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백두대간·정맥·기맥/낙남정맥 종주기

낙남정맥 종주기13(담티재-발산재-오곡재)

시인마뇽 2011. 2. 9. 09:32

                                                     낙남정맥 종주기13

 

                                       *정맥구간:담티재-발산재-오곡재

                                       *산행일자:2011. 2. 6일

                                       *소재지   :경남고성/진주, 마산/함안

                                       *산높이   :용암산400m, 깃대봉521m

                                       *산행코스:담티재-용암산-깃대봉-발산재-외곡고개-큰정고개-500봉

                                                      -오곡재-둔덕리버스종점

                                       *산행시간:7시18분-17시58분(9시간40분)

                                       *동행      :나홀로

 

 

 

  11시간 가까이 걸어 목적했던 구간종주를 마치고나자, 체중이 80Kg가 넘는 저를 군말 않고 무탈하게 옮겨준 두 다리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3년 전부터 스틱 두개를 사용해 양손 모두 산행에 동원되기는 하지만, 하는 일의 강도가 두발에 비할 것이 못되어 이번의 성공적인 구간종주는 두 다리의 헌신적인 봉사에 힘입어 가능했습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약 350만 년 전의 일입니다. 최초의 인류인 아우스트랄로페테쿠스가 숲속을 돌아다니며 식물을 채집하고 동물을 수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두 다리가 건강하게 잘 작동된 덕분입니다. 인류가 아우스트랄로페테쿠스에서 호모하빌리스, 호모엘렉투스, 호모사피엔스를 거쳐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로 진화하는 동안 뇌의 용량이 500cc에서 그 3배인 1,500cc-1,600cc로 커지면서 두뇌가 발달했습니다. 두 다리를 움직여 채취와 수렵으로 살아온 획득경제시대는 구석기시대에서 끝났고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자연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생산경제시대가 열렸습니다. 한 곳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인류는 차츰 손과 머리에 의존하면서 두 다리의 중요도는 점점 적어졌습니다. 급기야 두 다리를 애지중지 하는 사람들은 운동선수가 아니고 누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두 다리의 고마움은 모두에게서 잊혀졌습니다.

 

 

  요즘 들어 두 다리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는 것 같아 크게 다행입니다. 걷는 것이 만병을 예방하는 첩경으로 알려지고 나서 걷기 전용의 둘레길이 여기저기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제주의 올레 길을 시작으로 지리산의 둘레 길도 명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북한산의 둘레 길도 서둘러 개방됐습니다. 높낮이 차가 크지 않는 둘레 길은 더 나이 들어 밟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저는 벌써부터 주로 정맥이나 지맥 종주에 열심이었습니다. 제 두 다리의 노동 강도가 둘레 길을 걷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강한 것은 이 때문이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번처럼 긴 시간 무탈하게 걷고 나면 두 다리에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신체 부위를 발끝에서 머리로 올라갈수록 소중히 여기는데 저는 그 반대로 발끝으로 내려갈수록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별명이 원시인 크로마뇽의 축어인 시인마뇽일 수밖에 없는 소이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침7시18분 담티재를 출발했습니다. 지난 번 발산재까지 진출하겠다는 본래 계획을 중간의 담티재에서 접는 바람에 이번 구간의 목적지인 오곡재까지 종주거리가 그만큼 길어졌습니다.  전날 내려가 당항포를 둘러보고 고성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새벽5시에 일어나 김밥 집에서 아침을 사든 후 터미널로 옮겨 6시20분에 출발하는 마산행 첫 버스에 오르기까지 바삐 움직였습니다. 20분이 채 안 걸려 도착한 배둔에서 택시를 잡아탔는데 기사분의 실수로 배치고개로 가다가 배둔으로 되돌아와 담티재로 가느라 15분가량 늦게 도착했습니다. 경남고성의 구만면과 개천면을 경계 짓는 담티재에서 산행채비를 마친 후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왼쪽으로 넓은 목장이 시원스레 펼쳐진 산길은 이내 가팔라져 숨을 헐떡이고 오르느라 해뜨기 직전의 산 공기가 그다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바위들이 자리한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8-9분을 더 걸어 담티재 출발 40분 만에 올라선 봉우리가 해발399.5m의 용암산이었습니다.

 

 

  8시32분 남성재에 내려섰습니다. 용암산에서 내려가 고도를 90m가량 낮추자 평탄한 길이 나타났습니다. 편안한 길을 따라 얼마간 진행해 다다른 옥녀봉에서 동쪽으로 난 가파른 길로 내려서면서 완전히 퍼진 아침햇살을 가슴 가득히 안았습니다. 여러 기의 묘지 바로 아래 자리한 남성재는 아스팔트길이 지나는 고개로 왼쪽 아래로 선동소류지가 보였습니다. 아스팔트길은 선동마을로 이어졌고 정맥길은 그 오른 쪽 위 시골 큰 집 마당만한 억새밭 사이로 이어졌습니다. 억새밭과 묘지를 지나 편안한 길을 10분가량 이어 걸은 후 완만한 경사 길을 올라 봉분이 보이지 않는 묘지 터인 무명봉에 다다랐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고도를 60-70m가량 낮추었다가 완만한 길을 올라 삼각점이 박혀있는 해발418.5m의 벌말들 봉우리에 다다른 시각이 9시27분이었습니다. 특이한 이름의 이 봉우리에서 속을 비우고 옷을 갈아입느라 반시간을 머무르며 마냥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 숨을 죽인 바람과 결이 부드럽고 포근한 아침햇살 덕분이어서 이들에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10시10분 선동치를 지났습니다. 고성 땅을 막 벗어나 벌말들 출발 14분후에 내려선 마산 땅의 선동치고개는 크기가 때까치만한 새 한 마리를 만나 카메라에 옮겨놓았습니다. 그다지 깊지도 넓지도 않은 안부사거리인 선동치고개가 더욱 편안하게 느껴진 것은 저 이름 모르는 새가 길목을 지켰다가 지나가는 제게 사진모델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선동치를 출발해 이번 종주구간에서 가장 높이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528m봉으로 이어지는 북진 길은 또 다시 가팔랐습니다. 오름 길에 잠시 멈춰 서서 유유히 상공을 비행하는 매 한 마리를 사진 찍었습니다. 숨 가쁘게 올라 다다른 “깃대봉”의 표지석이 세워진 528m봉에서 오른 쪽 멀리로 구름다리가 설치된 고산을 사진 찍었습니다. 마산(?)에서 오셨다는 몇 분들을 만나 그림 같은 저 고봉이 적석산임을 확인한 후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기대봉으로 향했습니다.

 

  11시21분 해발521.7m의 기대봉에 올라섰습니다. 528m봉에서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능선 길은 높낮이 차가 심하지 않았으나 더러는 바위 길로 이어져 아기자기한 맛이 더해졌습니다. “고산마루”님이 “깃대봉”의 비닐판표지를 걸어놓은 기대봉에 넙적 바위가 들어앉아 커피를 꺼내들며 십 수 분간 편히 쉬었습니다. 일요 산행에 나선 몇 분들을 만나 인사를 나눈 후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다가 얼마간 가파른 길을 다시 올라 왼쪽으로 만수산 길이 갈리는 삼거리봉우리에 이르렀습니다. “준봉산 해발520m”의 표지석이 세워진 이 봉우리에 누군가가 지도상의 기대봉으로 표시해놓은 것을 보고 헷갈렸습니다. 지형도를 꺼내놓고 주위 산들을 살펴본 즉 앞서 지나온 넙적 바위 봉우리가 지도상의 기대봉이 확실했습니다. 먼저 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분들을 사진 찍어 드리면서 저 연세에 해발500m가 넘는 고봉을 오르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할 수 없이 행복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시38분 발산재에 이르렀습니다. 왼쪽 아래로 나동저수지가 보이는 “준봉산”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가면서 오전9시경 오곡재를 출발해 담티재로 향하는 종주 팀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커다란 바위의 깨진 부분에서 어렸을 때 시골에서 많이 보아온 쑥돌이 눈에 띄어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해발고도를 200m가량 낮추어 만난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 왼쪽 아래로 발산저수지가 자리한 아스팔트길로 내려섰습니다. 진주시와 마산시를 어우르는 경계석이 세워진 구도로 상의 발산재를 조금 지나 화장실 옆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아침을 일찍 들어서인지 벌써부터 시장기가 느껴졌지만 기왕 들어선 산길을 아무데서나 쉴 수 없어 눈앞에 보이는 봉우리에 이르기까지 산 오름을 계속했습니다. 4기의 묘지를 지나 가파른 비알 길을 오르는 저를 스쳐 지나는 바람이 제법 냉랭하고 그 소리도 제법 컸습니다. 발산재에서 150m가량 고도를 높여 13시6분에 다다른 첫 봉우리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15분여 점심식사를 마치고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자 길이 평탄해졌습니다. 편안한 길을 10분도 못 걸어 안부가 깊지 않은 흐릿한 외곡고개로 내려선 시각이 13시45분이었습니다.

 

  14시19분 “영봉산 1.6Km"표지봉이 서있는 능선삼거리를 지났습니다. 외곡고개에서 담티재로 향하는 길은 안부 오른 쪽 바로 아래 차도에 버금갈만한 넓은 임도와 나란한 북쪽 방향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지도에 임도가 나와 있지 않아 임도 길이 얼마나 계속될지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정맥 길에 이정표를 가름할 만한 삼거리나 봉우리 또는 안부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북쪽으로 뻗어나가 지도상에서 제 위치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300m대의 봉우리 하나를 넘어 14시20분 경 “영봉산 1.6Km"의 표지봉이 서있는 능선삼거리를 지나서부터 오름길이 많이 가팔라졌습니다. 봉우리를 넘고 5기의 묘지를 지나고 또 다시 나지막한 봉우리를 몇 개 넘어 묘지 2기가 들어선 넓은 공터에서 짐을 벗어 내려놓고 편히 쉬고 있노라니, 봉분이 내려앉아 더욱 넓어 보이는 묘역을 뒤덮은 황갈색 낙엽들로 쓸쓸함이 더해졌습니다. 저보다 담치재를 3시간가량 늦게 출발했다는 부산 산악회의 낙남정맥 종주 팀원들이 앞질러 내닫는 것을 보고 15시7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16시24분 오봉산 갈림길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낙엽 덮인 묘역을 출발해 조금 내려서자 또 다시 오른쪽 옆으로 외곡고개에서 처음 본 넓은 임도가 다시 보였습니다. 시간 반 가까이 마루금과 나란히 이어온 임도는 오른 쪽으로 꺾어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곧바로 뻗어나가는 마루금은 고도를 조금씩 높여가 오름길이 가팔라졌습니다. 부산의 산악회 종주팀원 몇 분들이 많이 지쳤던지 제 뒤로 쳐져 많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제가 9시간 가까이 걸은 길을 6시간 조금 더 걸려 다 밟았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습니다. 비알 길을 올라 다다른 암봉에서 먼저 도착해 쉬고 있는 부산의 산악회원 한 분으로부터 배 한 쪽을 받아먹고 200-300m를 더 걸어 왼쪽으로 오봉산이 갈리는 봉우리삼거리에 올라섰습니다. “오봉산2.14km/여항산5.20km"의 표지봉이 서있는 이 봉우리는 마산시와 진주시가 함께 함안군을 만나는 삼군봉(三郡峰)으로 이 봉우리에서 낙남정맥을 종주하느라 오래 인연을 맺어온 진주시의 산줄기와 이별을 고했습니다.

 

 

  17시2분 오곡재에 도착해 13구간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삼군봉(?)”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오곡재로 하산하면서 낙남정맥을 두 번째 종주한다는 부산의 산악회원 한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산행 마지막 고봉인 523m봉을 넘으면서 힘들어하는 제게 어느 정맥이든 다 제 값을 한다고 일러주는 이 분의 이야기를 듣고 새삼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서양명언이 생각났습니다. 제값을 치르느라 발품 팔아 올라선 523m봉에서 오곡재로 내려가는 길은 편했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오곡재에 도착해 해떨어지기 전에 저 아래 둔덕마을에서 하루 산행을 모두 마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왼쪽 아래 함안의 오곡리와 오른쪽 아래 마산의 여항리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오곡재에서 구간종주를 마치고나자 이번에도 먼 길을 잘 걸어와 깔끔하게 해냈다 싶어 어깨가 으쓱여졌습니다.

 

  17시58분 둔덕리 새마을회관 앞에서 이번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오곡재에서 오른쪽 임도로 접어들어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위험 경고판이 서있는 굴을 지나 공사중인 도로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왼쪽 위로 미산령을 넘어가는 임도가 갈리는 삼거리를 지나 동리로 내려서기 얼마 전에 길옆에서 옷을 갈아입느라 10분 동안 걷지를 않았더니 땀이 식어 냉기가 느껴졌습니다. 느티나무 거목 두 그루가 서 있는 위 동리 어귀를 지나 차도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서 둔덕 새마을 회관에 도착했습니다.

 

 

  막차 시간이 한 시간이 남아 있어 조금 더 걸어 동리 안을 살펴보았는데 많은 집들이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시골동네에서 맥 놓고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 화장실 옆 백열등 밑으로 자리를 옮겨 책을 꺼내 읽으면서 형설지공의 참 뜻을 새겨보았습니다. 형설지공이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주경야독과 같은 뜻으로 풀이된다면 굳이 두 개의 사자성어가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사대부의 자녀라면 낮에 죽어라하고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반딧불과 백설의 도움을 받아 밤 시간에도 공부를 한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낮에는 내내 산을 오르내리고 밤이 되어 자투리 시간을 책읽기에 쓰는 정도를 갖고 형설지공을 들먹여서는 말이 안 될 것입니다.

 

  11시간 가까이 중노동을 한 두 다리를 정중하게 모시고자 양촌의 온천장을 찾았습니다. 밤새 푹 쉬고 난 후 다시 10시간을 걸을 수 있도록 두 다리에 힘을 모아달라고 빌고 또 빌어봅니다. 주인을 잘 못 만나 고생 많이 한다 싶으면서도 또 한 편 주인을 잘 만나 그래도 정중하게 대접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