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나주대교-영산포-죽산보
*탐방일자:2021. 3. 5일(금)
*탐방코스:나주대교-영산포-구진교차로-백호문학관-영산교-죽산보
*탐방시간:9시-16시1분(7시간1분)
*동행 :나 홀로
국토의 2/3 이상이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는 험난한 산곡(山谷)이 많아 수레로 운송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변남주 교수는 저서 『영산강 뱃길과 포구연구』에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고래로부터 육로보다는 해로가 교통의 중심이 되어 왔다고 밝혔습니다. 해로가 교통의 중심이었다면 나루와 포구가 발달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영산강유역의 전근대포구는 변남주 교수의 위 책에 따르면 상류인 발원지-나주대교 구간에의 6개소, 중류인 나주대교-몽탄대교 구간에 23개소, 하류인 몽탄대교-영산강하구 구간에 33개소 등 모두 62개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포구란 광의의 의미로 쓰여 포구는 물론 진이나 나루도 포함합니다. 영산강의 대표적인 포구는 해상포구인 목포와 강상포구인 영산포입니다. 나주에 강상포구인 나주목포가 있었다는 것은 위 책을 읽고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1981년 영산강 하구에 둑을 쌓아 배들이 바다와 강을 넘나들 수 없게 되자 영산강은 더 이상 수송 기능을 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송기능을 상실한 영산강은 포구가 사라지고 속속 다리가 놓이면서 나루 또한 거의 다 사라져, 이제는 관광선을 띄우는데 필요한 선착장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수운을 주목적으로 하는 해선을 강에서 운항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조수(潮水)의 감조구간(感潮區間)입니다. 감조구간이란 밀물과 썰물이 영향을 미치는 강의 구간을 뜻하는 것으로 배를 띄우는데 매우 중요한 강물의 깊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감조구간은 조차가 매일 변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설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변남주교수는 위 책에서 영산강의 감조구간에 대해 목포기준 약65.5Km 지점인 회진, 69.5Km 지점인 영산대교, 목포기준 약74.9Km 지점인 나주대교 인근까지 등 세 가지 견해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제 때까지 대표적인 강상포구로 기능했던 영산포는 영산대교인근지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주대교에서 죽산보까지 영산강의 강줄기를 따라 걸으면서 상기 세 가지 견해의 감조구간을 차례로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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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9시 나주대교를 출발했습니다. 나주역에서 999번 버스를 타고가다 나주대교를 막 건너 미곡정류장에서 하차했습니다. 지난번에 탐방을 마친 나주대교 아래 동쪽 제방에 자리한 예다음정 정자를 찾아가 6구간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오른 쪽 나주대교 아래 농구장과 축구장을 지나 천변에 나 있는 자전거 길을 따라 남진했습니다. 안개가 짙게 끼어 저만치 떨어져 흐르는 강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물방울이 총총히 맺힌 길가의 풀잎들은 더욱 파릇파릇해 보였습니다. 금천2배수장을 지나 나주대교 아래에 계류되어 있는 경비행기와 같은 종류의 비행기가 보인 것은 천변에 경비행기이착륙장 및 계류장이 자리하고 있어서였습니다. 다리 위의 첨탑이 안개 속에 가려 보이지 않는 빛가람교를 지나 제방 위로 올라서자 왼쪽 아래 넓게 펼쳐진 평야가 초록색 보리로 뒤덮여 약동하는 봄기운이 더욱 짙게 느껴졌습니다.
10시26분 나주강변저류지를 지났습니다. 강 건너 천변 숲이 시야에 들어올 만큼 안개가 걷히자 몸 안의 냉기도 함께 가셔 손끝에 온기가 되돌아왔습니다. 영산강에서 유일한 강변저류지는 제방보다 1-2m(?) 낮게 축조된 시멘트 둑 너머에 있었습니다. 시멘트 둑을 지나 저류지 쪽으로 4개(?)의 야구장이 연이어 보였습니다. 안개가 짙게 끼어 길이 촉촉하게 젖은 제방 위를 걸으면서 넓은 천변 한 가운데 자리한 섬을 에워싸 흐르는 영산강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영산천이 합류하는 노향교를 건너 영산포로 들어서자 길은 오른 쪽으로 확 꺾여 영산대교로 이어졌습니다. 길이400m의 영산대교에 이르자 영산대교가 주차장으로 바뀐 듯 수많은 차량들이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산포에 발을 들이자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샛노란 산수화가 저를 반겼습니다. 그냥 지나치기가 뭣해 잠시 짬을 내어 길 건너 일본인지주가옥들이 들어선 깔끔한 거리를 둘러본 후 포구로 다가가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황포돛배를 사진 찍었습니다.
영산포는 나주 지역의 영산강 남안(南岸)에 있었던 하항(河港)으로 남포(南浦) 또는 금강진(錦江津)으로 불리기도 했던 영산강의 대표적인 강상포구였습니다. 조선 중기에 남부지방의 조운창(漕運倉)이었던 영산포의 영산창(榮山倉)이 영광의 법성창(法聖倉)으로 이전하면서 영산포는 조운(漕運)의 기능을 잃게 되었지만, 수운(水運)의 적지인 영산포를 중심으로 주변지역 산물들이 모여들어 거래는 계속해서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1904년 목포-영산포 간에 동력선이 운항되면서 급속히 발전한 영산포가 포구의 기능을 제대로 해온 것은 1960년대까지로 그 후는 육로교통이 발달하고 토사퇴적이 늘어나 더 이상 포구로서 기능하지 못했습니다. 1981년 강 하구에 쌓은 영산강하구둑이 준공되자 더 이상 배들이 바다와 강을 자유롭게 다닐 수 없게 되었고, 일제 때 등대까지 설치했던 영산포는 이제는 관광용 황포돛배만 운항되고 있습니다.
11시27분 영산대교보다 먼저 놓은 좁은 다리의 영산교를 건넜습니다. 다리 건너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둔치체육공원 위의 제방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삼영양수장을 지나 천변의 요철광장 쉼터에 앉아 강 건너 산마루에 정자가 들어선 별봉산과 바위 위에 정자가 자리한 영암 바위를 바라보면서 햄버그를 꺼내들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영산강하구둑 55Km'의 폴이 세워진 강둑으로 올라가자 길 건너 저만치에 조선후기의 문신인 미수 허목을 배향하는 미천서원이 보였습니다. 31번 도로를 따라 목포 쪽으로 진행해 안창배수통문에 이르자 그 아래 강변에 올려다 놓은 작은 배 한척이 보였는데, 5분을 더 걸어 다다른 장수배수통문 아래에는 강변은 물론 물 위에도 배가 떠 있어 옛날에 나룻배가 운항되었던 나루가 이 주변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3시 정각 오른 쪽으로 다시로 가는 길이 갈리는 구진교차로를 지났습니다. 회진교를 건너 10여분 진행하다 길 건너 언덕 위의 기오정(寄傲亭)을 들렀습니다.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을 한 기오정(寄傲亭)은 반남박씨의 시조 묘가 있는 나주 회진에 시거(始居)한 박세해(朴世楷, 1615-1698)가 현종10년인 1669년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아래로 영산강이 흘러 풍광이 빼어난 이 정자는 후학들을 가르치고, 또 당대에 걸출한 문인들과 교류했던 곳으로 숙종 19년인 1693년의 회혼연 때에는 최석정, 이건명, 재종제인 박세채, 삼종제인 박세당 등 쟁쟁한 문신들이 시를 지어 축하해주었다 하니 박세해의 인물됨이 어떠했는가가 대략 짐작되었습니다. 때 마침 언덕 아래 영산강에 배 한 척이 지나가 박세해가 이래서 이곳에 정자를 세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다음에 들른 곳은 기오정과는 걸어서 2-3분이면 닿을 수 있는 영모정(永慕亭)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인 영모정이 건립된 것은 중종15년인 1520년의 일입니다. 바로 전에 둘러본 기오정보다 한 세기 반이나 앞서 세워진 이 정자의 이름은 건립자인 조선전기의 문신 임붕(林鵬, 1486-1593)의 호를 따서 지은 귀래정(歸來亭)이었습니다. 영모정(永慕亭)은 명종10년인 1555년 임붕의 한 후손이 정자를 다시 지으면서 개명한 새 이름입니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에 다시 중창한 것이어서 고색창연함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정자가 들어앉은 언덕에 4백년을 넘긴 팽나무와 괴목나무 등아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정자 아래에 창립자 임붕의 유허비인 ‘歸來亭羅州林公鵬遺墟碑(귀래정나주임공붕유허비)’와 조선 전기 명문장가인 백호(白湖) 임제를 기리는 ‘白湖林悌先生紀念碑(백호임제선생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짬을 내어 둘러볼 만 합니다.
내친 김에 영모정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백호문학관도 들러 임제를 기리는 전시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한 전시물에서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는 “기질이 호방하고 예속에 구속받지 않았으며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비판하는 정신을 풍류기남아(風流奇男兒)로 일컬어졌다. 39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삶의 고뇌와 빼어난 정신을 1천여수의 시와 산문, 소설로 남겨 16세기 조선에서 가장 개성적이며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받고 있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임제는 과연 그러한 인물이었기에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李瀷)이 “임백호는 기상이 호방하여 검속당하기를 싫어했다”라고 저서 『성호사설』 에 적어 넣었을 것입니다. 전시물을 둘러보고 조선시대에 창작된 『원생몽유록』에는 이미 읽은 바 있는 원호의 『원생몽유록』 외에 임제가 지은 『원생몽유록』이 더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14시37분 영산교를 지났습니다. 백호문학관을 나와 영산강의 천변길을 걸었습니다. 미세한 진흙이 덮여 있는 천변 길을 걸어 다가간 곳은 오색의 조형물이었습니다. 섬진강살리기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한 자전거길 조성과 하도정비사업 완수를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조형물을 보고 왜 오색인가 하고 품었던 궁금증을 풀었습니다. “여기 나주 천연염색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난 오색빛깔 무명 모시 명주가 유난히 아름다운 것은 영산강 물에 담긴 비밀 때문이기도 하다”라는 서정신의 ‘오색으로 물들다’라는 시문을 읽고서야 여기가 강변에 조성한 천연염색테마공원임을 상기했습니다. 다시 제방길로 올라가 서진하면서 내려다 본 영산강은 유로가 좁아진 것 같은데 강폭이 넓어져 더욱 광활해 보이는 천변공간이 갈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다시 쪽 자금평야의 드넓은 논 뜰은 초록색의 보리가 잘 자라고 있어 봄빛이 완연했습니다. 전장780m의 영산교를 지나 복암배수장에서 영산강의 제1지류인 문평천을 바로 건너지 못하고 한참 올라가 다리를 건너 그 너머 하구로 돌아가느라 족히 1Km는 더 걸은 것 같습니다.
16시3분 죽산보에서 6구간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문평천의 첫 다리를 건너 합수점인 하구로 돌아가자 유로가 많이 넓어진 것으,ㄹ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4-5Km 후방에 설치된 죽산보가 흐르는 강물을 붙잡아주어서인데 넓은 강에 물이 가득 차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 발걸음을 빨리 한 것은 나주를 저녁 6시13분에 출발하는 수원행 열차를 놓칠까봐 걱정되어서였습니다. 강 건너로 멀리 보이는 산줄기가 영산강의 유역을 이루는 동쪽의 둘레산줄기인 호남정맥 같은데, 그 산줄기가 호남정맥의 어느 구간인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시와 왕곡을 이어주는 죽산교에 이르자 0,8Km 가량 떨어져 있는 죽산보가 가깝게 보였습니다. 넓은 천변을 가득 채운 갈대밭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의 물줄기가 또 다시 좁게 보인 것은 유로가 동쪽 제방에 치우쳐 거리가 멀어서였습니다. 죽산보에 이르러 강 건너 죽산수변공원을 둘러보고자 전장 650m의 보 위 다리를 건넜습니다. 전체 다리의 반가량 밖에 보가 설치되지 않은 것은 보를 설치해도 유로의 폭이 강폭대비 반 밖에 안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다리 건너 수변공원에서 해체로 결정 난 죽산보와 보를 채운 영산강 강물을 사진 찍는 것으로써 6구간 종주를 마쳤습니다.
몇 번의 전화 끝에 택시를 불러 다시로 이동했습니다. 다시에서 3-4분을 기다렸다가 나주행 버스를 갈아타 나주역에서 제 시간에 수원행 열차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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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수변공원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서 죽산보 해체를 반대하는 슬로건을 읽었습니다. 영산포홍어연합회의 “영산강 유역 주민 없는 물관리위원 39명의 결정 무효다!”, 나주어민회, 해양구조나주지부, 농촌중앙회지도자회의 “죽산보가 희생양이 될 수 없다. 죽산보는 생태계의 보루다”, 영산포상가 상인회의 “정치적인 논리로 죽산보를 해체하려 들지 말아라!”, 한국유기농협회 광주, 전남도지회나주시지회의 “영산강죽산보는 가동보이므로 절대해체해서는 안된다. 국민의 건강을 위하여 농업용수 현 4,5등급에서 3등급으로 격상하라”는 플래카드 외에는 보 해체를 지지하는 내용의 플래카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환경단체들이 찬성 플래카드를 걸지 않은 것은 기왕에 해체하기로 결정된 것을 가지고 현지 주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보를 해체하면 수질이 좋아져 녹조류가 발생하지 않고 모래톱이 되살아나는 등 자연성이 회복된다는 것만으로는 당국은 위 단체들을 설득시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죽산보를 해체했을 때 얻는 이득이 크다면 바로 그 이득을 향유할 현지주민들이 쌍수로 환영할 터인데 반대하는 것으로 보아 당국의 설득 노력이 부족했거나 보해체로 오히려 손해를 본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싶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어느 쪽이든 정치적인 고려 없이 오로지 해당분야 전문가와 인근 주민들의 의견을 따라야 풀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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