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백두대간·정맥·기맥/호남정맥 종주기

호남정맥 종주기 23 (성림청소년수련원갈림길-일목고개-방축리금과동산)

시인마뇽 2008. 3. 28. 20:39
                                       호남정맥 종주기 23


            *정맥구간:성림청소년수련원갈림길-일목고개-방축리금과동산

            *산행일자:2008. 3. 25일(화)

            *소재지  :전남담양/곡성/순창

            *산높이  :괘일산446m, 서암산456m, 봉황산236m, 고지산315m

            *산행코스:성림청소년수련원갈림길-괘일산-서흥고개-서암산-일목고개

                      -봉황산-88고속도로-고지산-방축리금과동산

            *산행시간:10시38분-18시38분(8시간)

            *동행    :나홀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면 그 말씀은 어떤 품사(品詞)였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품사는 아마도 사물을 가리키는 명사(名詞)였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추정하는 것은 아기들이 맨 먼저 익히는 단어들이 “찌찌” “맘마” “아빠” 등의 명사가 아닐까 해서입니다. 물론 품사니 명사니 하는 것들 모두 먼 훗날 글이 생기고 나서 이름 붙여진 것이지만 굳이 말한다면 태초의 말씀은 명사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입니다. 제 추정이 틀리지 않다면 명사처럼 바쁜 품사도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새로 생기고 사라지는 사물들에 일일이 이름을 지어 구별해야하니 잠시도 마음 편히 쉴 새 없는 품사가 명사일 것입니다. 우리말이 다른 나라 말보다 뛰어난 점은 의성어와 의태어 등 부사가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갈고 닦은 것만으로도 소리시늉이나 짓시늉을 표현하기에 별반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아 새로 생길 부사는 그리 많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명사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수많은 신물질과 신상품 그리고 광속으로 변화하는 세태를 나타내는 새로운 명사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기에 말입니다.


  이번 호남정맥 종주 중에 높은 산의 형체를 그대로 빼닮은 구름을 보았습니다. 

산행 중에 골짜기를 뒤덮어 마치 바다처럼 보이는 운해(雲海)는 가끔 보았지만 산 모양을 그대로 갖춘 구름을 만나 카메라에 담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저런 모양의 구름은 당연히 운해(雲海)에 대비되는 운산(雲山)으로 부르겠지 한 제 생각이 틀렸음을 안 것은 집에 돌아와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였습니다. 운산(雲山)이란 “구름이 낀 높고 아득한 산”으로 구름이 아니고 산을 일컫는 말로 적혀 있었습니다. “운산(雲山)”이 아니라면 “산운(山雲)”인가보다 했는데 이 또한 “산에 끼어 있는 구름”으로 뜻풀이가 되어있어 난감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카메라에 담아온 높은 산 모양의 구름은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열고나서 이 땅에서 줄곧 존재해온 것인데 형상만 만드시고 이제껏 이름을 지어주지 않으셨다면 과연 태초에 어떤 말씀이 있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명사들 중에 고산의 모양을 하고 있는 구름을 나타내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함은 우리의 언어가 그리 완벽하지 못함을 뜻하는 것이기에 노자께서 어떤 사물에 이름을 붙이면 그 본성을 잃게 된다고 “명가명 비가명(名可名 非可名)”을 말씀하신 것이 이제와 생각하니 과연 옳은 말씀이겠다 싶었습니다.


  이번에 만나 본 구름 산은 장관이었습니다.

저 정도 높이라면 이제까지 제가 오른 산들 중 가장 높은 해발4,095m의 키나바루산보다 훨씬 높고 산줄기의 위세 또한 설악산의 서북주능을 뛰어넘어 보였습니다. 몸은 비록 2-3백m 밖에 안 되는 나지막한 호남정맥 길을 걷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알프스의 연봉들보다 훨씬 높은 구름 산을 오르내리고 있다 싶어 가슴이 두근댔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뜬금없이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선현들의 옛 말씀이 생각난 것은 저의 말솜씨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석양이 비추는 구름 산의 황홀함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선현들의 말씀인 즉 불완전한 언어로 백번 듣는 것보다 두 눈으로 직접 사물을 있는 그대로 한 번 보는 것이 훨씬 낫다는 뜻 일진데 이는 우리 언어의 한계를 바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솜씨는 정말 보잘 것 없지만 사진만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감히 사진 한 컷을 글과 함께 올릴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침10시38분 괘일산 못 미쳐 사거리 안부인 성림청소년 수련원 갈림길을 출발했습니다. 전남 곡성의 옥과에서 택시를 타고 가 수련원 입구 삼거리에서 하차했습니다. 왼쪽으로 난 임도 길을 10분 동안 걷다가 오른 쪽 산소위로 올라가 곧바로 갈림길에 다다라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만난 더 넓은 사거리에서 직진해 괘일산 암봉 바로 밑까지 올랐습니다. 이곳에서 거암을 왼쪽으로 에돌다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고도를 높여갔습니다. 우측사면이 암벽인 능선 길 오른쪽에 시꺼멓게 불탄 흔적이 보였는데 길 왼쪽 나무들은 멀쩡한 것으로 보아 제가 걷고 있는 길이 방화선의 역할도 같이 했음이 분명했습니다. 봄의 화신답게 생강나무와 진달래가 꽃을 활짝 피워 이들을 보는 저도 가슴을 활짝 열고 봄을 맞이했습니다.


  11시28분 해발446m의 괘일산을 올랐습니다.

삼각점도 표지석도 없는 암반에다 뿌리박은 한 나무에 표지기가 걸려 있지 않았다면 다른 암봉들과 높이 차가 크게 나지 않아 이 암봉이 괘일산 정상이라 알아채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수련원과 그 옆의 저수지가 바로 아래 내려다보이는 정상에서 내려서 3개의 봉우리를 연이어 오르내린 25분 동안 남사면이 거대한 암벽인 이 산의 진수를 제대로 맛보았습니다. 먼저 분들 산행기에서 괘일산의 암릉 길이 아기자기하고 오를 만하다는 내용을 읽고 나서 아예 릿지화를 신고 왔는데 바위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상쾌하고 발걸음도 가벼워 암릉길 산행이 한껏 즐거웠습니다. 마지막 암봉에서 건너편 회색바위의 설산과 조금 전 로프를 잡고 올라섰던 지나온 암봉 들을 카메라에 담은 후 왼쪽으로 내려가 편안한 솔밭 길을 걸었습니다.


  12시17분 전라북도로 첫 발을 들이는 설산갈림길에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암봉에서 솔밭 길로 내려가 15분가량 걸었더니 바로 위에 꽤 넓은 공터가 자리 잡은 임도가 나타났습니다. 임도 건너 5-6분을 올라 다다른 능선삼거리가 전남담양과 곡성 및 전북 순창의 3개 군이 만나는 접점으로 오른 쪽으로 곡성의 명산인 설산을 오르는 길이 나있었습니다. 동악산의 해오름에 버금가는 이 산의 해넘이가 장관이어서 곡성팔경의 첫 번째가 “동악조일(動樂朝日)이고 두 번째가 "설산낙조(雪山洛照)"라 하는데 1Km밖에 안 떨어진 설산을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치고나자 많이 아쉬웠습니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다가 저보다 더 연배로 보이는 몇 분들을 만났습니다. 아침8시경 방축리를 출발하셨다는 이분들도 저처럼 호남정맥을 종주하는 분들로 서로들 갈 길이 멀어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송전탑을 지나고 길 왼쪽에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친 임도길을 한참 걸어 오른 쪽 바로 아래 마을이 보이는 오거리안부로 내려섰습니다.


  13시59분 해발 456m의 서암산에 올라가 점심을 들었습니다.

오거리 안부에서 낮은 봉우리를 오르내려 베어낸 나무들이 길을 가로막은 능선을 따라 한 참 동안 걷는 중 어느새 줄기가 새파래진 명감나무가 가시를 세워 집적대기 시작했습니다. 고개 마루 왼쪽만 시멘트포장 길인 서흥고개에 다다른 시각이 13시14분으로 시장기가 느껴졌습니다. 언제 이런 연초록 꽃송이를 보았던가 싶은 오리나무(?)가 팔을 크게 벌리고 저를 반기는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내려선 임도에서 직진하여 조금 오르자 길 오른쪽으로 파란 지붕의 조촐한 건물이 한 채 보였습니다. 서암산 허리를 왼쪽으로 가로지르며 너덜 길을 지나 올라선 능선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정상에 오르자 “독도법#8”이라는 팻말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점심을 들면서 14분을 쉰 후 똑바로 내려갔다 다시 오른 봉우리에 산불감시초소가 서있었습니다.


  15시34분 일목고개에 도착했습니다.

산불감시초소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지 않고 똑바로 진행한 것이 이번 알바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이는 초소를 지키는 누군가가 안에서 자고 있어 입산금지기간에 산을 올랐다는 죄의식에 저도 모르게 들키지 않으려고 지도를 보지 않고 재빨리 지나쳤던 것입니다. 초소에서 3-4분을 내려가 만난 삼거리에서 오른 쪽 큰 길로 내려가다가 길이 아닌 것 같아 이내 올라서 다시 왼쪽 길로 내려서자 이내 넓은 묘지가 나타났습니다. 양지바른 곳의 샛노란 개나리와 진적색의 동백꽃이 너무도 아름다워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꽤 오래 걸었어도 표지기가 안보여 불안해하던 중 흐릿한 종주표지기가 하나 보여 맞는 길이다 했는데, 그 후로는 다시 한 번도 보이지 않아 길을 잘 못 들었다 싶어 먼저 오른 한 분의 산행기를 꺼내 읽었습니다. 길을 잘 못 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은 잘도 들어맞아 이제 다시 초소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얼마 남지 않은 지방도로 내려서서 일목고개를 찾아갈 것인 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반시간 가까이 되올라가다가는 지쳐서 목적지인 방축리까지 나아갈 기운이 남아있을 것 같지 않아 그냥 차도로 내려섰습니다. 지도를 보니 차도를 따라 왼쪽으로 쭉 가면 일목고개에 다다를 것 같아 부지런히 내달렸습니다. 낮은 고개를 하나 넘어 만난 담양/금과 양쪽으로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왼쪽 담양방향으로 한참을 걸어 일목고개에 올라서자 표지기가 다시 보였습니다. 이번 알바로 반시간 이상은 늦어진 셈이어서 서둘러 오른 쪽의 봉황산으로 향했습니다만 대나무 밭을 지나 다다른 묘지에서 10분가량 쉬면서 알바로 지친 몸을 추슬렀습니다.


  17시16분 해발315m의 고지산을 올랐습니다.

일목고개 출발 35분에 해발 236m의 봉황산을 올라선 다음 인삼밭과 다소곳하게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는 백목련 등 몇 가지 나무들을 기르고 있는 묘목 밭을 지나 88고속도로변에 다다랐습니다. 갓길을 따라 2-3분을 내려가 시멘트중앙분리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88고속도로를 건너 복숭아밭으로 들어섰다가 능선으로 올라섰습니다. 한참을 걸어도 표지기가 보이지 않아 겁이 덜컥 났습니다만 얼마 후 다시 표지기가 보여 안심하고 내달려 고지산 정상에 오르자 삼각점이 보였습니다. 조금 내려가다 왼쪽으로 확 꺾어 한참을 남진해 다시 88고속도로를 만난 것이 17시46분이었습니다. 고속도로 밑으로 난 수로가 보이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조금 가다 고속도로로 올라서 10여 분 간 순창방향으로 갓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18시41분 방축리 금과동산에서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88고속도로를 건너 수문(?) 위 표지기가 보이는 넓은 길로 들어섰는데 길은 이내 희미해져 자칫 길을 잃을 뻔 했습니다. 낮은 봉우리에서 직진하다 왼쪽 아래 임도로 들어서 다시 88고속도로를 만났습니다. 길 건너 표지기가 보이는 왼쪽 담양 쪽으로 조금 내려가 고속도로를 건넌 후 다시 절개면 위 산길로 붙었습니다. 절개면을 올라서자 편안한 임도 길이 나타났고 얼마 동안 이 길을 걸으며 서편 해넘이의 장관을 제대로 감상했습니다. 나지막한 산줄기위에 또 하나의 드높은 산줄기가 자리해 다시 보니 진짜 산이 아니었고 산 모양을 하고 있는 구름 산이었습니다. 그간 한 여름에는 이 같은 구름 산을 몇 번 보았지만 이른 봄에 저토록 드높은 구름 산을 만나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사진 몇 커트를 찍어 왔습니다. 방축리가 가까워 밭가 큰 길을 한껏 느긋하게 걸으며 장엄한 낙조를 보고나자 하루 피로가 사르르 사라져 온 몸이 개운했습니다.


  파출소를 지나 도착한 금과정류장에서 2-3분을 가다려 순창행 직행버스에 올랐습니다. 순창에 내려 맥주 한 캔을 사들며 찜질방을 물었으나 이 도시에는 없고 담양으로 나가야 있다고 해 다시 광주행 버스를 타고 담양으로 가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변화무쌍한 구름 놀이는 언제보아도 매혹적입니다.

은은하면서도 잔잔한 새털구름이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면, 당장이라도 큰비를 내릴 것 같은 적란운의 먹구름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산자락에 걸친 구름바다는 태고의 비밀을 바다 속에 묻어둔 양 한껏 신비해보이고, 산줄기 위로 펼쳐진 구름 산은 저를 구름 위로 들어 올려 몽환적인 구름 산길로 안내할 것 같았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구름모양을 일일이 이름붙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이번 산행에서 만나본 구름 산은 누구라도 나서서 걸 맞는 이름을 붙여주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명가명 비가명(名可名 非可名)”이라는 노자의 말씀도 옳은 말씀이지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덱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씀도 백번 지당한 말씀입니다.  저 구름 산이 끝내 이름을 얻지 못한다면 존재의 집을 짓지 못하는 것이기에 머지않아 형상도 없어지고 이미지도 사라질 것입니다. 구름에 대한 대접이 이래서야 어찌 구름의 신 제우스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겠으며 그 분노가 부르는 화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나서서 구름 산에 붙여줄 적절한 이름을 찾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제우스신이 화내는 일이 없도록 해 산행 중 평화를 얻고자 위함입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