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성동사거리-낙하리-반구정(평화누리길 7코스)
*탐방일자:2019년1월30일(수)
*탐방코스:성동사거리-프로방스-만우천하구-오금리-낙하리
-내포리-문산천하구-반구정
*탐방시간:10시7분-17시48분(7시간41분)
*동행 :문산중학교 황규직동문
조선초기의 문신인 성현(成俔, 1439-1504) 선생은 그의 글 「게으른 농부(惰農說)」에서 파주들판을 다녀온 것을 아래와 같이 적었습니다.
“경인년(1470년) 큰 가뭄이 들었다. 내가 예전에 가을걷이를 할 무렵 파주들판에 간 적이 있다. 논밭을 살펴보니 반은 황량하게 묵었고 반은 농사가 잘 되어 있으며 반은 곡식이 드문드문하고 반은 곡식이 빽빽했다. 어떤 사람은 뻣뻣이 고개를 든 채 하늘만 바라보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한 듯 목이 메인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노인들에게 물었더니 황량하고 곡식이 드문드문한 곳은 뻣뻣이 고개를 들고 하늘만 바라보던 사람이 소용없다고 여겨 김매지 않았던 곳이요, 농사가 잘되어 곡식이 빽빽한 곳은 술에 취한 듯 목 메인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이 마음과 힘을 다해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든 곳이었다.”
중학교동창 황규직군과 함께 평화누리길을 탐방하는 길에 549년 전 성현 선생이 다녀간 파주들판을 걸었습니다. 탄현면의 성동사거리에서 시작하여 문산읍의 반구정에서 끝나는 이번 코스는 ‘헤이리길’로 명명된 평화누리길 7코스로 그 전장이 21Km에 달합니다. 성현 선생이 다녀간 것은 중간에 자유로가 가로막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일이어서 파주들판이 임진강변까지 그대로 이어졌을 것이기에 지금보다 훨씬 넓게 보였을 것입니다.
오전10시7분 평화누리길 7구간이 시작되는 성동사거리의 평화누리길사무소를 출발했습니다. 아침 7시에 산본 집을 나서 전철로 금촌역까지 가는데 2시간이 걸렸습니다. 9시가 조금 지나 금촌역에서 친구를 만나 900번 버스를 타고 성동사거리로 향했습니다. 성동사거리를 50-60m 가량 앞에둔 맛고을 정류장에서 하차해 바로 옆 7코스의 출발점에서 ‘평화누리길’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은 후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평화누리길 관리를 맡고 있다는 한 분이 준 표지기를 배낭에 꽂은 후 왼쪽 위 프로방스로 이어지는 언덕길로 들어섰습니다. 음식점이 즐비한 프로방스 거리는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오가는 사람들이나 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갯마루를 막 넘어 왼쪽으로 꺾어 자유로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임진강과 그 건너 북한 땅이 잘 보여 그 정경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자유로를 따라 걷는 좁은 차로는 그 바닥에 '농기계 우선'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농기계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대형 덤프트럭이 자주 지나가 그 때마다 길옆으로 비켜서야 했습니다. 지난 번 교하 땅을 지날 때 사진 찍었던 재두루미가 길옆의 논 뜰 곳곳에서 보여 인적이 비교적 드문 임진강변 논 뜰이 재두루미가 겨울을 내기에 최적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5백여 년 전 성현이 다녀간 여기 파주들판에도 이맘때는 재두루미가 다녀가지 않았겠나 싶기는 하지만, 그동안의 기후변화가 어떠했는지 몰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농번기에 영농불편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전거 이용 시 주의해달라는 파주시청의 안내판이 무색하게 누리길을 지나가는 자전거가 단 한 대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자유로 바로 옆의 '농기계 우선' 길에 자전거거치대와 쉼터가 조성된 것으로 보아 봄이 오면 자전거동호인들이 이 길을 많이 찾을 것 같습니다. 이 길을 따라 얼마만큼 진행하다 동쪽으로 들어가 만우천 하구에 이르렀습니다. 탐방 시작 2시간이 채 안되어 도착한 만우천의 오금교를 건너면서 바로 아래 하천에 생긴 조그만 모래톱을 보았습니다. 한강의 보를 개방해 드러난 모래톱에 새들이 모여든 것을 보고 많은 환경단체들이 4대강의 보가 망친 자연성을 회복했다고 자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를 개방해 모래톱이 보일 정도로 물이 빠졌다면 이 보가 과연 홍수와 가뭄의 피해를 막아주는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오히려 걱정됐습니다. 만우천을 건너 거의 직선으로 축조한 이 개천의 둑을 따라 4-5백미터 걷다가 왼쪽 마을 안으로 낸 오금로 길로 마을을 지나 고개를 넘었습니다. 다시 자유로 쪽으로 이동해 그 옆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얼마 후 다다른 문지리의 아쿠아랜드 입구 공터에서 샌드위치로 요기를 한 것은 주차장이 텅 빈 것으로 보아 안으로 들어가 보았자 영업을 하지 않아 허탕 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아쿠아랜드 입구에서 자유로를 따라 걸으면서 길 건너 임진강을 사진 찍고자 했으나 자유로와 임진강 사이에 제법 넓은 평야가 자리해 도도히 흐르는 임진강의 물줄기를 볼 수 없었습니다. 자유로 밑으로 몇 군데 임진강으로 통하는 지하도가 나 있었지만 군사목적상 통행을 막아 임진강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자유로 옆에 낸 시멘트도로를 따라 걷다가 낙하리IC를 조금 못가서 ‘자유로레져사계절’을 들러 김치찌개를 시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30년 전쯤 파주로 이사와 낚시터와 음식점을 꾸려나간다는 50대 후반의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은 엉뚱하다 싶었던 것은 바닷물을 사다가 부어 바다고기 낚시터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다시 탐방 길에 올라 낙하리경로당을 지났습니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흔히 보는 폐가와는 달리 튼튼하게 잘 지은 벽돌집이 버려진 것을 바라보면서 조금만 손보면 누구라도 들어와 살만하다 싶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 쪽 벽에 색색의 주먹만한조형물을 붙여 놓은 자유로 옆길을 얼마간 따라 걸어 쓰레기위생처리시설이 들어앉은 `파주시환경센타에 이른 시각이 14시44분이었습니다.
파주환경센타에서 10여분을 걸어가자 왼쪽으로 자유로 건너편에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480km임을 알려주는 '통일로 가는 경기도' 광고판이 보였는데. 부산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백두산을 북한 땅으로 오를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반시간 가까이 더 걸어 다다른 사거리에서 ‘용제성현묘역 1.2Km'의 작은 표지판을 보았습니다. 성현선생은 1470년 여기 파주들판을 찾아와 「게으른 농부(惰農說)」라는 글을 남긴 분이어서 한번 묘를 들러보고 싶었지만, 해떨어지기 전에 반구정에 도착해야 해 포기했습니다. 발걸음을 빨리 해 내포리 들판을 지나는 중 때마침 논뜰에 앉아있는 재두루미들이 떼를 지어 비상해 운 좋게도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문산천이 임진강과 만나는 하구의 문산대교에서 서쪽으로 1Km가량 떨어져 있는 임월교를 건너면서 이쯤에 있었을 하동포구를 떠올렸습니다. 문산에서 시집온 큰형수님으로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수많은 고깃배가 문산읍내 하동포구를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동행한 친구에게서 노무현대통령 때 '통일로 가는 경기도' 광고판 뒤 야산 바로 아래 강변에 포구를 개발하고자 했으나 흐지부지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꼭 포구가 필요하다면 통일 후 하동을 복원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잘됐다 했습니다. 임월교를 건너 문산시내로 들어서면서 잠시 다른 길로 들어섰으나 이내 제 길을 찾아 당동어린이공원에 들어섰습니다. 생각지 못한 산길을 지나고 당동1교를 건너자 어느새 해가 많이 불그스레해졌습니다.
17시48분 반구정입구에서 2구간 임진강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산길을 지나 만난 지방도에서 또 다시 길을 잘못 들어 10분 가까이 지체되는 바람에 반구정 정자에 앉아 느긋하게 낙조의 정경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이러다가는 해떨어지기 전에 반구정에 도착하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렀습니다. 산에서 내려선 차도를 따라 남쪽으로 10분가량 걸어 반구정에 도착했을 때는 해는 넘어가고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해 강변의 정자를 찾아가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장장21Km를 걸어 다다른 반구정에서 13km 거리의 다음 구간이 시작되는 지점과 길을 확인했습니다.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15분가량 기다려 마을버스를 타고 문산 시내로 들어가 저녁을 함께 든 후 문산역으로 이동, 전철로 귀가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게으른 농부(惰農說)」는 성현선생이 파주들판에서 목도한 광경을 토대로 그럴싸하게 지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가뭄이 들었지만 부지런한 농부는 계속 농사를 지어 결국 수확을 했고 게으른 농부는 손을 놓고 있다가 굶주리게 되었다는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선생이 이 글을 쓴 본 뜻은 두 농부의 이야기를 선비의 공부에 비유해 공부하는 선비가 농부만도 못해서야 되겠냐며 선비의 면학을 촉구하는데 있었다고 합니다.
성현 선생의 빼어난 문학적 역량이 결실한 것은 1525년(중종20년)에 간행된 선생의 저서 <용재총화(傭齋叢話)>입니다. 필기잡록류(筆記雜錄類)로 분류되는 이 책은 고려에서 조선의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유명인들의 일화나 해학담, 일반대중의 소화(笑話) 등 다양한 설화를 담고 있어 민속학이나 구비문학연구에 크게 소용되어 자료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민간풍속이나 역사, 지리, 문학 등 문화전반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는 유용한 고전문헌이라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일러주고 있습니다.
선생은 연산군이 즉위한 후 공조판서가 되고 대제학을 겸임하기도 했으나, 죽은 뒤 몇 달 안지나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를 당했습니다. 그 뒤에 신원되어 청백리에 녹선되는 등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이 <용재총화>를 저술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분이 파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선생이 파주와 맺은 인연은 파주 들판을 다녀온 글을 남기고 또 파주 땅에 묻힌 것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앞으로 선생을 파주의 인물로 기리고자 합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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