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서산 산행기
*산행일자:2019. 9. 13일(금)
*소재지 :경기 파주
*산 높이 :봉서산 213m
*산행코스:용불사입구-원형전망대-봉황사입구
-통일공원-문산역
*산행시간:11시58분-14시45분(2시간47분)
*동행 :나 홀로
제가 고향 땅 파주의 봉서산(鳳棲山)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문산중학교에 입학해 교가를 부르기 시작한 1962년입니다. 이 고장 명문고인 문산농업고등학교와 병설 문산중학교가 함께 부르는 교가의 가사에 봉서산이라는 산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임진강 내리막에 넓은 벌이 생겼거니/ 봉서산 높은 곳에 봉황어이 없었으랴
봉황은 가고 없고 강물만이 흐르는데/ 거룩한 문산농업 샛바람을 안고 섰다
매주 조회 시간에 이 노래를 부르면서도 임진강과 봉서산을 볼 수 없었던 것은 문산중/농고가 원래 문산에 자리하고 있다가 한국전쟁 때 남쪽인 금촌으로 이전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는 파주군 광탄면의 벽제수목원 길 건너에 위치한 도마산초등학교입니다. 면소재지에 자리한 신산국민학교의 분교였다가 5학년 때인 1959년 도마산국민학교로 독립해 졸업할 때까지 교가가 없었습니다. 1962년 봄에 군청 소재지인 금촌의 문산중학교에 들어가 목청 높여 교가를 부른 것은 이 때 처음으로 교가를 불러서이기도 했지만, 군청소재지의 중학교를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어깨를 으쓱댈 만해서였습니다.
중/고등학교 교가에는 거의 빠짐없이 그 지방의 산과 강을 찬하는 가사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8년에 졸업한 서울의 경동고등학교 교가도 예외가 아니어서 삼각산과 한강수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삼각산 높은 봉에 기상이 씩씩하고/ 한강수 맑은 물은 마음도 깨끗하다
엣 성밖 묏 뿌리에 우뚝 선 우리 경동/ 모여든 즈믄아이 배우는 마당일세
경기고나 서울고처럼 소위 명문고교의 교가에 나오는 산과 강이라 해서 그렇지 못한 학교의 교가 속에 들어있는 산과 강보다 더 유명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전국의 인재들이 다 모여든 경기고나 서울고의 교가에는 백두산이 나와야 이들 학교의 전국적인 명성에 어울릴 만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경기고는 이 학교를 떠받쳐왔던 ‘화동언덕’이, 그리고 서울고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인왕의 억세 바위’가 교가 가사에 포함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로 보아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교가에 산과 강이 나오는 것은 애교심과 함께 애향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지 유명 산과 강의 힘을 빌려 학교를 홍보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
이번 추석에는 문산중학교를 졸업한지 54년 만에 처음으로 교가에 나오는 봉서산을 다녀왔습니다. 이 산은 그 정상의 해발고도가 213m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낮지만, 문산 일대에서 가장 높아 우리 군부대가 들어서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꼭대기까지 오르지 못하고 바로 아래에서 내려왔지만,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황금 빛 벼들이 가득 찬 파주의 곡창지대인 교하벌과 문산벌을 조망하는 데는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11시58분 형님댁에서 한가위차례를 지내고 귀가 길에 큰 아들 차로 봉서산로에 인접한 용불사 입구로 가서 혼자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용불사입구에서 바로 위 고갯마루로 올라가 ‘현 위치 봉서산로 대성사입구/ 현위치-정상전망대 720m’로 표기된 안내판을 보고서야 바로 아래 용불사의 전 이름이 대성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갯마루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세멘트 차도를 따라 올라가면서 태풍라라의 내습(來襲)으로 축대 일부가 붕괴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내 다다른 정상전망대에서 남쪽 먼발치에 자리한 고령산과 그 뒤 우뚝 솟아 있는 북한산을 조망했습니다.
봉서산을 소개하는 아래 글은 전망대 바로 옆 안내판에 적힌 것입니다. 이 산에 얽힌 이야기들 중 이만한 글을 찾기가 쉽지 않아 여기에 그 전문을 옮겨 놓습니다.
“봉서산은 봉황이 즐기며 노래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 정상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하나는 장사가 먹었다는 장사우물이고 다른 하나는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전대우물입니다. 또한 산마루에는 장사가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바위가 남아 있습니다. 경기북부의 군사요충지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이 행주대첩 이후 주둔했던 봉서산성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통일공원으로 내려가는 직진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꺾어 경사가 완만한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가 원형전망대에 올라서자 남쪽 멀리로 정상전망대에서 조망한 북한산의 수려한 능선이 한 눈에 잡혔고, 제가 사는 산본의 수리산 능선도 흐릿하게나마 보였습니다. 북한산이나 수리산보다 더 제 눈을 끈 것은 수직으로 뻗어 오른 흰 구름입니다. 마치 용트림을 하는 듯이 보이는 흰 구름을 보고 이 구름을 담고 있는 푸른 하늘이야 말로 지상 최고이자 최대의 캔버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 위 정상 쪽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군부대가 점하고 있어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부대 앞 후문에서 정상전망대 삼거리로 돌아가는 길에 자갈이 비교적 촘촘하게 박혀 있는 바위인 역암(礫岩)을 보았습니다. 퇴적암의 일종인 역암이 보인다는 것은 이 산은 바다가 융기해서 생긴 것임을 일러주는 것이어서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딱 한 개만 자갈이 빠져나갔고 나머지 자갈들은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갈이 빠져 나가 구멍이 숭숭 난 진안의 마이산보다 풍화와 침식을 덜 받은 것이 틀림없을 진데, 이 산이 융기된 것은 마이산이 형성된 중생대 백악기말보다 한참 후의 일로 보입니다.
삼거리로 돌아가 바로 옆 봉황약수터와 봉서산 표지석을 확인한 후 13시 정각에 정자에 편히 앉아 쉬면서 이 산을 찾아와 즐기며 노래했다는 봉황을 떠 올렸습니다.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내려앉고 대나무 이슬만 마신다고 들었는데, 오동나무도 죽림동도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생각해보았지만 답을 얻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통일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삼거리에서 북쪽의 통일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나무계단 길을 지나 큰 나무들로 그늘진 제법 넓은 숲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어서 천천히 걸으며 모처럼 고향 땅의 청정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습니다. 봉서산에서 통일공원으로 향하는 길 곳곳에 ‘의주길’ 표지리본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때 국왕 선조가 이 길로 몽진해 임진강을 건넜던 것 같습니다. 이 길을 따라 20분여 내려가 오른 쪽 아래로 0.8Km 떨어진 파주초교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는 안부사거리를 지나 ‘봉서산57’의 표지물 옆에 자리한 벤치에 앉아 잠시 쉬었습니다.
제가 걷는 길이 통일공원등산로라는 것을 안 것은 이 길을 반 시간 이상 걸어 다다른 안부에서 ‘통일공원1,530m/봉서산(정상전망대)1,380m’의 표지목에 적힌 ‘통일등산로’를 보고나서입니다. 오른 쪽으로 수억고등학교 가는 길이, 그리고 왼쪽으로 봉서2.4리 길이 갈리는 여기 안부사거리에서 나무 계단을 올라 이어지는 통일등산로는 들깨 밭과 능선 길 양옥을 차례로 지났습니다. 한참을 더 걷자 문산읍내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 왔고 얼마간 더 걸어 왼쪽 아래로 내려가 통일공원 경내로 들어섰습니다.
과연 통일공원이다 싶었던 것은 이 공원에 세워진 탑과 비가 남북한 전역에서 조국통일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려서입니다. 이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가장 높게 세워진 ‘개마공원반공유격대위령탑’은 백두산이 우러러 보이는 개마고원에서 공산학정에 저항하다 의롭게 목숨을 잃은 북한의 젊은이들 영령을 위로하고자 세운 탑입니다. 그 아래 충현탑은 6.25 때 남한 땅 문산전투에서 산화한 육군3270부대의 장병 2,385명의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기원하고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건립한 탑입니다. 이렇듯 통일은 남북한 주민들이 모두가 염원하는 것일 진데 아직도 요원한 것은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집권층이 적화통일야욕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14시45분 문산역에 도착해 서울행 전철에 오르는 것으로 봉서산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
서울대는 역시 다르다는 것은 그 교가의 가사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가슴마다 성스러운 이념을 품고/ 이 세상에 사는 진리 찾는 이 길을
씩씩하게 나아가는 젊은 오누들/ 이 겨레와 이 나라의 크나큰 보람
뛰어나는 인제들이 다 모여들어/ 더욱 더욱 융성하는 서울대학교
‘진리는 나의 빛’으로 상징되는 서울대의 교가에 담긴 주요한 메시지 또한 진리의 추구이기에 산과 강을 뛰어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의 서울대는 교수들조차 그리하지 않는 것 같아 이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럽지 못하지만, 그래도 교가만은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어 가끔 혼자서 흥얼거리곤 합니다.
<산행사진>
'VIII.지역 명산 > 지역명산 탐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16. 최정산 산행기 (0) | 2020.07.11 |
---|---|
A-68.퇴미산 산행기 (0) | 2020.04.06 |
E-15. 한우산 산행기 (0) | 2019.05.10 |
E-14.학가산 산행기 (0) | 2019.01.27 |
D-5.달마산 산행기 (0) | 2018.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