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밤마다 스스로의 몸을 조금씩 조금씩 깎아내고 있는 그믐 달빛은 스산하게 흐렸다. 달빛은 어둠을 제대로 사르지 못했고, 어둠은 달빛을 마음대로 물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달빛과 어둠은 서로를 반반씩 섞어 묽은 안개가 자욱히 퍼진 것 같은 미명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위 글로 시작되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읽노라면 우리 말글을 이토록 아름답게 다듬은 작가 조정래 선생에 존경의 마음이 절로 입니다. 중학생 때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의 기미독립선언문을 배우며 도시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독립선언문과 공약 3장을 달달 외운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육당 최남선 선생이 쓴 글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 백성들이 알아먹게 써야 하는데 거의다가 한자 단어로 된 이런 글로 어떻게 독립선언을 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단언하건대 기미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재야사학가 이이화선생의 지적처럼 우리 선조들이 뜻도 모르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에 감동해서가 아니고, 일제의 만행에 대한 그동안 쌓인 분노가 고종의 장례식을 맞아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과 글을 갈고 닦은 분들은 누가 뭐라 해도 단연 소설가들입니다. 그 후 홍명희, 최인훈, 이청준 선생 등의 뛰어난 소설가들이 우리 말글을 갈고 닦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독립선언문과 같은 난해한 글들을 명문장으로 받들며 열심히 자전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태백산맥”을 통해 묻혀있던 우리의 말글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새롭게 다듬어낸 공만으로도 선생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소설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습니다. 선생의 뛰어난 글 솜씨에 매료되어 자칫 공산주의와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긍정적 태도를 갖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소설이 출간되던 1980년대가 반문명적인 폭거로 집권했던 5공화국 때여서 많은 사람들이 이 정권에 반하는 것은 모두가 정의라는 생각을 얼마고 갖고 있던 때였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한번 잡으면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어 밤을 새가며 읽으면서도 작가와 대립적인 입장에 서서 비판적으로 읽어가느라 엄청 힘들었습니다. 왼쪽날개를 이토록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게 보여주는 선생과 겨룰만한 분이 오른 쪽 날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가들 중에는 왜 없을까 하고 매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미 검찰에서 오랜 숙고 끝에 무혐의로 처리했듯이 선생의 “태백산맥”이 좌경불온서적으로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선생이 의도하지는 않았다 해도 이 소설을 읽고난 후 많은 분들이 왜 그동안 포스터에 빨간 색깔을 이렇게 적게 썼냐며 파란 색의 크레파스를 내다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것 같아 얼마고 불안했습니다. 6.25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 전체를 비극의 바다로 침몰시킨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이유로든 남쪽의 집권세력보다 더 도덕적인 것처럼 미화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저의 소견이었기에 “태백산맥”을 다 읽고나서 이 소설을 비판한 어느 한 분의 “소설 태백산맥 그 현장을 찾아서”를 사 읽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연 이틀 종주한 조계산-석거리재-무남이재 구간의 호남정맥 연봉들은 50-60년 전에 소설에서 묘사된 산 아래 해방구에서 좌우의 대립으로 수많은 지역주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던 산봉우리들입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해방구였던 인근 지역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당시의 고통스러운 흔적은 온데 간 데 없어지고 이제는 다들 남부럽지 않게 살만하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를 보고 당시에 억장이 무너졌을 호남정맥의 연봉들도 이제는 기뻐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석거리재에서 시작한 8구간 종주를 무남이재에서 마치고 1시간 20분 동안 대곡리 저수지와 논 뜰을 거쳐 조성 역까지 천천히 걸어가며 “태백산맥”의 현장들을 느긋하게 보기도 하고 소설의 몇 장면들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경향이 어떠했든 좌우이념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민중들이 겪은 참담한 고통의 실상을 “태백산맥”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이 없기에, 이번의 호남정맥 종주는 “태백산맥”의 현장을 지났다는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뜻 깊은 산행이 되었습니다.
작은 소도시 조성시내는 면소재지로 거리가 깨끗하고 건물들도 깔끔해 “태백산맥”의 잔흔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해 갈등이 극심했던 이 소도시를 진정으로 해방시킨 것은 공산주의의 북이 아니고 자유민주주의의 남이라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했습니다. 북의 해방구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호남정맥 종주 길에 짬을 내어 들러볼 수도 없을 뿐더러 어쩌면 오랜 흉년으로 기근이 들어 북한의 도시들처럼 외국의 원조로 연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코스인 존제산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안도감에다 승리한 역사의 현장에서 사 마시는 맥주가 더 입에 당겨졌습니다. 그리고 여기 조성 땅이 점점 살갑게 느껴졌습니다. 이만하면 소설 태백산맥도 이제는 긴장의 끈을 놓고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족 한마디는 소설의 제목에 대해섭니다.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은 태백산맥이 아니고 호남정맥입니다. 선생께서 이 소설을 썼을 당시에는 산맥만 있었지 대간과 정맥이 알려지기 전이어서 설사 호남정맥으로 이름을 짓고 싶어도 그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호남정맥이라 하더라도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북으로 내닫는 태백산맥이 훨씬 장대해 남북의 갈등을 주제로 하는 대하소설의 제목으로는 호남정맥보다 태백산맥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한마디를 사족으로 달면서 이 글을 맺습니다.
*위 글은 2007년7월22일 호남정맥의 석거리재-존제산-무남이재 구간을 종주한 후 남긴 산행기의 일부를 따와 2021년6월19일 재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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