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시인마뇽의 문학산책/시인마뇽의 산행에세이

16.술타령

시인마뇽 2012. 11. 1. 22:30

                                                            술타령

 

 

 

        

 

 

  제인생도 사주지 않는 술을 제게 사준 산악회의 여성 회원 한 분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다른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는 저를 위해 맥주를 무려 여섯 캔이나 사갖고 와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대관령-선자령-진고개 구간의 산행을 마치고 하산해서 같이 마시자며 맥주를 몽땅 제 배낭에 옮겨 넣고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전철이 끊기기 전에 서울에 닿고자 앞의 차를 타느라 늦게 내려온 그 분을 만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와 다 마셔버렸습니다.

 

 

 

  지난 번 캄캄한 밤에 함께 산행을 해주어 고맙다며 맥주를 사다준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2005년10월16일 마등령-황철봉-미시령 구간에서입니다. 입산금지구역이어서 대낮에 오르지를 못하고 산악회원들과 함께 밤을 도와 황철봉을 통과하는 중 너덜지대로 내려가는 길에서 길을 잘 못 들어 20여분 헤맸습니다. 뒤로 혼자 쳐진 여성회원 한 분이 같이 가자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서있으라고 큰 소리로 답한 후 그분이 비치는 헤드랜턴 빛을 따라 다가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분을 모시고 천천히 길을 찾아 대간 길로 복귀했습니다.

 

 

 

  술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고백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저는 제 인생에 술을 정말 많이 사주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시골에서 술심부름을 하느라 홀짝대며 배웠던 막걸리를 시작으로 우리의 위스키 소주는 물론하고 양주와 맥주 등 종류를 불문하고 계속 사댔습니다. 그 결과 30-40대에 제가 가장 많이 지출한 문화비는 단연 술값이었습니다. 한창 젊어 집사람이 며칠간 친정으로 몸을 옮긴 것도 그놈의 술 때문이었습니다. 20년 넘게 그 많은 술을 혼자 마시지 않고 제 인생과 함께 마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 인생은 야속하리만치 이제껏 저를 위해 단 한 번도 사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횟수와 양의 다과를 묻지 않고 주는 대로 제 술을 받아 마시는 제 인생이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사람을 멀리 보내고 나서 이래서는 제 몸이 견뎌낼 것 같지 못해, 앞으로는 더 이상 무턱대고 술을 사주지 않겠다고 반란을 획책했습니다. 그리고 과감히 2001년 3월부터 제 인생에 모든 술의 공급을 끊었습니다. 그랬더니 유예기간도 주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일시에 끊는 법이 어디 있냐며 제 인생이 협상을 요청해왔습니다. 그래서 아주 가끔 맥주만 사주기로 합의했습니다. 맥주는 술이 아니고 음료수라고 강변하는 제 인생에 그 정도는 들어주어야 평화가 깨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죽어라고 술을 사주고도 인생으로부터 한잔도 얻어먹지 못한 못난이는 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시인 정 호승님이 그랬습니다. 그는 인생에 줄곧 술을 사주고 한 잔도 얻어먹지 못한 울분을 술 한 잔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으로부터 간신히 얻은 것이 그의 시 “술 한 잔”입니다.

 

 

                                          술 한 잔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 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아! 저도 인생에 술을 사주고 얻은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얻었습니다. 세상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알았습니다. 술을 통해 현명하게 사는 법은 배우지는 못했어도,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그저 그런 선남선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법을 익혔습니다. 또 그렇게 살다보면 사는 것이 즐거울 수 있음도 배웠습니다.

 

 

 

  제게 술을 받아먹기만 했던 인생이 제게 돌려준 것은 술이 아니고 이 세상 살아가는 인생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생은 제게 과다하게 술을 얻어먹고 인생전부를 넘겨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인생에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아무리 고마워도 저는 앞으로 맥주만 사줄 뜻입니다. 저로부터 술을 받아먹는 제 인생이 저보다 먼저 쓰러질까 두려워서입니다.

 

 

 

  긴 글 끝에 또 맥주에 손이 갑니다. 이 맥주는 제 인생이 아닌 제가 마실 것입니다.

 

 

 

                                            2012. 11. 1일 산본에서

 

 

 

 

 

*위 글은 2006. 1. 15일 대관령-선자령-진고개 구간의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쓴 산행기에서 발췌해 가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