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기맥 종주기10
*기맥구간:대학산 안부-수리봉-먼드래재
*산행일자:2015. 7. 4일(토)
*소재지 :강원 홍천/횡성
*산높이 :수리봉960m
*산행코스:부목재-대학산안부-935m봉-수리봉-여무재
-714m봉-먼드래재
*산행시간:8시41분-18시27분(9시간46분)
*동행 :나홀로
길이란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을 이릅니다. ‘길로 가라니까 메로 간다’거나 ‘길을 두고 메로 갈까’라는 말을 새겨보면 길의 뜻이 더욱 극명해집니다. ‘길로 가라니까 메로 간다’는 말은 있어도 ‘길로 가라니까 강으로 간다’는 말이 없는 것은 산과 달리 강에는 강변을 따라 큰 길이 나있어 사람들이 늘 다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길이란 역시 사람들이 다녀야 그 수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큰 길이 강변 따라 나 있는 것은 인류의 문명이 큰 강에서 발생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가 강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강 가까이로 사람들이 모여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서로 이어주는 것이 바로 길입니다. 지금은 서로 왕래가 없어도 소통이 가능하지만, 전화가 발명되기 전에는 물리적 왕래만이 소통을 가능하게 해 사람들은 반드시 두 곳을 잇는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강가나 냇가는 모여 사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산속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은 주로 화전민이나 피난민들로 그 수가 적었던 것이 산 길이 많지 않은 이유입니다. 산 능선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능선 가까이에 드물게 묘지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집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산 능선에 낸 길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산줄기를 이어가며 종주산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지혜가 최고로 농축되어 모여진 곳이 바로 산 길이라는 것입니다. 산속으로 터널을 뚫고 강 위로 다리를 놓아 큰 길을 내는 데는 첨단 지식이 필요합니다만, 능선을 따라 종주 길을 내는 데는 경험이 축적해 놓은 지혜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요즘 지나고 있는 강원도의 한강기맥의 종주 길에는 그 흔한 철제 계단이나 데크 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러 보이는 것은 통나무 계단과 바위 길에 걸어놓은 밧줄이 전부였습니다. 제가 감탄하는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어디 다른데다 새 길을 낸다 해도 지금 걷는 이 길만한 데가 없겠다 싶어서입니다. 산 길은 도로공사처럼 처음부터 완벽한 길을 낸 것이 아니어서 뒤따르는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길을 다듬어 왔습니다. 위험하다 싶은 바위 길에 빠짐없이 밧줄을 걸어놓고 필요할 때는 고봉 아래로 에돌아 길을 다시 내어 저 같은 종주꾼들도 안전하고 빠르게 산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온 것입니다. 이러니 산 길은 한 두 사람이 낸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거목이 쓰러져 길을 막으면 누군가가 비껴서 새 길을 내어 최적화에 이르도록 합니다.
누군가가 제게 길은 '낸 것'이냐 '난 것'이냐를 물어온다면 둘 다라고 대답할 뜻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부분의 도로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낸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산길도 처음에는 누군가가 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산에다 길을 냈다는 것은 도로공사를 했다는 것이 아니고 처음으로 걸었음을 뜻하는 것이어서, 그 다음 다른 사람들이 걷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길이 나 있을 리 없습니다. 한 겨울에 흰 눈이 소북이 쌓인 산 길을 걷노라면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짐승들이 먼저 지난 것을 자주 봅니다. 그 길이 최적의 길이어서 그리 했을 것입니다. 그 길을 걸은 모든 사람의 지혜가 그 길에 녹아있을 것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과연 산길은 우리 지혜의 소산이라 할 만합니다. 이런 산 길은 길을 낸 주체가 분명한 일반도로와 달리 길을 낸 사람을 특정할 수 없어 '낸 것'이라고 단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산 길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 반응하며 필요시 바뀌기도 해 '난 것'으로 이해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제가 산 길을 '낸 것'이자 '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8 시41분 부목재를 출발했습니다. 주말이라 서울을 빠져나가는 차들이 많아 아침7시에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한 양구 행 직행버스가 홍천에 평일보다 15분가량 늦은 8시15분 경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부목재로 이동했습니다. 444번 도로가 지나는 부목재에서 왼쪽 임도를 따라 40분여 부지런히 걸어 임도 한 모퉁이에 이르자 대학산안부로 이어지는 길이 왼쪽 위로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이 길로 20분 가까이 풀숲을 헤치며 올라가 부목재 출발 1시간 만에 대학산 안부에 이르렀는데 그새 등산화 속으로 스며든 이슬이 양말을 적셔 구두 속이 축축했습니다.
9시52분 대학산 안부에서 10구간 종주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먼드래재까지는 길이 잘 나있어 알바는 걱정 안 해도 되지만 오르내림이 매우 심한 것으로 알려진 쉽지 않은 구간입니다. 안부를 출발해 표고차가 100m 정도 나는 동쪽 바로 앞의 무명봉을 천천히 걸어 오른 것은 탈진에 대비해 체력을 안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명봉에서 조금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는 중 제게 아침 인사를 해오는 수더분한 싸리 꽃을 만나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안부 출발 50분이 지나 올라선 그리 넓지 않은 공터에 다른 분들 산행기에서 본 사기단자(?)가 땅 바닥에 있는 것으로 보아 폐쇄된 헬기장 같았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확 꺾어 조금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는 길이 비교적 편안해지자 비로소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음악으로 들려왔습니다. 완만한 길을 따라 올라 왼쪽 아래로 부목재 길이 나있는 능선 삼거리를 지나며 여기가 바로 지난 번 고교후배들이 길을 잘 못 들어 잠시 알바를 한 곳이구나 했습니다.
11시35분 935m봉에 올랐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올라가 다다른 봉우리에서 급경사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기 시작해 만난 무명봉을 왼쪽으로 에돌아가는 중 저처럼 한강기맥을 혼자서 종주하는 한 분을 만났습니다. 아침 일찍 먼드래재를 출발해 갯고개까지 진출한다는 이 분의 체력이 한 없이 부러운 것은 저는 그 길을 두 구간으로 나누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졸고 낙남정맥 종주기를 읽었다는 이 분에 감사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잠깐 동안의 해후를 끝내고 다시 기맥종주를 이어갔습니다. 완만한 길을 따라 올라선 봉우리에서 왼쪽 능선을 따라 진행해 얼마 후 올라선 ‘삼계봉’이라는 비닐 표지판이 걸려 있는 봉우리가 935m봉임을 안 것은 삼각점 덕분이었습니다. 잠시 쉬면서 시계의 고도를 보정한 후 조금 내려갔다가 수피가 희멀건 철쭉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능선 길을 걸었습니다. 935m봉에서 북동쪽으로 진행해 조금 가파른 길을 걸어 어론산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909m봉에 올라선 시각이 12시14분으로, 이 봉우리에서 친구 분들끼리 이 산을 오른 젊은 네 분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13시19분 750m대의 안부사거리에 내려섰습니다. 909m봉에서 표고차가 90m가량 나는 안부로 내려가는 길이 경사가 급해 조심해서 내려갔는데 이런 길은 서곡에 불과하고 진짜 내리막길이 저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 것은 수리봉을 지나고 나서입니다. 비알 내려가 길을 12시31분 해발 820m대의 안부에 도착해 점심을 들으면서 15분여 푹 쉬었습니다. 안부에서 표고를 80m가량 높여 올라선 봉우리에서 다시 내려가 얼마만큼 걷다가 오른 쪽으로 내려가 해발755m의 안부사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왼쪽 아래로 홍천의 어론리 가는 길과 오른 쪽 아래로 횡성의 봉명리로 가는 길이 희미하게 나 있는 안부사거리에서 수리봉으로 이러지는 길은 방금 넘어온 봉우리보다 경사가 덜 해보여 저 정도면 오를 만 하다 싶었습니다.
14시10분 해발960m의 수리봉에 올라섰습니다. 안부사거리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오르내리며 크고 작은 바위들 옆을 지나는 동안 오른 쪽 아래 봉명리 쪽에서 정감 있는 색스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완만한 길이 끝나고 조금 지쳐서인지 꽤 가파르게 느껴지는 비알 길을 오르며 고도를 점검한 것은 수리봉에 점점 다가섬을 숫자로 확인하고 싶어서였습니다. 힘들게 오른 940m 봉에서 혹시 이 봉우리가 아닌가 하다가 오른 쪽으로 조금 높은 봉우리가 보여 쉬지 않고 진행했습니다. 이 봉우리를 넘어 올라선 두 번째 봉우리에 수리봉을 알리는 비닐표지판을 걸어놓은 분이 고마웠습니다. 이 높은 곳에 삼각점을 세운 분들에도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수리봉에 오르자 정상이 비좁은데다 바람이 통하지 않고 나무들로 시야가 가려 답답했습니다.
16시21분 여무재를 지났습니다. 수리봉 정상을 출발해 커다란 바위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는 암릉 길을 지나느라 너무 긴장해 힘이 더 드는 것 같았습니다. 암릉 길을 지나 이어지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 걷다가 내려선 이름 없는 안부에서 남은 떡을 마저 꺼내 들면서 시계에 나오는 고도를 사진 찍은 것은 볼펜에 잉크가 떨어져 더 이상 기록이 불가능해서였습니다. 수리봉부터 먼드래재까지는 카메라와 시계로 사진과 시간, 그리고 고도를 남기고 부족한 것은 기억을 되살려 산행기를 쓸 수밖에 없어 혹시 잘 못 기록할까봐 적지 아니 신경이 쓰였습니다. 표지물이 따로 없는 여무재가 어디인지를 확정하기 위해 봉우리를 넘을 때마다 고도를 체크했습니다. 가장 고도가 낮게 나오는 해발570m대의 안부에 이르러 주위를 살펴보자 오른 쪽 아래로 나 있는 길이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 이 안부를 여무재로 기록했습니다.
17시16분 714m봉에서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여무재에서 714m 봉에 오르는 길이 이번 산행에서 가장 힘들었습니다. 고도는 150m정도 차이가 나 별 것 아니지만 중간에 날 등의 암릉 길이 있어 긴장되었습니다. 여무재에서 얼마간 오르자 중간 쯤에 트래버스 길이 나있는 날등의 커다란 바위가 보였습니다. 이 정도 길이라면 별 문제없이 지나겠다 싶으면서도 안전을 위해 바위 아래로 표지기가 걸려 있어 왼쪽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길로는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서인지 중간에 길이 사라져 오른 쪽 위 능선으로 치고 오른 길이 경사가 매우 급해 많이 힘들었습니다. 팔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고 간신히 올라간 이 길을 비가 오는 날 지나갔다면 경사가 심해 아래로 미끄러지는 것을 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위를 에돌아 올라선 능선에 오르자 이 높은 산 위에 길을 낸 여러 분들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또 한 번 오름 길이 힘들었던 곳은 714m봉 바로 아래에서 올라가는 바위 길로 가느다란 밧줄이 느려져 있어 큰 바위를 에돈 길보다 한결 수월하게 올라갔습니다. 714m봉에 올라서자 표지기가 왼쪽으로 걸려 있어 이상하다 싶어 지도를 꺼내 확인했습니다. 지도에서 기맥길이 이봉우리에서 V자로 확 꺾여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맞게 걸린 것이다 싶어 안도했습니다.
18시27분 해발464m의 먼드래재에서 10구간 종주를 마쳤습니다. 714m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는 급경사 길이 이번산행에서 마지막으로 힘든 길이었습니다. 기울기가 60-70도는 족히 될 내려가는 길에 암릉 길이 아니어서인지 로프가 걸려있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걸음걸음마다 손바닥 크기의 발 딛을 곳이 있어 스틱을 내딛으며 조심해서 내려갔습니다. 급경사 길을 내려선 후 북동쪽으로 진행하면서 넘은 몇개의 봉우리가 모두가 나지막해 그다지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긴장을 풀지 못한 것은 다른 분들의 사진에서 본 암릉을 트래버스하는 큰 바위가 언제 나타날 까 거정되어서였는데 오른 쪽 아래로 먼드래재를 바로 위 무명봉에 올라서고 나서야 나뭇가지를 붙잡고 밑으로 에돈 바위가 그 바위라는 생각이들었습니다. 무명봉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바로 아래 절개면 길을 조심해 내려가 해발 464m의 먼드래재에 내려서자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에 혼자서 험한 길을 오르내려 또 한 구간을 마친 제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드래재 한 편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19시 조금 넘어 길 건너편에서 원주를 출발해 홍천군의 서석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탔습니다. 서석에서 하차해 홍천시내로 들어가는 농촌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버스가 출발했습니다. 19시50분 경 홍천터미널에 도착해 20분을 기다렸다가 동서울행 버스에 올라 홍천에서의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무명봉에서 절개면 끝에 낸 길을 따라 먼드래재로 내려가는 길에 엉덩이로 충분히 가릴만한 좁은 흙 터에다 지어 놓은 깔때기 모양의 앙증맞은 모래집을 여러 채 보았습니다. 어렸을 때 시골의 개천가 모래 밭에서 이런 집들을 보고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께 새 집 다오’ 하고 놀던 생각이 나서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개천가 모래밭보다 집터가 좁아서인지 미물들이 지은 집들은 어렸을 때 본 것보다 훨씬 작았지만 산길에서 만나보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해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런 집을 본 것은 제 기억으로는 30-40년은 족히 된 것 같습니다. 한참동안 인터넷을 뒤적이고서야 간신히 두꺼비 집을 생각해낸 것이 이제 이런 집들은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다 사라졌고 그 이름도 함께 망각됐음을 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이번에 본 이런 자그마한 집들이 바로 정서적으로 저를 성숙하게 만든 자양분이었다 싶어 더욱 그러했습니다.
다 내려와 생각하니 모래집을 이어주는 길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래집을 진 미물들이 미쳐 길을 내지 못한 것이라면 다시 올라가 저라도 길을 내줄까하다가 제 큰 손으로 내는 길이 그들에는 아무 쓸데없는 수십 차선의 너무 넓은 도로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습니다. 제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산객들이 지혜를 모아 능선에 산길을 냈 듯이 그들도 머리를 짜내어 길을 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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