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 석진천교-식영정-일로하수종말처리장
*탐방일자 : 2021. 4. 1일(목)
*탐방코스 : 석진천교-늘러지마을-식영정--몽탄대교-일로하수종말처리장
*탐방시간 : 8시44분-15시24분(6시간40분)
*동행 : 나 홀로
이번 영산강 탐방 길에 만난 역사적 인물은 조선전기의 문신인 최부(崔溥, 1454-1504)입니다. 제가 이 분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해양문학작품인 『표해록(漂海錄)』을 지은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최부의 묘가 무안군의 몽탄면에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어, 이번에 영산강을 따라 걸으며 길가의 묘지들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끝내 최부의 묘는 찾지 못하고, 몽탄면의 늘어지교차로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떨어진 늘어지마을의 커다란 한옥이 눈에 띄어 사진 몇 컷을 찍어왔습니다. 그 사진 속의 한옥 바로 뒤 야산에 최부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뒤적이다 알았습니다.
전남 나주출신의 최부(崔溥, 1454-1504)는 성종18년인 1487년 제주추쇄경차관으로 부임합니다. 이듬해 정월 부친상을 듣고 도해하다가 14일간 표류 끝에 중국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계의 우두외양에 표착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북경을 경유해 그해 7월 환국한 최부는 성종임금의 명을 받고 바다에서의 표류생활과 중국 땅에 표착한 후 조선으로 귀국하기까지 겪었던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표해록』을 저술합니다. 훗날 최부는 반대파로부터 왕명을 받들어 수행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곧장 귀향해 돌아가신 부친을 모시지 않은 것은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며 비난을 받습니다. 최부가 왕명을 받고 『표해록』을 저술한 덕분에 조정은 당대의 중국 명나라 실정을 알 수 있었고, 우리 문학은 15세기에 걸출한 해양문학작품을 갖게 됩니다. 그 당시 최부가 『표해록』을 남기지 못했다면, 1770년 일행 29명과 함께 제주를 떠나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길에 풍랑을 만나 류우큐 열도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장한철(張漢喆, 1744-미상)이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해 내놓기까지 우리는 해양문학 작품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나 멜빌의 『모비딕』 같은 해양소설 이 창작되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는 1960년대 들어 박정희 정부가 수출우선정책을 펴기까지 해양국가가 아닌 대륙국가로 머물러왔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 반만년 동안 우리나라를 가장 오래, 그리고 자주 침공해 강점한 나라를 들라면, 그 첫째는 단연 대륙국가인 중국이고, 그 다음이 해양국가인 일본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중국보다 일본을 훨씬 더 혐오하고 반대합니다. 이는 일본의 조선강점이 중국보다 훨씬 최근의 일인데다가, 스스로를 대륙국가의 국민으로 인식한 나머지 같은 대륙국가로 대국인 중국과는 가까이 지내고자 힘썼으나, 해양국가인 일본은 무지한 국가라면서 무시하고 멀리해왔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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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역에서 지난번에 탐방을 마친 석진천교까지는 영산강의 제1지류인 석진천을 따라 걸었습니다. 제방 길은 공사로 어수선했으나 길은 잘 이어져 무안역 출발 40분만에 석진천교에 도착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이 길을 몰라 일로역까지 택시를 타고 수원행 기차를 타느라 돈과 시간을 낭비했었습니다.
오전8시44분 석진천교에서 영산강 따라 걷기의 8구간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석진천이 영산강과 합류되는 합수점 위에 놓인 석진천교를 건너 차도를 따라 남진했습니다. 목포32Km 전방지점을 거쳐 이산터널 앞에 조금 못 미쳐 언덕 위의 데크전망대에 올라서자 강폭이 엄청 넓어진 영산강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산터널을 지나자 황토랑팬션의 날렵한 외관이 눈을 끌었습니다. 늘어지교차로에 이르기 조금 전에 825번 차도에서 벗어나 왼쪽 길로 접어들어 영산강에 가까이 낸 느러지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강 건너에 나 있는 자전거 길을 따라 걸어야 전망대에 올라가 영산강의 제2경인 ‘무안느러지’의 물도리를 조망할 수 있는데, 저는 그 건너편 길을 걷느라 강 건너 산위에 자리한 전망대를 사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도보 길에서 영산강은 거리상으로는 가까웠지만 갈대밭과 숲에 가려 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굽도리를 다 돌아 직선의 제방 길에 이르고 나서야 새파란 들판 너머로 흐르는 영산강이 다시 눈에 잡혔습니다. 몇 분 후 늘어지교차로를 지나는 중 잠시 멈춰 오른 쪽 늘어지마을의 한옥을 카메라에 옮겨 담아왔습니다.
11시3분 식영정을 들러 주위의 승경을 탐승했습니다. 늘어지교차로에서 이산1교차로까지 강변에 조림한 벚나무들이 화사하게 꽃을 피운 825번 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차가 지날 적마다 차도에 내려앉은 벚꽃들이 흩날리는 흔치 않은 풍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산1교차로를 막 지나 배뫼당촌의 표지석이 서 있는 왼쪽 길로 접어들어 식영정(息營亭)을 찾아갔습니다. 연분홍의 복숭아꽃과 진적색의 동백꽃이 만발한 식영정을 지켜주는 나무들은 여러 그루의 팽나무와 수조나무로 500년 이상 된 고목들입니다. 정면3칸, 측면3칸에 팔작지붕이 얹힌 식영정은 한호(閒好) 임연(林堜, 1589-1648)이 1630년에 지은 정자로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지은 시만도 28명이 지은 92편이나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들은 언덕아래 영산강이 흐르고 강 건너로 꽤 넓은 갈대밭이 펼쳐진 것을 바라본 묵객들이 절로 시흥을 느껴 자연스럽게 읊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문적인 측면만 본다면 식영정은 과연 영산강 유역의 제1정자로 모자람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자 아래 ‘소망의 숲’ 가까이에 작은 배 두 척이 정박해 있고 소설가 문순태 님의 「타오르는 강」에서 일부를 옮겨 적은 큰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비석의 다른 한 면에는 “영산강 제2경 몽탄노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몽탄노적(夢灘蘆笛)’이 몽탄의 갈대피리를 일컫는 것이라면 강 건너 갈대밭이 노적의 적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샛노란 유채꽃이 꽃을 피운 ‘소망의 숲’에서 영산강을 바라보며 햄버그를 드는 것으로써 점심식사를 대신했습니다.
‘소망의 숲’을 산책한 후 825번 도로로 복귀해 20분가량 따라 걸어가 석정포공원에 다다랐습니다. 석정포는 1970년대까지 주변 몽강리 일원에서 생산되는 옹기와 질그릇, 백자와 청자기를 실어 나르고, 점토와 고령토 등 생산원료를 들여오는 수송의 요충지로, 수송선인 돛배들이 쉬어갔던 포구였다고 합니다.
13시1분 몽탄대교를 지났습니다. 석정포공원을 둘러본 후 한국농어촌공사명산양수장과 기와지붕에 건물외관이 몽땅 흰색으로 도장된 라온뜨락팬션을 지나 몽탄대교에 이르기까지 45분이 걸렸습니다. 전장 700m의 몽탄대교에 이르자 영산강종주자전길을 알리는 종합안내판이 다시 보여 반가웠습니다. 지난 번 동강대교를 건넌 후 영산강 서쪽의 825번 도로를 따라 걷느라 강 건너에 낸 자전거종주길을 벗어나 얼마간 불안했었는데, 여기 몽탄대교에 이르러 다시 자전거길을 따라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전거길 종합안내판을 지나 이내 다다른 영산대교는 몽탄대교보다 더 길고 깔끔해보였습니다. 영산강 서안의 자전거 길은 삼포천과의 합수점까지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직선길이어서 자전거길 옆에 새롭게 도로를 내는 공사가 진행되지 않았다면 이 길을 걷는 것이 퍽이나 단조로울 뻔 했습니다. 안내판에 적힌 대로 자전거 길을 우회해 다른 길로 가야 하는 것을 그리하지 않아 고생 좀 했습니다. 영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몇 지천은 아직 개통되지 않은 공사 중인 다리로 건넜지만 하천 폭이 좁은 작은 지천은 그런 다리도 없어 공사장에 쌓인 흙더미 위를 걸어 건너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15시24분 일로하수종말처리장에서 8구간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언제라도 비를 뿌릴 듯한 기세인데다 자전거길 곳곳이 공사로 길이 끊겨 긴장됐습니다. 삼포천 합수점을 지나 영암천과의 합수점까지는 정남쪽으로 제방길이 곧게 이어졌지만, 저 멀리 우뚝 솟은 영암의 월출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걷는 길이어서 마냥 단조롭지는 않았습니다. 몽탄대교에서 소댕이나루까지 강 양쪽으로 펼쳐진 너른 평야는 제방이 축조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영산강 서안 너머 무안 쪽의 꽤 넓은 들판에는 나주벌을 지나며 보아온 파릇파릇한 보리들이 자라지 않아 조금은 썰렁해 보였습니다. 강 건너 동안 너머 나주와 영암 쪽 들판은 강둑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지도상으로는 무안 쪽 들판보다 더 넓어 보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영산강 동쪽의 너른 들판 상당 부분이 태양광발전단지로 바뀌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한 세대 위 선배들이 하구언을 축조하고 곳곳에 제방을 쌓아 바다를 농토로 만드느라 고생한 보람도 없이 농토를 태양광발전단지로 전환하는 것이 그대로 놓아두고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친환경적이라는 데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화산백련지 쉼터를 지나 차도가 지나가는 일로하수종말처리장 앞에서 8구간 탐방을 모두 마치고 택시를 불러 일로역으로 이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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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의 『표해록』을 읽고 깜짝 놀란 것은 이 분의 백두산에 대한 정보가 매우 상세하다는 것입니다. 최부가 중국의 소흥부에 도착해 만난 명의 파총관에게 조선의 산천을 설명하면서 백두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장백산은 동북방에 있는데 백두산이라고도 합니다. 가로는 천여리로 뻗쳐 있고, 높이는 200여리 되는데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어 둘레가 80여리 됩니다. 동쪽으로 흘러서 두만강(豆滿江)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서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북으로 흘러서 속평강( 速平江)이 되고, 서북으로 흘러서 송화강(松花江)이 되는데 송화강 하류가 곧 혼돈강(混同江)입니다.”
백두산이 조선의 영토가 된 것은 세종 때인 15세기 초반입니다. 이 산을 자유롭게 오를 수 있었던 것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이후의 일로, 백두산의 유산기도 1712년에 처음으로 선을 보입니다. 나주에서 태어나 영산강을 바라보며 자랐을 최부가 이토록 백두산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것으로 보아 최부의 우리 산하에 대한 지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생각지 못한 표류로 체득한 바다에 관한 지식도 상당했을 것이기에 최부의 『표해록』이 오늘도 읽혀지는 것이다 싶었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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