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봉
*산행일자:2006. 9. 16일
*소재지 :경북 울릉군 울릉도
*산높이 :984미터
*산행코스:대아레조트-안평전-바람등대-성인봉-바람등대
-팔각정-대원사-도동선착장
*산행시간:7시20분-12시4분(4시간44분)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 갈거나.“
우리나라 최동단의 섬 독도를 87키로 앞에 둔 울릉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신라 말 청해진을 거점으로 해상왕국을 세운 거상 장보고를 바다의 신 “해신”으로 불러 온 이 나라 사람들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단단히 노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1980년대에 쌍용제지(주)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및 부인 등 총 7명으로 나들이 팀을 만들어 난생 처음으로 울릉도를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선 저희 일행들의 소박한 섬 나들이 꿈을 산산이 박살내겠다고 포세이돈 신이 13호 태풍 산산을 하필 이때 태평양에서 이 먼 곳까지 불러올릴 일이 뭐 있겠느냐 싶었습니다. 묵호를 출발한 시플라워 여객선이 높은 파도를 뚫고 항해를 하느라 앞뒤로 흔들리는 피칭이 엄청 심했습니다. 4시간 가까운 긴 항해 끝에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한 승객들은 초죽음이 다 되어 하선했는데 이들이 처음 접한 소식은 태풍 산산의 북상으로 다음 날 출항하는 배를 못타면 3-4일을 이 섬에서 묶여 있어야 한다는 여행사 안내원의 통보였습니다. 이틀 밤을 묵으면서 독도도 다녀오고 울릉도 곳곳을 제대로 찾아보겠다는 꿈을 접고 하루를 당겨 이 섬을 빠져나가도록 등을 떠민 것이 바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심술이었습니다.
13시경에 도동에 도착하여 점심을 든 후 관광길에 나서 나리분지 등 명소 몇 곳을 들러보았습니다. 4시간의 육로관광을 마치고 사동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한 대아리조트 콘도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포세이돈 신의 심술에 제우스 신까지 동참해 밤사이 내린 비가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빼어난 경관과 훌륭한 설비를 갖춘 리조트 주위를 산책하면서 조용히 비를 맞고 있는 잔잔한 바다를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한식부페로 공복을 깨고 나서 봉래폭포와 독도전망대를 들르겠다는 일행들과 헤어지고 저 혼자서 성인봉 등정 길에 나섰습니다.
아침7시20분 대아리조트를 출발했습니다.
비닐우의를 걸치고 시멘트 길을 십 수분 걸어 둔덕에 올라서자 온몸이 땀에 뒤범벅이 됐습니다. 이 길을 따라 20분을 걸었어도 들머리가 나타나지 않아 길을 잘 못 든 것이 아닌 가해서 조금은 불안했습니다. 길옆의 민가에 들러 한 할머니에 성인봉과 대원사 가는 길을 물었더니 대원사는 이제껏 걸어온 시멘트 길을 한참을 더 걸어야 다다를 수 있으니 그리하지 말고 조금만 되돌아가 삼거리에서 소나무 숲 옆으로 난 오른 쪽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성인봉으로 들어서는 외길이 나타난다고 할머니께서 친절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할머니의 자상한 길 안내를 따르지 않고 그대로 십 수분을 더 간 것은 지도상에서 제가 어디에 있는가가 확인되지 않아서였습니다. 무리해서라도 지도에 나오는 대원사에 도착해야 제 위치를 적어 넣을 수 있고 그 다음부터는 위치확인이 손쉽기에 시멘트 길을 계속 걸었습니다. 15분을 넘게 걸어 고개 너머 아래로 내려서자 생각지도 않은 이미 문을 닫은 마리나호텔이 나타나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개념도에 마침 이 호텔이 실려 있어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고 지도가 가리키는 산길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할머니가 가르쳐준 길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어 말씀하신 삼거리로 되돌아가 오른쪽으로 난 제 길로 들어섰습니다.
8시5분 키가 훤칠한 소나무들 옆으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얼마를 올랐어도 이렇다할 들머리가 나타나지 않고 안내판이나 표지리봉도 전혀 보이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고개마루에 올라선 다음 오른 쪽으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15분을 더 걸어 길가에 세워진 “성인봉 가는 길”의 안내판을 만나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누렇게 변한 잎들이 꽤 넒은 땅을 뒤덮은 더덕 밭을 지났어도 더덕특유의 향내가 나지 않아 마치 거세당한 짐승을 보는 듯 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와 사신다는 한 할아버지에게서 이 동네가 안평마을이고 저 넓은 뜰이 안평전이며 바로 아래 그림같이 아름다운 포구가 사동항임을 알았습니다. 저를 보고 어디서 왔느냐며 반기는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외로움을 읽고나자 늙어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일거리나 취미생활을 지금부터 개발하지 않는다면 저 노인이 바로 십 몇 년 후의 저의 자화상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긴장됐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아침시간에 한적한 시골 길을 걸으며 배산임수의 안평마을을 보고 평화로움이 이런 것이다 싶었습니다.
8시40분 성인봉 하늘아래 첫 집이라는 산장민박집을 지나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시간만 여의하다면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따끈한 커피라도 시켜들고 집주인인 듯한 할머니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가며 주름 속에 숨겨진 삶의 지혜를 배워도 좋을 법한 쉼터를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웠습니다. 성인봉이 3.2키로 남은 들머리로 들어서 밭떼기를 지나자 꿩 네 마리가 한꺼번에 후드득 큰 소리를 내며 날라 가는 것을 보고 이 섬에는 천적이 없어 꿩들이 무서운 속도로 번식하고 있다는 안내기사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성인봉2.7키로 전방에서부터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됐습니다. 줄기에 불그스레한 기가 도는 마가목(?)과 활엽수들이 많이 보였고 드물게 소나무들도 눈에 띄어 육지의 산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보였습니다. 제 길로 들어섰다는 안도감에 그동안 참아왔던 속이 다시 들끓기 시작해 너덜지대를 지나는 길에서 한참을 벗어나 속을 비운 후 다시 너덜 길로 되돌아와 7-8분을 쉬었는데 그 사이 멈추었던 비가 또다시 뿌리기 시작해 산 속이 컴컴해졌고 그래서 음산하고 스산했습니다.
9시41분 “성인봉 19번지점”안내판이 서있는 능선으로 올라서 5분여 숨을 골랐습니다.
해발390미터대의 산장민박집에서 330미터가량 고도를 높여 능선으로 올라서는 길이 갈지자를 그리며 이어져 된비알의 오름길이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습니다. 너덜지대를 지나 4-5미터 높이의 나란히 서있는 두개의 바위 옆을 지났는데 직각으로 만나는 두 바위 사이의 틈바구니가 훌륭한 K-크랙코스가 될 법했고 마침 암면 한 가운데로 나무가 등을 붙여 꼭대기까지 뻗어 있어 하강연습을 해도 좋아 보였습니다. 능선으로 오르는 중 목덜미가 잘려나간 채 길바닥에 버려져있는 까치(?)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이 섬에는 뱀도 없고 네발달린 짐승도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무서워 할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 새의 목덜미를 공격하여 먹이 감으로 취한 동물은 무엇이고 그 동물이 왜 꿩은 그대로 살려두는지 궁금했습니다. 뱀도 멧돼지도 살지 않는 성인봉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올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반바지만 입고 올랐는데 새 한 마리의 주검을 보고나자 이 산을 너무 가볍게 대한 것이 아닌가 싶었고, 그렇다면 제가 진정 두려워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구름의 신 제우스가 저의 경솔함에 화를 내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능선에 올라서 거친 바람을 맞자 태풍 산산이 어느새 다가와 저를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닌 가 두려웠고 과연 배는 출항할 수 있을지 걱정되어 그들의 분노를 다스려달라고 속으로 주님께 빌었습니다. 왼쪽의 산죽사이로 난 길을 따라 성인봉으로 향했습니다. 몇 개의 봉우리를 20분여 오르내리며 바람등대에 다다르기까지 들머리출발 시간 반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10시33분 해발985미터의 성인봉에 올라섰습니다.
먼저 오른 몇 분들이 자리를 비켜주어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짙은 안개로 바로 앞의 정상석을 빼놓고는 제대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대원사로 갈리는 삼거리 쉼터인 바람등대에서 해인사에서 대원사에 오셨다가 성인봉을 오른다는 한 스님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된 팔만대장경을 제대로 보관하기가 어렵지 않느냐는 제 질문에 옛 분 들이 통풍이 잘되고 습기가 차지 않도록 잘 해놓아 제 때에 먼지를 털어주고 청소만 잘하면 문제가 없다며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를 자세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정상에 오르자마자 일행 한명이 출항시간이 한 시간 앞당겨졌다며 서둘러야한다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스님은 나리분지로 내려갔고 저는 봉래폭포를 들러 저동항으로 내려가 도동항으로 가겠다는 계획을 바꿔 바로 대원사로 내려가 도동항으로 가기로 하고 정상을 내려섰습니다.
11시2분 팔각정 휴게소에서 4-5분을 쉬었습니다.
23분 걸려 오른 바람등대-성인봉 정상의 0.8키로 구간을 뛰어내려와 10분 만에 바람등대로 되돌아왔습니다. 바람등대에서 대원사로 내려서는 길의 경사가 급했습니다만 계속 뛰어 내려가 팔각정에 다다랐고 잠시 숨을 돌린 후 또 다시 밑으로 내달리다가 중간에 오른 쪽으로 꺾어 산허리를 완만하게 에도는 우회 길로 들어섰습니다. 뱃살에 저장된 지방 덕분에 계속해 내달려도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비가 그치고 안개도 어느 정도 가셔 성인봉 정상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까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지만 뭉게구름이 정상을 가려 시간만 까먹었습니다. 실족사고가 자주 일어난다는 “위험지대”를 벗어나 다다른 삼거리 갈림길에서 왼쪽 아랫길을 택해 바람을 가르며 대원사를 향해 또다시 뛰었습니다.
11시32분 차 한잔 들면서 쉬어 가라는 아주머니에 길만 확인하고 냅다 내달렸습니다.
10분을 달려 내려가 시멘트 길로 내려서자 비로소 바로 아래 도동항이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급경사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다 오른 쪽으로 조금 올라가 대원사를 들렀습니다. 너무도 선명한 단청색이 이 절이 지켜본 세월이 그리 길지 않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일행들에 전화를 걸어 방금 대원사를 막 떠났고 아무리 늦어도 30분 이내에 도동항에 도착할 수 있음을 알렸습니다. 전날 차로 지난 팔자고개를 걸어 내려가 도동시내로 들어섰습니다.
12시4분 도동항에 도착해 5시간 가까운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서둘러 점심을 사든 후 십 수분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쪼개어 해수목욕탕에서 번갯불에 콩 튀어 먹듯이 잽싸게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간신히 약속시간에 대어 선착장에 다다르자 아침에 헤어져서 봉래폭포와 전망대 및 저동항을 다녀온 일행들이 반갑게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13시10분 도동항을 출항해 24시간 동안 머물렀던 울릉도와 작별했습니다.
돌아가는 뱃길에도 여전히 파도가 높게 일어 4시간이 다 걸려 묵호항에 도착했지만 파도의 운동방향과 배의 진행방향이 일치하여 흔들림이 거의 없었습니다. 승객 어느 누구도 토하는 사람이 없어 배안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쉬지 않고 틀어대는 텔레비전 소리에 읽던 책을 덮어버리고 파도가 넘실대는 창밖의 바다로 눈을 돌렸습니다.
깊고 넓기로 말한다면 어머니 가슴을 빼 놓고는 단연 바다가 으뜸입니다.
그러고 보니 바다는 어머니를 많이 닮은 듯 합니다. 넓은 가슴으로 자식들을 감싸주는 어머니처럼 바다는 육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모든 물들을 싫다는 내색 한번하지 않고 말없이 받아들입니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제대로 길러내고자 어떤 아픔도 드러내지 않고 가슴속 깊이 꼭꼭 숨겨놓듯이 바다 또한 사람들이 아무리 못살게 굴어도 웬만해서는 분노하지 않고 그 깊은 속으로 삭이고 또 삭입니다. 그러나 이 바다도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참았다가는 자식들에 해가 된다고 판단된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돌변하여 무섭게 덤벼드는 우리 어머니처럼 바다도 사람들이 더 이상 바다와의 공존을 거부하고 혼자 살겠다고 바다를 죽음으로 몰고 갈 때 이 바다의 저항은 치열합니다. 빙하를 녹여서 해안가 도시를 물속에 잠기도록 만드는가 하면, 적조현상을 일으키어 사람들이 싼 값으로 고급단백질을 취할 수 없도록 훼방을 놓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증발시켜 얻은 수증기를 바람의 도움을 받아 육지로 상륙시켜 물바다를 만드는 태풍은 분노한 바다가 사람들을 공격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일 것입니다. 이 나라 아버지들이 우리의 어머니에 너무 심한 한을 남겨주어서는 안되듯이 사람들도 더 이상 바다를 괴롭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굳힌 것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작은 심술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배우고 익혔기 때문입니다.
묵호항에서 정동진으로 옮겨 어둠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바다를 지켜보았습니다. 정동진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아침 일찍 서둘러 서울로 귀경하여 3박4일간의 모든 여정을 마쳤습니다.
2,600만 년 전부터 시작된 화산활동이 불과 1만 년 전에 멈추어 오늘의 울릉도가 이루어졌다 합니다. 그 긴 세월동안 용암을 분출하고 식히기를 수백 번을 했을 터인데 마지막 화산활동 시에 분출된 용암만은 멀리 흘러가지 못하고 꽤 급하게 식어 버린 것 같습니다. 해안가가 완만한 제주도와는 달리 여기 울릉도의 해안가는 경사가 급해 아직도 길을 내지 못한 해안선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각박한 해안가보다는 성인봉에 오르는 산길이 더 여유롭게 보였고 산속에 숨겨진 나리분지가 더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북상하는 태풍에 밀려 쫓기듯 울릉도를 빠져나오느라 제대로 관찰하지 못한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지만 언제고 다시 찾아 이번 여정의 아쉬움을 풀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분노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도 다독거려 줄 뜻입니다.
청마 유치환 님의 시 “울릉도”를 올리며 산행기를 맺습니다.
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 갈거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첨부:울릉도 여행기
< 울릉도 여행기>
*여행기간:2006년 9월14일-17일(3박4일)
*여행지 :경북 울릉도/강원 정동진
*여행인원:1980년대 쌍용제지 직장동료 등 총 7명
(손병운 대장, 서상원/신영희 부부, 이성현/정미경 부부, 하철수님 및 우명길)
*여행일정:
-9월14일: 11시30분 강남터미널 출발
-9월15일: 3시 동해시 도착
9시-13시 묵호항 -울릉도 도동
14시20분-18시30분 울릉도 해안 육로관광
대아레조트에서 일박
-9월16일: 7시20분-12시30분 봉래폭포, 독도전망대, 저동항 관광 /성인봉 산행
13시-15시 울릉도-묵호
정동진으로 옮겨 모텔에서 일박
-9시17일 8시50분 정동진 출발
9시45분 강릉터미널 출발
12시20분 강남터미널 도착
중식후 해산
우리나라 최동단의 섬 독도를 87키로 앞에 둔 울릉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신라 말 청해진을 거점으로 해상왕국을 세운 거상 장보고를 “해신”으로 불러 온 이 나라 사람들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단단히 노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1980년대에 쌍용제지(주)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및 부인 등 총 7명으로 나들이 팀을 만들어 난생 처음으로 울릉도를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선 저희 일행들의 소박한 섬 나들이 꿈을 산산이 박살내겠다고 포세이돈 신이 13호 태풍 산산을 하필 이때 태평양에서 이 먼 곳까지 불러올릴 일이 뭐 있겠느냐 싶었습니다. 묵호를 출발한 시플라워 여객선이 높은 파도를 뚫고 항해를 하느라 앞뒤로 흔들리는 피칭이 엄청 심했습니다. 4시간 가까운 긴 항해 끝에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한 승객들은 초죽음이 다 되어 하선했는데 이들이 처음 접한 소식은 태풍 산산의 북상으로 다음 날 출항하는 배를 못타면 3-4일을 이 섬에서 묶여 있어야 한다는 여행사 안내원의 통보였습니다. 이틀 밤을 묵으면서 독도도 다녀오고 울릉도 곳곳을 제대로 찾아보겠다는 꿈을 접고 하루를 당겨 이 섬을 빠져나가도록 등을 떠민 것이 바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심술이었습니다.
*9월15일 금요일: 오전 흐림/오후 흐림
전날 밤 11시 반에 서울의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동해 행 심야우등버스에 올랐습니다.
1980년대에 쌍용제지에서 같이 일한 인연을 오늘까지 이어 온 저희들 5명이 이 모임을 가진 후 처음으로 동부인하여 원거리 여행길에 나선 것은 적극적이고 유연한 성격으로 어떤 일이든 깔끔하게 매듭짓는 손병운 대장이 도맡아 주선한 덕분이었습니다. 서울출발 3시간 반이 지난 새벽 3시에 동해시에 도착하여 인근 찜질방을 찾아들어가 몇 시간동안 눈을 붙였습니다. 아침식사로 이곳 특별매뉴인 곰치국을 든 후 묵호항으로 옮겨 울릉도로 떠나는 여객선 시플라워호에 승선했습니다.
아침9시 묵호항을 출발하여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한가운데로 나섰습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태풍의 북상으로 파고가 높은 곳에서는 4미터에 이른다는 기상예보가 발해졌으나 모처럼의 바닷길 여행으로 들떠서인지 어느 누구도 날씨에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161키로의 거리에 승선료를 44,000원이나 받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쌌습니다. 해운이 가장 저렴한 교통수단인데 동일거리의 우등고속버스보다 3배 이상 비싼 차비를 물리는 것은 비수기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동해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즈음해서 승객 몇 분들이 배 멀미로 토하기 시작한 것은 파고가 높아 배가 앞뒤로 심하게 요동쳐서인데 승무원들이 비닐주머니를 나누어주는 것을 빼고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해 배 멀미의 고통은 고스란히 승객들의 몫이었습니다. 다행히 좌우로 흔들리는 로우링은 별로 없고 앞뒤로 요동치는 피칭 현상만 나타나서 저는 그런대로 참아냈습니다만 일행 중 반이 넘게 토하기 시작했고 한 명은 유난히도 괴로워해 계획대로 독도를 다녀올 수 있을지 걱정됐습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조금 심술을 부렸다고 큰 배에서도 이 난리를 치르는데 까마득한 옛날인 신라의 지증왕 13년(512년)에 나무사자를 가득 실은 목선으로 풍랑을 헤치고 군사들을 이끌고 가 우산국 울릉도를 정벌한 이사부 장군이 새삼 존경스러웠습니다. 울릉도가 시야에 들어오고 나서도 반시간 이상을 더 운항해 오후 1시경에 울릉도 도동항에 기착했는데 거칠게 이는 파도를 거스르며 나가느라 다른 때보다 50분이 더 걸렸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울릉도 땅을 밟았습니다.
4시간 가까이 멀미로 시달리다 간신히 울릉도에 첫발을 내디딘 저희들에 여행사 안내원이 태풍의 북상으로 내일 오후 2시 배로 이 섬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틀 밤을 묵으면서 독도를 다녀오고 울릉도 해안가를 차로 돌고 배로 돈후 해발 985미터의 성인봉을 오르며 알차게 보내고자했으나 25시간 이상 이 섬에 머물 수 없어 독도관광을 포기해야 했기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도를 넘는 심술에 짜증이 났습니다. 여행사 직원이 안내하는 한 음식점에 들러 점심을 드는 중 서비스가 하도 엉망이어서 목소리를 높여야 했습니다. 옛날 같지 않고 도시음식점의 친절한 서비스에 길들여진 요즈음 관광지 특유의 바가지요금이나 불친절에 많은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분노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고 대처해야 이 섬에서 외국의 관광객을 끌어 모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14시20분 승합차로 섬 일주 관광길에 나섰습니다.
전국에서 7번째로 큰 섬인 울릉도의 섬 둘레는 56.5키로이나 지금부터 1만 년 전 마지막으로 분출된 용암이 급하게 식느라 해안가가 제주도처럼 완만한 것이 아니고 경사가 급해 아직도 일주 길이 다 나있지 않았습니다. 긴 시간 안내를 맡은 35세의 젊은 남자 기사가 이 섬에서 유일한 대학이 노인대학이라고 익살을 떨어가며 구수하게 길안내를 잘 해주어 점심시간의 불쾌했던 기분이 이내 풀렸습니다. 차도변의 마가자 나무는 빨간 열매와 잎들이 장수무병에 약효가 있음이 알려진 후 무단 채취를 금하고 있는 소중한 유실수이지만, 정작 이 섬을 상징하는 울릉군 군목은 바늘잎 모양의 상록수 후박나무라 합니다.
도동항에서 팔자교를 지나는 고개를 넘어 시계방향으로 해안선을 따라 돌며 남서쪽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사동항을 거쳐 이 섬의 최남단에 위치한 가루등 등대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송곳봉 앞 성불사까지 진행하는데 2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섬의 명동이라는 도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신호등이 터널 앞에 설치된 것은 통구미, 남양 그리고 남통터널 등이 모두 외길로 되어있어서였습니다. 길지 않은 차도를 내기위해 산을 뚫기도 하고 산사태방지용으로 만들기도 해 이 길 끝 지점의 섬목도선장까지 모두 8개의 터널이 나 있는 것으로 지도상에 적혀있었습니다. 통구미와 남양의 몽돌해변은 이 섬에 모래가 얼마나 귀한가를 짐작케 했으며 거북바위, 사자암, 곰바위, 악어바위, 상황버섯바위등은 바위의 기기묘묘한 형태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이렇다할 전설이 덧대지지 않아 상상력이 그리 풍부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곰바위 오른 쪽으로 난 수층교 길로 올라가 수층터널, 산막터널 그리고 태하터널을 차례로 지나 현포령을 넘었습니다. 바닷가 현포리에 도착해 아담한 규모의 해양박물관을 들러 다양한 조개류는 물론 박제된 물개와 표범 등을 관찰했습니다. 용천수로 발전을 한다는 작다란 수력발전소를 지나자 바다 속에 자리 잡은 코끼리바위가 눈을 끌었습니다.
16시20분 구멍이 네 개 뚫린 송곳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성불사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이 지났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희멀건 좌불석상과 곧추서있는 송곳봉을 배경으로 일행들에 기념사진을 찍어 준 후 막힘없이 시원스레 펼쳐진 잔잔한 앞 바다를 여유롭게 내려다보자 며칠 후에 저 바다로 앙칼진 태풍이 지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옛날부터 부자들이 살아왔다는 천부동을 지나 구불구불한 아리랑고개를 넘어서자 산으로 빙 둘러싸인 드넓은 나리분지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여기가 바로 화산활동으로 이 섬이 생성될 때에 용암이 분출된 해발 400미터대의 분화구였으며 넓이가 60만평이나 되는 울릉도 유일의 평지지대여서 가파르게 바위들이 곧추 서있는 해안가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안온함이 저희 일행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18시30분 대아리조트에 도착해 관광일정을 마치고 배정된 방을 찾아 짐을 풀었습니다.
도동으로 나가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도 오전의 배 멀미로 되게 시달린 일행 한명이 아직도 몸이 제대로 회복이 되지 않아 몹시 힘들어했습니다.
*9월16일 토요일: 오전 비/오후 흐림
사동항이 내려다보이는 대아리조트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아직은 고요하지만 전운이 감도는 아침 바다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한식 부페로 아침을 들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저 혼자 성인봉에 오르고 나머지 6명은 여행사의 봉래폭포 등 몇 곳을 더 관광하기로 스케쥴을 확정한 후 아침 7시경에 일단은 헤어졌습니다. (이하 후첨 산행기 참조)
12시40분이 다되어 도동선착장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일행들이 봉래폭포와 독도전망대 및 저동항을 들러 즐거운 시간을 가진데다 만약에 저를 따라 모두 성인봉에 올랐다면 한 시간 당겨진 배의 출항시간에 대기가 힘들었을 것 같아 따로 스케쥴을 잡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었습니다. 13시10분 경 도동항을 출발해 24시간을 체류했던 울릉도에 작별인사를 고했습니다. 올 때와는 달리 로우링과 피칭을 거의 느끼지 못해 출발부터 바닥에 누운 일행도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파도는 전날과 비슷했지만 파도를 타고 순방향으로 항해하는 것이어서 흔들림이 거의 없었습니다. 운항시간은 울릉도로 갈 때와 비슷하게 걸렸지만 토해내는 승객들이 한 사람도 없어 배안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쉬지 않고 틀어대는 테레비존 소리에 읽던 책을 덮어버리고 파도가 넘실대는 창밖의 바다로 눈을 돌렸습니다. 넓고 깊기로 말한다면 어머니 가슴을 빼 놓고는 단연 바다가 으뜸입니다. 그러고 보니 바다는 어머니를 많이 닮은 듯 합니다. 넓은 가슴으로 자식들을 감싸주는 어머니처럼 바다는 육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모든 물들을 싫다는 내색 한번하지 않고 말없이 받아들입니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제대로 길러내고자 어떤 아픔도 드러내지 않고 가슴속 깊이 꼭꼭 숨겨놓듯이 바다 또한 사람들이 아무리 못살게 굴어도 웬만해서는 분노하지 않고 그 깊은 속으로 삭이고 또 삭입니다. 그러나 이 바다도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참았다가는 자식들에 해가 된다고 판단된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돌변하여 무섭게 덤벼드는 우리 어머니처럼 바다도 사람들이 더 이상 바다와의 공존을 거부하고 혼자 살겠다고 바다를 죽음으로 몰고 갈 때 이 바다의 저항은 치열합니다. 빙하를 녹여서 해안가 도시를 물속에 잠기도록 만드는가 하면, 적조현상을 일으키어 사람들이 싼 값으로 고급단백질을 취할 수 없도록 훼방을 놓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증발시켜 얻은 수증기를 바람의 도움을 받아 육지로 상륙시켜 물바다를 만드는 태풍은 분노한 바다가 사람들을 공격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일 것입니다. 이 나라 아버지들이 우리의 어머니에 너무 심한 한을 남겨주어서는 안되듯이 사람들도 더 이상 바다를 괴롭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굳힌 것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작은 심술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배우고 익혔기 때문입니다.
17시10분 경 묵호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택시 2대로 최고의 일출전망지로 알려진 정동진으로 옮겼습니다. 모텔에 짐을 푼 후 모래시계공원을 거닐었습니다. “모래시계” 드라마 덕을 단단히 본 정동진은 동해안의 다른 해수욕장보다 지나치게 상업화되어 드라마의 애틋한 분위기나 조용하게 편히 쉬어 갈만한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에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든 해변가는 역동감이 감돌았습니다. 생선회로 저녁을 포식하고 노래방에서 목청을 돋운 다음 다시 해변가를 찾았습니다. 수평선 가까이에 포진한 오징어 배 등불 빛이 캄캄한 밤하늘에 숨어버린 별빛을 대신했습니다. 폭죽의 폭명도 없는 다소곳한 오징어 배 불빛이 다정다감하게 다가왔습니다.
*9월17일 일요일: 오전 흐림/오후 흐림
해돋이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정동진에서 해오름을 지켜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해넘이에 뒤이은 땅거미와 해돋이에 앞선 먼동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하늘에서 일출만은 제대로 볼 수 있겠다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아침 일찍이 혹시나 하면서 해변 가를 찾은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손대장과 강릉행 기차시간을 확인하고자 해변 가 모래사장을 10분여 걸어 정동진역으로 나갔습니다. “모래시계”드라마 덕에 열연했던 여배우의 이름을 얻은 자그마한 소나무는 탈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녀는 벌써 별리의 고통을 안으로 새기며 또 다른 드라마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미국의 시인 조이스 킬머의 시“나무들”의 “시는 나와 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건 하느님 뿐”이라는 구절이 참이다 싶었습니다. 아침7시차는 너무 이르고 10시차는 너무 늦어 기차여행을 포기하고 8시50분에 정동진을 출발하는 강릉행 좌석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강릉고속터미널에서 3시간 가까이 달려 강남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12시가 조금 넘어서였습니다. 터미널식당에 들러 점심을 들면서 해단식을 가지며 손대장의 노고에 감사했습니다.
청마 유치환 님의 시 “울릉도”를 올리며 3박4일간의 울릉도 여행기를 맺습니다.
울릉도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 갈거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산행사진>
*여행일자:2006. 9. 15일
*여행지 :울릉도
*동행 :쌍용제지 동료 총7명
*산행일자:2006. 9. 18일
*산행코스:대아레조트-성인봉-도동선착장
*나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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