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백두대간·정맥·기맥/낙남정맥 종주기

낙남정맥 종주기14(오곡재-여항산-한티재)

시인마뇽 2011. 2. 18. 16:08

                                                   낙남정맥 종주기14

 

 

                                     *정맥구간:오곡재-여항산-한치재

                                     *산행일자:2월7일(월)

                                     *소재지 :경남마산/함안

                                     *산높이 :여항산770m, 서북산738m, 대부산649m

                                     *산행코스:둔덕버스종점-오곡재-미산령-여항산-소무덤봉

                                                    -서북산-대부산-한치

                                     *산행시간:7시31분-17시46분(10시간15분)

                                     *동행 :나홀로

 

 

 

  낙남정맥 종주 길에 올라선 서북산은 경남 마산과 함안을 어우르는 고산으로 해발고도가 738m에 이릅니다. 여항산에서 남동쪽으로 4Km 가량 떨어져 있는 이 산은 전적비가 세워질 만큼 어느 산 못지않게 치열하게 한국전쟁을 치러냈습니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을 기해 새벽에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은 서울을 빼앗은 여세를 몰아 대전을 점령하자 8월15일 광복절 안에 부산을 탈취하겠다는 목표로 8월대공세를 펼쳤습니다. 낙동강 방어선 서남부지역과 경주-포항지역을 공격하여 유엔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대구의 정면과 좌우측을 공격해 대구에 이어 부산을 점령한다는 개념 하에 낙동강 방어선 전 지역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였고 그 일환으로 마산전투가 치러졌습니다. 진주를 점령하고 마산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고자 미(美)25사단장 킨(William B. Kean)은 “킨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유엔군의  사단급 반격작전을 한국 전쟁 최초로 펼쳤습니다. 8월7일부터 12일까지 치른 마산전투에서 북한군에 선점된 서북산은 뺐고 뺏기는 혈전 끝에 우세한 전력을 보유한 유엔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습니다. 서북산 전투는 8월7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온창일 박사가 그의 저서 “한민족전쟁사”를 통해 전하는 대로 그해 8월말까지 서북산의 주인이 19차례나 바뀌는 등 접전이 계속 되었습니다.

 

  온 몸으로 북한의 부산 점령을 저지한 서북산 정상에서 가져간 식빵을 뜯어 먹으며 제가 겪은 휴전 후 한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기억하건대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후 몇 년간 겪었던 일입니다. 3살 때 6.25전쟁이 발발해 전쟁을 어떻게 치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은 제가 6살 때여서 그 후부터는 더러 더러 그 때 일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그즈음 동계훈련 차 동네 가까이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 미군들을 쫓아가 식빵을 얻어먹은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크기가 맛이 요즘의 제빵 집 식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식빵을 미군들로부터 얻어먹는 날은 모처럼 배를 불릴 수 있어 그들이 훈련을 나오면 만사 제쳐놓고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드물게 터키 군도 훈련을 나왔는데 그들은 미군들보다 훨씬 인색했고 던져주는 식빵도 밀가루로 만든 고급(?) 빵이 아니고 보리 가루로 만든 시꺼먼 빵이었지만 이것들도 감지덕지해 받아먹었습니다. 그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면 버리고 간 탄피를 주어오곤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 고향 파주에는 미군과 터키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빨간 제복의 영국군도 주둔했고 태국군은 제가 대학을 다니는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들 우방국이 더 할 수 없이 고마운 것은 그 때 제게 빵을 던져준 때문이 아니고 이 나라를 지켜주어서입니다. 그 때 한국전쟁에서 패했다면 오늘날의 국부는 절대로 이룰 수 없었을 것이고 김일성 일족의 치하에서 배 골리며 사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터인데 이들 나라들이 파병해 이 나라를 지켜주었기에 이번에 여기 서북산을 지나는 낙남정맥을 종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침7시31분 둔덕마을 버스종점을 출발했습니다. 하룻밤을 묵은 양촌의 산수랜드 찜질방 앞에서 아침6시30분에 진동을 출발하는 75-1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들락날락하느라 반시간이 조금 더 걸려 둔덕리 새마을회관 앞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햇살이 퍼지지 않아 아침공기가 냉랭했지만 한 겨울에 이정도 날씨면 감지덕지할 만큼 요 며칠 맹위를 떨쳤던 한기가 많이 수그러졌습니다. 전날 오곡재에서 내려온 길로 다시 올라가 구제역 방역으로 동네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출입금지 판이 세워진 삼거리를 지났습니다. 전날 저녁 사진 찍은 거목의 느티나무를 막 지나 다다른 삼거리에서 공사 중인 찻길을 버리고 왼쪽 소로로 접어들었습니다. 마지막 집 한 채를 지나 들어선 산길로 몇 분을 걸은 후 비알 길을 치고 올라가 버스종점 출발 36분 만에 오곡재고개 마루에 올라 낙남정맥에 복귀했습니다.

 

 

 

  8시11분 오곡재에서 낙남정맥의 14번째 구간종주를 시작했습니다. 북동쪽의 557m봉으로 오르는 길은 초반 얼마간은 비교적 완만했으나 557m봉이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급해졌습니다. 오곡재 출발 반시간이 조금 더 걸려 557m봉에 오르자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습니다. 557m봉에서 조금 내려갔다가 낮은 봉우리를 넘어 다시 비알 길을 올랐습니다. 여항산을 2.31Km 남겨놓은 해발고도 630m대의 봉우리에 올라서자 정남쪽에 자리한 둔덕리 마을이 아늑해 보였습니다. 봉우리삼거리에서 함안군 군북면의 660m봉으로 연결되는 왼쪽 길을 버리고 서서히 고도가 낮아지는 정맥 길을 따라 오른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늘은 질리도록 새파랬고 함안 쪽에서 불어오는 냉기서린 삭풍은 가슴팍을 파고들었습니다.

 

 

 

   9시31분 미산령에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활짝 퍼진 햇살 덕분에 매섭게 파고드는 삭풍도 견딜 만 했습니다. 고개 마루 위 에코브리지(Eco-bridge)가 너무 반듯해 동물들이 지나가기가 머뭇거려질 것 같은 미산령에서 통나무계단을 따라 동진했습니다. 돌무덤이 자리한 743.5m봉에 올라 흰 눈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북서쪽 먼발치의 군계일학의 준봉을 사진 찍었는데 위치나 높이로 보아 지리산의 천왕봉인 것 같았습니다. 743.5m에서 헬기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비교적 평탄했습니다. 인근 백성들의 애환이 담긴 설화들이 주저리주저리 열려있을 것 같은 돌탑들에 인사를 건네면서도 조금 후 다다를 여항산 정상에서 가파른 암벽을 로프를 잡고 타고 내려갈 걱정에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습니다. 낙남정맥을 종주하는 많은 분들이 무탈하게 내려간 암벽 길 통과를 마음 놓지 못하는 것은 강원도 춘천의 용화산에서 바위 길을 내려가다가 낙상사고를 크게 당해서입니다. 그새 만 2년이 더 지났는데도 그때의 공포감이 사라지지 않아 바위길만 지나면 더럭 겁부터 납니다.

 

 

 

   11시17분 해발770m의 여항산을 올랐습니다. 헬기장에 이르자 태고의 음향을 전해줄 듯 거칠게 불던 북서풍이 완전히 잦아들었습니다. 잠시 멈춰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상공에서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을 온전하게 즐기면서 이런 것이 바로 행복이다 했습니다. 지리산의 영신봉에서 분기된 낙남정맥이 지리산 권을 빠져나온 후 낙동강을 만나기까지 가장 높게 일군 봉우리가 바로 여항산입니다. 함안의 진산인 여항산은 여느 진산과는 달리 북쪽이 아닌 남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산에 바다로 떠나간다는 뜻을 지닌 “여항(餘航)”의 이름을 붙여준 것은 남고북저형의 이 산이 나라를 배반할 기운이 갖고 있다하여 산의 지기를 누르기 위해서였다 합니다. 표지석과 조망안내판이 세워진 정상의 귀바위는 여러 명이 함께 앉아도 될 만큼 널찍했습니다. 산정의 귀바위를 남쪽에서 받쳐주는 남쪽의 암벽은 거의 직벽 수준으로 굵은 로프를 잡고 내려가야 해 적지 아니 이 길 통과를 걱정했는데 마침 오른 쪽 아래로 우회길이 보여 두말 않고 그리로 내려가 정상을 에돌았습니다.

 

 

 

   12시 정각 위험 안내판이 서 있는 암봉을 왼쪽으로 우회했습니다. 여항산 정상을 에돌아 다다른 능선삼거리에서 잠시 쉬면서 방금 우회한 암봉을 올려다보니 굵은 로프가 걸려 있어 못 내려올 길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북동쪽으로 좌촌주차장 길이 갈리는 능선삼거리에서 편안한 길을 따라 서북산을 향해 남진하면서도 또 한 번 암봉을 우회해야 암릉지대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싶어 긴장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 로프를 잡고 짧은 암릉 길을 내려선 다음 조금 더 내려가 위험하니 돌아가라는 안내판이 세워진 암봉 앞에 다다랐습니다. 암굴이 자리한 왼쪽 길로 우회해 암봉을 넘어 내려오는 능선삼거리에 도착하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나자 해떨어지기 전에 목적지인 한티재까지 가는 일만 남아 있다 싶어 달콤한 휴식을 마치고 12시17분 자리에서 일어나 오후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긴장이 풀린 두 다리에 힘이 다시 붙어 편안한 능선 길을 들입다 내달렸습니다. 오곡재에서 시작해 둔덕마을을 끼고 시계방향으로 도는 긴 산행은 소무덤봉에서 끝났고, 정맥 길은 대부산을 조금 더 가서 한티재로 내려서는 하산 길에 이르기까지 별천마을을 가운데 두고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 계속해 이어졌습니다. 소무덤봉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을 따라 걸어 두 번째 헬기장에 도착했습니다. 휴일이라면 시끌벅적했을 여항산-서북산 능선 길을 지나는 산객이 엄청 많았을 터인데 이날은 오직 저 혼자여서 길은 걷는 사람이 임자라는 여암선생님의 말씀대로 마치 제가 이 산의 주인이 된 듯했습니다.

 

 

 

   13시41분 해발738m의 서북산에 도착했습니다. 헬기장을 조금 지나 칡뿌리를 캔다는 한 분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요즈음이야 내다 팔 목적으로 칡뿌리를 캐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절대 부족한 당분을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사탕을 처음 사먹은 것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으니 그 전에는 부족한 당분은 계절을 달리하며 칡뿌리, 버찌, 오디와 딸기 등으로 채울 수밖에 없어 땅만 풀리면 곧바로 앞산에 올라 칡뿌리를 캐먹곤 했습니다. 얼마 후 다다른 전망바위에서 시원스레 남동쪽으로 뻗어나가는 낙남정맥을 조망하면서 가슴이 탁 트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13시2분에 “대촌3.1Km/별천2Km/서북산1.9Km"의 표지봉이 세워진 봉우리삼거리에 다다라 오른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경사가 급한 길을 따라 내려선 안부에서 봉우리 몇 개를 넘어 왼쪽 아래 별천으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지나 세 번째 헬기장이 들어선 서북산에 이르렀습니다. 북쪽으로 3.9Km 떨어진 여항산의 귀바위가 군계일학처럼 돋보였고 그 반대방향으로 멀지 않은 곳에 올망졸망한 섬들이 더할 수 없이 평화로워 보여 한국전쟁 때 이 산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 역사적 사실을 깜박 잊을 뻔 했습니다. 20분간 푹 쉰 후 바로 아래 갈림길에서 잠시 헤매다 왼쪽 길로 내려갔습니다. 경사가 급한 것도 급한 것이려니와 무엇보다 흙먼지가 풀풀 나는 것은 참기 어려웠습니다. 휴일 날 이 길을 걸어내려 간다면 북적대는 인파로 철쭉제를 치르는 황매산 길의 먼지를 방불할 만한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을 피할 수 없을 터인데 평일이라서 저 혼자 조심해서 내려가 그래도 견딜 만 했습니다. 별천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는 첫 번째 안부를 지니고 임도 따라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두 번째 안부삼사거리에 도착한 시각이 14시54분이었습니다.

 

 

 

   15시59분 해발649m의 대부산에 올라섰습니다. 아침에 둔덕마을을 출발할 때는 걸음이 느려 한티재까지 진출하기가 너무 버거우면 여기 안부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함안읍에서 하루 묵으며 가야 고분을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해떨어지기 전에 한티재에 도착할 것 같아 그대로 직진했습니다. 세 번째 안부를 지나 해발고도를 200m가까이 높여야 다다를 수 있는 봉우리삼거리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숨을 가다듬었습니다. 고압선이 지나는 송전탑을 지나 산화제2철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 표면이 불그스레한 넙적 바위를 사진 찍었는데 층리가 분명해 보기에 좋았습니다. 오른 쪽으로 600m봉이 갈리는 봉우리삼거리에 다다라 지도를 꺼내 본 즉 정맥 길은 제 예상과는 반대로 왼쪽으로 이어졌습니다. 봉우리삼거리에서 대부산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능선 길은 낙엽이 소북이 쌓여 앞서 흙먼지를 맡으며 서북산에서 내려온 제게는 비단 길이 따로 없다 싶을 정도로 폭신하고 푸근했습니다. 서북산 출발 2시간 만에 다다른 대부산에서 바라보이는 여항산은 호남정맥의 제암산처럼 우뚝 솟아 그 위용이 먼발치서도 느껴졌습니다. 물 오른 생강나무(?) 가지와 망울지기 시작한 진달래 가지들이 저만치 다가온 봄의 전령 같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17시46분 한티재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대부산 정상에서 봉화산 갈림길에 이르는 길은 600m봉 갈림길에서 대부산에 이르는 길을 옮겨 놓은 것처럼 걷기에 편안했습니다. “서북산2.6Km/봉화산0.9Km/한티재1.8Km"의 표지봉이 세워진 봉우리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가파른 비알길이 끝날 즈음 십 수 명이 둘러앉아 식사를 해도 넉넉할 만한 널찍한 바위 앞에서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 “봉곡0.8Km/한치0.8Km"의 표지봉이 세워진 깊숙한 안부에 내려서기까지 봉화산 갈림길출발부터 반시간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안부에서 70m가량 고도를 높여 눈앞의 봉우리를 넘어 한티재가 바로 아래 보이는 묘지에 다다라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마산시 진북면과 함안군 여항면을 어우르는 한티재로 내려선 다음 함안쪽 휴게소로 옮겨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가야읍에서 저녁7시에 출발하는 버스로 마산시내로 들어가 서울 가는 고속버스에 오름으로써 낙남정맥14구간 종주산행을 매듭졌습니다.

 

 

  낙남정맥 종주는 단순히 지리산에서 신어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밟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낙남정맥이 치러냈을 역사를 돌아보고 보듬는 일도 함께 해야 제게 길을 내준 낙남정맥이 서운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이 쉬워 19번이지 그 많은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은 무릇 그 수가 얼마이겠습니까? 전적비 앞에서 묵념을 올리며 한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북산 전투에서 전사한 뭇 영혼들의 편안한 안식을 빌며 이 글을 맺습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