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기맥 종주기4
*기맥구간:승달산갈림길-태봉재-초당대
*산행일자:2016. 4. 10일(일)
*소재지 :전남 무안
*산높이:사자바위산317m, 구리봉309m
*산행코스:목포대-목포대갈림길-사자바위산-태봉재
-헬기장-삼거리-남산삼거리-초당대
*산행시간:6시46분-16시26분(9시간40분)
어느 한 강을 정해 둘레산줄기를 환주하는 중 그 강을 만나볼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환주 산행의 시작과 끝이 강 하구에서 이루어져 이 두 번은 바다로 흘러드는 도도한 강 흐름을 목도할 수 있지만 대개는 강과 멀리 떨어져 산행을 하기에 강을 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전장630Km의 섬진강둘레산줄기를 환주하면서 이 강을 본 것은 총50회의 산행 중 처음 한 번과 마지막 두 번, 중간에 오봉산에서 옥정호를 내려다보고 지리산 노고단에서 조망한 것 등 모두 다섯 번에 불과합니다. 어느 강이든 둘레산줄기를 환주하면서 때때로 정호승 님의 시 “길”이 생각나는 것은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라는 구절처럼 봄 꽃과 그 잎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자리한 강줄기와 산줄기를 너무나도 닮았다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이번 종주산행 중에 오른 한 봉우리에서 영산강 강줄기를 조망한 것은 흔치 않은 일로 참으로 소중한 기회이다 싶어 황사로 희뿌옇게 보였지만 개의치 않고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영산(榮山江)강은 그 이름이 흑산도의 한 현인 영산현(榮山縣)의 사람들이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을 피해 나주로 피난 와 살았다는데서 비롯되었다 합니다. 조선의 지리지인 <<신중동국여지승람>>의 나주 편에 "영산폐현은 주의 남쪽 10리에 있으며 본래 흑산도 사람들이 육지로 나와 남포에 우거하였으므로 영산현이라 칭했다(榮山廢縣 在州南十里本黑山島人出陸僑寓南浦稱榮山縣)."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남 담양의 용추봉에서 발원해 남해의 목포 하구로 흐르는 영산강은 그 길이가 136Km로 섬진강보다 89km나 짧습니다. 그럼에도 몇해 전에 끝난 ' 4대강살리기 사업' 대상에 섬진강 대신 영산강이 선정된 것은 이 강이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 물을 대어 남도의 젖줄 역할을 단단히 해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신대의 조진상교수는 나남출판사에서 펴낸 “강과 한국인의 삶”에 실린 그의 글 ‘영산강’에서 담양, 장성, 화순의 상류에는 자연경관도 아름다운 하천습지가 넓게 발달되었고, 광주와 나주의 중류지역은 호남농업을 떠받치는 평야지대이며, 영암과 무안에 이르는 하류 지역은 강폭이 대폭 넓어지고 산과 언덕을 끼고 있는 곳이 많아 아름다운 하천 경관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은 고인돌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모여 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로 그 수가 무려 4만여 개에 달합니다. 그 중 반 이상이 영산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기에 2000년에 화순일대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었습니다. 나주시, 영암군과 함평면 일대에 경주지역보다 더 많고 더 규모가 큰 고분군이 집중해 있는 것도 이 강 유역이 청동기문화만 아니라 그 뒤를 이은 고대문화도 함께 꽃피웠음을 말해준다 하겠습니다. 일본에 우리의 우수한 한류 문화를 최초로 전해준 백제의 왕인박사나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시조인 신라 말의 고승 도선국사가 이 강 유역에서 태어난 것도 그저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아침6시46분 목포대버스정류장을 출발했습니다. 전날 밤 수원에서 밤차를 타고 내려가 목포역에 도착한 시각이 새벽4시10분경이었는데 5시20분에 출발하는 서울행 첫 KTX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아 역사 안이 북적댔습니다. 길 건너 김밥 집에서 아침을 사 들고 6시 조금 넘어 목포역 앞에서 200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반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목포대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해 산행채비를 한 후 해뜨기 직전 한기가 느껴지는 캠퍼스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봄이 완연한 캠퍼스의 이른 아침은 아직 일어나 움직이기에는 이른 일요일이어서인지 학생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캠퍼스 맨 위쪽에 자리한 생활관에서 산길로 들어가 꾸준히 고도를 높여 갔습니다. 45분간 표고를 230m 가량 높여 다다른 평바위에서 왼쪽 능선을 따라 진행하며 노승봉을 에돌아 지맥 길이 시작되는 승달산 갈림길에 도착하기까지 반시간이 걸렸습니다.
8시20분 승달산 갈림길에서 4구간 종주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북으로 이어지는 지맥 길을 따라 0.4Km 거리의 하루재로 내려가는 길에 오른쪽 아래 법천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 싶은 법천사는 신라때 지은 천년 고찰이라는데 먼발치서 보아서인지 고색창연한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안부사거리 하루재에서 10분가량 쉰 후 그대로 북진해 정자가 세워진 해발 317m의 사자산에서 서해를 조망했습니다. 몇 분간 더 북진하다 깃봉 바로 아래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안부사거리로 내려섰다가 해발309m의 구리봉으로 올라서는 오름 길이 환했던 것은 여기저기에 진달래꽃이 활짝 피어서였습니다. 구리봉을 넘어 묘지를 지나서 다다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 수피가 깔끔한 거목이 몇 그루 있어 돌무더기만 있었다면 영락없는 성황당고개였을 안부사거리로 내려선 시각이 10시16분이었습니다.
10시45분 태봉재를 지났습니다. 거목이 자리한 안부사거리에서 그대로 직진해 올라가 다다른 능선삼거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것은 바로 앞 봉우리로 직진해야할지를 결정하지 못해서였는데 지도와 산행기를 꼼꼼히 읽어 보고나서 왼쪽으로 내려갔는데 5-6분이 지나 지맥 길을 알리는 표지기가 보여 비로소 마음이 놓였습니다. 잘 정비된 비포장임도가 지나는 태봉재에서 길을 건너 들어선 지맥 길을 따라 북진했습니다. 태봉재에서 표고를 80m 가량 높여 삼각점이 박혀있는 264.6m봉에 올라 2시간 훨씬 넘게 걸은 종주산행을 잠시 멈추고 15분여 푹 쉬었습니다. 시야가 탁 트인 이 봉우리에서 동쪽을 조망하자 먼발치로 굽이져 흐르는 영산강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이 강의 여유로운 몸놀림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264.6m봉에서 큰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이내 ‘보만식계 표지기’가 걸린 오른쪽의 희미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골프장 옆 안부로 내려서기까지 20분 가까이가 이번 산행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 다닌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이 희미했고 이런 저런 잡목들이 길을 막아서였는데 아직은 청미래나 찔레나무가 극성을 부리기에 이른 때여서 알바 없이 11시51분에 골프장 옆 안부로 내려설 수 있었습니다.
12시21분 암반 길에 조금 못 미친 능선에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골프장 옆 안부에서 몇 걸음 오른 쪽으로 옮겨 태봉재에서 만난 임도로 내려섰습니다. 왼쪽 위 골프장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5-6분 오르다 오른 쪽 연증산으로 이어지는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안부 출발 반시간 후 올라선 무명봉에서 북진하다 그늘을 찾아 점심을 들면서 반시간 가까이 푹 쉬었습니다. 초당대를 출발해 목포대로 하산한다는 50대로 보이는 남성분을 만나 길안내를 받은 후 오후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거꾸로 내려가기에는 얼마간 신경이 쓰일만한 길지 않은 슬라브 암반 길 몇 곳을 올라 다다른 전망바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사진 찍은 후 몇 분을 더 걸어 산불감시초소가 자리한 봉우리에 이른 시각이 13시16분이었습니다. 4월은 산불이 자주 나는 한 달일 텐데 산불감시초소가 텅 비어 있어 한창 성수기에 문만 열어놓고 주인이 자리를 비운 가게를 보는 것 같아 씁쓰레했습니다.
14시25분 헬기장을 지났습니다. 산불감시초소에서 경사가 급한 통나무 계단 길을 따라 내려가 표고를 90m가량 낮추자 잔디밭의 청전리임도종점이 나타났습니다. 직진해 산오름을 계속해 나지막한 봉우리 몇 개를 넘었습니다. 한 낮의 기온이 섭씨 18도에 이르자 목덜미를 내리쬐는 햇볕이 따갑게 느껴져 남방의 옷깃을 세우고 산행을 하다가 오후 산행 재개 1시간이 채 안되어 다시 10분여 쉬었습니다. 휴식을 끝내고 표고차가 30-40m가량 되는 봉우리 몇 개를 더 넘어 도착한 헬기장에서 승달산10.5Km'와 ‘사격장’을 안내하는 표지목이 세워진 안부삼거리로 내려서면서 맞은편 산 중턱에 세워진 정자를 사진 찍었습니다. 안부삼거리에서 ‘전망의 숲’에 세워진 정자로 오르는 길은 된비알의 데크 계단 길이어서 오름 길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요즘 들어 무릎 통증이 부쩍 심해 걱정인데 계단 간의 높이가 아파트 계단의 두 배 이상 되어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300개는 족히 될 것 같은 엄청 가파른 계단을 올라 다다른 정자에서 초당대 학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항공정비과에 다닌다는 이 학생이 학교에서 멀지 않은 이 산을 처음 올랐다며 이 근처 가장 높은 봉우리를 물어와 해발 301m의 연증산을 알려주었습니다.
16시26분 초당대버스정류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전망의 숲에 자리한 정자에서 일어나 학생과 함께 서쪽 연증산으로 이어지는 편안한 능선 길을 걸으면서 데크 계단 길을 오르느라 무리했을 두 다리를 달랬습니다. 십 수 분을 걸어 다다른 능선 삼거리에서 학생과 헤어지고 왼쪽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영산기맥은 능선삼거리에서 조금 더 올라가 다다르는 첫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여서 능선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는 사색의 숲길이 지맥과 다시 만나는 지점은 샘터가 있는 정자를 훨씬 지나 안부사거리인 미륵사사거리를 얼마 앞 둔 삼거리였습니다. 정자를 지나서 북진하다 동쪽으로 조금 진행해 영산기맥과 만난 능선삼거리에서 200m가량 내려가 미륵사가거리에 닿았습니다. 나무의자가 세워진 미륵사사거리에서 곧 바로 올라가다 남산표지목이 서 있는 삼거리에서 바로 위 남산을 오르지 않고 왼쪽으로 내려가 초당대 쪽으로 하산했습니다. 아스팔트 길을 건너 측백나무(?) 숲을 지나 초당대 캠퍼스로 내려섰습니다. 캠퍼스 안 차도를 따라 정문으로 옮기면서 야외에 진열된 탱크와 항공기를 보고 이 대학이 군사학과 항공정비학 쪽을 특화해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가 했습니다. 정문 앞 1번 국도를 건너 초당대버스정류장에서 영산기맥4구간 종주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영산강이 우리 문학사와 맺은 인연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면앙정 송순이 연 호남문단은 송강 정철이 그 뒤를 이어갔습니다.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은 그의 저서 “서포만필”에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전후 ‘사미인가'는 곧 우리나라의 이소 (松江 關東別曲 前後 思美人歌 乃我東之離騷)"라 했습니다.송강에 앞서 나주가 배출한 조선의 문인은 배포 크기로 이름난 백호 임제입니다.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해 평양으로 가던 중 개성에 있는 황진이의 무덤을 들러 시조를 읊었다하여 파면되지만, 그가 노래한 시조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소설가 유주현은 그의 소설 "임진강은 흐른다"에서 천년을 한가지로 흐르면서 세월을 셈하는 것은 오로지 강물뿐이라 했습니다. 영산강 강물이 136Km를 흐르면서 천년 넘게 셈해온 세월이 실어낸 이 강 유역의 역사가 온당하고 영광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영산강은 이 강 유역의 백성들을 속이고 절망케 한 역사도 함께 실어 날랐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된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이 절창하고 우리 어르신들이 모두 따라 불렀습니다. 노래 가사처럼 유달산의 바람이 안은 것은 영산강만이 아닙니다. 이 강의 둘레산줄기인 영산기맥을 오르내리는 저도 안았습니다. 어느새 살가워진 영산강과 유달산이 고마워 기맥종주를 마치는 날 영산강 하구에서 '목포의 눈물'을 소리 높여 불러보고자 합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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