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오미 종점-직연폭포-고방산 정류장
*탐방일자: 2020. 11. 24일(화)
*탐방코스: 오미종점-각시교-직연폭포-송현교-고방산 사거리
*탐방시간: 9시46분-15시34분(5시간48분)
*동행 :문산중14회 황규직/황홍기 동문
강원도 양구가 조선백자의 시원지이고, 양구의 백토는 조선백자의 중심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평화누리길 탐방 길에 들른 양구백자박물관의 안내전단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박물관은 코로나19로 휴관 중이어서 전시물을 보지는 못했지만, 직원에게서 받은 안내전단을 보고 양구가 조선백자의 시원지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자기(瓷器)하면 떠오르는 곳은 경기도 광주나 인근의 이천, 여주 등일 것입니다. 광주의 지리는 1970년대 중반 광주중학교에서 3년간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어 비교적 잘 아는 편입니다. 당시에 제가 듣기로는 이 지역이 도자기의 주요 생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근에 남한강이 흘러, 도자기를 깨뜨리지 않고 온전하게 한양으로 운송하기에 이만한 적지가 따로 없어서였다고 합니다. 집에 있는 도자기 몇 점은 집사람이 여주의 도자기 가마를 찾아가 직접 만든 것들입니다. 서양화를 전공한 집사람이 도자기를 직접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광주의 한 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면서 방학 때면 인근의 가마를 찾아가 직접 실습을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양구가 조선백자의 시원지일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강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강점은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려 있고 맑은 물이 굽이쳐서 전국으로 소통되는 양구에는 흰 백자를 만드는 양질의 백토와 도석이 매장되어 있다”라고 박물관의 안내전단이 적시한 바와 같습니다. 조선백자의 주생산지인 양구군의 방산면 일대는 한양에서 거리는 광주보다 멀지만 수입천을 따라가면 북한강이 멀지 않아 수운이 가능한데다, 조선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토가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지역에 분원이 설치된 후 여기 양구에서 공납백자를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 필요한 원료만을 광주 분원에 공급한 것은 아무래도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한양으로 실어 나르는 데는 한강에 바로 붙어 있는 광주만 못해서 그리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평화누리길을 걸으면서 조선백자 생산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을 탐방할 수 있었던 것은 생각지 못한 수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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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9시46분 방산면 오미리의 오미 종점을 출발했습니다. 17-18세기의 양구의 백자는 백색 또는 회백색을 띠며 대부분이 오목굽에 모래받침으로 포개서 구웠다 합니다. 철화로 대접이나 접시의 외면에 간단한 선문(線文)이나 초화문(草花文)을 그린 백자편들이 발견된 곳이 여기 오미리라고 박물관의 안내전단은 적고 있습니다. 천변의 제방에 조성한 평화누리길을 따라 수입천을 거슬러 직연폭포 쪽으로 서진했습니다. 탐방 시작 1시간이 지나 하천 바닥에 놓은 시멘트 다리로 수입천을 건넜습니다. 얼핏 보면 보(湺)인 것 같지만 중간에 서너 개의 수로가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저수보다는 주민들의 보행을 위해 설치한 것 같습니다. 몇 분 후 다다른 다리는 460번 평화로가 지나는 각시교였습니다. 평화누리길은 평화로를 가로질러 약4Km 길이의 오미제 제방길로 이어졌습니다. 제방 아래 천변에 쌓인 모래가 다른 곳의 모래보다 훨씬 더 하얗게 보였습니다. 혹시 저 모래가 백자생산에 쓰이는 백토가 아닌가 싶어 사진을 찍어와 박물관의 안내전단에 실린 ‘금악리수입천백토사진’과 대조해보았는데 백토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11시14분 금악리의 금악교에 이르렀습니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양구에서 생산되는 백자의 가마터는 여기 금악리 외에도 장평리, 송현리, 상무룡리 등에 산재해 있었습니다. 이들 백자는 태토에 불순물이 있고 빙렬이 있으며 누르스름하거나 녹색을 띠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자기의 대부분은 대접과 접시류였는데, 특히 여기 금악리에서 주로 발견된 것은 전접시와 측선이 꺾여 올라간 접시 등이었다고 합니다.
금악리는 ‘금악리수입천백토사진’이 박물관의 안내전단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양구백토의 주산지였던 것 같습니다. 양구의 백토는 조선시대 분원백자 생산에 쓰인 주원료였습니다. 양구백토는 불순물이 약간 함유된 백운모계 고령토질 도석으로, 철분 함유량이 0.1-0.5%로 백색도가 높은 태토였습니다. 이 흙의 주성분은 이산화실리콘, 산화알루미늄, 산화칼륨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채굴된 백토는 연간 500-550석(약72-79톤)에 달하며, 매년 봄과 가을 두 번씩 수운을 이용해 광주분원으로 운송되었다고 합니다. 방산자연폭포 앞 야외에 전시된 황포돛대는 당시 백토를 실어나른 배를 모형화한 것입니다.
이 지역의 4대 조류는 독수리, 황조롱이, 두루미, 꾀꼬리라고 안내판에 소개되어 있는데, 제가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수입천을 배회하는 두루미였습니다. 제방 오른 쪽의 들판이 제법 넓어 이 들판에서 모이를 찾는 다른 조류를 사냥할 독수리나 황조롱이는 시간을 갖고 지켜보면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금악교를 건너 이어지는 평화누리길에 세워진 주홍색의 아취교가 이채로웠습니다. 길가의 조그마한 배는 갑자기 물이 불면 이 배를 타고 수입천을 건너 산으로 올라가라고 놓은 것 같습니다. 천변의 수리공사 중인 데크 길을 지나 선암천교를 건너자 바로 앞에 방산초교가 보였습니다. 방산면사무소와 보건지소, 복지회관 등이 들어선 면소재지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 탐방에 나선 시각은 12시45분이었습니다.
13시15분 직연폭포를 사진 찍었습니다. 이번 탐방 길에 들른 곳 중 가장 많이 알려진 명소는 직연폭포(直淵瀑布)로 1998년 여름 집사람과 함께 들렀었습니다. 여기 양구군 방산면 칠전리에 소재한 직연폭포는 수입천 하상에 발달한 높이 15m의 자연폭포로 돌에서 가까워 누구나 쉽게 찾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입니다. 제가 굳이 이 폭포를 자연폭포라고 칭한 것은 다리 건너 규모가 제법 큰 인공폭포인 방상백자폭포와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1998년 당시에는 폭포 위에 다리나 방산백자폭포는 없었습니다. 이 인공폭포는 폭포수가 세차게 흘러 떨어지는 여름철에는 볼 만하겠지만, 이 폭포에 대비되어 바로 아래 자연폭포인 직연폭포가 초라하게 보이는 것은 설치 전에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직연폭포와 가까이 있는 양구백자박물관을 먼저 들렀습니다. 이 박물관은 양구지역의 백자제작역사를 보존하고 조선왕실백자의 중심 원료로 사용되었던 양구 백토의 연구 및 현대적 활용가치를 모색하고자 2006년 6월에 개관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휴관중인 이 박물관에서 제작한 안내전단에 따르면 1932년 금강산 방화선 공사를 할 때 이성계의 발원문이 적혀 있는 백자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백자의 굽에 쓰인 ‘방산기장 심룡(方山器匠 沈龍)’ 라는 구절을 통해 이들 백자의 생산지가 양구방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안내전단은 적고 있습니다.
직연폭포와 두타연은 모두 수입천이 빚어낸 명승지로 9.2Km 떨어져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중간쯤인 고방산교까지만 진행하고, 코로나19로 출입이 금지된 두타연은 내년으로 미뤄야할 것 같습니다. 평화누리길과 면해 있는 축사를 지나면서 한우와 개, 그리고 토종닭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한참 동안 더 걸어 자월교에 다다른 시각은 13시40분이었습니다.
14시28분 송현교를 건넜습니다. 장평리의 자월교를 지나 천변 제방의 평화누리길을 따라 걸으며 경기도의 평화누리길 곳곳에 걸려 있는 표지리본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이 길이 자전거 전용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수입천에 하상과 천변에 암반들이 자리하고 있어 한탄강의 협곡이 연상됐습니다. 송현리 체육공원과 송현1교를 차례로 지나 다다른 송현교를 건너 오른 쪽으로 460번 평화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앞서 지나온 장평리와 여기 송현리도 백자를 굽는 가마터가 있었던 곳입니다. 두 곳의 가마터에서 생산된 백자도 앞서 언급한 금악리의 백자와 같은 유형이 발견되어 방산지역의 백자제작이 늦어도 14세기까지는 올라갈 것으로 본다고 안내전단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그 근거로 이들 백자가 홍무(洪武)24년(1391년) 명(銘) 백자와 유사한 태토와 유약의 백자를 들고 있습니다. 사용된 태토의 성분과 태토를 다루는 기술이 일정함도 근거로 추가되었습니다.
왼쪽으로 소풍정 길이 갈리는 송현리3거리를 거쳐 부대 앞을 지났습니다. 오른 쪽 아래 간이 보에 저수된 수입천의 물은 맑디맑아 지켜보는 저도 같이 맑아지는 듯 했습니다.
15시34분 고방산 버스정류장에서 평화누리길의 23구간 탐방을 마쳤습니다. 수입천을 오른 쪽에 끼고 조금씩 고도를 높여 가는 동안 제 눈을 끈 것은 길가의 ‘생태계교란종대체식물식재사업지’의 작은 표지판이었습니다. 기존의 국내 생태계의 균형을 교란시키는 외래종을 생태계교란종이라 하는데, 황소개구리, 꽃매미 등 동물과 단풍잎돼지풀, 돼지풀, 기시박 등 식물이 생태계교란종입니다. 인력을 동원해 직접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추가적으로 대체식물식재사업을 벌여야 할 만큼 생태계교란이 심각하다는 것은 미쳐 알지 못했습니다. 협동교를 건너 수입천은 산자락 오른 쪽으로 돌아 흐르고, 저희 일행은 전장382m의 두타연터널로 질러갔습니다. 460번 평화로와 수입천은 고방산교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터널을 빠져나와 바로 앞의 두타연갤러리를 들렀으나 문이 닫혀 관람하지 못했습니다. 고방산 정류장에서 반시간여 기다렸다가 양구읍내로 가는 농촌버스에 몸을 싣는 것으로 23회차 평화누리길 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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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청초의 사상가 고염무(顧炎武, 1613-1682)는 평생에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걸으라며 “둑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을 주창했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여행을 떠날 때 근사록이나 심경 또는 시집을 갖고 간 것은 고염무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사대부가 지켜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다르지 않아 열심히 책을 읽고 꾸준하게 걸었습니다. 백두대간과 9정맥을 종주했고 수많은 산을 오르내린데다 평화누리길과 강줄기를 계속 걸어 태어나서 지금까지 걸은 거리는 만리가 훨씬 더 됩니다. 문제는 평생 동안 만권의 책을 읽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껏 읽은 책은 교과서나 참고서를 포함하더라도 3천권이 넘지 않습니다. 제가 읽은 대다수의 책들이 페이지수가 많이 나가는 두꺼운 책이어서 옛날 책을 기준 한다면 5-6천권은 족히 될 것 같습니다만, 만권에는 훨씬 못 미칩니다. 만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지난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대부라고 해도 책 보급이 여의치 못한 조선시대에 만권의 책을 접한다는 것조차 엄청 힘들었을 것입니다. 만 권의 책이란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으면 읽은 횟수만큼 읽은 책의 권수가 늘어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논어와 맹자 등 사서오경을 끼고 살았던 사대부들이 만권의 책을 읽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같은 책을 반복해 읽는 횟수만큼 권수로 인정받는다 해도 저는 그리할 뜻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안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이야기하기를 독서는 집안에서 여행하는 것이고, 여행은 집 밖에서 독서를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2만리를 걸어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를 달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작년 여름부터 저는 거의 매일 2만보를 걸어왔습니다. 보폭을 50cm로 잡으면 하루에 10Km를 걷는 셈이니 400일만 걸으면 독만권서(讀萬卷書)에 상당하는 행만리로(行萬里路)를 달성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행만리로(行萬里路)를 추가해 독만권서(讀萬卷書)를 대신하는 것은 꼼수가 분명합니다. 그래서 벌써부터 해 온 것이 운동장을 걸을 때는 가급적이면 책을 보며 걷는 것입니다. 이는 어려서부터 익혀온 습관이어서 그다지 힘들지 않습니다.
걸으면서 같이 볼 조선백자에 관한 책을 서둘러 찾아 볼 뜻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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