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죽산보-동강대교-석진천교
*탐방일자:2021. 3. 18일(목)
*탐방코스:죽산보-나주영상테마파크-금강정-운산리데크길
-동강대교-무안양수-석진천교
*탐방시간:10시45분-15시36분(4시간51분)
*동행 :나 홀로
영산강의 강줄기를 따라 걸으며 의외다 싶은 것은 저처럼 두 발로 걸어가는 사람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도심의 강변을 지날 때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도심만 벗어나면 그 많던 도보꾼들은 거의 다 사라지고, 자전거꾼들만 주로 눈에 띕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두 발로 걷는 저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훨씬 더 젊다는 것입니다.
발원지를 출발해 강줄기를 따라 강 하구까지 같은 길로 간다면 두 발로 걸어가든, 자전거를 타고가든 이동한 거리는 발원지의 강물이 강 하구까지 흘러내려가는 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직 다른 것은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뿐입니다. 제 걸음으로는 시간당 평균해서 이동한 거리는 3Km에 불과합니다만, 자전거로는 한 시간에 20Km는 달릴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강물의 유속은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지만, 걷는 것보다는 빠르고 자전거보다는 늦을 것 같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강물보다 더 빨리 내달리고자 하는 젊은이들에 들려주고 싶은 시는 정호승 시인의 아래 시 「강물」입니다.
<강물>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사랑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
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
흐느끼는 푸른 댓잎하나
날카로운 붉은 난초잎 하나
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
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정호승 시인은 그의 수필 「봄의 강가」에서 밝혔듯이 “지는 꽃을 보고 강가로 나가 느린 강물을” 바라보면서 위 시를 지은 것 같습니다. “강둑에는 사람들이 급하게 달리기를 하며 지나가고, 강변의 고가도로 위에는 자동차들이 재빠르게” 달리고 있지만, “아무도 저 느린 강물의 내면의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시인은 사람들에게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고, 빠름은 부지런함이 아니다”라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위 시를 지었다는 것이 제 해석입니다. 젊은이들에는 인생의 시간이 저 강물처럼 너무 더디게 흘러 자전거를 타고 강물보다 더 빨리 달리고 싶겠지만, 나이 들면 인생이라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강물보다 더 천천히 움직이려고 저처럼 두 발로 걸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고 빠름은 부지런함이 아니니 젊은이들도 달리다가 힘들면 쉬어 가고 때때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분노하지 말고 천천히 매듭을 풀며 살아가라고 시인이 이야기한 것으로 위 시를 감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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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역에서 택시를 대절해 나주읍성의 4대문과 나주목의 관아인 금성관을 둘러보면서 나주가 유서 깊은 도시임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나주에서 죽산보까지는 시내버스로 이동했습니다. 오전9시50분에 버스터미널을 출발하는 503번 버스에 올라 다시를 거쳐 10시 반이 조금 지나 죽산보에 도착했습니다. 13일 만에 다시 찾은 죽산보의 수변공원은 보 해체를 반대하는 플래카드가 몇 개 걸려 있었을 뿐 관광객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새 수변공원은 나무에 물이 오르고 햇살도 따사로워져 봄빛이 완연했습니다. 공사 중인 전망대를 다 올라가지 못하고 계단의 중간쯤에서 영산강의 제4경인 수변공원의 전경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선박이 어떻게 보를 지나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이번에 죽산보문화쉼터안내판을 보고 완전히 풀었습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보에 접근한 선박은 하류수문개방 및 선박 진입-하류수문하강-수위조절-상류수문개방-선박진출 등 5단계를 거쳐 보를 통과한다고 합니다. 이에 소요되는 시간이 30분이라고 하는데 배안에서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10시45분 해체하기로 결정된 죽산보에서 7구간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영산강하구둑까지 남은 거리가 54Km라고 하니 세 번은 더 걸어야 영산강 따라 걷기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왼쪽 아래에 죽산보오토캠핑장이 자리한 영산강 좌안(左岸)의 왕곡제 제방길을 따라 걸어 수위관측소와 송죽배수통문, 그리고 공산양수장을 차례로 지났습니다. 왼쪽으로 위생매립장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강줄기는 오른 쪽으로 굽어 산 밑으로 이어졌습니다. 산 위의 나주영상테마파크가 가깝게 보이는 다야선착장에 이르자 강물을 가르고 쾌속으로 운항하는 작은 배가 눈에 띄었습니다. 33만평 규모의 드넓은 다야뜰생태공원을 꽉 채운 갈대밭을 바라보면서 과연 수변생태계의 특징은 무엇인지 새삼 궁금했습니다. 옛 고구려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으로 평가받는 산 위의 나주영상테마파크는 갈 길이 멀어 올려다만 보고 그냥 지나쳐 강 건너 야산의 바위 위에 자리한 석관정(石串亭)이 눈에 잡히는 자전거전용도로해제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석관정은 조선시대 무인이었던 함평 이씨 석관(石串) 이진충이 퇴임 후 1530년에 세운 정자입니다. 고막원천이 합수되는 영산강 우안(右岸)의 절벽 위에 자리해 풍광이 빼어나고, 배들이 돌아와 정박할 수 있는 ‘석관귀범(石串歸帆)’의 나루터가 있어 영산강 제3경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정자와 인접한 이별바위는 전쟁 중 소집된 남편이나 연인을 따라온 여인네들이 합류점의 넓어진 강을 건너지 못하고 이별하거나 강물로 투신했다고 합니다.
12시1분 금강정에 올랐습니다. 강 건너 석관정을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은 신곡리 마을 어귀의 금강정(錦岡亭)을 들러 풀었습니다. 봉곡 김시중의 노년 휴식을 위해 아들 김상수가 19세기경에 세운 것으로 알려진 이 정자는 단층 팔작지붕의 골기와 건물로 정면3칸 측면2칸의 대칭형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강 건너로 석관정이 잘 보이는 금강정은 안내판에 소개된 대로 이민선의 기문과 임철주의 상량문, 그리고 14수의 원영시가 쓰인 편액들이 보였습니다. 햄버거로 요기를 한 후 일직선으로 나있는 공산제 제방길을 따라 남서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제방의 왼쪽 아래는 그루갈이로 심은 보리들로 논들이 초록색을 띄었고, 오른 쪽 아래는 누런색의 갈대들이 강변에 가득히 들어서 제방을 경계로 좌우의 색대비가 분명했습니다. 논의 그루갈이로 보리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에 못자리를 만들어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移秧法)이 보급되고 나서라 합니다. 직선의 제방이 끝나는 곳에서 오른 쪽으로 휘어 흐르는 강물을 따라 걷다가 산 밑 데크 길의 한반도전망대에서 휠체어에 앉아 딸과 함께 강물을 조망하는 중년의 여성분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전망대에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자 진가민가 했던 섬이 확연하게 보였습니다. 이 큰 섬을 사이에 두고 흘러온 두 갈래의 강물이 다시 합쳐져 한 길로 데크 길 바로 아래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14시18분 동강교를 건넜습니다. 데크 길이 끝나자 드넓은 늪지가 펼쳐졌습니다. 이 늪지를 뒤덮은 수변식물은 다야생태공원의 갈대보다 훨씬 키가 작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섬진강 강줄기를 따라 걸으면서 여러 번 보았던 달뿌리가 아닌가 합니다. 길 왼쪽으로 아주 짧은 제방이 보여 저수지이겠다 싶어 올라가보았는데 뜻밖에도 논과 밭이었습니다. 이 제방은 저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영산강의 범람을 막아주는 둑이었습니다. 이 둑을 보고나자 김제의 벽골제는 저수를 위해서가 아니고 바닷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축조했다는 이영훈교수의 주장이 결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닭똥이 야적된 밭을 지나면서, 달걀만 삶아 먹을 수 있다면 닭똥보다 냄새가 훨씬 더 지독한 어떤 것도 얼마든지 기꺼이 맡을 의사가 강했던 지질이도 가난한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동강교에 이르러 자전거 길과 헤어진 후 다리를 건너 함평 땅으로 발을 들인 곳이 곡창교차로입니다. 영산강하구둑까지 38Km 남았음을 알려주는 안내폴을 사진 찍고 나서 왼쪽 함평천 위에 놓인 함평천교를 건너 825번 도로를 따라 목포 쪽으로 남진했습니다. 영산강 우안(右岸)의 825번 차도를 따라 걸어 함평군의 엄다면을 지나자 무안군의 몽탄면이 이어졌습니다.
15시36분 석진천교를 건너 7구간 탐방을 끝냈습니다. 몽탄면에 발을 들여 시작된 무안군의 영산강 따라 걷기는 계속하여 남쪽으로 이어갔습니다. 몽탄양수장에서 잠시 차도를 벗어나 강 건너 곡강평야가 보다 잘 보이는 제방길을 따라 걷다가 무안양수장 앞에서 차도로 복귀했습니다. 산자락을 에돌자 비닐하우스로 뒤덮인 강 건너 곡강평야가 더욱 가깝게 보였습니다. 점차 강폭이 넓어지고 수면이 잔잔해 영산강 하류가 시작되는 몽탄대교가 멀지 않았구나 했습니다. 차도 아래 강안(江岸)의 버드나무들이 연초록색을 띄고 있어 봄이 완연해 보였으나, 봄바람이 불지 않아서인지 물결이 일지 않아 수면은 잔잔했습니다. 작은 배 한 척이 정박해 있는 북적포나루를 지나 이번 탐방의 끝점인 석진천교를 건넜습니다.
아무 탈 없이 7구간 탐방을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싶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제가 와 달라고 요청한 석진천교가 어디 있는지 무안의 택시기사분이 몰랐습니다. 이분이 일러준대로 인근마을로 자리를 옮겨 마을이름이 학산2리임을 확인한 후 택시를 다시 부르느라 예매한 기차를 놓쳐 다음 열차를 타야했습니다. 기사분이 알려준 대로 일로택시를 불러 일로역으로 이동하느라 택시비만 2만원이 넘겨들었습니다. 뭔가 아니다 싶어 집에 와서 지도를 펴놓고 자세히 살펴본 즉 무안역은 걸어가도 1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것 같았습니다. 그냥 무안역으로 걸어갔으면 택시비도 안 들고 제시간에 기차를 탈 수 있었는데 바보같이 돈과 시간을 낭비한 것은 사전에 철저히 점검하지 않아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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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은 자작시 『강물』에서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라고 읊었습니다. 흐르는 것이 물이니 그대로 두라는 말은 시적 표현으로는 훌륭할 수 있지만, 한 나라의 정책기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 말이 참이라면 물을 다스리는 치수(治水)는 모두가 헛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산강 수계에는 댐 5개소, 보 2개소, 농업용저수지 23개소, 홍수조절지2개소, 강변저류지1개소 등이 있습니다. 이밖에 배수통문과 양수장은 제가 본 것만도 꽤 많습니다. 이런 수리시설들이 제대로 작동해 영산강은 이제껏 큰 탈 없이 계속해 흐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수량과 수질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영산강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이 강물을 이용하거나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 최대한 자연친화적으로 강을 관리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싶어 사족을 달았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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