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지맥·분맥·단맥/한북정맥 분기지맥

한북명성지맥 종주기

시인마뇽 2012. 1. 16. 10:48

                                                 한북명성지맥 종주기6(최종회)

 

 

 

                            *지맥구간:밤골고개-보장산-고모성리버스정류장

                            *산행일자:2012. 1. 28일(토)

                            *소재지 :경기포천

                            *산높이 :보장산555m

                            *산행코스:밤골고개-운산리고개-보장산-353m봉-고소성리 버스정류장

                            *산행시간:10시20분-18시2분(7시간42분)

                            *동행 :경동고동문 5명

                             (24회 이규성, 이기후, 김주홍, 우명길, 29회 정병기)

 

 

 

  보통사람들에는 먹고 산다는 것만큼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업이 위태로워질 때는 물불가리지 않고 저항하게 마련입니다. 놀이나 예술은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의 일이기에 예부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습니다. 시장 통 아주머니들이 목소리가 드센 것도 먹고사는 일이 어느 무엇보다 긴박한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한북명성지맥 종주 차 보장산을 오르는 길에 임도를 막고 입산을 막는 영농조합법인의 조합원 한 분을 만났습니다. 이 분이 입산을 막는 것은 등산객들 때문에 생업이 크게 지장을 받고 있어서라는 것입니다. 보장산 일대는 사유지로 조합원들이 22억을 투자해 값나가는 임산물을 재배하고 있어 365일 입산이 불허됐는데, 등산객들이 불법으로 입산해 조합원들이 애써 가꾼 장뇌삼과 더덕 등의 임산물을 몰래 캐가 생존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 이 조합원의 이야기입니다.

 

 

 

  보장산만 오르면 고교동창들과 함께 해온 한북명성지맥 종주를 모두 마치는 것이기에 정상을 코앞에 두고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저희들 모두들 망연자실했습니다. 어느새 60대 중반에 접어든 친구들이 한 번 산에 들면 7-8시간 산행을 해야 하는 종주산행을 부담스러워해, 앞으로 새롭게 종주산행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 구간의 종주산행을 이토록 허망하게 접을 수는 없어 끈질기게 길을 열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저희들의 종주산행은 영농조합원들이 여기 보장산에 임산물을 재배해 먹고 사는 것만큼 절박한 것은 아니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정도의 놀이를 훨씬 뛰어넘는 진지한 고행입니다. 등산객들이 모두 사기꾼처럼 보인다는 조합원의 경험측이 잘못됐다고 비난하려면, 물고기를 생각지 않고 별 생각 없이 돌을 던지듯 “나 하나쯤이야” 또는 “더덕 한 뿌리쯤이야”하고 생각하고 장난삼아 임산물을 캐가는 등산객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전 10시20분 밤골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운천에서 들머리인 밤골고개까지 택시로 이동했는데도

산본 집에서 의정부를 거쳐 운천까지 가는데 4시간이 거의 다 걸려 산행시작이 예정했던 시간보다 20분이 늦어졌습니다. 밤골고개에서 서쪽 방향으로 나 있는 넓은 군사도로(?)를 따라 오르다 이내 왼쪽 좁은 길로 들어서 방공호가 들어선 능선에 올라섰습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남진을 계속했습니다. 방공호 바로 위 봉우리에 올라서자 왼쪽 불무산 기슭에 포진한 탱크들이 여러 대 보였습니다. 휴일이라서 훈련이 없으리라는 예상이 빗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포사격 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왼쪽 가로 비닐 줄을 쳐 놓은 해발고도 200m대의 능선 길을 오르내리는 중 11시26분 271.5m봉을 지났습니다.

 

 

 

  11시45분 나지막한 봉우리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밤골고개 출발 후 시간 반 가까이 남진을 계속해 군작전용 간이창고가 세워진 이 봉우리에 이르기까지 군사훈련용(?) 철제구조물 8개를 지났습니다. 10-20m(?)두께의 철판으로 만든 육면체구조물은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보기에 흉했습니다. 10분 가까이 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헬기장이 나타났고 차도에 구축한 대전차장애물이 보였습니다. 바로 아래 왼쪽 넓은 공터가 바람 한 점 없고 햇볕을 온전하게 쪼이는 곳이어서 좀 이른 시간이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점심을 들었습니다. 40분여 반주를 곁들인 점심을 들며 담소를 즐긴 후 십 수분 걸어 내려가 87번 도로가 지나는 운산리고개로 내려섰습니다.

 

 

 

  고갯마루에 구축해 놓은 대전차 장애물을 보자 시뻘겋게 녹이 슨 채 버려져 있는 철제구조물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녹이 많이 슬어 더 이상 쓸 수 없는 철제구조물을 대신할 깔끔한 새 간이창고용 구조물을 세워놓은 것은 우리나라가 아직도 휴전 중에 있음을 증거 하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엇습니다. 그러고 보니 보기 흉하게 녹이 슨 것은 철제구조물만이 아닙니다. 1953년 시작된 휴전상태가 한 걸음도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하고 60년 가까이 대치해온 남북관계도 녹이 슬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페인트조차 덧입힐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심하게 녹이 슬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20대의 젊은 아들이 권력을 세습한 최근의 북한의 정세는 녹이 슬대로 슬은 남북관계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해 가슴이 답답합니다.

 

 

 

  13시2분 운산리고개를 지났습니다. 고갯마루에서 차도를 건너 큰 길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 오르자 입산금지경고문이 보였습니다. 영농법인이 산삼, 더덕 등을 재배하는 사유림이니 올라가지 말라는 내용이어서 난감해 하다가 그냥 진행했습니다. 정맥이나 지맥을 종주하면서 더덕이나 산양삼등의 임산물은 애당초 제 관심 밖인데다, 여암 신경준 선생의 말씀대로 길은 걷는 사람이 임자이므로 아무리 사유림이라 해도 등산로를 사사로이 막는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의 오른 쪽 사면에 훤칠한 잣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한 겨울인데도 푸른 숲이 울창해보였습니다.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아 이런 길이라면 따로 쉬지 않고도 두 세 시간을 거뜬히 걸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서남쪽으로 나아가다 군작전용간이창고가 들어선 258m봉을 지나 서북쪽으로 방향이 바뀐 마루금을 따라가 임도로 올라섰습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한사람이 험상궂은 인상을 하고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으니 임도 따라 내려가라며 길을 막았습니다. 다른 분들 산행기에서 읽어 알고 있는 난감한 일을 저희들은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한 겨울에는 표시가 안나 산양산삼 등 작물을 제대로 식별해 훔쳐갈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지키는 주인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해서였는데 완전히 오산이었습니다. 얼마간 사과하다가 안 받아들이면 한바탕 설전을 벌일 각오로 서로 말을 주고받다가, 입산 객들이 작물을 훔쳐가고 망쳐놓아 20억 넘게 투자한 것을 얼마나 건질지 모르겠다는 절실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무조건 봐달라고 사정하기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마지막 구간의 보장산을 오르지 않고는 한북명성지맥종주를 마무리 할 수 없어 이번 산행이 저희들에도 절실하고 절박한 것입니다만, 아무려면 전 재산을 걸고 생업으로 하는 이분이 입산을 막는 것보다 더 절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남아 배낭을 지킬 테니 일행 4명만이라도 임도 따라 보장산까지 갔다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저희들이 산 작물에 해를 끼칠 사람들이 아니고 보장산을 오르겠다는 자세가 진지함을 인정해서인지 어렵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명함을 건네주며 정상을 지키는 군인들에 이 명함을 보여주면 통과시켜 줄 것이니 다른 데로 내려가지 말고 능선만 타고 가라고 말해주어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15시2분 해발555m의 보장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생각지 못한 입씨름으로 20분 넘게 시간을 까먹어 산행을 서둘렀습니다. 산허리를 에돌아 다다른 넓은 공터에서 왼쪽으로 꺾이는 임도를 따라 걷다가 잠시 임도를 벗어나 능선 길로 올라섰습니다. 몇 분 후 다시 만난 임도를 따라 올라 정상 바로 아래 헬기장에 도착하자 오른 쪽 한탄강 너머로 재작년 이맘때 힘들게 오른 종자산과 그 뒤로 이어지는 연봉들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들 연봉 뒤 멀리로 깊숙한 안부가 보였고 그 좌우에 우뚝 선 고대산과 금학산을 알아보아 일행에 알려주었습니다. 정상에 올라서자 군 텐트 두 동이 쳐져 있었습니다. 텐트 안의 장병들에 가져간 과일을 건넨 후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종주산행을 이어갔습니다. 3-4분간 걸어 다다른 암봉에서, 성봉현님이 왼쪽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배모루로 내려가지 못하고 창옥병으로 내려간 산행기를 읽은 터라, 저희들은 오른 쪽 능선을 따라 가파른 길을 조심해서 걸어 내려갔습니다. 밋밋한 안부로 내려선 다음부터 353m봉에 이르기까지는 갈림길이 거의 없는 외길이어서 알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16시52분 353m봉에 이르렀습니다. 외길을 따라 350m봉을 넘고 나서 353m봉에 이르는 중간에 연륜이 묻어나는 의젓한 자태의 노송 한그루를 사진 찍고 나서 얼마 후 암에 걸린 듯 크고 작은 혹들이 줄기와 가지에서 불거져 나온 활엽수 한 그루를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더러더러 암릉 길도 나타났지만 작년 가을 떨어진 낙엽들이 길 위에 수북이 쌓여 푹신푹신한 길도 꽤 길게 이어졌습니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넘고 또 넘어 가파른 비알 길을 올라 350m대의 봉우리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왼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른 봉우리에서 ‘산친구산악회’에서 걸어놓은 ‘353봉(명성지맥)’표지물을 보았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진행해 철조망이 쳐진 옛 군 초소를 지났습니다. 사방이 확 트인 능선 길을 지나며 사방을 둘러보자 한 번 올라 눈에 익은 산들이 인사를 해와 엄청 반가웠습니다. 정면으로 왕방지맥의 개미산,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는 종현산, 더 북쪽으로 웅장한 암벽의 감악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나온 보장산이 참으로 위엄 있어 보였고, 오른 쪽 아래로 굽이져 흐르는 영평천이 정감 있어 보였으며, 왼쪽 멀리로 하얀 눈이 쌓인 한북정맥이 길게 이어진 모습이 성곽보다 더 든든해 보였습니다.

 

 

 

  18시2분 고모성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한북명성지맥 종주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텅 빈 군 초소를 지나 조금 내려섰다가 밧줄이 늘어진 바위 길을 올랐습니다. 산행 내내 따뜻함을 안겨준 태양이 고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 아쉬웠던지 둘러 싼 구름들을 연붉은색으로 물들여 그 애잔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오른 쪽 아래로 군부대가 들어선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길을 굵은 모래와 잔자갈이 덮고 있어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군부대 유격훈련장 같은 곳을 지나 넓은 공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더 내려가 군부대 아파트촌을 지났습니다. 해는 완전히 지고 땅거미가 밀려오기 직전 372번지방도로가 지나는 고소성리버스정류장에 도착해 명성지맥 마지막 구간종주를 깔끔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전곡을 거쳐 동두천으로 나가 저녁식사를 하면서 동행한 한 후배가 길을 열어준 조합원에 전화를 걸어 덕분에 산행을 잘 마쳤다며 감사인사를 전했습니다. 보장산 전역이 입산금지구역이니 돌아가라며 20분 넘게 길을 열어주지 않은 그 분에게서 먹고사는 것이 얼마나 절박하고 진지한 현안과제인가를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 차를 끌고 산 중턱까지 올라와 길을 막고 그 많은 등산객들과 입씨름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임도도 조합 땅이라 하는데 수년전 산행기에는 임도를 막아 못 올라갔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임도는 영농조합에서 이 산에 임산물을 재배하기 전에 나있었던 것 같습니다. 산림청에서 임도로 통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내주었다면 보장산으로 오르는 모든 길이 원천 봉쇄되는 일은 없어 조합원과 등산객들 간의 과도한 갈등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조합원들도 모든 등산객들을 절도용의자로 보고 입산을 막는 일이 어쩔 수 없어 하는 것이지 내켜서 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입산을 저지당하는 등산객들도 멀쩡한 길을 막고 못 가게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항의하지만 남의 농사를 망치는 일부 등산객들의 몰지각한 행위에 분노할 것입니다. 임산물절취를 목적으로 하는 입산하는 자들은 일벌백계로 의법처리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허가관청인 산림청은 조합과 협의해 임도만이라도 등산로로 허용하고 다른 길은 울타리를 쳐 철저하게 관리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산행사진>

 

 

 

 

 

 

 

 

 

 

 

 

 

 

 

 

 

 

 

 

 

 

 

 

 

 

 

 

 

 

 

 

 

 

 

 

 

 

 

 

  

 

 

 

 

 

 

                                                 한북명성지맥 산행기5

 

 

 

                                  *지맥구간:도내지고개-불무산-방골고개

                                  *산행일자:2011. 9. 10일(토)

                                  *소재지 :경기포천

                                  *산높이 :불무산669m

                                  *산행코스:도내지고개-불무산-642m봉-방골고개-대화산리버스정류장

                                  *산행시간:9시28분-16시37분(7시간9분)

                                  *동행 :경동고24회 이기후, 이규성 동문

 

 

  추석연휴 첫 날 고교동창 셋이서 불무산을 올랐습니다. 명성지맥의 다섯 번째 구간을 종주하는 길에 오른 불무산은 산행 중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을 정도로 한적했습니다. 사람 다닌 흔적이 분명치 않아 마루금을 제대로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자연 걸음이 느려져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운산리고개까지 진출하겠다는 계획을 수정해 그 앞 방골고개에서 산행을 접었는데 동행한 한 친구는 이번 산행속도가 자기에게 딱 맞았다며 앞으로도 이런 정도의 빠르기로 산행하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표했습니다.

 

 

 

  이번 산행은 시간당 1.5 Km도 채 안 되는 거북이 산행이었는데 이런 속도로는 정상적인 종주산행을 해내기가 어렵습니다. 이 친구도 3년 전에 한북정맥을 완주해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산 꾼입니다. 그때 같이 완주한 친구들 중 네 댓 명은 더 이상 종주산행을 이어가기가 부담스럽다며 나오지 않고, 저를 포함해 4명의 동기들만 동문산악회에서 주관하는 지맥종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인 이  친구가 이번처럼 느림보 산행이 딱 맞는다며 좋아하는 것은 이 친구도 엄습해오는 세월을 피해가지는 못해서일 것입니다. 또 한 친구는 아침에 꾀가 나서 참여하지 못하겠다는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그 메시지를 보고나서 우리도 어느새 높은 산을 올라가는데 꾀를 낼만한 나이가 되었다 싶었습니다. 마음은 변함없이 산으로 향하지만 몸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태업을 일삼을 나이가 됐나봅니다.

 

 

 

  이런 속도가 계속된다면  아무래도 현재 몸담고 있는 산악회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종주산행은 그만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체력이 따라주지 못해 공연히 후배들에 누가 될까 두려워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한해 위 선배들이 산악회 산행에 참여하지 않은지가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한 해 후배인 저희들이 이제까지 빠지지 않고 참여한 것은 그동안 걸음이 빨라 용케도 세월에 꼬리를 잡히지 않아서였는데, 이제 몸 컨디션이 달라진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번처럼 구간을 짧게 잘라 천천히 걸어서 6-7시간에 마칠만한 종주코스를 택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9시28분 도내지고개를 출발했습니다. 동서울터미널을 아침7시29분에 출발하는 동송 행 버스에 올라 내촌과 포천을 거쳐 운천에서 하차했습니다. 인근 슈퍼에서 이것저것을 사 넣은 후 택시를 잡아타고 이번 종주산행의 들머리인 도내지고개로 옮겼습니다. 동서울터미널 출발 2시간 만에 도착한 도내지고개에서 들머리를 찾고자 고갯마루에 자리한 서부자동차공업사 뒤편의 묘지에 올라보기도 하고 밭길로 들어가도 보았지만 불무산으로 이어지는 온전한 길을 찾지 못해 십 수분가량 시간만 허비하고 출발지인 군부대 앞 버스정류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정류장에서 서쪽으로 몇 걸음 옮겨 다가선 군부대 정문 앞에서 왼쪽으로 난 큰 길을 따라 오르다가 신일기도원 안내판이 세워진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군부대 울타리 옆길로 진행했습니다. 군부대 울타리를 지나 가파른 폐타이어 길에 발을 들여 본격적인 산 오름을 시작했습니다. 폐타이어길이 끝나는 즈음에 설치된 벙커 위에 올라섰다가 내려선 넓은 임도로 내려서자 꽤 넓은 묘지가 보였습니다.

 

 

 

  11시8분 지뢰 경고판이 세워진 군부대철조망 앞에 다다랐습니다. 묘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다 산행시작 1시간쯤 지나서 산 중턱에 짐을 내려놓고 십 수분을 쉬었습니다. 남아 있는 명성지맥 종주 길이 다른 산 꾼들이라면 한 번에 마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인데 두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어서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됐습니다. 가파른 비알 길을 올라 만난 지뢰경고판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왼쪽으로 꺾어 진행한 것은 철조망이 쳐져있어 그대로 직등 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군부대 우회길이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우회길 중간쯤에서 움푹 파진 마른 계곡(?)을 지났습니다.  잘은 몰라도 지난여름 폭우에 흙이 휩쓸려 내려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 가 했는데, 이토록 가운데가 움푹 파이게 할 정도로 비에 휩쓸려 내려간 토사 양이 많았다면 산사태로 발전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시24분 해발669m의 불무산에 올랐습니다. 군부대 왼쪽아래 산허리에 난 우회길에 드문드문 지맥 표지기가 붙어있었지만 사람 다닌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길로 불무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명성지맥 종주 꾼 밖에 없지 않나 싶었습니다. 앞장선 이교수가 길을 잘 안내해 희미한 길에서 알바 한 번 없이 정상으로 이어지는 군부대 남쪽의 주능선으로 올라섰습니다. 해발540m대의 능선에서 왼쪽으로 꺾어 모처럼 편안한 길을 걸어 엄청 튼튼해 보이는 벙커가 자리한 불무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정상에 올랐어도 시야가 가려 영평천과 한탄강은 조망되지 않았지만 거대한 암벽들이 주능선을 받쳐주는 명성산의 위용만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벙커 옆 좁은 풀밭에서 반주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마치고 13시가 다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남서쪽으로 뻗어나간 명성지맥 길을 다시 이어갔습니다.

 

 

 

  14시15분 전망바위를 지났습니다. 정상을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610m봉을 넘어 안부로 내려섰다가 만난 삼거리에서 능선 길을 버리고 왼쪽 아래로 우회했습니다. 눈이 쌓였거나 비가 내리는 날에는 칼날능선의 암릉길을 버리고 왼쪽 아래로 우회하는 것이 좋겠다는 성봉현님의 산행기를 보고 암릉 길이 언제 나타날까 궁금했는데 삼거리에서 왼쪽 아래로 우회해 풀들이 우거진 공터로 올라서고 나서야 그 암릉 길을 우회했음을 알았습니다. 억새풀이 무성한 공터가 642m봉으로 이 봉우리에서 북서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여 그 길로 내려갔습니다. 길 초입에 홀대모 등 이름 난 종주꾼들의 표지기가 걸려있지 않았다면 이 길이 정말 맞나 싶을 정도로 잔 나뭇가지들이 심하게 길을 막았습니다.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고 나침반으로 제 방향을 잡은 후 진행하는 것이어서 길을 잘 못들 리 없겠다 하면서도 한참 동안 표지기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데 이번에는 모처럼 믿을만한 친구들과 같이해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642m봉에서 반시간 넘게 걸어 올라선 전망바위는 자그마했지만 덕분에 나무숲을 잠시 빠져나가 하늘을 볼 수 있는데다 왼쪽 먼발치에 펼쳐진 시골풍경을 카메라에 담아올 수 있어 저녁 무렵 냇가에서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처럼 갑갑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15시17분 안부에서 푹 쉬었습니다. 여름은 끝났어도 여름이 키워놓은 잡목들의 무성함은 여전해 끊긴 길을 이어가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구간에서 쉽게 만나보는 표지기가 거의 보이지 않아 행여 길을 잘 못 든 것이 아닌 가 해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행방향이 북서쪽으로 고정된 데다 위험한 암릉이 없고 중간에 좌우로 갈라져나간 산줄기들이 별로 없어 다른 산줄기로 잘 못 들어설 염려가 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망바위를 떠나 한참동안 북서쪽으로 진행해 벌목한지 오래되지 않아 우측사면이 벌거숭이인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내려가는 길이 완전 풀숲길이어서 포기하고 이 봉우리를 왼쪽으로 우회했습니다. 다시 만난 능선에도 여전히 길이 나있지 않아 잡풀들을 헤쳐 가며 깊숙한 안부로 내려갔습니다. 벌목으로 민둥산이가 된 능선을 점한 것은 우리나라 극상림인 소나무나 참나무들이 아니었습니다. 여름 내내 무성하게 자란 잡목과 잡초들 틈바구니에서 요염한 자태의 꽃을 피운 이름 모르는 야생화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힘들게 내려선 안부가 최고의 쉼터였으니, 이곳에서 한동안 보이지 않은 표지기가 눈에 띄어 제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6시15분 방골고개에 도착했습니다. 목적한 운산리고개까지 가는 데 시간이 바트면 그 전 방골고개에서 이번 산행을 마칠 수 있다는 제 얘기를 듣고 누구하나 싫어하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깊숙한 안부에서 30-40m 고도를 높여 다다른 능선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옮겨 풀들이 우거져 “H”표지물이 보이지 않는 해발고도 350m대의 헬기장을 지났습니다. 조금씩 고도가 낮아져 이제 힘든 길은 끝났다 싶은데 밤골고개를 지나는 차도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320m대 능선의 나지막한 봉우리를 지나 서서히 왼쪽으로 방향을 튼 능선을 따라가자 고갯마루에 대전차장애물이 설치된 차도가 보였습니다. 경사가 완만한 절개면을 따라 내려가 아스팔트 차도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종주산행은 여기 방골고개에서 끝내기로 뜻을 모으고 고개를 넘어 대화산리로 향했습니다.

 

 

 

  16시37분 대화산리버스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고개를 막 넘자 명성산의 마루금이 선명하게 보여 산정호수와 가까운 운천이 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아스팔트길은 이내 끝났고 동리에 들어서기까지 비포장도로가 계속되어 차가 지날 적마다 먼지가 크게 일곤 했습니다. 숲속에서 몇 시간을 보낸 불무산이 한 눈에 잡혀 그동안 걸어온 길을 그려봤습니다. 방골고개에서 20분가량 걸어 다다른 대화산리버스정류장에서 맥주를 사들며 18시40분에 운천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1시간 쯤 남겨놓고 택시를 불러 운천으로 나갔습니다.

 

 

 

  이틀 후면 추석입니다. 가을이 완연한 추석을 맞으며 가을의 본뜻을 새겨봅니다. 가을에 할 일이 갈무리를 하는 것이라면 조상들께 추수감사의 예를 다한 후 서둘러 수확해 갈무리하라는 뜻이 이 추석에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을 갈무리할 나이가 60 몇 세라면 너무 이를 것입니다. 그렇다고 60대에 마구 힘을 다 쓰고 나면, 그래서 갈무리할 힘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 또한 서글픈 일입니다. 산과 함께 남은 삶을 갈무리할 뜻이라면 60중반의 이쯤해서 산행의 강도를 점검해 자기 몸에 맞도록 조정해보는 일을 이 가을에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산행사진>

 

  

 

 

 

 

 

 

 

 

 

 

 

 

 

 

 

 

 

 

 

 

 

 

 

 

 

 

 

 

 

 

 

 

 

 

 

 

 

 

 

                                             한북명성지맥 종주기4

 

 

 

                               *지맥구간:낭유고개-관음산-도내지고개

                               *산행일자:2011. 3. 20일(일)

                               *소재지   :경기포천

                               *산높이   :733m

                               *산행코스:낭유고개-관음산-501m봉-316.5m봉-도내지고개

                               *산행시간:8시50분-14시39분(5시간49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 유한준 회장 등 8명

                                (24회이규성, 김주홍, 우명길, 29회유한준, 오창환, 정병기

                                 31회 김성만, 초대손님 박현출님)

 

 

  이번 봄비가 그리 반갑지 않은 것은 중국의 황사와 일본의 원자력발전소에서 터져 나온 낙진이 혹시라도 이 비에 섞인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서인데 사람들 걱정은 조금도 아랑곳 않고 그칠 줄 모르고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낭유고개를 출발해 관음산을 오르며 기왕 내릴 바에야 구질구질한 비보다는 새하얀 눈이 좋겠다했는데 바란 대로 눈이 펑펑 내려 산에 오기를 참 잘했다 했습니다. 한수 이남의 산들은 춘분을 제대로 맞으려 겨울의 잔재를 씻어내느라 한창 바쁜데 이번에 오르는 관음산은 위도가 북위38도로 높은 편이며 산 높이도 700m대여서 아직도 겨울이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봄비 대신 겨울눈이 내려주기를 원했는데 제우스신이 저희들의 이런 뜻을 살펴주어 비를 백설로 바꿔주었습니다.

 

 

 

  3월 하순에 함박눈을 만나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비를 피하려 집에 남아 있었다면 이렇게 탐스러운 흰 눈을 어찌 맞이할 수 있었겠습니까? 소나무 잎들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송이가 참으로 소담스러웠습니다. 백설이 쌓여 있는 벙커 위 봉우리도 더할 수 없이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길이 좀 미끄럽기는 해도 흰 눈이 살짝 깔린 비알 길을 걸어 오르며 한껏 기분이 삽상해짐을 느꼈습니다. 한 일 년 이런 눈을 다시 못 본다 싶어지자 다시 얼굴을 내보여 이 산에서 하얀 눈을 앗아가는 태양이 밉살스러웠습니다.

 

 

 

  눈이 그치고 안개가 가득 들여 이산의 분위기가 그윽했습니다. 밝음과 어둠을 완충하는 안개는 그 흐릿함 속에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 산도 속내를 들어 내보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말 많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채 조용히 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산만이 아니고 이산에 주소를 두고 있는 생명체들도 안개 속에 숨어 쉬고 싶을 것입니다. 그들 뜻이 그렇다면 그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람들도 안개 속에 숨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산상에 햇빛이 내려앉았습니다. 산속의 생명체들이 단잠을 다 잤다 싶을 즈음해 태양이 안개를 걷어 들였습니다. 안개가 사라지고 밝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밝음과 함께 따사로움도 되살아났습니다. 안개를 걷어낸 태양이 봄을 재촉했습니다. 오전에 내린 눈은 겨울이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음을 알리는 고별의 눈이었기에 남중한 태양이 주저하지 않고 눈을 다 걷어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나절 사이에 일어난 기상변화가 끝나고 이 산은 다시 봄에로의 일상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아침 8시50분 낭유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오전에는 비가 오고 오후 들어 날이 갤 것이라는 기상청의 일기예보대로 아침 내내 내린 비가 좀처럼 멈출 줄 몰라 별 수 없이 낭유고개에서 비옷을 껴입고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 첫 번째 헬기장을 지나자 서쪽으로 이어지는 지맥길이 가팔라졌습니다. 해발고도가 400m를 넘어서자 지분대는 비가 진눈깨비로 변했다 했는데 이내 함박눈으로 바뀌어 오름길에 하얗게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산행시작 반시간이 조금 더되어 다다른 벙커 위 봉우리에 세워진 앙증맞은 탄피종이 두 해전 한북정맥 종주 시 마지막 봉우리 장명산에서 타종했던 종과 같아 더 눈길이 갔습니다.

 

 

 

  10시28분 해발733m의 관음산에 올랐습니다. 탄피종이 세워진 벙커위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지맥 길을 따라 산 오름을 계속했습니다. 완만한 오름길을 천천히 걸으며 진행하다가 앞에 보이는 암봉을 오른 쪽으로 우회했습니다. 하얀 눈에 박무가 더해져 시야가 좋지 않아서인지 관음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아주 멀게 느껴졌습니다. 평탄한 길을 이어가다 된비알 길을 올라 바위 봉에 이르렀는데도 정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내려섰다 오르기를 몇 번 반복하다 경사가 가파른 된비알 길을 걸어 헬기장이 들어선 관음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헬기장에 막 내려앉은 신설은 이내 스러지겠지만 이 봉우리가 관음산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지목은 눈비를 맞아가며 오래 오래 이 봉우리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날만 좋았다면 한 눈에 들어왔을 사향산과 한북정맥의 연봉들을 조망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으로 정상을 떠났습니다.

 

 

 

  11시32분 벌목지를 지났습니다. 관음산 정상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눈이 내려 모처럼 마음 놓고 쉬고 있을 태양열 집진판 옆을 지났습니다. 얼마 후 오른 쪽으로 산정리길이 갈리는 능선 삼거리에 다다른 시각이 11시1분으로 “관음골삼거리/정상/산정리”의 표지목이 세워진 여기 삼거리에서 관음골삼거리 방향으로 직진했습니다. “현위치: 관음산1-3(7부능선)”의 119안내판이 세워진 능선 끝자락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른 후 오른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우측사면의 낙엽송을 베어내 개활지로 변한 벌목지 봉우리를 넘어 5-6분을 내려가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편안한 곳에 자리를 잡아 점심을 들었습니다. 방금 전에 눈발이 멈췄다 싶었는데 어느새 태양이 구름을 헤치고 나와 점심 식사를 하느라 앉아 쉬는 저희들을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13시8분 501m봉에 올라섰습니다. 반시간 남짓 걸려 식사를 마친 후 12시10분경 오후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잣나무와 참나무 숲이 좌우로 갈리는 능선 길에 내린 눈은 다 녹아 안 보이고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어 걷기가 편안했습니다. 낙엽 길을 걸어올라 만난 초록색의 철조망 울타리를 끼고 왼쪽으로 돌았습니다. 오른 쪽 계곡으로 떨어지는 울타리와 헤어져 오른 봉우리에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오전에 오른 관음산이 잠시 보였다가 다시 보이지 않은 것은 오전 내내 골짜기를 덮었던 안개가 능선으로 올라가 마지막 관음산 정상과 세 싸움을 해서였습니다. 몇 곳의 희미한 갈림길에서 길을 제대로 찾아 501m봉에 올라서자 산친구산악회에서 비닐 카바를 씌워 줄기에 매달아 놓은 표지물이 보여 반가웠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지 않아 길 찾기가 쉽지 않은 이 구간을 방송대의 중간시험 때문에 나중에 저 혼자 할 까 하다가 그래도 친구들과 같이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참가했는데 참 잘 한 결정이었습니다. 501m봉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길을 따라 걸어 바위구간을 지났고 이내 환기구가 설치된 군 벙커 위 500m봉에 도착했습니다.

 

 

 

  14시39분 도내리고개 바로 위 밭에서 이번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웅장한 암벽이 서측 면을 받쳐주는 명성산이 아주 가깝게 보이는 500m봉에서 내려가 만난 암봉을 오른 쪽으로 우회해 다다른 갈림길에서 직진해 450m봉에 올랐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넓은 안부를 지나 사각체의 시멘트표시석이 세워진 군 벙커 위 442m 봉에 다다랐는데, 500m봉에서 442m봉에 이르는 길을 제대로 이어가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442m봉에서 얼마가 내려가 송전탑을 지났습니다. 얼마 후 만난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헤어지고 바로 앞 봉우리에 올랐다가 오른 쪽으로 내려가 삼각점이 설치된 316.5m봉에 도착한 시각이 14시31분이었습니다. 7-8분을 더 걸어 내려가 다다른 삼포 옆 묘지터에서 다음에 오를 불무산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빙 둘러서서 하루 산행을 무사히 마쳤음을 자축하면서 4구간 종주산행을 끝냈습니다.

 

  묘지터에서 오른 쪽으로 옮겨 타일랜드 군 참전기념비를 들렀습니다. 한국전쟁 때 전투군을 파견해 우리나라를 도운 태국군의 참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참전비를 들러보고 새삼 고마운 마음이 일었습니다. 제 고향 파주의 적성에 주둔했던 태극군이  완전 철수한 것은 1971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내린 눈이 바로 사라질 눈이기에 더욱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사람도 그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능력 있고 재력이 있어도 제 때 물러서지 않는다면 그를 두고 아름답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있으라고 주위에서 붙잡을 때가 바로 물러설 때일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영생하지 않고 수명을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산행기록이 부실해 상당부분 기억에 의존해 써서 틀린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지적해주시면 바로 잡겠습니다.)

 

 

 

                                                <산행사진>

 

 

 

 

 

 

 

 

 

 

 

 

 

 

 

 

 

 

 

 

 

 

 

 

 

 

 

 

 

 

 

 

 

 

 

 

                                                   한북명성지맥 종주기3

 

                             *지맥구간:산정호수주차장-여우고개-낭유고개

                             *산행일자:2011. 2. 20일(일)

                             *소재지   :경기 포천

                             *산높이   :여우봉620m, 사향산750m

                             *산행코스:산정호수버스종점-여우봉갈림길-안덕고개-여우봉-여우고개

                                            -사향산-낭유고개

                             *산행시간:9시22분-17시20분(7시간58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 회원10명

                              (24회김주홍, 이규성, 이기후, 우명길, 26회임종륜, 29회정병기, 유한준.

                               31회김성만, 37회장부순, 초대손님 박현출) 

 

 

   명성지맥 종주 길에 아주 가까이에서 군 사격장을 보았습니다. 지맥의 마루금이 사격장 안을 지나 이를 따르지 못하고 빙 돌아가면서도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은 것은 사격훈련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간 군은 여기 사격장에서 실시되는 대규모 사격훈련을 매년 한 번씩 일반에 공개하고 언론이 이를 보도해왔습니다. 유사시에 대비해 평상시에 사격훈련을 철저히 해 두는 것이야말로 유비무환에 이르는 길입니다. 제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반만년에 이르는 우리민족의 전쟁사에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사전에 만반의 대비를 하고서도 전쟁에 패한 사례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반대로 아무런 사전대비 없이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면 이는 극히 예외적인 천우신조의 결과임에 틀림없습니다.

 

 

 

 

  방금 읽기를 마친 서애 유성룡선생의 징비록(懲毖錄)을 통해 다시 확인한 것은 국가안보에 유비무환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입니다. 선생은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懲>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毖>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라고  이 책의 첫머리인 자서(自序)에서 그 집필동기를 밝혔습니다.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의 일을 중심으로 하고 전란의 발단을 구명하기 위해 왜란 전의 일도 같이 기록해 놓은 징비록을 읽고 나서 조선이 임란에서 망하지 않은 것은 천우신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서장관으로 일본을 왕래한 명신 신숙주가 죽을 때 성종께 절대 일본과 실화(失和)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음에도 조선의 임금들과 조정신하들은 일본을 얕잡아보고 일본의 침략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조정에서 최고의 명장으로 굳게 믿었던 신립은 명성과는 달리 장군의 자질이 충분히 갖춰진 인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천혜의 요새 조령을 버리고 늪지인 탄금대에다 배수의 진을 친 후 왜군을 맞아 싸우다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그가 이끄는 조선군이 허망하게 전멸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또 다른 장수 이일 역시 명장이 아니었습니다. 상주에서 패전하여 충주로 달아난 이일은 적군이 선산에 이르러 가까이 왔다고  보고한 개령사람을 여러사람의  마음을 의혹시킨다고 목을 베었습니다. 이 일을 목격한 여러 사람들이 적의 척후병을 보고도 말을 하지 않아 조선군은 패하고 이일은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이 모두가 조선은 물적대비는 말할 것도 없고 인적으로도 전쟁을 치러낼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임란 발발 한해 전에 선조임금이 서애 유성룡선생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정읍현감을 하던 종6품의 이순신을 정3품의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것은 정말 잘 한 일로 하늘이 조선을 도운 것입니다. 사간원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좌수사로 임명된 장군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전선을 건조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1년 동안 사전 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그 결과 해전에서 대승했고 그 덕분에 호남의 곡창지대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지 않아 조선의 패망을 막았습니다. 조선군이 육전에서  참패하고 해전에서 대승한 것은 유비무환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하는 가장 좋은 본보기입니다. 

 

 

 

  아침9시22분 산정호수주차장을 출발했습니다. 지난 달 강추위로 종주산행을 쉬어서인지 두 달 만에 만나보는 동창들이 반갑고 또 반가웠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 북한의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는 산정호수는 38선 이북의 수복지구여서 서울보다 기온이 3-4도는 낮은 것 같습니다. 주차장에서 등룡폭포를 거쳐 사격장까지 이어지는 계곡 길에 햇빛이 닿지 않아 대동강 얼음도 녹는다는 우수가 지났는데도 한 겨울의 냉기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등룡폭포가 빙폭 속에 가둬버린 궁예의 비화를 떠올리며 계곡 길을 올라 왼쪽 위로 팔각정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주차장 출발 50분이 다 걸린 이 길은 지난번에 하산한 길이어서 엄격하게 따진다면 지맥 길 이어가기는 이제부터라 하겠습니다.

 

 

 

  10시18분 사격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팔각정갈림길에서 몇 분을 더올라가 군 텐트를 보았습니다. 사격장출입을 통제할 뜻으로 세웠을 텐트에서 머물고 있는 앳된 병사 한 명이 저희 일행을 보고도 길을 막지 않아 바로 위 사격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통제지역답게 억새가 무성하다 했는데 조금 더 올라가자 넓은 평지가 나타나고 사격장이 눈앞에 전개됐습니다. 명성지맥 동쪽 너머로만 사격장이 있는 줄 알고 있었던 저는 이제껏 그 반대편의 계곡에 왜 흙탕물이 흐를까 그 이유를 몰라 많이 궁금해 했는데 이번에 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팔각정을 지난 명성지맥의 마루금이 사격장 안의 안덕재를 지나면서 이 지맥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사격장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직접 보고 나서야 등룡폭포로 흐르는 서사면의 계곡물이 흙탕물인 이유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사격장 안을 가로 지르는 마루금을 따르지 못하고 그 앞의 시멘트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선 후 사람 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는 눈길을 힘들게 걸어올라 이동통신탑에 이른 시각이 11시14분이었습니다.

 

 

 

  11시55분 해발620m의 여우봉을 올랐습니다. 한 주전에 올랐던 소백산에 쌓인 눈에 못지않은 많은 양의 눈이 그대로 남아 있는 덕분에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오르며 몸은 조금 힘들어도 마음만은 어느새 순백의 동심으로 돌아간 듯 했습니다. 헬기장에서 동쪽 멀리 남북으로 내닫는 한북정맥의 연봉들을 바라보며 한북정맥을 같이 종주한 동문들과 함께 하나 하나 봉우리 이름들을 확인해 나갔습니다. 국망봉을 위시한 몇 봉우리는 해발고도가 천m를 넘어 멀리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눈을 확인할 수 있었고 경기도 제 1봉인 화악산과 제2봉인 명지산도 같이 보여 반가웠습니다. 헬기장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오르다 한참 후 다시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어 여우의 흔적이라곤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여우봉에 올라섰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오래된 표지목이 봉우리 이름을 알려주는 여우봉에서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  점심을 들고자 안부에다 자리를 잡았습니다.

 

 

 

  13시50분 여우고개에 내려섰습니다. 이번 산행에 처음 참여한 한 후배가 산행을 하면서 이렇게 호화로운 점심상을 차려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감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자 준비한 메뉴에 산에서 좀처럼 맛볼 수 없는 따끈한 어묵 국이 곁들여졌으니 이 정도면 성찬이라 할 만해서입니다. 13시7분 1시간 남짓 걸려 점심식사를 마친 후 오후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봉우리 하나를 넘어 편안한 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사 길을 내려가 여우고개를 조금 앞둔 묘지 근처에서 잠시 쉰 후 여우고개에서 78번 도로를 건너 넓은 시멘트길을 따라 직진했습니다. 몇 분 후 다다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갈라진 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마루금 길이 아닌 것을 알고 삼거리로 되돌아오느라 십 수분을 까먹었습니다. 삼거리에서 눈이 녹아 질퍽한 큰 길을 따라 남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시멘트도로에서 조금 벗어나 왼쪽 위에 터 잡은 팬션 파인힐을 지난 시각이 14시7분이었습니다.

 

 

 

  15시55분 해발750m의 사향산에 올랐습니다. 군부대 정문으로 이어지는 시멘트도로에서 벗어나 왼쪽으로 올라가는 임도는 북사면의 산허리에 낸 길이어서 응달이 진데다 짙푸른 잣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곳도 있어 어둠기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지맥 길은 임도에서 왼쪽으로 치고 올라 만나는 능선 길이 틀림없지만 힘들게 올라가봤자 군부대가 길을 가로막아 마루금을 이어갈 수는 없어 오른쪽으로 확 꺾이는 임도를 버리고 곧바로 산등성을 올랐습니다. 선두가 눈 위에 낸 길을 따라 힘들게 올라 군부대의 철조망 울타리를 만났습니다. 이 울타리를 따라 군부대를 오른 쪽으로 에돌아 부대 정문 앞 공터에 올라선 것이 파인힐 출발 1시간이 넘게 지난 15시15분이었으니 눈이 많이 쌓인 산등성을 오르내리느라 반시간 넘게 고생한 셈입니다. 명성지맥을 앞서 종주한 몇 분들처럼 여기 부대 앞까지 시멘트 길을 따라 걸었다면 몸은 편했겠지만 가는 겨울 마지막 눈길을 이번처럼 원 없이 걷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철원 벌에 우뚝 솟은 금학산과 고대산 줄기가 가깝게 보이는 부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깊숙이 내려갔다가 능선으로 올라서는 길이 이번 산행의 마지막 깔딱 길이었습니다. 깔딱 길을 올라 다다른 능선에서 군부대 울타리와 헤어지고 오른쪽으로 진행해 삼각점만 박혀 있는 사향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북쪽 방향으로 군부대가 들어선 730m봉이 내려다보이는 사향산에 오르자 국망봉을 남북으로 지나는 한북정맥이 참으로 늠름해 보였습니다.

 

 

 

  17시21분 낭유고개에 도착해 3구간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사향산 정상에서 조금 더 진행해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가는 중 길이 미끄러워 잠시 멈춰 서서 크램폰을 꺼내 찼습니다. 이내 내려선 평탄한 방화선 길을 따라 모처럼 느긋하게 걸었습니다. 먼 곳에서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명성산 자인사 부근의 웅장한 암벽과 꽁꽁 얼어붙어 마냥 초라해 보이는 산정호수가 한 눈에 들어오는 벙커봉우리인 670m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서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미끄럽고 질퍽한 길을 내려가며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다보니 생각보다 하산 길이 힘들었습니다. 차 소리가 가깝게 들려 낭유고개가 멀지 않겠다 싶어 크램폰을 풀었는데 여전히 길은 미끄러워 조심해야 했습니다. 한참을 내려가 낭유고개가 가까워지자 다음번에 오를 차도 건너 관음산이 꽤 높아 보였습니다. 일행에 물어 고도를 확인해본 즉 해발733m로 사향산과 별반 차이나지 않아 다음 종주산행도 초반부터 만만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330번 도로가 지나는 낭유고개에 도착해 대기 중인 음식점 차에 올라 이동으로 옮겼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산행대장을 맡은 막내 기수의 한 후배와 오로지 카페 글을 읽고 마음이 동해 동참했다는 또 다른 후배의 성공적인 산행을 축하하며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조선이 사전대비는 못하더라도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제때 고쳤다면 병자호란의 참화는 막았을 것입니다. 반정공신 이괄의 난에 놀라 토성으로 된 남한산성을 석성으로 개축한 일을 빼고 외세의 침입에 제대로 대비하지 않은 인조임금이 청나라 황제에 굴욕적으로 항복한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천안함 피폭 사건과 연평도 피침사건을 겪고서도 북한에 관용을 베풀자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군사격장에서 사격훈련을 하는 소리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후방의 국민들 모두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잠잘 수 있도록 만드는 첩경은 이번에 지난 사격장에서 사격훈련을 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 사격장에서 사격훈련을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야  궁예의 울음소리를 간직한 명성산에 우리 국민들이 비통한 곡소리를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산행사진>

 

 

 

 

 

 

 

 

 

 

 

 

 

 

 

 

 

 

 

 

 

 

 

 

 

 

 

 

 

 

 

 

 

 

 

 

 

 

 

 

 

 

 

 

 

 

  

 

 

 

                                           한북명성지맥 종주기2

 

                        *지맥구간:약사령-명성산-산정호수주차장

                        *산행일자:2010. 12. 19일(일)

                        *소재지   :경기 포천/강원 철원

                        *산높이   :명성산923m

                        *산행코스:약사삼거리-약사령-명성산-팔각정-비선폭포 여우봉갈림길-산정호수주차장

                        *산행시간:9시4분-16시1분(6시57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원 16명

 

 

  명성지맥 종주 길에 명성산의 팔각정에서 빨간 우체통을 보았습니다. 이 빨간 우체통이 제 눈을 끈 것은 우선은 드럼통만한 그 크기였고, 다음으로 우체통 상단에 쓰인 하얀 글씨의 “1년 후에 받는 편지”라는 문구였습니다. 이삼일도 못 참아 등기 속달로 보내거나 그도 성이 안차 이메일로 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오늘날 1년 후에 편지를 받는 산꼭대기 우체통에 편지를 써 넣을 사람들이 과연 누가 있을까 궁금했고, 도심의 작은 우체통도 그 안에 온갖 쓰레기가 편지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 있다는데 이 높은 산에 너무 큰 우체통을 세운 것이 아닌 가 싶어서였습니다.

 

 

 

  여기 산 꼭대기 우체통에서 1년을 기다리는 편지들의 사연들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또 궁금했습니다. 잘은 몰라도 대다수의 편지가 사랑을 노래하는 연서(戀書)일 것이라 짐작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젊어서 연애편지 한 번 안 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사랑에 빠져 수없이 편지를 나누면서 정작 결혼은 엉뚱한 사람과 해, 나중에 주고받은 연서가 문제가 되어 당혹했다는 경험이 회자되던 시대는 이제는 지난 듯합니다. 요즈음은 거의다가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이루어져 ID만 잘 간수한다면 물증을 남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뀐 덕분입니다.

 

 

 

  이 산의 빨간 우체통을 보고 십 수 년 전에 상영된 일본 영화 “러브레터”를 떠올렸습니다. 199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상영된 것은 그 4년 후인 1999년이었으니 당시만 해도 한일 간의 문화교류가 요즘만큼 원활하지 못한 때로 일본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 저와 같은 보통사람들에 상존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2년 전 등반사고로 목숨을 잃은 연인 후지이 이츠키의 옛 주소를 졸업앨범에서 확인하고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와타나베 히로코에게 답장이 날라 와 이를 위안 삼고 살다가 연인 이츠키의 옛집을 찾아가지만 답신을 보낸 사람이 죽은 연인과 이름이 같은 중학교동창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인데, 여 주인공 히로코가 연인이 등반사고로 숨진 산을 찾아 하얀 눈밭에서 연인을 부르며 절규하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우체통 앞에서 뜬금없이 일본영화 “러브레터”가 생각난 것은 히로코가 절규하는 눈 덮인 산에다 빨간 우체통을 세워놓는다면 어떨까 싶어서였습니다. 편지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산에서 죽어간 산꾼을 찾는 연인들의 눈물만은 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우체통에도 눈물로 적셔진 러브레터 몇 통쯤은 들어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내년 이맘때쯤 집배원 아저씨와 함께 다시 올 생각입니다.

 

 

 

  아침 9시4분 약사삼거리를 출발했습니다. 포천 이동에서 택시를 타고 약사삼거리로 옮겨 “준희네”가게 집 앞에서 합동사진을 찍은 후 하루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가게 앞에서 서쪽으로 난 약사령 가는 길에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산길에서는 아이젠을 차야할 것 같았습니다. 겨울바람에 뒷덜미가 써늘해 영하의 기온이 체감됐는데 아직은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지 않아서인지 손끝이 아려오지는 않았습니다.

 

 

 

  10시10분 약사령에서 명성지맥의 2구간 종주 길에 들어섰습니다. 고개 너머가 강원도 철원 땅인 약사령에서 아이젠을 꺼내 찬 후 왼쪽 산길로 올라섰습니다. 각흘산과 명성산 사이의 가장 깊숙한 안부인 약사령에서 고도를 200m 가량 높여 두 번째 헬기장에 올라서기까지 반시간 남짓한 오름 길이 이번 산행에서 가장 힘든 깔딱 코스였습니다. 첫 번째 헬기장을 지나 좌측 사면이 거의 낭떠러지인 가파른 길을 몇 번은 로프를 잡고 오르면서 아이젠을 잘 찼다는 생각을 한 것은 오름 길에 하얀 눈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인데 덕분에 겨울 산행이 마냥 썰렁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짐을 많이 진 후미의 한 친구와 보조를 맞추느라 천천히 오르는 동안 나머지 대원들은 앞으로 내달려 따라잡기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10시45분 제5지점 안내판이 세워진 삼거리를 지났습니다. 두 번째 헬기장에서 명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주위는 나무들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키 작은 억새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시야가 탁 트였습니다. 한 여름이라면 햇빛이 내리쬐는 땡볕의 능선을 지나는 일이 엄청 고역일 것이기에 겨울에 지나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지난번에는 해토 때 이 길을 지났는데 길이 미끄럽고 진흙이 바짓가랑이에 철떡 들러붙는 등 애를 먹은 기억이 생생해 더욱 그러했습니다. 왼쪽 아래 움푹한 넓은 곳이 이름난 포사격 장으로 군사도로도 얼기설기 잘 나있었습니다. 헬기장에서 내려선 제5지점의 안부삼거리는 바람이 지나는 길목이어서 귀가 시렸습니다. 안부삼거리에서 계단 길을 걸어 올라선 봉우리에서 오른 쪽 바로 아래 삭풍을 피할 만한 곳을 찾아 과일을 꺼내들며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11시43분 해발923m의 명성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잠시 쉬고 나자 앞서 간 일행들이 보이지 않아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저희들이 이번에 종주하는 산줄기가 한북명성지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산줄기가 명성산을 지나서인데 정작 명성산의 정상은 명성지맥에서 0.3Km 북쪽으로 떨어져 있어 잠시 마루금에서 이탈하여 우정 다녀와야 했습니다. 지맥 길이 왼쪽으로 꺾이는 능선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북릉 길을 오르내려 앞서 다녀간 산객들로 바닥의 눈이 단단하게 다져진 명성산의 고스락에 올라섰습니다. 곧바로 함박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날씨로 북쪽 지근거리의 궁예봉에 자리하고 있을 비운의 사나이 궁예와 인사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능선삼거리로 되돌아갔습니다.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몇 분간 걸어가자 바람을 가릴 만한 넓은 곳이 눈에 띄어 이곳에서 산행을 멈추고 전 대원이 빙 둘러 앉아 점심을 들었습니다. 언제고 그랬듯이 이번에도 김주홍동문이 손수 가져온 식재료로 겨울산행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오댕 국을 끓여 주어 으스스한 한기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13시55분 팔각정에 다다랐습니다. 따끈한 오뎅 국과 동문들과의 훈훈한 정담으로 40분 남짓한 점심시간이 내내 행복했습니다. 13시가 다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지맥 길을 다시 밟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앞 910m봉에서 팔각정 쉼터까지의 남릉 길은 고도차가 별로 없어 오르내림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곳곳의 암릉 길에 눈이 깔려 있어 조심해야 했습니다. 로프를 쳐놓은 우회 길로 암봉을 왼쪽으로 에돌아 능선에 올라선 후 남진을 계속하자 얼마 후 오른 쪽 아래 먼발치로 산정호수가 눈에 잡혔습니다. 우측 사면이 낭떠러지인 능선을 지나 삼각봉에 이르자 팔각정과 빨간 우체통이 보였습니다. 명성산 정상에서 시작된 아기자기한 능선 길은 삼각봉에서 끝났고 너른 안부로 내려가 팔각정 앞에서 바로 옆의 빨간 우체통에 눈길을 주며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마루금은 바로 위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데 저희들은 명성산이 자랑하는 광활한 억새밭을 지나고자 왼쪽 아래로 곧바로 내려갔다가 얼마 후 오른 쪽 능선으로 붙어 지맥 길로 복귀하기로 했습니다.

 

 

 

  15시6분 얼어붙은 등룡폭포의 물줄기를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지난 번 팔각정 아래 억새밭을 지날 때는 저녁 시간이어서 이 밭에 몸을 숨긴 작은 새들이 억새풀 사이를 떼거리로 날아다녀 억새들이 부딪치며 사각사각 내는 소리가 산상의 화음이다 했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일러서인지 그 소리를 듣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지맥 길이 지나는 능선에 다시 올라선 지 얼마 후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간 것이 지맥 길을 놓친 직접적인 원인임을 알게 된 것은 집에 돌아와서 지형도를 보고 다른 분들의 산행기를 읽고 나서였습니다. 직진하면 마루금을 타게 되지만 사격장을 지나게 되어 사격훈련을 쉬는 일요일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저희들처럼 오른 쪽으로 꺾어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가 비선폭포 즈음해서 계곡을 건너 왼쪽의 여우봉으로 오르므로 길을 잘 못 들었다고 부끄러워할 일도 아닙니다. 짧은 너덜 길을 지나 만난 계곡 길에서 한참 동안 숙고 끝에 시간이 여의타면 적당한 지점에서 계곡을 건너 여우봉으로 붙기로 하고 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정호수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얼마 후 다다른 등룡폭포는 물줄기가 얼어붙어 또 다른 비경을 연출했습니다. 등룡폭포의 물줄기를 얼어붙게 한 동장군이 세월도 같이 얼어붙게 한다면 그 때만이라도 나이가 들지 않아 몇 년이라도 더 산에 다닐 수 있겠는데 과연 그런 자비를 베풀지 모르겠습니다.

 

 

 

  16시1분 산정호수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산정호수로 흘러들어가는 계곡물이 얼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이 예전처럼 탁류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넓은 공터에 세워진 격자  창살모양의 모던한 쉼터에서 산행대장이 여우봉 산행을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결정해 이제 멀지 않은 산정호수로 하산해 버스를 타는 일만 남았습니다. 비선폭포(?)를 막 지나자 “여우봉 2.5Km"의 표지목이 서 있어 여우봉으로 오르는 길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격장을 지나서라도 반드시 마루금을 타야겠다고 고집하지 않는다면 다른 산객들도 저희들과 같은 코스로 산행했을 것이라 생각하자 뭔가 찝찝한 기분이 사라졌습니다. 산정호수 버스정류장에서 택시를 불러 운천으로 나가 저녁을 들었습니다. 모처럼 동서울터미널에 일찍 돌아와 동기들과 인근 맥주 집을 들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자정이 다 되어 귀가해 산 나들이를 전부 마쳤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처럼 편지를 보낼 곳이 있습니다. 10년 전에 제 곁을 떠난 집사람이 머무는 천국이 그 곳입니다. 당신의 막내아들이 반듯한 규수를 만나 장가를 들었고, 당신의 남편이 방송대국문과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며, 막내 녀석 결혼을 축하하는 고마운 분들에 올릴 수 있도록 때 맞춰 “섬진강둘레산줄기에서 길을 찾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는 소식을 담은 편지를 써 갖고 명성산을 올랐다면 우체통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진작 우체통이 세워진 것을 알지 못해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기왕 늦은 김에 한 해를 더 기다려 당신의 두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남편이 정말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을 사진 찍고 글을 써 편지를 보내고자 합니다. 혹시라도 주님께서 제 편지를 보시고 집사람에 답장을 보내라고 명하실지 누가 압니까? 그래서 저는 내년 이맘때쯤 편지를 보내고 1년이고 10년이고 기다려볼 뜻입니다.

 

 

 

 

 

 

 

 

                                                       <산행사진>

 

 

 

 

 

 

 

 

 

 

 

 

 

 

 

 

 

 

 

 

 

 

 

 

 

 

 

 

 

 

 

 

 

 

 

 

 

                                         한북명성지맥 종주기1

 

                      *지맥구간:광덕산-각흘산-약사령

                      *산행일자:2010. 11. 21일(일)

                      *산높이  :광덕산1,046m, 각흘산838m

                      *산행코스:광덕고개아랫마을-광덕산-자등현-각흘산-약사령-내약사동

                      *산행시간:9시12분-17시20분(8시간8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 16명

 

 

  한반도 산줄기의 족보라 할 수 있는 산경표에 따르면 백두산과 지리산을 잇는 거대한 산줄기가 백두대간이고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가 파주의 장명산에서 끝나는 긴 산줄기가 한북정맥입니다. 한북정맥이 시작되는 분수령이 북한에 있고 휴전선 남쪽의 적근산과 대성산은 출입금지지역이어서 한북정맥 종주는 대성산과 복계산의 안부인 수피령에서 시작됩니다. 몇 년 전 제가 몸담고 있는 경동동문산악회에서도 수피령에서 한북정맥 종주를 시작해 장명산에서 마무리 진 바 있습니다.

 

 

 

  산줄기 족보인 산경표는 여암 신경준선생의 동국문헌비고에서 따왔다는 것이 정설인 듯합니다. 여암 신경준 선생은 조선조 영조 때의 문신으로 병조참지역을 지냈으며 훈민정음정해를 지은 국어학자이면서 지리서인 동국문헌비고를 펴낼 정도로 지리학에 정통한 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날 한반도 남단의 산줄기를 이어 밟는 종주꾼들은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과 이 대간에서 분기된 장백정간 및 13정맥을 산경표에 담을 수 있도록 동국문헌비고를 펴낸 여암 신경준선생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여암선생의 숭고한 뜻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애쓰시는 두 분이 있습니다. 산경표가 담지 못하는 이 나라의 수많은 산줄기들을 하나하나 직접 밟고 산행기를 올리는 신경수님과 산경표를 확대해 신산경표를 펴낸 박성태님이 그들입니다. 이 두 분들이 지맥이라 부르는 산줄기는 대체로 정맥에서 갈라져나간 산줄기를 이름 하는데 한북정맥에서 갈라져나가 강이나 하천에서 끝나는 지맥이 여덟 산줄기가 있어 통상 한북정맥의 8지맥이라 부릅니다.

 

 

 

  2008년 11월 한북정맥 종주를 성공리에 마친 경동동문산악회는 그 다음 달 한북정맥에서 분기된 오두지맥종주에 들어갔습니다. 연이어 한북정맥의 8지맥인 왕방지맥, 감악지맥, 화악지맥, 연인지맥종주를 마치고 남은 세 지맥 중 명성지맥 종주산행을 어제 시작했습니다. 한북명성지맥은 한북정맥의 광덕산에서 분기하여 서쪽으로 뻗어나가면서 각흘산, 명성산, 사향산과 보장산을 일군 후 한탄강의 제1지류인 영평천으로 침잠하는 산줄기로 그 길이가 52km나 됩니다.

 

 

 

  오전9시15분 광덕고개 아랫마을을 출발했습니다. 지난 9월 한북연인지맥의 불기산구간을 다녀온 후 종주산행에 나서지 못한 것은 그간 막내아들을 출가시키고 방송대의 출석수업과 중간시험이 잇달아 짬을 내지 못해서였습니다. 광덕고개 너머 마을 중간 왼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가파른 길을 오르며 초반 십 수분 간은 숨이 가빴습니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자 오른 쪽 광덕산 쪽으로 뻗어나가는 산줄기가 3년 전 종주 차 지났던 한북정맥 산줄기인데다 짙게 낀 안개를 몰아내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어 힘든 줄 모르고 걸었습니다. 한 낮의 서울 기온이 섭씨16도까지 올라간다고 해 방한복을 벗고 남방만 입었는데 산행 중에는 한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10시15분 한북명성지맥이 갈리는 헬기장에 올라섰습니다. 광덕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40-50m가량 떨어진 1043m봉의 헬기장에 정상석을 세운 것은 한북정맥을 종주할 때는 어떤 표지물도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6명의 전 대원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고 나서 남서쪽으로 뻗어나가는 한북명성지맥에 첫발을 들였습니다. 38선이 멀지않은 고위도지방의 산답게 단풍잎이 거의 다 떨어져 벌거벗은 나무들을 보자 이제 가을도 끝나간다 싶어 아쉽기도 했습니다. 912m봉과 930m봉을 차례로 넘어 830m봉에 올라서자 삼각점이 보였습니다. 박달봉을 지척에 둔 이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확 꺾어 자등현으로 내려가는 중 전사자유해발굴현장을 지났습니다.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혼(魂)이란 실체가 없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허공에 떠돈다고 했으며 혼이 빠져나가고 남은 존재의 상태를 일컫는 (魄)은 넋이라고도 불리는데 묘에 붙어있다고 믿어왔기에, 향을 피워 혼을 부르고 술을 뿌려서 백을 부르는 등으로 조상의 혼백을 모셔왔다 합니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장병들의 시신을 이제 와서 뒤늦게 야단법석이냐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이 어떻게든 유해를 찾아 안장해야 그들의 혼(魂)이 구천에서 떠돌지 않고 백(魄)이 한 곳에 자리하고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12시11분 광덕산과 각흘산 한 가운데 안부인 자등현을 지났습니다. 830봉에서 자등현으로 내려가는 중 계곡 건너 동쪽으로 상해봉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서그 늠름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상해봉은 광덕산에서 지근거리에 자리해 한북정맥 종주 길에 두 번이나 다녀온 암봉입니다. 후미로 뒤쳐져 산행하는 바람에 경기도의 포천과 강원도의 철원을 가르는 고개마루 자등현에서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곧바로 각흘산으로 붙었습니다. 자등현에서 약사령까지는 3년 전 명성산 산행 길에 한 번 밟은 길이어서 눈에 익었습니다. 10분 남짓 걸어 올라선 능선 길에서 한 자리에 모여 1시간 가깝게 점심을 든 후 다시 종주산행을 이어갔습니다. 한숨에 올라선 헬기장에서 한 후배가 어딘가에 지갑을 빼놓았다며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공자께서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구라도 일단 산에 오르면 어질어지는 것은 틀림없기에 산에서 지갑을 보았다면 주인에 전해주려 애쓸 것입니다.

 

 

 

  14시48분 해발838m의 각흘산을 올랐습니다. 헬기장에서 십 수분을 걸어 다다른 능선에서 왼쪽으로 조금 더 가 삼각점이 박혀있는 각흘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이 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뻗어나간 능선길이 황량해 보이는 것은 포사격을 위해 초목을 모두 제거해서였습니다. 날씨만 좋았다면 한북정맥의 웅장한 산줄기가 한 눈에 잡히는데 안개가 뿌옇게 끼어 전망이 좋지 않은 이 산에서 흑염소를 만나 반가워하다가 눈이 내려쌓이면 어찌 살아가나 싶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간  정맥을 종주하다가 몇 번 흑염소를 만났지만 대개가 낮은 산이고 풀들이 있는 곳인데 정상 바위들에 흑염소가 싸놓은 똥들이 적지 않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냥 한 번 이 산에 놀러 올라온 것은 아닌 것 같아 더 그러했습니다. 정상에서 남서쪽의 “나홀로 소나무”에 이르는 능선 길도 그 반대방향으로 뻗어나간 능선 길과 마찬가지로 황량했습니다. 말 타고 이 길을 지났다면 영락없이 황야의 무법자로 보일 만큼 서부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산길을 걸어 올라선 “나홀로소나무” 앞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15시50분 헬기장이 들어선 765m봉에 도착했습니다. “나홀로 소나무”에서 헬기장에 이르는 길은 여느 산들과 마찬가지로 나무들이 들어선 길이어서 앞서 걸은 길과는 달랐습니다. 좌측 사면이 낭떠러지여서 고 장준하선생이 이 길을 지나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닌 가 했는데 선생께서 사고를 당한 길은 이 길이 아니고 헬기장에서 남동쪽으로 얼마간 떨어진 약사봉으로 가는 길 어디쯤인 것 같습니다. 헬기장에 올라서서 잠시 숨을 고르며 생전의 선생을 떠올렸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근대화 업적으로 생전의 노력을 제대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 반대쪽에 서서 민주주의 사수를 위해 투쟁하셨던 선생의 노고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선생은 불의에 대한 투쟁에 단호함을 보이셨지만 요즈음의 시민단체들처럼 사사건건 반대하거나 억지를 부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선생께서 살아계셨다면 몇 년 전의 쇠고기파동을 보고 정부의 용의주도하지 못함을 매섭게 힐책하셨겠지만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고 선동을 하며 어린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데모행렬에 동원하는 시민단체들에도 잘못하는 일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1969년인가 효창운동장에서 삼선개헌을 반대하며 포효하시는 선생님을 뵈었는데 아직도 선생의 의 열정적이고도 단아한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16시27분 이번 종주산행의 끝점인 약사령에 내려섰습니다. 765m봉에서 오른 쪽으로 갈리는 길이 약사령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내림 길이어서 속도가 붙었습니다. 약사령에 내려서서 용화저수지로 넘어가는 약사령 고개마루를 사진 찍은 후 반대방향인 내약사동까지 걸어갔습니다. 군사도로인지 포장이 안 되어 택시가 다닐 수 없는 길이어서 별 수 없이 포장도로를 만나는 내약사동까지 걸어내려갔습니다.  내약사동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으로 향한 시각이 17시20분경으로 걸은 시간이 총 8시간 남짓해 이번 산행에서 모처럼 다리품 한 번 제대로 팔았습니다.

 

 

 

  약사령에서 내약사동으로 내려가는 중 종주산행에 처음 나선 여성분들에 저희들이 이번에 종주하고 있는 한북명성지맥에 대해 몇 말씀 드렸습니다. 백두대간에서 시작해 한북정맥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큰 산줄기 족보를 개략한 후 한북정맥에서 분기해 서쪽으로 뻗어나가다 영평천에 이르러 끝을 맺는 산줄기가 이번에 첫발을 들인 한북명성지맥임을 설명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웠을 산맥(山脈)의 개념과 같지 않아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산줄기를 종주하는 산객들만이라도 우리 선조들이 나름대로 정립한 산경(山經)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설명을 했는데 열심히 경청해주어 고마웠습니다. 어떤 이론이고 완벽한 것이 아니라면 지질개념의 산맥(山脈)과 인문지리개념의 산경(山經)개념은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상보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