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명소 탐방기
*탐방일자:2012. 9. 16일(일)
*탐방지 :경북예천군소재 회룡포, 용문사, 초간정
금당실 전통마을, 예천곤충생태체험관
*동행 :방송대남부학습관 동문회원
오다가다 한두 번 지나친 예천(醴泉)을 여행의 목적지로 삼아 작정하고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TV에 자주 나오는 물도리 마을 회룡포에서 시작해 예천곤충생태시험관을 마지막으로 들른 예천명소탐방프로그램은 방송대의 서울남부학습관 동문들과 함께 했습니다. 종일토록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무려 다섯 곳이나 찾아다니느라 꽤나 바빴지만, 덕분에 좀처럼 찾아가기 힘든 예천의 명소들을 여기저기 둘러보아 이번 탐방이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경상북도 북쪽에 위치해 영주시 및 문경시와 더불어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군 단위 행정구역이 이번에 찾아간 예천군입니다. 군에서 발간한 안내팜플렛에 ‘소백준령의 높은 산줄기가 감싸고 낙동강 내성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인심이 순박하고 살기 좋은 고장’으로 소개된 예천이 답사기의 전범이랄 수 있는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어느 한 곳도 올리지 못한 것은 아직은 예천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참고가 될 만하다 싶은 다른 분들의 책을 꽤 여러 권 뒤지면서도 답사의 선구자이신 유홍준님이 들르지 않은 곳을 누가 먼저 다녀갔겠나 했는데 제 생각이 별반 틀리지 않아, 총 14권에서 겨우 찾은 것이 박종관교수의 “Let's go! 지리여행”에 실린 회룡포 한 곳의 사진과 글 등 딱 두 쪽이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조선조 최고의 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인근의 안동, 영주, 문경 및 상주가 자세히 나와 있는 것과는 달리 이렇다 할 설명 없이 달랑 ‘예천’이라는 지명만 나와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침 9시가 조금 못되어 신도림 역앞에서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가 꽉 차 비가 내리는 데도 탐방 길에 오른 방송대생들의 열기가 온 몸에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1)회룡포(回龍浦)
첫 번째 찾아간 곳은 KBS의 ‘1박2일’프로그램에 소개되어 더욱 유명해진 회룡포입니다. 주차장에서 하차해 우산을 받쳐 쓰고 전망대인 ‘회룡대’로 올라갔습니다. 회룡대에 오르자 아랫마을 회룡포가 한 눈에 잡혔습니다. 낙동강의 제1지류인 내성천이 용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 하여 이름을 얻은 회룡포(回龍浦)는 내성천 냇물이 350도 되돌아서 흘러나가 안내판의 문구처럼 ‘한 삽만 뜨면 섬’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천이 얼마나 굽어졌나를 알려주는 지표로 곡률도(曲率度)가 있습니다. 강이 곡류하면 뱀이 구불거리는 모양을 하게 되는데 구불거리는 물줄기가 좁혀진 부분을 미앤더 네크(meander neck)로 불린다고 “Let's go! 지리여행”에 나와 있습니다. 이번에 처음 본 회룡포는 이미 공격사면의 측방침식이 심하게 일어나 조금 더 진행되면 미앤더 네크(meander neck)의 목이 완전히 잘려나갈 것이 분명해 아슬아슬해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곡률도가 가장 큰 하천구간은 단연 여기 내성천의 회룡포입니다. 그러니 회룡포가 우리나라 최고의 물도리마을이 되는 것입니다. 물도리 마을로 널리 알려진 또 한 곳은 안동의 하회마을로 같은 낙동강이 굽이져 흐르지만 곡률도는 회룡포가 단연 큽니다. 회룡포의 물 돌이가 하회마을보다 훨씬 완벽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 회룡포는 ‘한 삽만 뜨면 섬’이 될 수 있어 보이지만, 하회마을은 만 삽을 떠내도 결코 섬이 될 수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햇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이 날 내성천 냇가의 모래사장이 둘러싸고 있는 회룡포 마을의 2/3는 잔디밭으로, 그 위의 ‘곤충나라 예천’의 여섯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육지의 섬 ‘회룡포’를 물길 따라 한 바퀴 휘돌면 ‘곤충나라 예천’의 나비라 해도 어질어질할 것입니다. 구름이 끼어 낙동강, 내성천과 금천이 합류하는 삼강(三江)이 어느 곳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 하산하면서 비룡산 중턱에 자리한 장안사를 둘러보았습니다. 용궁의 한 음식점에서 동년배 한 분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심식사를 함께 한 후 용문사로 향했습니다.
2)용문사
용문사는 신라의 경문왕10년인 서력870년에 두운(杜雲)선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입니다. 청룡 두 마리가 운무 속에 나타나 왕건을 이 절로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라 불린 이절은 앞서 들른 장안사보다 그 규모가 훨씬 크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 절만이 가지고 있는 보물도 몇 점 가지고 있는 명찰로, 조선조 세조임금께서 이 절에 면역(免役)을 인정하는 사패교지(賜牌敎旨)를 내릴 정도로 귀하게 여기신 절이기도 합니다.
예천군에서 해설사를 파견한 것이 세조 임금께서 사패교지를 내리는 것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탐방 차 이절을 찾아온 제게는 그만큼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방의 경찰관으로 재직 시 말을 타고 순찰을 해 화제를 모았던 해설사의 구수하고도 속이 찬 해설은 이층 누각의 해운루에서 행해졌습니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빗소리를 배경음악으로 해 진행된 해설은 20분 넘게 계속됐는데도 누구하나 지루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설을 다 듣고나서 해설사를 따라 먼저 대장전(大藏殿)을 찾아갔습니다. 이름이 말해주듯이 이 건물이 고려 명종3년인 1173년에 지어진 것은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간직하기 위해서였다합니다. 지금 보는 이 건물은 조선 현종 6년인 1665년에 중건한 것이라 하니 줄잡아 350년은 된 셈입니다. 대장전 안으로 들어가자 제 눈을 끈 것은 ‘목불좌상’과 ‘목불탱’이었습니다. 중앙 뒷면에 마련된 불단에 좌우 협시를 거느린 작은 여래를 안치하였고 그 뒤 후불벽에 목각탱을 달았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탱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표면에 금분을 칠했는지 대단히 화려해 보이는 그 크기가 가로가 215cm이고 세로가 261cm로 결코 작지 않은 목각후불탱에는 여러 불상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목각표면에 금분을 칠했는지 색상도 엄청 화려해 17세기 불교미술, 특히 조각기술이 상당 수준에 다다랐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보물은 목각후불탱 양옆의 윤장대(輪藏臺)였습니다. 이 윤장대는 국내 사찰가운데 유일한 회전식 장경각입니다.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한 윤장대를 돌리면 번뇌가 소멸되고 공덕이 쌓여 소원이 성취된다고 알려져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합니다. 그 많은 참배객이 시도 때도 없이 돌리다가는 윤장대가 견뎌내지 못할 것이기에 일 년에 음력3월3일과 9월9일 딱 이틀만 돌리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싶습니다.
청동범종 안내문에 소백산 용문사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절에 터를 내준 산은 소백산의 한 줄기인 것 같습니다. 소백산이 거산이듯이 용문사도 대찰이어서 대장전 외에도 보광명전, 명부전등 둘러볼 곳도 많았습니다.
3)초간정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勝覽)에 나와 있는 인물 중 제가 들어 아는 분은 국순전이라는 가전을 쓴 임춘(林椿) 뿐입니다. 이조의 권맹손(權盟孫)도 보이는데 초간정에서 머문 권문해(權文海)가 그의 후손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발간된 것이 성종 때의 일이고보면 1534년에 태어나 1591년에 세상을 떠난 권문해가 실리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과문한 탓으로 권문해만큼 이름 난 예천의 역사적 인물로 알지 못해 혹시나 하고 신증 동국여지승람을 찾아보았는데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낸 권맹손(權盟孫)과 제학을 역임한 윤 상(尹 祥)을 제외하고는 다른 인물을 만나볼 수 없었습니다.
초간정은 조선 선조 때 대학자인 초간 권문해가 관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입니다. 초간정의 건물은 선조 때인 1582년에 창건했다 두 차례 불타 없어져 그의 현손이 1870년에 중창한 것이지만, 집터만은 4백년을 훨씬 넘게 그 자리를 유지했으니, 그것은 아마도 맑은 계곡과 푸른 송림사이의 큰 바위 위에 자리했고 바위를 휘돌아가는 계곡물이 주변 경관과 어울려 자아내는 경관이 빼어난 경승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빗소리와 계곡 물소리가 여성해설사의 목소리를 먹어 삼켜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아들 수 없었습니다. 구름다리로 깊은 계곡을 건너 초간정에 다가가 안내문을 자세히 읽는 것으로 미처 듣지 못하고 놓친 해설사의 설명을 가름했습니다.
“정자채는 사주문을 통하여 들어가며 뒤쪽과 오른 쪽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자연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팔작집이다. 정면 3칸 중 앞면의 좌측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 4칸은 통간의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측면은 사간으로 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초간정사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면서 생각한 것은 권문해가 1589년에 저술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입니다. 일종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권옥이 국문학도인 제게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이 책에 고소설 ‘최치원전’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최치원전은 고려의 박인량이 지었다는 수이전에 실렸다는데 그 수이전은 전하지 않고 대동운부권옥에 전재된 덕분에 오늘날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치원전이 소설로 평가받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였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대동운부권옥에 최치원전을 실은 것만으로도 권문해는 이 좋은 곳에 이 같은 정자를 지어 만년을 여유롭게 보낼 만했다는 생각입니다. 초간정은 1582년에 창건하였고 대동운부권옥은 1589년에 저술하였으니 이 정자에서 옥고를 다듬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4)금당실 전통마을
네 번째 방문지인 금당실 전통마을도 초간정이나 용문사와 같이 모두 용문면에 몰려 있어 이동시간이 적게 걸렸습니다. 용문면 신금곡리에 자리한 금당실전통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전적으로 정감록 덕분입니다. 정감록에 십승지의 한 곳으로 여기 금당실마을이 올려 있기 때문입니다.
동네 어귀 안내판에 이 마을은 병화가 들지 못하는 땅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을 승지(勝地)라 합니다. 정감록의 십승지가 오늘까지 전해지는 것은 이 땅에 지리적여건상 전쟁을 피해갈 수 있고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이 아주 적었음을 뜻한다 하겠습니다. 이런 곳은 대개가 하천의 상류 골짜기 마을로 요즘으로 말하면 오지 중의 오지입니다. 전국적으로 이런 오지는 많았겠지만, 천재지변을 피해가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곳은 매우 드물었을 것입니다. 전답을 붙여먹을 수 있는 일정 규모의 평야가 있어야 하고 수해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냇가에서 떨어진 조금 높은 곳에 마을이 들어설 수 있을 정도의 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장풍득수(藏風得水)라는 조건을 두루 갖춘 지형이라야 할 것이고 황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금계포란(金鷄抱卵) 지형을 갖춘 곳이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 때문에 먼발치서 제대로 관찰한 것이 아니어서 뭐라 말하기가 주저되지만 금당실전통마을은 얼핏 보아 십승지로 꼽힐 만큼 빼어난 승지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는 예천양수상부댐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천이 흐르고 뒤로 좀 떨어진 곳에 해발4백m대의 망월봉이 자리하고 있어 배산임수임에 틀림없지만, 이 마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산줄기가 가까이 보이지 않아 금계포란에는 못 미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의 무지가 가져온 단견이라 생각하는 것은 실제 이 마을이 임진왜란을 피해갔고 조선이 이곳을 도읍지로 삼을까도 했다는 글이 안내판에 적혀있어서입니다.
코스모스가 피었고 대추가 주렁주렁 열린 돌담길 안 고택 중에는 명가인 반송재 고택도 있었고 우천재고택도 눈에 띄었습니다. 우산을 쓰고 비에 젖은 돌담길과 토담길을 동행한 학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이 마을이 승지이다 했습니다.
5)예천곤충생태체험관
마지막 탐방코스인 예천곤충생태체험관에서 가장 가까운 백두대간의 봉우리는 체험관 동쪽의 옥녀봉에서 멀지 않은 해발1,020m의 묘적령입니다. 차도가 지나는 백두대간 길의 저수령에서 가장 가까운 예천의 명소는 예천양수하부댐인데, 여기 곤충생태체험관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제가 지형도를 보고 생태체험관과 백두대간과의 거리를 어림짐작해본 것은 생태체험관과 붙어 있는 곤충생태원에 살고 있는 여러 곤충들이 혹시라도 백두대간의 정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였습니다.
경북예천의 상리면에 자리한 예천곤충생태체험관은 지상3층의 현대식 건물로 그 외관이 나비처럼 날렵했습니다. 예천군곤충연구소는 곤충생태체험관 외에도 곤충생태원과 곤충정원을 같이 운영하고 있는데 비가 그치지 않아 이번에는 곤충생태체험관만 둘러보았습니다. 야외에 조성된 곤충생태원과 곤충정원을 사진만 찍고 그냥 돌아간 것은 날씨가 궂어서기보다는 이제 다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의 곤충에 대한 호기심이 거의 다 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입구에 비치해 놓은 ‘예천곤충생태체험학습지’를 펴보자 ‘몸이 마디로 구분된 동물’인 곤충의 몸은 ( ), ( ), ( )의 3부분으로 나눠지며, ( )쌍의 다리와 ( )쌍의 날개가 있다며 ( )안을 채우는 문제가 실려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 )를 채우기 위해 예천군곤충연구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답을 찾아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이제껏 저는 곤충이 무엇이고 그 특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질문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그동안 산을 오르면서 만난 수많은 곤충들에 “Who are you?"나 "What are you?"하고 물어본 적도 없었으니 아주 기본적인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내친 김에 홈페이지 내용을 기초로 곤충이 무엇이고 그 신체적 특징은 무엇인지 약술하고자 합니다. 곤충은 영어로 ‘insect’인데 여기사 ‘in’은 ‘안쪽’을, ‘sect'는 ‘마디’를 뜻합니다. ‘insect’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곤충이란 몸이 마디로 구분되어 있는 동물을 뜻합니다. 곤충은 머리, 가슴과 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머리는 1쌍의 더듬이와 1쌍의 겹눈, 그리고 3개의 홑눈으로 되어 있고, 가슴에는 2쌍의 날개와 3쌍의 다리가 있으며, 배는 여러 쌍의 체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위 ( )에 들어갈 답은 순서대로 (머리), (가슴), (배), (3), (2)가 됩니다.
체험관 안으로 들어가 첫 번째로 배운 것은 곤충이 지구상 동물의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번성한 주된 이유가 튼튼한 외골격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인 학습에 이어진 곤충과의 만남은 경이와 감탄, 그리고 환희와 황홀이었습니다. 수백 마리를 가지고 동심원을 만들어 진열한 하늘소를 보고 느낀 잘 짜인 질서감은 색채의 다양함이 더해진 세계의 나비들을 보자 사방으로 날아갈 듯한 해방감으로 바뀌었다 했는데 10만 마리(?)의 비단벌레를 등장시킨 황홀한 디스플레이 쇼(display show)를 보고 느낀 환희는 경이와 감탄 이상이었습니다.
이 전시물을 준비한 분들의 정성어린 수고가 이런 걸작을 만들었다 싶어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진열된 비단벌레들이 아무리 표본이라 해도 생체가 아닌 시체일진데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가 사람들의 시체들을 모아 기하학적으로 배치한다 해도 저처럼 미적 효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고 보면 우리는 죽어서도 다른 종에 기쁨을 주는 비단벌레에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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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일정을 모두 마치고 풍기를 거쳐 밤 11시가 다 되어 신도림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침부터 줄기차게 비가 내렸는데도 나들이 나온 차량이 많아 귀경길이 많이 지연되었습니다. 자연과 역사를 두루 돌아본 이번 탐방으로 그동안 잘 몰랐던 예천과는 많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입니다. 나중에 느긋하게 찾아가볼 명소를 또 몇 곳 늘린 것만으로도 예천명소탐방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탐방사진>
1)회룡포
2)용문사
3)초간정
4)반서울금당실마을
5)예천곤충생태체험관
'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 > 국내명소 탐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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