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13. 고창명소탐방기 2(무장읍성)

시인마뇽 2020. 8. 10. 17:19

고창명소탐방기 2(무장읍성)

 

*탐방일자:2020. 3. 29()

*탐방지   :전북고창군무장면소재 무장읍성

*동행      :서울사대 원영환/이상훈 동문

 

 

   제가 고창 땅에 처음 발을 들인 곳은 풍천입니다. 모회사의 충호남영업부장으로 일하던 1993년 여름 전북영업소 대리점주들과 함께 찾아간 풍천에서 장어요리를 맛있게 들은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날 함께 식사를 했던 대리점주님들은 안타깝게도 그 석 달 후 위도로 단체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배가 침몰되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고창이 자랑하는 선운산과 방장산, 그리고 변산을 차례로 오른 저는 명찰 선운사도 서너 번 다녀왔고, 고창읍성과 판소리박물관, 고인돌박물관도 둘러보았습니다.

 

   제가 탐방하지 못한 고창의 명소는 무장기포지, 전봉준의 생가터, 무장현의 관아와 읍성, 손화중 도소와 피체지, 흥성동헌 등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들입니다. 조선말기인 1894년에 발발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중 스스로가 각성해 일어난 농민항쟁으로, 우리나라에서 근대사회를 여는 계기를 만든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두 번의 농민봉기가 동학농민 혁명 중에 일어났는데, 1차 농민봉기는 자유와 민권을 위한 반봉건항쟁이었으며, 2차 농민봉기는 외세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한 민족자존의 항쟁이었다고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안내전단 1894 동학농민혁명은 전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민족의 정신이며 희망의 등불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무장기포기념제, 전봉준장군탄생기념제와 동학농민혁명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처음으로 탐방한 고창의 동학농민혁명유적지는 무장현의 관아와 읍성이 자리한 무장읍성입니다. 동행한 이상훈교수의 친지 한분이 고향 땅 무장에 별장을 가지고 있어 전날 밤을 그 집에서 묵었습니다.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해 섬진강의 옥정호로 향하던 중 십분도 지나지 않아 도로변에 자리한 튼실한 석성이 보였습니다. 가까이에 차를 세워놓고 다가가 안내문을 읽고 이 성이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인 무장읍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장읍성은 1894년에 발발한 동학혁명과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이곳 무장읍성에서 멀지 않은 고창군공음면구암리의 당산(구수내)마을은 동학혁명의 기포지(起包地)로 알려진 곳입니다. 무장기포지는 전봉준과 손화중이 김덕명 및 김개남과 더불어 사전모의를 한 후 포고문과 4대명의 등을 선포, 혁명의 출발을 알린 역사의 현장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지인 구수내에서 1994년부터 매년 425일에 무장기포 기념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전날 밤을 묵었던 숙소에서 차를 타고 이동한 10번 도로는 구수내마을에서 기포한 농민군이 반봉건 항쟁의 깃발을 높이 들고 무장현을 향해 진격할 때 밟았던 진격로였습니다. 동학혁명의 농민군이 전라도의 각 군/현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고창과 흥덕의 관아 건물들은 많이 훼손되었는데도 여기 무장관아가 극적으로 화를 면한 것은 무장현 출신의 농민군이 무장읍성과 관아의 훼손을 막았고, 또 무장현의 서리들이 농민군에 대거 동조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417(태종 17)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병마사 김저래(金著來)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그 중간 지점에 무장현을 두고, 2월부터 5월까지 만 4개월 동안 축조한 성이 바로 사적 346호로 지정된 무장읍성입니다. 높이 60m의 사두봉을 중심으로 구릉성 야산을 장방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평지 읍성인 이 성의 둘레는 1,140m에 달합니다. 이 성을 둘러 싸 물길을 낸 해자(垓字)는 그 흔적이 폭 4m, 길이 574m 정도 남아 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터만 남은 동문과 달리 남문의 진무루(鎭茂樓)는 앞면 3, 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복원되어 성 위에 펄럭이는 깃발들과 함께 읍성의 운치를 더해주었습니다. 성 바깥쪽에 반원형의 편문식 옹성이 설치되어 있어 더욱 다부져 보였습니다. 성 전체가 한 눈에 잡힐 정도로 아담한 규모의 무장읍성은 복원한지 오래되지 않아 외관이 깔끔했습니다. 규모는 작으나 역사는 오래되어 이 성이 함께한 세월만 헤아린다면 1396년에 축성한 한양도성과 견줄 만큼 유서 깊은 성이라 하겠습니다.

 

   남문인 진무루를 통해 성 안으로 들어서자 동헌인 취백당(翠白堂)과 객사인 송사지관(松沙之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현감이 집무하던 동헌은 낮은 담이 빙 둘러 쳐져있고 담 안에 1983년 중창한 翠白堂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정면 6, 측면 4칸으로, 네 귀에 추녀를 설치하고 겹처마 형식을 하여 건물 전체가 단정해 보였습니다. 한 여름이라면 그늘을 넓게 만들었을 커다란 느티나무(?)와 곧게 뻗어 올라간 소나무들이 자리한 담 안은 작은 정원 같았습니다. 동헌과 떨어져 객사는 가운데 정전과 그 양쪽의 헌()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홑처마 맞배지붕의 정전에는 松沙之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고, 양 날개의 헌()은 팔작지붕의 건물로 축대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나이가 꽤 들었을 느티나무들이 앞뒤로 에워싸고 있는 객사의 건물이 동헌의 건물보다 훨씬 장중하고 안정되어 보여 중앙의 방문객들이 편히 묵어 갔으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44천평 가량 되는 성 안에 아직 29동의 건물이 다 복원되지 않아 들어선 건물이 많지 않아서인지 이 읍성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넓은 인근의 고창읍성보다 오히려 더 공간감이 느껴졌습니다.

 

   이어서 찾아간 곳은 느티나무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해발60m의 사두봉입니다. 안내판에 적혀 있는 사두봉과 느티나무 전설을 일별한 후 몸체가 뒤틀린 느티나무들을 사진 찍었습니다. 연못 쪽으로 내려가다 규모가 제법 큰 정자인 읍취루를 둘러본 후 나란히 서 있는 16기의 송덕비(頌德碑)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딱 하나 보이는 쇠로 만든 철비는 조선조 후기의 몇 개 안 남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합니다. 옛 문헌기록에 의하면 사두봉 좌우에 두 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합니다. 송덕비 바로 옆의 연못 용소는 일제 때 메워 2004년까지 무장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쓰던 것을 2014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이 연못은 100여 년간 자취를 감추었던 연꽃이 다시 피었고, 부레와 부레 옥잠 등 수생식물들이 자라 오늘의 연못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 안내문을 다시 읽었습니다. 정읍의 황토현 싸움에서 전라감영군을 일거에 무찌른 동학농민군은 정읍의 흥덕과 고창읍성을 접수한 후 여기 무장읍내에 도착한 것은 189449일이었습니다. 옥중의 동학교인 44명을 석방하고 성 내외 7거리에 방화를 하니 화염이 충천했다고 안내문은 적고 있습니다. 무장에 입성한 동학농민군은 3일 동안 머물면서 휴식을 취한 후 전열을 재정비해 홍계훈 초토사의 경군과의 전투를 준비를 했다하니 여기 읍성을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라 부른다 해서 지나칠 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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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구입한 한 책에서 동학농민혁명과 동학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놀랄만한 내용들을 읽었습니다. ‘월간 조선의 편집장을 했던 역사저술가 김용삼 님이 지은 지금, 천천히 고종을 읽는 이유가 바로 그 책입니다. 아래 내용은 위 책의 269-270쪽에 실린 글에 근거해 작성한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주도해 농민봉기가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항거해 일어난 민란으로 애초에는 동학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고 합니다. 민란을 진압하러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 참여와 관계없이 동학교도를 잡아다가 고문을 하는 등 탄압을 가하자 동학의 지도자인 손학중과 김개남이 봉기에 가세하면서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고 이 책은 적고 있습니다. 전봉준의 최초 봉기는 순수한 농민봉기였는데 이용태의 탐학행위에 저항하기 위해 동학이 뒤늦게 합류했다는 것입니다.

 

   동학교주 최시형과 주류인 충청도의 북접은 이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호응도 하지 않았으니, 농민봉기는 전라도의 남접만 참여한 거사였다는 것입니다. 최시형은 동학교주인 자신의 비폭력 노선을 따르지 않은 전봉준에 경고문을 보내고, 전봉준을 비롯한 남접지도자들을 국가의 역적이요 사문난적으로 규정하고 벌남기(伐南旗)’를 보내 남접을 공격하라고 명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교주 최시형에게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해서 그 역사적 의의가 손상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또 동학 전체가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참여했다 해도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등에 업은 관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적을 앞에 두고 동학은 왜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 때도 오늘처럼 지역을 기반으로 동학의 세가 나뉜 것이 아닌가 싶어 안타까워서 하는 말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