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산림청선정 명산100산/명산100산 탐방기

39.청량산 산행기(1-2)

시인마뇽 2007. 1. 2. 23:30

                                             청량산(2) 


    *산행일자:2009. 8. 30일(일)

    *소재지  :경북봉화

    *산높이  :870m

    *산행코스:선학정-청량사-하늘다리-청량산장인봉-두들마을-청량폭포 앞

    *산행시간:11시12분-15시(3시간48분)

    *동행    :경동고24기 동산회회원25명

    (김남진부부,김주홍부부,김준기부부,유영근부부.이문상부부,장병일부부,문순신, 박부준, 박용철,서중원,우명길,이규성,이기후,이달헌,이명재,장광종,장용진,정준식,황의천)

 

    


  청량(淸凉)하다 함은 맑고 서늘함을 뜻합니다.

거의 모든 산들은 숲이 우거져 서늘하고 공기가 맑아 청량(淸凉)하다 함은 우리나라 산의 대표적인 속성이기에, 어느 한 산을 정해 “청량산(淸凉山)”으로 부르는 것은 마치 미스코리아에 출전한 한 여인에 “미인(美人)”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어제 오른 산이 특별히 “청량산(淸凉山)”으로 불리는 데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산이 남한 땅에서 가장 기온이 낮고 오지 중의 오지인 경북 봉화에 자리하고 있어 다른 산들보다 더 청량할 것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생각됩니다만, 그 이유 하나만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낸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산에 오래 머무른 지혜로운 선현들이 이 산을 오르는 산객들에 오늘을 사는 청량한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산을 오르면 이 산에서 머물다 가신 선현들을 꽤 여러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이성(二聖)과 김생 및 최치원 등 당대 최고의 문필가를 만나 뵐 수 있습니다. 고려조 공민왕은 황건적의 난을 피해 이 산으로 들어와 머무르며 청량산성을 쌓도록 했습니다. 조선조 최초로 서원을 연 주세붕은 이산 12봉의 이름을 손수 지었고 이나라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은 이 산을 오가산(吾家山)이라 부르며 내 집 드나들듯이 했다 합니다.


  제가 청량(淸凉)한 곳과 인연을 맺은 것도 어언 40년이 넘었습니다.

어제 오른 청량산을 처음 오른 것은 금세기에 들어선 후의 일이지만, 서울 제기동의 제가 다닌 대학캠퍼스 안에 있는 청량대(淸凉臺)에 오른 것은 1968년의 일입니다. 5대사찰을 다 다녀보았다는 한 친구는 제가 중3때인 1964년 경주로 수학여행 떠나면서 지나간 청량리(淸凉里)까지 청량한 곳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만 아무래도 억지 같아 빼놓았습니다. 선농단(先農壇)의 비가 서있는 나지막한 구릉을 아이디어가 청량한 이 캠퍼스의 대학생들이 청량대(淸凉臺)라고 지어 부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청량대의 공기가 특별히 청량했다는 기억은 없습니다. 백운대(白雲臺)가 백운산(白雲山)이 아니듯이 청량대(淸凉臺)도 청량산(淸凉山)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청량대에서 선농제가 치러지는 시기가 논농사를 시작하기 직전이어서 그 때쯤의 날씨가 청량하다 못해 쌀쌀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여담입니다만 선농제에 참여한 임금과 백성들이 함께 탕을 드셨는데 이 탕이 훗날 설렁탕으로 이름이 바뀐 선농탕이라는 이야기는 쌀쌀한 날씨에 장시간 긴장한 채 서있느라 힘겨워했을 선농단 하객들을 따뜻하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어제는 고교동기생들과 함께 경북 봉화의 청량산(淸凉山)을 올랐습니다.

경북 청송의 주왕산 및 전남 영암의 월출산과 함께 기기묘묘한 바위가 많다 하여 우리나라 3대 기악에 속하는 청량산은 최고봉인 장인봉이 해발870m로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지만 수많은 암봉과 기암, 샘물과 암굴, 그리고 청량사와 그 암자들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산림청에서 명산100산으로 선정한 꽤 유명한 산입니다.


  오전11시11분 선학정을 출발했습니다.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세 시간 넘게 달려 청량산 도립공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선학정-입석-자소봉-하늘다리-장인봉-청량폭포의 풀코스를 다 뛰는 친구들 14명은 이달헌 대장이 이끌고 출발지인 입석으로 옮겼고 선학정-청량사-하늘다리-장인봉-청량폭포의 단축코스로 산행하는 나머지 11명은 제가 앞장서 청량사로 향하고자 시멘트 길로 올라섰습니다. 너무 흘려 써 현판한자를 판독할 수 없는 일주문을 지나 다다른 갈림길에서 퇴계 이황선생께서 머무셨다는 청량정사를 들르지 않고 곧바로 진행했습니다. 3년 전 산사태로 떼굴떼굴 길 따라 굴러 내려오는 커다란 바위를 피하느라 섬뜩했던 그 지점에 이르자 가파른 언덕에 세워진 청량사가 바로 머리 위로 가까워졌고 계곡 건너 남쪽으로는 해발845m의 축융산과 청량산성이 잘 보였습니다. 아침 집을 출발할 때 내리던 비는 완전히 멈췄지만 하늘의 먹구름은 그대로여서인지 가파른 시멘트 길을 따라 올랐어도 그다지 덥지 않아 역시 청량산이다 했습니다.


  11시45분 청량사의 유리보전(琉璃寶殿) 앞에 섰습니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하니 천년고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후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인 고봉선사(1351년-1428년)에 의해 중창되었다는데 이 절의 고색창연한 맛은 이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동의 봉정사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연화봉 기슭에 자리한 청량사는 절터가 좁고 가팔라 계단식으로 가람을 배치한 것이 참으로 독특해 보였습니다. 이절의 본전인 유리본전은 양 옆의 문수보살과 자장보살사이의 한 가운데에 약사여래가 좌정하고 있어 석가여래가 중앙에 자리한 여느 대웅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공민왕이 친히 현판을 쓰셨다는 유리본전의 약사여래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닥나무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이라 하는데 여기 와서 약사여래께 불공을 드려 병을 고치고 장수를 하며 소원을 성취한 불자들이 많다 합니다. 남쪽의 축륭봉이 막힘없이 훤히 보이는 5층석탑 앞에서 몇 번이고 예불을 올리는 여인네의 불심과 그 옆에 서서 눈멀거니 먼 곳만 바라다보는 남정네의 무심을 모두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오른 쪽으로 떨어져 자리한 응진전(應眞殿)은 원효대사가 머물던 암자로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다 합니다.


  12시 57분 하늘다리를 건넜습니다.

청량사에서 왼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뒷실고개에 다다르기까지 된비알의 계단 길을 걸어 오르느라 땀을 조금 흘렸습니다. 뒷실고개에서 오른 쪽 자소봉으로 오르는 철계단이 하도 가팔라 곧추선 것처럼 보였습니다. 단축코스를 밟는 저희들은 풀코스팀이 지나올 자소봉을 포기하고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능선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비껴선 곳에 둘러앉아 함께 점심을 들었습니다. 풀코스팀 선두 몇 명이 자소봉을 오르고 있음을 무전교신으로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장인봉으로 향했습니다. 4-5분이 지나 이 산의 새로운 명물인 하늘다리 앞에 다가섰습니다. 선학봉과 자란봉을 이어주는 초록색의 이 다리는 작년5월에 준공된 것으로 주변의 우중충한 회색의 암벽이 이 다리 밝은 색의 도움을 받아서인지 한결 더 밝아 보였습니다. 길이가 90m이고 폭이 1.2m인 이 다리가 하늘다리로 불리는 것은 가운데가 공중에 붕 떠있는 현수교이기 때문이겠는데 지상에서 붕 뜬 높이가 70m라 합니다. 3년 전 여기를 지날 때만 해도 한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건너편 봉우리로 오르느라 진땀을 뺐는데 하늘다리 덕분에 참으로 편해졌다 싶어지자 먼 훗날 하늘나라로 가는 길도 이 하늘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방정맞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도록 바닥에 강화유리를 깔아놓은 아주 안전한 다리 한가운데를 지나면서 아찔한 느낌이 들어 불안해 한 것은 안전과 안심이 별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13시23분 해발870m의 장인봉(丈人峰)에 올라섰습니다.

하늘다리를 건너 봉우리 하나를 넘어 깊숙한 안부로 내려섰습니다. 왼쪽으로 청량폭포 길이 갈리는 안부에서 봉우리 하나를 오른 쪽으로 에돌며 철계단으로 올라섰습니다. 3년 전 풀코스로 뛸 때에는 이 계단을 오르기가 엄청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단축코스로 올라서인지 별로 힘든 줄 모르고 이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새 변한 것은 정상석에 새겨진 봉우리이름이  의상봉에서 장인봉으로 바뀐 것인데 조선조 유학자 주세붕이 중국 태산의 장악(丈岳)을 본 떠 장인봉(丈人峰)으로 바꿨다 합니다. 바로 아래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풍광이 일품이었으니 S자를 그리며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의 지류 현풍천의 몸놀림이 참으로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다시 장인봉으로 돌아와 안부로 되 내려가는 길에 풀코스 팀의 선두 몇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제껏 점심도 들지 못하고 강행군하고 있는 이들에 미안한 감도 들었지만, 세상만사 욕심을 조금만 줄여도 이렇게 여유롭게 즐기며 산행할 수 있음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14시27분 집 이 산 중턱에 들어선 집 몇 채의 두들마을(?)에서 짐을 풀었습니다.

장인봉에서 깊숙한 안부로 되내려와 오른 쪽 청량폭포 길로 내려선 시각은 13시47분이었습니다. 청량폭포까지 1.5 Km이면 이 마을까지는 1Km를 넘지 않을 것 같은데 경사가 하도 급해 나무계단 길을 걸어 마을에 이르는데 중간에 나무계단 길이 끝나는 곳에서 잠시 쉬기는 했지만 무려 40분이나 걸렸습니다. 칡넝쿨이 잔 나무들을 뒤덮은 길을 따라 먼저 내려간 몇 친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마을 초입의 첫 집에서 팔고 있는 막걸리였습니다.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가 절로 읊어질 법한 술자리가 생각보다 길어진 것은 뒤따라오는 풀코스 팀의 선두들이 합류해서였습니다.


  할머니의 허락을 받아 부뚜막에 걸려있는 무쇠 솥을 사진 찍어왔습니다.

어렸을 때 시골집에서 이 솥으로 쇠죽을 쑤던 그 옛날이 떠올랐습니다. 뼈 빠지게 일해 온 일소들이 농기계에 일을 뺏겨 비육우로 전락한 이제는 더 이상 쇠죽을 쑬 일이 없어 많이 편할 것입니다. 그로인해 일터로 나가면서 둘레둘레 고개를 흔들면서 워낭소리를 내던 우리의 일소들은 이제는 더 이상 우공대접을 받고 있지 못합니다. 놀고먹는 개들이 견공대접을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일자리를 잃은 우공들은 더 이상 워낭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은 워낭소리는 일터로 진군하는 나팔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워낭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우공만이 아닙니다. 지난 가을 경제난국으로 목에 달고 있는 워낭을 내려놓아야 했던 중년의 아버지들도 아직은 다 워낭을 다시 찾아 매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워낭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는 날 이집을 다시 찾아 부뚜막 신에 감사의 절을 올리고자 합니다.


  15시 청량폭포 앞에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무쇠 솥 집을 뒤로 하고 다시 하산 길을 이어갔습니다. 계단 길을 지나 시멘트 길로 들어서서 얼마간 내려가자 계곡 건너로 청량폭포가 보였는데 거의 물이 흐르지 않아 청량의 참 의미가 왜곡되지 않나 싶었습니다. 차도에 내려서서 청량폭포를 카메라 담은 후 하루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아래 계곡에서 탁족을 마친 후 버스에 올라 청량산 도립공원을 빠져나와 도산서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지난 봄 속리산의 문장대를 오른 후 안동의 풍산을 들러 한우고기를 포식한 일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는 저희들은 잉어찜을 포기하고 다시 그 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반주를 곁들이며 포식했습니다. 후속프로그램으로 귀경버스가 노래방으로 꾸며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청량산에서 청량한 공기로 폐부 깊숙이 속을 씻어 냈으니 친구들이 내는 노래 소리도 모처럼 하모니를 이루었습니다.


  산행시간은 단 4시간으로 짧았지만 오가는 시간은 6시간이 넘게 걸려 배보다 배꼽이 컸습니다.

덕분에 1학년 때 짝 궁과 함께 앉아 오랜 시간 지난 추억을 반추할 수 있었습니다.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처럼  소리 높여 노래 한 곡 뽑았습니다. 기쁘게 들어준 친구들 모두 고마웠습니다. 오가는 길이 이리 즐거우니  오는 겨울의  설산 산행이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산행사진>

 

 

 

 

 

 

 

 

 

 

 

 

 

 

 

 

 

 

 

 

 

 

 

 

 

 

 

 

 

 

 

 

 

 

 

 

 

 

 

 

 

 

 

 

 

 

  • 2009.08.31 17:52
사진 참 빨리 올라 왔네요...산이름 만큼 상큼하네요....같이 산행을 못해 참 아쉬우나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오겠지요.....

일은 잘 처리하셧는지요? 작년에 설치한 하늘다리가 명품이었습니다.

꼭 가보고 싶은 청량산 마뇽님의 사진으로 잘 보았습니다
존함은 한국에 산하에서부터 뵙고 알고 있었는데 이제 인사드립니다*^^*
산하에서 처음 뵈었을땐 문학을 하시는 분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는데(시인이라고 하셔서요^^)별명이 생긴 사연을 보곤...ㅎㅎ(죄송합니다^^) 그런데 전혀 크로마뇽인 같지 않으세요
언제나 건강하셔서 좋은 산행 많이 하시길 빕니다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반갑습니다. 대학다닐 때 촌스럽기가 크로마뇽같다 했는데
그간 많이 진화했나 봅니다. 다 세종대왕님 창제하신 한글로 말과 글을 익힌 덕분입니다.
청량산은 산세도 산세려니와 선현들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어 더욱 가볼만한 산이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청량산(1) 
 

           *산행일자:2006. 5. 28일

           *소재지  :경북 봉화/안동

           *산높이  :870미터

           *산행코스:입석-김생굴-경일봉-보살봉-청량산정상(의상봉)-청량사-선학정

           *산행시간:10시42분-15시42분(5시간)

 


 

  오염과 공해로 찌든 도시에서 탈출해 청량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면 서울에서 좀 멀기는 해도 “맑고 서늘함”의 “청량”을 산 이름으로 가진 경북 봉화의 청량산이 제 격일 듯싶습니다. 남한 땅에서 연평균 기온이 가장 낮아 서늘하기로 이름난 봉화에 자리 잡은 청량산은 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기암괴석이 빼어나 경북 청송의 주왕산, 전남 영암의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악의 하나로 전해지는 명산입니다. 그러기에 신라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최치원과 김 생, 고려의 주세붕, 이조의 퇴계 이황 선생 등 이름난 성현과 명사들이 이 산을 찾아 그들의 족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계절의 여왕 5월이 끝날 즈음 비온 뒤 끝에 고산을 오르면 하늘이 맑고 바람이 선선해 청량하고 삽상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때 찾은 산의 주 수종이 침엽수 소나무가 아닌 활엽수 참나무라면 연초록 잎들과 그 넓은 잎들이 내뿜는 피톤치드 덕분에 일년 중 청량함은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어제 오른 청량산이 그러했습니다. 5시간가량 청량산의 연봉들을 오르내리며 지나온 참나무 숲 속에서 삼림욕을 끝내고 나자 온 몸이 더 할 수 없이 개운했습니다. 잠실로 되돌아와 일행 몇 분들과 맥주 몇 잔을 나눈 후에도 산뜻한 몸 컨디션이 그대로 유지되어 집에 돌아와서도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아침 7시 조금 지나 잠실을 출발하면서 청량산의 출발지로는 청량리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쓸 데 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청량리에서 가까운 청량대가 떠올랐습니다. 청량대는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조그마한 둔덕으로 지금은 사라진 제가 대학 4년 동안 몸담았던 캠퍼스의 이름입니다.  이 안에 조선조 때 임금께서 손수 납시어 매년 이른 봄에 일년 농사가 순조롭도록 조상께 제를 올린 선농단이 있었습니다. 이 선농단에서 올린 제를 선농제라 불렀으며 이 때 임금은 선농제에 참석한 인근 백성들과 함께 탕을 끓여 들었다 합니다. 이 탕이 바로 오늘날의 설렁탕의 어원이 된 선농탕으로, 제가 나가는 산악회에서  하루 산행을 끝낸 회원들에 식사를 제공해, 선농탕에 숨어 있는 두레 문화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가해서 항상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아침 10시42분 선학정을 조금 지나 입석에서 하루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입석에서 왼쪽의 청량산 들머리로 함께 들은 분은 이 산악회의 명산 순례에 처음 참여한 여성분으로 빨리 가는 것에는 영 자신이 없어 걱정이라고 말씀해와 제가 이 산악회의 맡아놓은  단골 후미라며 안심시켜드렸습니다. 올망졸망한 청량사 사찰들이 한눈에 잡히는 어풍대 전망대를 거쳐 들머리 출발 반시간 후에 김생 굴에 도착했습니다. 반월형의 자연암굴인 이 굴에서 신라 후기 명필가인 김 생이 머물러 공부를 했다는 데 암자도 아닌 저리 불편한 굴에서 공부해 과연 학습효과가 제대로 났을까 의심이 갔고 9년 후 혼연히 나타난 여인의 길쌈 솜씨에 대적할 글 솜씨가 안 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1시53분 산소를 막 지나 왼쪽으로 등산로 표시가 나있는 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김생 굴을 둘러본 후  경일봉을 향해 반시간 동안 경사가 가파른 깔딱고개를 오르느라 진땀께나 흘렸습니다. 된비알의 고개 길을 흔히들 깔딱고개라 부르는데 유독 금오산에는 할딱고개로 적혀 있어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할딱과 깔딱은 모두 같은 뜻으로 차이는 깔딱은 의성어이고 할딱은 의태어라는 것이었습니다. 깔딱고개를 오르느라 할딱거리는 제게 “홀딱벗고 새”들이 짝을 짓느라 짖어대는 울음소리가 아주 정겹게 들렸습니다. 능선에 올라 오른 쪽의 탁립봉을 들르지 않고 바로 청량산의 주봉인 보살봉으로 향했습니다.


 

 

  12시27분 일명 자소봉으로도 불리는 해발 845미터의 보살봉에 올랐습니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은 다음 20분 남짓 걸어 다다른 841봉에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청량산 12봉 중 유일하게 제가 걷고 있는 능선 상에 있지 않고 큰 도로 건너 남서 쪽 능선에 자리한 축융봉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곧추 선 보살봉도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841봉에서 안부로 내려섰다 철계단을 따라 올라 망원경이 설치된 보살봉을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북적댔습니다. 이제껏 보살봉이 모델료를 받았다면 벌써 떼 부자가 되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행한 한 분을 그분의 카메라로 건너 편  암봉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어 드렸습니다. 저 멀리 북동쪽으로 내닫는 산줄기가 대간의 마루금이려니 생각하면서 안부로 내려서 “경일봉 1.2키로”의 표지목을 보았는데 언제 경일봉을 지났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12시55분 탁필봉을 지나 능선 길에서 전을 펴고 점심을 들었습니다.

보살봉에서 내려와 오른 쪽 길로 한참을 걷다가 길 가에 세워진 탁필봉 표지석을 만났습니다. 탁필봉 또한 암봉이어서 오르지를 않고 옆 질렀는데 우회 길에 표지석을 세워놓은 것은  탁필봉의 위치를 제대로 알려주겠다는 공원의 배려가 아니겠나 싶어 고마웠습니다. 탁필봉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의상봉으로 향하다 점심을 들고 있는 일행들을 만나 합류했습니다. 후미대장을 맡은 한 분이 집에서 얼려 온 맥주 한 캔을 내주어 고맙게 마셨습니다. 이 산속에서 더 할 수 없이 소중한 맥주 한 캔을 받아 들고 술의 신 박쿠스가 함께 들자고 덤벼들 것 같아 서둘러 마시고 나자 나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7-8분을 걸어 B코스로 빠지는 뒷실고개로 내려선 시각이 13시18분이었습니다.


 

  14시3분 해발 870미터의 청량산 상봉인 의상봉에 올라섰습니다.

뒷실고개에서 의상봉까지 1.3키로는 결코 편한 길이 아니어서 45분이나 걸어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뒤실고개에서 암봉을 우회해 다시 아래로 내려섰다가 10분 남짓 이름을 모르는 두개의 암봉사이로 나 있는 협곡을 따라 경사가 급하고 미끄러운 길을 걸어 고개마루로 올라섰는데 3년 전에는 없었던 철계단이 세워져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고개마루에서 얼마고 내려섰다가 의상봉으로 오르는 마지막 300미터는 힘이 들었습니다. 만장절벽의 단애를 이룬 암벽이 버텨주는 의상봉 정상에 올라서자 기대했던 암봉은 보이지 않고 정상이 평평하고 두루뭉술해  같이 오른 한 분은 조금은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만 일행 분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은 거르지 않았습니다. 1300여 년 전 신라의 명승 의상대사가 입산수도를 했다하여 이름 붙여진 의상봉에서 조망한 주변 정경은 일품이었습니다. 그동안 오르내리고 옆 질러온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의 암봉들을 뒤 돌아보며 저 바위들을 곧추세운 자연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 까 궁금했습니다.


 

  14시48분 산 중턱에 자리한 양철지붕의 빈집들을 지났습니다.

의상봉에서 전망대를 거쳐 빈집마을로 내려서기까지 하산 길은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이어서 미끄러질까 몹시 조심스러웠습니다. 빛이 제대로 닿지 않는 음습하고 미끄러운 숲길을 지나며 나뭇가지에 화사하게 피어난 하얀 꽃들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어두운 숲을 빠져 나와 양철지붕 집을 지나는 중 외롭게 놓여진 지게를 보았습니다. 이 길을 앞서간 나뭇꾼 님이 선녀님을 만나고자 바쁘게 지나느라 지게를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두고 간 것이 아닌 가해서 확인해볼 뜻입니다.


 

  15시20분 청량사를 들렀습니다.

양철지붕마을에서 고추밭을 지나 시멘트도로를 만나기까지 우회 길은 오솔길이었습니다. 숲 속 길은 고즈넉했고 숲 속을 벗어난 길을 걷는 동안은 병풍처럼 산허리를 내두른 암벽들을 카메라로 옮기느라 바빴습니다. 선학정에서 청량사로 이어지는 시멘트길을 만나 잠시 고심하다 일행들과 헤어져 청량사를 들르고자 10분을 도로를 따라 걸어 올랐습니다. 길옆에 수로로 연결한 나무통들이 이채로웠습니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청량사는 오랜 나이와는 달리 좁은 절터에 옹기종기 들어선 작은 절이었지만 전망만은 빼어났습니다. 페트병에 약수를 갈아 채우고 하산하는 길에 한 여인이 비명을 질러 뒤돌아보자 경사진 길을 따라 여러 개의 큰 바위돌이 굉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떼굴떼굴 굴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산사태가 난 듯싶었습니다. 다행히도 하산 중인 사람들이 모두 급하게 길을 벗어나 피신을 해서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지만 우물쭈물하다가 그 바위 돌 맞았다가는 다리가 분질러졌거나 목숨을 잃었겠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끼치고 아찔했습니다.


 

  15시42분 팔각정이 세워진 선학정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감했습니다.

화장실에서 흙으로 범벅이 된 바지를 갈아입고 바로 아래 주차장으로 옮겼습니다. 산악회에서 정해 준 5시간 안에는 간신히 댔지만 또 꼴찌로 내려와 조금은 민망했습니다.


 

  귀경길이 순조로워 저녁 8시경에 모처럼 일찍 잠실에 도착했습니다.

이 호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몇 분들과 뜻을 모아 찾은 곳은 인근의 한 생맥주 집이었습니다. 처음 이 산악회를 찾은 여성분과 함께한 자리에서 모두가 닉네임으로 통성명을 한 후 시원한  생맥주로 건배를 했습니다. 이시대의 석학인 이 어령교수는 그의 최신작 “디지로그 선언”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음식이 바로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메디아라고 지적했습니다. 무슨 행사가 있어 돌리는 시루떡을 받아 든 집들은 돌리는 집의 메시지를 충분히 알아챘다는 것입니다. 산행을 끝내고 산악회에서 내는 식사가 선농탕과 같이 여럿이 둘러 앉아 먹는 두레 같은 것이라면 서울로 돌아와 걸치는 한잔은 커뮤니케이션 메디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행기로 올리는 글과 사진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마지막 2%를 채우고자 명산 산행 후 처음 가진  맥주모임은 나름대로 청량했고 뜻있었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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