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구간:반구정-장산전망대-율곡습지공원(평화누리길 8코스)
*탐방일자:2019. 2. 20일(수)
*탐방코스:반구정-임진강역-장산전망대-화석정-율곡습지공원
*탐방시간:10시10분-16시15분(6시간10분)
*동행 :문산중학교 황규직동문
이번 3번째 임진강 따라 걷기에서 가장 뜻 깊었던 것은 파주를 빛낸 역사적 인물들을 여러분 만나 뵌 것입니다. 반구정으로 황희선생을, 화석정으로 이이선생을 찾아가 뵌 것은 여러 번 있었지만, 방촌기념관의 한 전시자료에서 파주를 빛낸 조선시대 청백리 스물세분의 존함을 한 분 한 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반구정에서 8코스 탐방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들른 이 기념관에서 확인한 파주의 청백리는 우현보, 경의, 황희, 이정보, 성현, 허종, 김훈, 이몽필, 윤츈년, 백인걸, 최흥원, 정곤수, 이광정, 이후백, 김장생, 이기설, 김행, 김덕함, 류경창, 이세화, 최경창, 심의신 등 모두 스물세 분입니다. 그중 우현보, 황희, 이정보, 성현, 백인걸, 김장생, 최경창 등은 익히 존함을 들어 알고 있는 분들이어서 반갑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청백리(淸白吏)란 청백탁이(淸白卓異) 즉 청렴하고 결백함이 뛰어난 이상적인 관료를 칭합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청백리에 녹선된 수는 대략 200명 내외라고 하는데 그중 1/10이 넘는 23분이 파주와 관련된 분들이며, 이중 19분은 사후 파주 땅에 안장되었다고 전시자료는 적고 있습니다. 이미 백인걸 선생을 배향하는 월롱서원과 이이선생과 함께 김장생 선생을 배향하는 자운서원을 다녀온 바 있는 제게는 청백리 여러분들이 빛내준 파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 더할 수 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청백리 명단을 보고 의아했던 것은 파주가 자랑하는 율곡 이이선생의 존함이 보이지 않아서였습니다. 워낙 당대 조야의 큰 인물이어서 청백리 명단에 없다 해서 선생의 명성에 흠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청백리로 추앙받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싶어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전10시10분 반구정을 출발했습니다. 문산역에서 황규직동문을 만나 반구정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임진강변의 반구정을 들러 바로 아래 임진강과 강 건너 북한 땅을 일별한 후 출발지로 돌아가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는 것으로 '8코스 반구정길'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반구정을 출발해 자유로 오른 쪽의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진행하다 오른 쪽으로 꺾어 수로 옆에 낸 농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얼마 후 다다른 경의선 철로를 건너 김대중 대통령 재직 중에 세워진 임진강역을 사진 찍었습니다. 1953년 종전 후부터 내내 문산역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경의선 철로에 멈춰선 철마가 비로소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염원을 이루어 여기 임진강 역을 지나게 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편 햇볕정책 덕분임이 확실합니다. 다만 그 더 달린다는 것이 고작해야 문산역을 출발해 운천역과 임진강역을 거쳐 도락산역에서 멈춰서는 것으로 끝이 났고, 북한 땅에는 발도 들여 넣지 못해 당시 많은 분들을 열광케 했던 햇볕정책이 요즘은 빛바랜 사진처럼 먼 옛날의 일로 느껴집니다.
임진강역에서 통일대교 앞 자유IC로 이어지는 대로와 같은 방향으로 시멘트 농로를 따라 북진하다 오른 쪽으로 꺾어 공덕양수장을 지났습니다. 임진강 남쪽의 방죽 아래 농로를 따라 얼마간 걷다가 공사를 하느라 길을 다 파헤쳐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어 왼쪽 위 강둑길로 올라갔습니다. 언뜻 보아 누리길 3코스에서 걸었던 한강의 강둑길과 비슷했으나 크게 다른 점은 한강 길은 강 건너로 신도시 일산이 보였지만 이 길은 강 건너로 나지막한 산만 보일 뿐 집이라곤 한 채도 눈에 띄지 않아 조금은 썰렁했습니다. 강둑길에 탐조대가 세워진 것을보고 안심하고 걸었 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초병들이 나타나 이 길은 민간인 통행이 금지되었다며 진행을 막아 둑 아래로 내려가서 그 옆 논을 가로질러 공사장을 비껴갔습니다.
공사장을 빠져나가 텅 빈 들판의 농로를 걸으면서 누구라도 저 논 뜰처럼 속을 다 비울 수 있다면 남들로부터 속좁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전날 내린 눈이 길을 덮은 농로를 지나 장산리 마을로 들어서자 이장님 아들이 서울의 명문대 입학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이 마을이야말로 이제는 20세기로 돌아가야 볼 수 있는 정감어린 마을이다 싶어 훈기가 느껴졌습니다. 농로 옆 수로에 걸터앉아 친구가 싸온 햄버그를 꺼내 든 후 탐방 길을 이어가다 논 뜰에 내려앉은 철새들이 비상하는 장관을 목도했습니다. 이런 장관이 연출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누리길이 제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자, 이런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준 튼튼한 제 두 다리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습니다.
누리길 8코스가 숨겨놓은 최고의 승지 초평도(草坪島)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장산전망대에 이른 시각은 14시6분이었습니다. 전망대에 이르러 임진강이 빚어낸 거의 유일한 하중도(河中島)인 초평도를 조망한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인데 서쪽 멀리로 판문점 인근의 대성동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고, 제가 오르지 못한 경기 오악(五嶽)의 한 산인 개성의 송악산이 눈에 잡혔으며, 이 섬 동쪽으로 강 건너 해마루촌이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 동행한 친구도 감탄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상류에서 쓸려 내려온 퇴적물이 쌓여 강 하구에 만들어지는 하중도가 탐방 내내 보이지 않아 다른 큰 강에 다 있는 하중도가 강의 전장이 200Km 대로 짧아 아예 임진강에는 형성되지 않은 것이 아닌 가 했는데, 저 아래 강 한 가운데 어엿한 초평도가 자리 잡은 것을 보고 그러면 그렇지 했습니다. 초평도는 그 면적이 약 176만m2로 여의도의 약 3/5에 상당하는 작지 않은 섬으로 원래는 논이었던 곳이 휴전 후 사람이 살지 않아 생태계의 보고로 바뀌었습니다. 꼭 10년 전에 화재가 크게 나 갈대밭 등 50만m2를 태운 일이 뉴스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 섬이 생태계의 보고지여서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장산전망대에서 이동한 화석정(花石亭)은 파평면 율곡리의 임진강변 야산에 세워진 정자로. 율곡 이이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화석정 바로 아래 임진강이 흐르는 강변의 풍광은 초평도 일대에 빠지지 않아 2년 전 함께 온 방송대학우들도 참으로 아름답다며 찬사를 거듭한 곳입니다. 임진왜란 중 왜군에 쫓겨 북으로 몽진 중인 선조임금 일행이 칠흑 같은 한 밤중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로 등을 밝힐 수 없어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하들이 이이선생께서 이를 예상하고 미리 기름칠을 해둔 화석정을 불태워 강을 밝혔다 합니다. 덕분에 임금께서 무사히 임진강을 건너 조선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이이선생의 탁월한 판단력과 충성심에 새삼 존경의 마음이 일었습니다. 선생의 5대조께서 야은 길재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세웠고, 증조부께서 이름을 지은 이 정자에 선생께서 불이 잘 붙도록 기름을 칠했다는 이야기가 틀린 것이 아닐진데, 선생께서도 어느 정도 효와 충의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을 애국이라는 대의로 극복하고 조선의 명맥을 잇게 한 선생은 과연 대인이셨습니다.
16시15분 율곡습지공원에 도착해 세 번째 임진강 따라 걷기를 모두 마무리했습니다. 화석정에서 율곡습지공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길에 ‘파주시어촌계’와 ‘어민생계대책위원회’ 간판이 같이 붙어 있는 길가의 단층 건물을 보았습니다. 그 아래 바닥에 어구들을 쌓아 놓은 작은 통통배 한 척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이제껏 임진강만 생각했지 파주에도 이 강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는 어부들이 살아간다는 것을 새까맣게 잊고 지낸 것이 아닌 가 했습니다. 임진강 강둑아래 조성된 율곡습지공원은 아직도 봄이 찾아오지 않아 썰렁했습니다. 공원을 찾아온 사람들도 세 네 분밖에 안 되었고 습지의 누런 풀들도 생기를 되찾지 못한 상태여서 별자리 등 조형물도 뭔가 모르게 낯설어보였습니다. 바로 옆 율곡1리 버스정류장에서 문산읍으로 나가 저녁을 든 후 전철로 상경하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방백기념관의 청백리 명단에서 만나 뵌 분 중 반가운 분은 가운(嘉運) 최경창(崔慶昌, 1539-1583)입니다. 최경창은 이달, 백광훈과 더불어 조선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릴 정도로 당시(唐詩)를 잘 지은 조선 중기의 문신입니다. 최경창이 후세에 널리 알려진 데는 기생 홍랑(洪娘)과의 순애보가 한 몫 단단히 했을 것입니다. 1573년 최경창은 북도평사로 가서 기생 홍랑과 사랑을 나눕니다. 윤덕진-손종흠은 그들의 공저 <<한국시가강독>>에 최경창이 경성으로 귀임할 때 홍랑은 쌍성까지 따라가서 시조를 지어 배웅했으며, 최경창이 병에 걸렸을 때는 경성까지 올라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저는 수년 전 파주에 터 잡은 최경창 묘와 바로 아래에 홍랑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 그냥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최경창과 홍랑이 나눈 사랑이 얼마나 진정어린 것이었나는 홍랑의 아래 시조에 잘 서려 있습니다. 이 시조는 홍랑이 경성으로 돌아가는 최경창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은 것으로 묏버들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자신의 속마음을 애절하게 표현한 것은 그녀의 문학적 상상력이 빼어나 가능했을 것입니다.
묏버들 갈해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돼
자시난 창밧긔 심거두고 보쇼서
밤비에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서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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