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명소 탐방기2(서울운현궁)
*탐방일자:2018. 1. 5일(금)
*탐방지 :서울종로소재 서울운현궁
*동행 :나 홀로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기 직전의 50년은 격동의 반세기였습니다. 조선의 왕권은 60년 가까이 장동김씨의 세도정치에 의해 농락당했다가, 1863년 고종(高宗, 1852-1919)이 26대 임금으로 즉위하고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대원군(大院君)으로 봉해진 후 10년간 섭정을 펴는 동안 많이 회복되고 강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의 국권은 집권세력의 무지와 무능, 그리고 부패로 끝내 지켜지지 못하고 1910년에 이르러 일본제국에게 찬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데 대해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들 두 사람이 정권을 잡고서도 외세의 움직임을 똑바로 읽지 못해 격동의 반세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부자간의 알력과 반목으로 국력을 집결하지 못해 급기야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서운관(書雲觀)이 있던 고개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운현궁(雲峴宮)은 본래 흥선군 이하응의 사저로, 아들 명복(命福)이 고종임금으로 등극하기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잠저(潛邸)였습니다. 이 사저가 왕궁이 되어 운현궁으로 불린 것은 1863년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대원군의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가 주어지는 교지가 내려진 후부터라 합니다. 흥선군의 사저였던 운현궁은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부근에 자리했는데,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자리에 해당됩니다. 대원군은 1864년 노안당(老安堂)과 노락당(老樂堂)을 짓고, 1869년 이로당(二老堂)과 영로당((永老堂)을 세웠습니다. 또 운현궁에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 경근문(敬覲門),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恭覲門)을 두었다고 안내팜플렛은 전하고 있습니다. 원래 운현궁은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으로 쓰이는 양관(洋館), 안국역 근처의 일본문화원, 중앙문화센터, 운현초등학교 일대를 포함해 꽤 넓었으나 일제 때에 크게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이달부터 두 달간 매주 수/금 양일은 한문을 공부하러 종로3가 낙원상가의 한문 학원을 다닙니다. 어제는 수업을 끝내고 전철을 타러 안국역으로 가는 길에 그 중간쯤에 자리한 운현궁을 둘러보았습니다. 먼발치서 보는 담장이 길고 높고 깔끔해 조선시대의 고관대작이 살았던 집이겠다 했는데 가까이 가서보니 과연 그러했습니다. 저녁 5시가 조금 넘어 해가 지기 얼마 전인데다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에서 머물러, 문은 활짝 열렸지만 안으로 들어가 구경하는 사람들은 세 사람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운현궁에 관한 역사지리 정보는 한국학중양연구원의 민족문화백과사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 글은 만족문화백과사전에서 따와 옮겨 적은 것입니다.
현재의 운현궁 터가 복원되면서 대지를 동서로 크게 양분하여, 동편에는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老堂)의 세 건물들이 들어섰고, 서편은 빈 마당으로 남겨 도로와 접하고 있다. 동편에 있는 세 건물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원군의 사랑채였던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 그리고 별당인 이로당 순서로 자리 잡고 있다. 노안당 남쪽에 원래 아재당(我在堂)이 있었으나 없어졌고, 이로당 북쪽에 있던 영로당도 원래 운현궁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개인 소유의 건물(김승현 가옥,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9호)로 되어 있고 대문인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이 있다. ....중략,,,, 당시 있었던 4대문 중에서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 터에 그 기초만 남아있다.
정문을 통과해 운현궁 안으로 들어서자 오른 쪽 바로 옆으로 이 궁을 지키는 수하들이 머물렀던 수직사가 보였습니다. 안국역으로 가는 큰 도로와 운현궁을 경계 짓는 담장 안쪽의 기획전시실과 조금 떨어져 있는 유물전시관은 이 궁의 서편에 위치해 있는데, 문이 닫혀 있어 외관만 사진 찍어 왔습니다.
운현궁 동편의 이로당(二老堂)은 유물전시관 오른 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로당의 이로 즉 두 노인은 물론 운현궁의 주인이었던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을 지칭합니다. 정면7칸, 측면7칸의 이로당은 ㅁ자의 똬리 집으로 실내는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단의 돌계단을 걸어 오른 후 다시 툇돌을 딛어야 마루에 이르게 되는 것은 제가 살던 시골의 부잣집 한옥과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로당 북쪽의 영로당은 개인소유건물이어서 들어가 보지 못하고 남쪽의 아재당은 없어진지 오래되어 곧바로 노락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운현궁의 중심건물인 노락당(老樂堂)은 이노당(二老堂)과는 남쪽으로 접해 있으며, 두 건물 모두 안채로 쓰였습니다. 노락당은 정면10칸, 측면 3칸의 일자형 건물로 똬리 모양의 이로당과는 복도각으로 이어집니다. 운현궁 안에서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새 날개 모양의 익공을 장식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드러내고 있는 노락당이 이 궁의 중심 건물로 자리매김한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집안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들이 여기 노락당에서 열렸습니다. 1866년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도 이곳에서 가례를 치렀습니다. 전시물도 명성황후가 세자를 데리고 운현궁을 방문하여 부대부인의 생신을 축하하는 장면을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노락당 남쪽에 접해 있는 노안당(老安堂)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이 주로 머물렀던 곳입니다. 정면 6칸, 측변 3칸의 굴도리를 쓴 민도리집의 노안당이 ㅁ자형의 이로당이나 일(一)자형의 노락당과 다른 점은 그 평면구조가 고무래 정(丁)자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논어』의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알려진 노안당은 이름과는 달리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하던 곳입니다. 고집스러운 한 노인의 정치적 야욕이 넘쳐나던 이곳에서 이 노인이 각을 세운 정적은 처음에는 왕권을 농락한 세도가였지만, 섭정을 끝낸 후부터는 다름 아닌 아들 고종임금이었습니다. 자기사람을 끌어들여 세를 모으고 정적을 제거해 적을 붕괴시키고자 하는 음모론적 논의가 비밀리에 이루어졌을 노안당에서 당시의 음습함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모든 것을 묻어버린 세월 덕분일 것입니다.
집터가 넓지 않아 이로당, 노락당과 노안당이 들어선 운현궁을 구석구석 찾아다녔습니다. 이번에 둘러 본 운현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에는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그 규모가 작았지만, 대원군의 권세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할 만큼 컸습니다. 이 큰 집을 드나든 인물들이 하나같이 수구적인 인물들이어서 바깥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흥선군은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 5년이 앞서 섭정을 시작하였습니다. 대원군이 내정개혁과 더불어 문호를 외국에 개방하고, 고종이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겼다면 총 한번 제대로 쏘지 못하고 그렇게 허무하게 일본에 합병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흥선군의 사저가 궁으로 승격되어 운현궁의 봄이 시작되었지만, 그 봄은 그리 길지 않아 조선의 멸망과 함께 끝났습니다. 제가 가끔 역사의 현장을 찾는 것은 역사의 재현에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덧붙여진 세월의 때를 벗겨내고 보면 역사의 교훈이 읽혀져서입니다. 외교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해본 것만으로도 이번 탐방은 충분히 의미 있다 싶어 그만 운현궁을 빠져나와 안국역으로 향했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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