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 :장남교-학곡리고인돌-숭의전지(평화누리길 10코스)
*탐방일자:2019. 3. 16일(토)
*탐방코스:장남교(원당리)-장남면사무소-사미천징검다리 -학곡리고인돌
-숭의전지
*탐방시간:9시45분-17시정각(7시간15분)
*동행 :문산중 황규직/ 황홍기동문
이번에 중학교 동창들과 함께 임진강을 따라 걸은 곳은 군사분계선과 면해 있는 경기도의 연천군입니다. 제가 태어난 파주와 인접한 연천 땅을 그동안 차로 몇 번 다녀왔지만, 두 발로 걸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3회에 걸쳐 연천 땅의 임진강을 따라 걸으면 남한 땅의 임진강 따라걷기를 마무리하게 되는데, 이번 탐방이 그 첫 번째 길 나들이입니다.
연천군은 군부대가 그 땅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북단의 자치단체입니다.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 선생께서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임진강 동편에 연천과 마전이 있고 북쪽에 삭녕이 있다” 면서, “세 고을은 모두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살만한 곳이 적다”라고 말씀한 것으로 보아, 선생은 연천 땅을 그다지 살기 좋은 곳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선생께서 “강을 임하여 아름다운 경치가 많다”라면서 임진강의 절경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번에 평화누리길 10코스를 걸으면서 이중환 선생께서 아름다운 경치가 많다는 연천 땅의 임진강을 제대로 완상했습니다.
오전9시45분 장남교 건너 원당리의 10코스게이트를 출발했습니다. 파주 적성에서 택시를 타고 장남교를 건너 게이트 앞에서 하차했습니다.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은 후 310번 도로를 따라 북진하다 삼거리에서 갈을 건너 오른쪽 310번도로를 따라 계속 걸었습니다. 원당2리 버스정류장을 지나 왼쪽으로 경순왕릉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조금 못 미쳐 오른 쪽 시멘트 농로로 접어들었습니다. 길옆 밭들을 촉촉이 적신 안개가 가시지 않아 봄기운이 감지되는 길을 얼마간 걸어가자 점프대가 보였습니다. 삼거리에 도착해 왼쪽으로 3-4분간 걸어가다 다시 왼쪽으로 난 농로를 걸으면서 삼포를 조성하고자 곱게 갈아놓은 밭을 보자, 뜬금없이 40여 년 전에 읽은 황석영의 소설 “삼포가는 길”이 생각났습니다. 산업화에 밀려 고생하는 언저리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이 소설을 읽고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참으로 빼어나다 싶어 여러 편의 소설을 더 구해 읽었습니다. 북한으로 월북해 몇 년을 살다가 남하해 이 땅에서 다시 살아가는 곡절 많은 이 작가의 소설을 더 이상 보지 않은 것은 사람이 들어설 자리에 특정 이념이 똬리를 틀고 있다 싶어서입니다.
백곰팬션마을을 지나 한 친구가 뭔가 모르는 살기가 느껴진다는 고개를 넘어 우천 시에는 우회하라는 안내판이 세워진 사미천변에 이르렀습니다. 한 친구가 혈당이 떨어진 것 같다며 쉬어가자고 해 이 친구가 준비해온 간식으로 요기를 하면서 모처럼 천변에서 냇물을 바라보며 20분 가까이 쉬었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 오른 쪽으로 천변을 따라 내려가다가 징검다리로 실개천을 건너 강둑위로 올라선 것이 11시40분경이었습니다. 사미천과 이름을 모르는 실개천이 임진강에 합류하는 합수점과 그 안에 형성된 꽤 큰 규모의 모래톱을 사진 찍었습니다. 강둑길을 따라 남동쪽으로 진행하면서 내려다본 임진강은 물이 깊지 않아서인지 여기저기서 모래톱이 보였고, 그 물 흐름에서 천년을 셈할만한 도도함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비룡대교를 얼마 앞두고 왼쪽 농로를 따라가 371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사거리에 이르러 인근 해장국집을 들러 점심 식사를 한 후 다시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비룡대교를 막 지나 다시 올라선 강둑을 따라 걸으면서 이 지역은 북한의 황강댐 방류로 인한 인명피해가 발생한 지역으로 야영, 취사 및 낚시를 금한다는 경고판을 몇 곳에서 보았습니다. 강둑 아래로 내려가 강변의 흙길을 따라 걸으면서 오른 쪽 강물과 그 건너 먼발치에 우뚝 솟은 감악산을 조망했습니다. 숭의전을 6.3Km 남겨놓은 지점에서 학곡리 마을로 들어서 흐르는 세월의 흐름을 6시50분에 묶어둔 벽시계가 걸려 있는 사랑방 쉼터를 지났습니다. 이내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유형인 학고리고인돌을 살펴본 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연천학곡리적석총도 둘러보았습니다. 임진강변 자연제방위에 쌓은 돌무지무덤인 여기 적석총(績石塚)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백제의 건국과 관련될 정도로 오래 전에 세워진 것으로 마귀할멈이 치마폭으로 돌을 날라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강둑길을 걸으며 강변 풍경이 여유롭고 평화롭다고 느껴지는 것은 쉼 없이 흐르는 강물과 정지된 모습의 자연풍광이 빚어낸 콘트라스트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방도로가 지나는 학곡교 다리를 건너 고개를 넘다가 몽셍미셀 카페를 들러 커피한잔을 들었습니다. 카페뿐만 아니라 숙박시설, 수영장 등 위락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한 여름에 다시 찾을 만 하겠다 싶은 이 카페에서 내려다 본 절벽아래 임진강의 풍광은 참으로 절경이었습니다. 이런 절경이 주는 환희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물결이 이는 강물을 오랫동안 보노라면 우울증이 걸리기 쉽다는 한 친구의 이야기처럼 우리 삶에서 문명을 배제하게 되면 역동성이 사라지고, 그 결과로 활력을 잃기 때문일 것입니다. 카페 바로 위 평화누리길 ‘학곡리쉼터’ 게이트를 사진 찍고 나서 고개를 넘자 하얀 열차 두 량이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시 강변으로 돌아가 강둑길을 걸으면서 임진강을 계속 보았는데 그저 지나가는 객이어서인지 우울증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넓게 자리한 인삼밭을 지나 숭의전으로 이어지는 차도를 따라 걷다가 오른 쪽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내 길을 가로 막은 파이프를 보고 당황했는데 우측으로 파이프를 밀어 통과한 후 다시 좌측으로 밀어 원상태로 만들어 놓고 지나가라는 평화누리길 명의의 안내문을 보고 참으로 재미있는 길이다 싶었습니다. 간이 정자가 세워진 구릉에서 왼쪽 능선을 따라 산길을 걸으면서 푸근함이 느껴졌으니, 이는 아직도 저는 강 길보다 산길을 걷는 것이 더 익숙해서일 것입니다. 강변 야산의 봄 전령이라도 된 듯 수 백 마리의 하루살이(?)들이 윙윙거리며 저희들을 반겨 맞았습니다. 소북이 쌓인 낙엽들을 밟아 산마루에 올라서자 나뭇가지 사이로 숭의전이 보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선 곳은 비케이 카페로 그 바깥벽에 ‘묵개강변도서관’의 명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명판에 쓰인 “讀書萬卷 行路萬里”(독서만권 행로만리)라는 문구가 눈에 띈 것은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여행하는 “讀書萬卷 行路萬里”는 옛 선비들만이 아니고 저도 당연히 따라야할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백두대간과 9정맥, 한강기맥과 여러 지맥을 종주하느라 제가 그동안 걸은 산길만도 萬里가 훨씬 넘습니다반, 나이가 일흔이 넘도록 읽은 책은 고작 3천권에도 훨씬 못 미쳐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래도 위안을 삼는 것은 제가 읽은 책 중에 5백 쪽이 넘는 것들이 상당수여서 옛날 기준으로 환산할 시 萬卷가까이 되지 않을 까 하는 것입니다.
17시 정각 숭의전의 11코스게이트에 도착해 10코스인 고랑포길 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카페에서 100여m직진해 산 중턱의 숭의전에 다가갔고, 조금 더 걸어 숭의전 끝자리에 자리한 11코스게이트 앞에 도착해 인증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내 아래로 내려가 몇 분 기다렸다가 52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동두천 시내에서 하차해 저녁식사를 함께 한 후 동두천중앙역에서 서울 가는 전철에 오르는 것으로 긴 시간의 하루 여정을 마무리 했습니다.
아래 글은 여러 해전 제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이 글을 여기에 덧붙이는 것은 제가 따라 걷고 있는 임진강을 살뜰히도 보듬어주고 있는 연천군의 땅이 고맙고 또 고마워서입니다.
“연천군이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8년 전곡리의 한탄강변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고 그 이듬해 사적으로 지정되고 나서일 것입니다. 전곡리유적의 발견이 고고학사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는 것은 그때까지 통용된 구석기지도를 다시 그려야 해서였습니다. 주먹도끼라 불리는 석기의 유무가 구석기시대 문화권설정의 지표가 된다고 한 미국의 고고학자 모비우스의 주장이 1944년 발표된 후 주먹도끼가 발견된 일이 없는 인도이동의 지역은 구석기시대 문화권에서 제외되었었는데, 전곡리유적의 발견으로 구석기문화권이 새롭게 추가된 것입니다.
전곡리 유적의 발견 경위도 상당히 극적이어서 흥미롭습니다. 전곡리 유적이 주한미군인 그렉보웬에 의해 발견된 것은 1978년1월20일입니다. 공군하사관인 그렉보웬이 인디애나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했었기에 그가 사귀던 한국여성과 함께 한탄강 유원지의 강변을 산책하다가 지면에 노출된 토기편과 숯이 된 목재를 보고 그 일대를 조사해 주먹도끼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먹도끼를 찾아낸 그렉보웬은 궁리 끝에 프랑스의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인 프랑소아 보르드교수에 편지를 보내 그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확인합니다. 그렉보웬은 서울대를 찾아가 고고학자 김원룡교수를 만나고 전곡리유적은 본격적으로 발굴작업에 들어갑니다. 당시 김원룡교수를 도와 그렉보웬과 동행했던 이신복교수는 그의 저서 ‘고고학 이야기’에다 그 후 그렉보웬이 귀국하여 아리조나대학에서 고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발굴전문회사에 취직해 한국인 아내와 잘 살고 있다고 그의 동향을 실었는데 그렉보웬은 그리 대접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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