니다. 송강 정철을 요즈음의 인사청문회에 출석시켜 공과 과를 따진다면 과연 그에 좌의정이란 중책을 맡길 수 있을까 선뜻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이런 평가들이 그들보다 더한 저의 편협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먼저 저를 돌아보는 것이 순서다 싶어 더 이상 송강 정철의 정치적 편력을 문제 삼지 않고 나머지 가사문학 길을 마저 걸었습니다.
10시56분 유둔재를 출발했습니다.
새벽부터 서둘러 강남에서 5시50분에 광주 가는 일반고속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10시 정각에 광천동터미널을 출발한 225번 버스에 올라 50분 후 유둔재에 이르는 동안 송강 정철선생의 문학을 기리는 가사문학관을 지났습니다. 고개 마루에서 차도를 건너 가사문학길 코스를 알리는 안내판 앞에서 임도로 들어서자 길섶의 대나무들이 3월을 맞아 생기를 되찾은 듯 푸르러 보였습니다. 10분을 걸어 묘지 앞에서 임도 길을 버리고 좁은 산길로 들어서 본격적인 산 오름을 시작했습니다. 베어낸 참나무들을 비닐로 씌워놓은 무명봉에서 오른쪽 안부로 내려섰다가 삼각점이 서 있는 456.5봉에 올라서자 사격소리가 들렸습니다.
12시12분 17번 표지목이 세워진 새목이재를 지나면서 노부부 두 분을 뵈었습니다.
조상님들의 묘지를 찾아 올라오신 이 분들은 이제껏 오른 쪽 외동에서 올라왔는데 이번에는 새 길을 알아두고자 유둔재에 차를 세워놓고 가사문학관 길을 따라 오셨다며 이제 차를 둔 유둔재로 다시 내려가실 참이라 하셨습니다. 막상 새 길은 알아놓았는데 너무 멀어 옛날처럼 외동 길로 올라와야겠다고 말씀하시며 자리를 뜨시는 두 분을 보고 새 봄을 맞아 일찌감치 선영을 찾으신 그 분들의 효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혹시나 근력이 남아 계실 때 미리 올라와 고별인사를 드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방정맞은 생각도 같이 들어 그 분들의 뒷모습이 마냥 쓸쓸해 보였습니다. 16번 표지목이 서있는 묘지를 지나서 450봉에 올랐다가 왼쪽 안부로 내려섰습니다.
13시51분 “최고봉”이라는 표지가 걸린 해발493m의 봉우리를 올랐습니다.
456.5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쉬지 않고 꽤 많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는 동안 어느새 13시가 후딱 지나 배가 고팠습니다. 456.5봉에서 시간 반 남짓 걸어 까치봉이 그리 멀지 않은 해발480m의 삿갓봉에 올라섰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짐을 내려놓고 점심을 들면서 15분을 쉬는 동안 생기를 되찾고 13시36분에 삿갓봉을 출발해 오른 쪽으로 내려섰습니다. 15분을 걸어 올라선 493봉에 “최고봉”이라는 표지를 걸어놓은 것은 이봉우리가 아마도 가사문학 길의 연봉들 중 최고로 높은 봉우리 때문인 것 같은데 혹시라도 송강께서 이 봉우리에 올라 사미인곡을 착상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다면 아예 “송강봉”이나 “사미봉”으로 명명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나 싶기도 했습니다. 유둔재출발 3시간 만에 가사문학길과 헤어져 송강과의 동행길이 끝나자 집에 돌아가면 그의 역작 사미인곡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다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14시44분 포장도로가 지나는 노가리재를 건넜습니다.
가사문학길 갈림길을 지나 막 베어낸 소나무들이 길을 막는 능선 길을 지났습니다. 450봉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갔다가 경사가 급한 무명봉을 올랐습니다. 얼마 후 다다른 송전탑을 지나 노가리재로 내려섰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고개이름이 점잖지 못한 것은 예전에 나무꾼들이 장보러가는 길에 이 고개에 모여 앉아 노가리를 풀었다하여 붙여진 이름 때문입니다. 노가리재에서 큰 길을 따라 올라 다다른 월봉산제2이륙장에서 잠시 쉬면서 언제고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저 아래 넓은 창평 벌을 훨훨 날게 될 저를 상상해보았습니다.
16시 정각 전망바위에 올랐습니다.
길가의 소나무를 베어내 한 동안 표지기가 보이지 않아 길을 잘 못 든 것이 아닌지 불안했지만 얼마 후 표지기가 다시 보였고 생각보다 산행속도가 빨라 저녁 6시안에 목적지인 입석리고개에 충분히 다다를 것 같아 안심됐습니다. 좌사면이 거의 수직에 가까운 낭떠러지인 능선 길을 걸어 희멀겋게 잘 생긴 커다란 암봉에 올라서면서 나무줄기를 쪼아대는 딱따구리(?)와 흰색과, 주홍색 그리고 검은색의 이름 모르는 삼색조를 만났습니다. 호남정맥에 새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사가 들꽃만이 아니고 이 들 새들도 있음을 새삼 깨달아 그들의 전신을 사진 찍고자 했으나 한자리에 진득하게 머무르지 않고 여기 저기 날아다니는 통에 한 장도 찍지 못했습니다. 창평 벌과 월봉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바위에 올라서서 발 아래 저수지와 넓은 벌을 조망하자 저녁 한 때 시골 풍경이 참으로 한가로워 보였습니다. 전망바위에서 조금 내려가 오른 쪽으로 철조망울타리를 친 길을 만나 안부로 내려서자 오른쪽으로 저수지가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17시11분 해발557.6m의 국수봉을 올랐습니다.
안부에서 조금 올라 이번 산행에서 가장 가팔라 보이는 오름길을 올라 산불감시초소가 서있는 468봉에 올랐습니다. 468봉에서 안부로 내려와 철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서 조금 올라가 만난 월성봉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얼마간 편한 임도 길을 걷다가 묘지 2곳을 지나 오른 봉우리가 국수봉으로 삼각점과 무인시스템이 서 있었습니다. 국수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입석리로 하산했습니다. 하산 길에 만난 시멘트도로 왼쪽 길로 계속 내려가 한쪽 사면을 이발기로 삭발을 한 것 같은 벌목지를 지나 시멘트 길로 들어섰습니다. 왼쪽으로 꺾어 조금 내려가 다다른 곳이 범죄 없는 마을의 입간판이 세워진 입석리 고개였습니다.
17시41분 897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입석리고개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수령이 355년 된 거목 등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가 지켜선 입석리고개에서 오른 쪽으로 3-4분 떨어진 입석리 정류장으로 내려가 18시10분에 창평 행 버스를 탔습니다. 창평서 담양 가는 33번 버스의 운행코스는 한갓진 시골을 모두 들르도록 되어 있어 덕분에 담양 땅 시골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종주산행이 제게 주는 생각지 않은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제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종주산행에 오르지 않고서는 무슨 수로 이처럼 멀리 떨어진 촌구석을 샅샅이 볼 수 있겠나 싶어서입니다. 담양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화순에 이어 제가 묵고 간 호남의 소도시 숫자를 늘렸습니다.
역사적 인물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송강 정철처럼 문학과 정치에서 나름대로 족적을 남긴 분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정치 낙제생, 문학가로서 천재”라고 평한 재야사학가 이이화 님의 한 말씀에 귀가 기울여지는 것은 송강 정철도 당 시대를 고민한 한 사람이었지 결코 현인은 아니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가사문학 길을 걸으며 스스로 범인 속의 인걸로 칭한 송강의 호연지기를 접해본 것만으로도 이번 호남정맥 종주는 아주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산행사진>
- 松琳 통나무 松琳 통나무 Y
- 2008.03.15 09:20
- 형님이 다시 도전하고 싶으신 행그라이더장이네요,,,어제보니 허영호씨도 경비행기 남북종단 재 도전하던데요..
- 시인마뇽 시인마뇽 Y
- 2008.03.15 22:58
- 산에 다니기 힘들면 패러글라이딩을 해볼 생각이오만, 아직은 밟아야 할 산줄기가 너무 많아 한눈 팔 생각이 아니라오.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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