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2010. 6. 13일(일)
*소재지 :경북 구미
*산높이 :976m
*산행코스:금오산버스정류장-법성사-약사암-현월봉 정상
-다혜폭포-해운사-채미정-금오산버스정류장
*산행시간:10시28분-16시8분(5시간40분)
*동행 :나홀로
권문세족들이 산과 하천을 경계로 삼는 거대한 농장을 갖고 있었다고 고려사가 전하는 대로 고려 말의 힘있는 자들은 권력을 이용해 일반 농민들의 토지를 약탈하고 농민들을 노비로 만드는 등 온갖 횡포를 다부려, 이들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합니다. 이때 등장한 개혁정치세력이 신흥사대부였는데 강경개혁파는 고려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는 정도전, 하륜, 조준 등의 역성혁명파들이 이끌었고, 고려는 존속시킨 채 개혁만을 수행하자는 온건개혁파는 정몽주, 이색, 길재 등이 주도했습니다. 왜구토벌에 전공을 세운 신흥 무장 세력인 이성계와 손잡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전복하고 조선을 세운 세력이 강경파였기에, 이성계의 5남 이방원에 정몽주가 타살되고 급격히 세력을 잃은 온건파는 권력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온건파를 대표하는 이색과 길재도 향리로 돌아가 은둔했습니다. (이 부분 이덕일님의 "당쟁으로보는 조선역사"를 참고했습니다.)
제가 뜬금없이 고려 말 역사를 일별한 것은 이번 금오산(金烏山)산행기에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을 모시고 싶어서였습니다. 1353년에 태어나 1419년에 돌아가신 길재선생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 및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과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고려 말 문신이자 유학자이셨습니다. 야은 길재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향리인 선산(지금의 구미)으로 내려가 모친을 봉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여생을 바치셨습니다. 하산 길에 들른 채미정(採微亭)은 영조44년에 지어진 정자로 길재선생께서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을 중국의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것에 비유하여 채미(採微)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입구의 안내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입구인 흥기문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팔각집과 오른쪽 위에 경모각 및 유허각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앞으로 금오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경모각 안에는 길재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고자 숙종임금께서 지으신 "어필 오언구(御筆 五言句)"가 모셔졌 있었습니다. 선생께서 잘 알려진 "야은(冶隱)"외에 "금오산인(金五山人)"이라는 호를 하나 더 가지신 것만 보아도 금오산에 대한 선생의 애틋한 마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경북 봉화의 청량산을 오르내리며 퇴계 이황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듯이 여기 구미의 금오산을 산행하며 야은 길재선생을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오전10시28분 금오산입구 상가지대의 버스정류장을 출발했습니다. 구미역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반시간 가량 기다려 금오산행 12번 버스에 오른 후 20분이 조금 더 지나 금오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법성사로 오르는 길 아래 계곡에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제 내린 비는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법성사 입구에 조금 못 미쳐 금오산도립공원 안내판이 세워진 정상2.4Km 전방 삼거리에서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서고 나서야 여름 한낮의 땡볕을 가릴 수 있었습니다. 정상으로 향하는 산길을 따라 십 수분 걸어 만난 삼거리에서 왼쪽 샛길로 빠져 법성사를 들러보고 돌아오는데 20분가량 걸렸습니다. 이절의 연륜을 적어놓은 안내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지만 세워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대웅전의 단청에 세월의 때가 끼지 않았습니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정상가는 길이 고도차가 별로 없어 편하다 했는데 정상 1.8Km 전방지점을 지나자 경사가 급해졌습니다.
12시18분 해발고도가 600m 가량 되는 능선에서 점심을 들면서 20분 남짓 쉬었습니다. 정상1.8Km 전방지점에서 10분 남짓 걸어 “법성사 5번지점”의 공터바위에 올라서자 동쪽으로 구미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여름 날 한낮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능선 길을 오르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도 이 산을 다시 찾은 것은 6년 전 다혜폭포 길로 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사진을 남기지 못해 제대로 한 번 찍고 싶어서였습니다. 햇볕을 가릴 나무가 없는 능선 길을 걸어 오르다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잠시 멈춰 서서 저 아래 흐릿하게 보이는 낙동강 강줄기를 사진 찍었습니다. 소나무 그늘아래에서 떡을 꺼내 든 후 12시41분에 오후산행을 이어갔습니다. 오름길은 여전히 가팔랐지만 활엽수 숲길이 계속되어 걸을 만 했습니다. 오른 쪽 위로 암봉이 자리한 돌계단 길을 지나면서 그늘이 시원해 잠시 쉬어갔습니다.
저 아래 낙동강이 4대강 개발 반대에 앞장선 종교인들을 떠올렸습니다. 정부는 수질을 개선하고 부족한 물을 확보하고 홍수피해를 줄이기 위해 4대강 개발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고 반대 측은 후손들에 물려줄 우리 강을 죽이는 일이라고 펄쩍 뛰고 있습니다. 찬성과 반대 모두 나름대로 논리가 있어 어느 것이 옳다고 딱 잘라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찬성이든 반대든 종교인들은 더 이상 나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속의 일은 속인들에 맡기고 종교인들은 그들이 할 일이나 잘 챙기라는 것입니다. 제가 매주 성당에 나가는 것은 신부님으로부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이지 4대강 개발에 관한 강론을 듣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더 이상 종교인들이 나서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안 될 만큼 어느 방면에든 수준 높은 전문가들이 넘쳐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어느 여승의 독선과 오만이 가져온 국가적 피해를 기억하고 있는 국민들에 종교인들이 조금이라도 미안해한다면 그리 쉽게 나서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13시48분 금오산의 정상인 해발976m의 현월봉에 올랐습니다. 그늘 길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얼마간 쉰 다음 거암 약사봉(?)을 왼쪽 허리 길로 에돌아 약사암 요사채(寮舍寨)를 들렀습니다. 남쪽 아래 금오산저수지가 한눈에 잡히는 요사채는 약사암 터가 좁아 그 옆 봉우리에 세운 것 같은데 이곳도 비좁아 답답했습니다. 이번 산행 최고의 볼거리는 약사암과 주변 바위봉우리였습니다. 거암 약사봉의 산허리에 들어앉은 약사암에는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가 좌정해 계시는데 서울 관악산의 연주대보다 더 높아 약사암 앞마당에서 둘러보는 풍광이 일품이었습니다. 서쪽으로는 구름다리로 연결된 종각이 위태로워보였고 동쪽의 깎아지른 암벽이 포대능선을 지나며 바라다보는 도봉산의 암벽처럼 위풍당당해 보였습니다. 회색의 수직암벽에 뿌리를 박고 하얀 꽃을 피운 이름 모르는 꽃나무들이 보여준 생명의 강인함은 여기 약사여래의 무한한 돌보심에 힘입어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사암에서 계단을 걸어 현월봉-약사봉 사이의 고개 마루로 올라서자 김천의 직지사에서 보았던 "동국 제1문" 현판이 붙어 있는 관문이 보여 여기 약사암이 직지사의 말사임을 알았습니다. 군부대가 먼저 자리를 차지한 현월봉 꼭대기는 올라가지 못하고 한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바로 아래 정상석 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헬기장으로 내려가 사방을 한 번 휘둘러보자 주변풍광들이 눈에 익다했는데 이는 6년 전 한 겨울에 여기 헬기장에서 점심을 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5시정각 할딱고개 전망바위에 이르렀습니다. 정상에서 할딱고개로 내려가는 길은 남쪽으로 이어졌습니다. 공터를 시멘트로 포장해 놓은 엄청 넓은 헬기장을 지나 송전탑에 이르기까지 길도 넓고 경사도 급하지 않아 걷기에 편했습니다. 송전탑 앞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산허리에 낸 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금오산성 옛터를 지났습니다. 조선조 영조 때는 성안에 주둔한 총 병력이 35,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요충지였다는 이 성은 그 기능이 조선 말엽까지 존속되었다고 금오산도립공원의 안내팜플렛은 전하고 있습니다. 경사가 급한 돌계단 길을 내려가 할딱고개에 이르자 바로 위 전망바위가 보였습니다. 이 바위에 올라 지척으로 보이는 금오산 저수지를 사진 찍은 후 다혜폭포로 내려가면서 고개이름이 묘하다 했습니다. “깔딱”이란 숨을 가쁘게 쉴 때 내는 의성어이고 “할딱”은 숨을 가쁘게 쉬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이기에 고개이름으로 쓰기에는 둘 다 괜찮을 듯싶은데 그래도 이제껏 귀에 익은 것이 “깔딱고개"여서 하는 말입니다. 지그재그로 설치한 가파른 목제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이 길로 오르는 이는 누구라도 할딱거릴 수밖에 없겠다 했습니다.
16시8분 금오산 입구 주차장 상가에 도착했습니다. 할딱고개 아래에 자리한 대혜폭포(大惠瀑布)는 그 높이가 27m에 달해 카메라를 세워 찍지 않고서는 전신을 한 커트에 담기 힘들 정도로 그 규모가 컸습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 전체를 울린다고 해 명금폭포(鳴金瀑布)로도 불리는 이 폭포가 이번에는 수량(水量)이 부족해 폭포수가 흘러내려가는 계곡조차 울리지 못했습니다. 선녀들이 폭포수를 탐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는 여기 전설의 현장에서 턱 받치고 주저앉아 몇 시간을 기다려본들 거의 바닥을 드러낸 소(沼)를 선녀가 찾을 것 같지 않아 곧바로 하산했습니다. 서력 898년 도선국사가 세운 고찰로 일면 대혈사로도 불리는 해운사에 두 젊은 남녀들이 단청을 새로 그려넣고 있었습니다. 절을 나와 영흥정에서 물 한 바가지를 받아 마신 후 금오산성의 대자문을 빠져나갔습니다. 구리시민의 염원을 담고 있는 돌탑들과 나무계단 길이 잘 나있는 적송지대를 지나 채미정을 들렀습니다. 서둘러 채미정(採薇亭)을 둘러보고 주차장 상가로 옮겨 맥주 한 캔을 사마신 후 곧바로 버스에 올라 금오역으로 향했습니다.
금오산 가까이로 환향한 야은 길재선생의 영향력은 선생이 서거하신 1419년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선을 개국하고 정권을 장악한 역성혁명파는 각종 공신이 되어 정국을 이끌어갔으나 상당수가 부패해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반면 역성혁명파에 밀린 온건개혁파는 향리로 돌아가 향촌사회를 장악해 갔습니다. 이들이 조선조 9대의 성종 임금 때 사림파라는 이름으로 정계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성혁명파의 후신인 훈구파들이 부패해 가능했습니다. 야은 길재선생의 손제자(孫弟子)인 김종직의 출사를 시작으로 영남지방의 김굉필, 김일손 등이 그 뒤를 이어 사림파를 이루었고, 그 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과 갈등이 사화를 낳았습니다. 몇 번의 사화 끝에 정권을 장악한 사림들이 하찮은 일로 갈라져 대립하면서 시작된 당쟁을 이끈 사람들 상당수가 야은 길재 선생의 몇 대 아래 제자들이었기에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선생의 영향력은 조선조 내내 지속되었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이부분 일부내용은 이덕일 님의 "당쟁으로보는 조선역사"를 참고했습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본 후 그 많던 인걸들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 것을 목도한 야은 길재선생께서 향리로 돌아와 천년만년 한 자리를 지켜온 금오산을 보시고 산천이 의구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은 그가 지은 택리지에서 선산(善山)을 "남쪽에 있는 선산(善山)은 산천이 상주보다 더욱 깨끗하고 밝다. 전해오는 말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일선(一善)에 있다' 한다. 까닭에 옛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았다"고 찬했습니다. 선산에 인재가 많다는 것이 틀린 얘기가 아니라면 그 공은 우선 후학양성에 힘쓴 길재선생과 선산을 넉넉하게 어우르는 금오산에 돌려야할 것입니다.
방송대 국문과를 다니는 동안 야은 길재선생의 야은집을 공부할 기회가 한번은 있을 것입니다. 그때 다시 선생께 인사드리기로 하고 이번에는 이만 맺고자 합니다.
<산행사진>
금오산 (1)
*산행일자:2004.2.15일
*소재지 :경북 구미
*산높이 :976미터
*산행코스:공원입구-다혜폭포-금오산 정상-다혜폭포-공원입구
*산행시간:10시36분-15시10분(4시간34분)
어제 경북 구미의 금오산을 올라, 봄을 열었습니다.
지난 달 초 계룡산을 다녀온 후 한달 반만에 과천시산악연맹의 금오산 산행에 합류했습니다. 아침 7시 10분 과천을 출발, 10시 30분 경 금오산 도립공원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언뜻 산세가 눈에 익은 듯 싶어 기억을 더듬어보니 작년 11월에 올랐던 주왕산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원로 입구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오 백년 옛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본 야은 길 재 선생의 회고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조선초기 영남학파를 연 길 재 선생이 여기 금오산의 채미정에 유했다하니 그 후학인 매월당 김시습도 국내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혹시나 이곳 금오산에서 쓴 것이 아닌가 해서 문헌을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가 글을 쓰느라 수년간 머문 금오산은 이곳 구미가 아니고 “신라의 달밤”노래에 나오는 경주의 금오산이라고 합니다.
10시36분 기념비를 출발하여 잘 포장된 페이브먼트를 지나 금오산의 들머리에 들어서자 “돌탑 21C"로 명명된 21기의 돌탑들이 길 오른 쪽에 도열해 있었습니다. 이 돌탑들은 지난 해 34만의 인구로 우리나라 전체수출(1940억불)의 10%가 넘는 200억불을 쳐내느라 고생한 구미시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합니다.
구미시민들의 염원이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산업평화일까, 경기활성화일까, 아니면 남북통일인가? 제 생각에는 공업도시인 이곳 구미시민들의 염원은 아무래도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그러니 평평한 평지에서 갑자기 튀어 올라 만들어진 해발 976미터의 금오산은 단연 구미시민의 보물단지임에 틀림없습니다.
1977년 이곳 금오산에서 처음으로 자연보호운동을 제창한 박 대통령은 과연 이 고장이 낳은 위인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생 촌을 공업도시로 일구어 낸 그가 먼 훗날 후손들이 치를 그 후유증을 줄여보고자 자연보호운동을 주창했다니, 그의 선견을 오늘에 되살리고 싶습니다. 혹시나 병 주고 약주는 격이라 비웃는 분이 있다면 그는 그의 단견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할 일은 최우선적으로 국민들의 끼니문제를 해결해야하며, 내일의 비전을 얘기하고 개발의 후유증을 치유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산적한 현안과제를 뒤 물린 채 내일의 비전만을 읊조리는 고담준론은 학자들의 몫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11시 금오산성을 지나 해운사 앞의 영흥정에서 지하암반에서 끌어올린 생수를 퍼마셔 속세에 더럽혀진 폐부를 말끔히 씻어 냈습니다. 해운사의 전신은 서력 898년 도선국사가 세운 대혈사라 합니다. 도선국사가 이 절을 창건한 신라 말기에 그 많은 대찰 들을 무슨 돈으로 세웠을까 의문입니다. 조선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느라 나라재정을 결단내 당백전을 남발해야했는데 그보다 천년 이른 신라 말기에 국부의 규모가 뻔한데 백성들의 강제노역이 없고서야 대찰 들을 창건하는 일이 턱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혜폭포를 일별하고 숨을 몰아쉬며 오른 할딱고개를 지나 눈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11시
40분 출발 1시간 여만에 첫 쉼을 가졌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는 껍질을 쉽게 벗길 수 있는 감귤이 최고의 과일입니다. 땀을 흘린 후 까먹은 귤은 그 맛이 정말 꿀 맛이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오르내리는 많은 사람들로 미끄러워진 눈길을 아이젠을 차고 올랐습니다.
치받이의 눈길을 15분 여 올라 정상 0.8키로 전방에 송전탑이 세워진 산마루에 섰습니다. 이제 급경사의 길은 끝난 듯 싶었고 양지 길이어서 아이젠을 풀고 편하게 걸었습니다.
12시 35분 경, 출발 2시간만에 해발 976미터의 정상에 섰습니다.
산바람이 찼지만 그래도 지난 토요일에 오른 강원도의 백덕산에 비해 찬 기운이 많이 빠져나가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이곳의 바람에서 저는 봄기운을 느꼈습니다. 동장군의 힘을 빌려 산자락 끝까지 쳐내려갔던 눈의 자취가 이제는 봄의 훈기에 밀려 5부 능선까지 쫓겨 올라와 있습니다. 먼발치 산등성이에 쌓인 마지막 눈들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인근의 헬기장으로 내려와 막걸리를 반주 삼아 일행분들과 함께 점심을 맛있게 들었습니다.
13시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아이젠을 차지 않은 어느 여성분이 고생스럽게 길을 내려와 제 스틱을 권했으나 그래도 확실히 믿을 것은 두 손밖에 없다며 맨손으로 두발을 도와가며 내려가는 모습이 너무 안스러웠습니다.
14시 할딱고개에서 짬을 내 금오산저수지의 아담한 정경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이 저수지의 얼음 또한 봄기운에 밀려 그 30%가량이 녹아 내려 사라졌습니다.
할딱고개와 깔딱고개중 어느 고개가 더 힘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할딱”과 “깔딱” 모두 가파른 고개를 넘을 때의 힘 듬을 묘사한 부사인데 “할딱”이 의태어라면 “깔딱”은 의성어라는 차이밖에 없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금오산의 할딱고개와 백운대의 깔딱고개중 어느 고개가 더 힘드냐를 묻는 것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금폭포로도 불리우는 빙폭의 다혜폭포도 그 사진을 남길 만하고, 폭포 양옆의 기암절벽도 진경이기에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해운사를 거쳐 15시 10분 공원입구로 되돌아 왔습니다. 왕복 8키로의 산행 길을 약 4시간 반만에 마친 셈입니다.
이번에는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왕복등산이어서 쉼 쉼이 금오산의 절경을 완상했습니다.
그리고 여말의 길 재 선생과 20세기 후반의 박 대통령을 기리며그 사이의 우리 역사를 기웃거려 보았습니다. 역사란 과거와의 대화라 합니다. 어제가 오늘의 과거이고 오늘은 내일의 과거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미래의 과거입니다. 그래서 미래를 예견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통찰이 절대 필요합니다.
선현들이 문,사,철을 중시한 내면은 이렇습니다.
문학을 통하여 상상력을 키우고 역사를 통하여 통찰력을 기르며 철학을 달구어 판단력을
길러야 현명한 지도자가 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역사에서 그러한 지도자들을 여러 분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오늘의 국부를 이루었고, 또 그 덕분에 오늘 금오산을 오르지 않았나 싶어 고마움에 답하고자 합니다.
'VII.산림청선정 명산100산 > 명산100산 탐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31.대야산 산행기(1-3) (0) | 2007.01.02 |
---|---|
30.운악산 산행기(1-2) (0) | 2007.01.02 |
28.성인봉 산행기 (0) | 2007.01.02 |
27.희양산 산행기 (0) | 2007.01.02 |
26.속리산 산행기(1-4) (0) | 2007.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