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자:2008. 5. 4일(일)
*소재지 :전남순창및 정읍/전남장성
*산높이 :백암산741m, 내장산764m
*산행코스:월성리삼거리-곡두재-백암산-소둥근재-내장산-유군치-내장사
*산행시간:9시15분-18시5분(8시간50분)
*동행 :나홀로
어제(2008. 5.4일)는 모처럼 흥건히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백암산-내장산 구간의 호남정맥을 종주했습니다. 입하(入夏)를 며칠 앞두고 내리는 봄비는 곡우(穀雨)임에 틀림없기에 웬만하면 고맙고 반가운 마음으로 비를 맞으며 끝까지 걷고자 했습니다. 처음 4-5분간은 지난주에 밀재-곡두재를 종주하며 만났던 봄비 정도려니 생각해 땀도 식힐 겸 오히려 잘됐다 했는데 이런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이내 바람이 거칠어지고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뿌리기 시작하자 곡우려니 했던 이번 비가 이참에 아예 일찌감치 여름을 불러들이자고 작정하고 내리는 소낙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빗줄기가 조금 더 굵고 강하속도가 조금만 빨랐다면 여름비와 다를 바 없다 싶었던 것은 이 비가 불러들인 천둥소리였습니다. 처음에는 구름 위를 비행하는 여객기 소리인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인지 식별이 잘 안됐는데 소리가 더 커지고 더 잦아지자 천둥소리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졌지만, 산행 중 이런 비를 한두 번 만난 것도 아니어서 이내 평정을 되찾고 산행을 계속했습니다.
아침9시15분에 월성리삼거리를 출발했습니다. 곡두재-백암산-소둥근재를 거쳐 내장산의 최고봉인 신선봉에 15시40분에 도착했습니다. 정상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이내 출발해 호남정맥을 따라 서진했습니다. 문필봉과 연자봉을 지나 장군봉에 오르자 빗줄기가 굵어지고 천둥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습니다. 비바람이 거세 장군봉에서 쉬지 못하고 서둘러 유군치로 내려갔습니다. 깊숙한 안부인 유군치에 내려선 시각은 산행을 시작한지 8시간이 지난 17시15분으로, 다리도 아프고 몸도 지친듯 했습니다. 더 이상의 산행은 무리다 싶어 추령 행을 포기하고 유군치에서 왼쪽 아래 내장사로 하산했습니다.
유군치에서 추령으로 직진할 것인가, 아니면 왼쪽 아래 내장사로 내려설 것인가는 벌써 마음속으로 결정을 했으면서도 재빨리 움직이지 못한 것은 자기합리화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산행을 계획할 때부터 추령까지 진출하겠다고 결정한 일을 비가 좀 많이 내리고 바람이 거칠게 분다고 해서, 포기하고 내장사로 내려가는 것이 뭔가 모르게 심약해 보이는 것 같아 바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내적갈등을 해소한 것은 내장사로 내려갈 만한 새로운 명분이었습니다. 다음 종주산행이 추령에서 개운치까지 6시간이 채 안 걸리는 짧은 구간이어서 유군치에서 출발한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겠다는 것과, 내장사로 내려가 함께 걸은 공원길을 먼저 간 집사람을 떠올리며 다시 걸어보고 싶다는 새로운 명분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자기합리화과정을 거친 후에야 마음 편히 내장사 길로 내려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기합리화는 때때로 산행을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갈림길에서 어느 한길을 택해 한참을 갔는데도 표지기가 나타나지 않으면 일단은 멈춰 서서 이 길이 맞는가를 점검해야 맞습니다. 그럼에도 그냥 진행하는 것은 얼마만큼 고민해 택한 길인데 제 길이 아닐 리가 없고 조금만 더 가면 틀림없이 표지기가 나타나리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설사 멈춰 서서 지도를 꺼내보고 산행기를 읽은 후에도 지도가 틀렸고 산행기가 잘못 기록되었다고 믿으며 그대로 진행하다가 결국은 큰 알바를 하고나서야 잘못된 자기합리화로 사서 생고생을 했음을 인정한 일도 몇 번 있었습니다.
자기합리화가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위한 수단으로 쓰일 때에는 상당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엘리엇 에런슨과 캐럴태브리스가 그들의 공저 “거짓말의 진화”에서 지적한 거짓말의 진화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에서 수입한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고 믿어온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과학적인 증거를 만나게 되면 인지부조화를 겪게 됩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입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믿어온 사람들이 모 방송국의 PD수첩 프로그램을 보았다면 엄청 심한 인지부조화를 겪었을 것입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이라고 확신한 어느 산 꾼이 이제껏 걸어온 길이 틀린 길이라고 알려주는 이정표를 보고나서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같은 것입니다. 이 경우 우리들의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과학적인 증거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조작된 것이라며 그 증거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증거를 찾아나서는 일입니다. 다시 출발지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장난으로 표지목을 돌려놓았다고 자기의 결정을 합리화하며 그대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은 지도가 잘못됐다거나 나침반의 바늘이 고장 났다며 건방을 떤 일이 있는데 이 모두가 잘못된 자기합리화의 결과였음을 실토합니다. 자기합리화과정이 길면 길수록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영원히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재빨리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용기와 유연함이 생활인의 지혜이다 싶어 자기합리화에 대한 제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
*위 글은 2008년5월4일 곡두재-백암산-소둔이재-내장산-장군봉-유군재 구간의 호남종맥을 종주하고 남긴 산행기 중 일부로, 2022년9월25일 일부 가필정정을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2022년9월24일 대기저수지-내장산신선봉-내장사 코스로 산행 중 찍은 것입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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