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임진강 따라 걷기

늘노천 따라 걷기 (임진강 제1지류: 직천저수지-파산서원-늘노천교)

시인마뇽 2024. 9. 18. 15:45

탐방구간: 직천저수지-마지2-늘노천교

탐방일자: 2024. 9. 17()

탐방코스: 직천저수지-웅담교회-마지2-파산서원-금파교-파평중학교

                 -두포리삼거리-늘노천교

탐방시간: 1047-1655(6시간8)

동행       : 나 홀로

 

 

 

  몇 해 전에 돌아가신 큰누님이 생각나 임진강의 제1지류인 늘노천을 따라 걸었습니다. 큰누님이 시집가서 사신 곳이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의 늘노리여서 중학교를 다닐 때 누님을 뵈러 늘노리를 여러 번 갔었고, 그때 늘노리 앞을 흐르는 늘노천도 몇 번 가서 놀았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늘노천을 명료하게 기억하는 것은 큰 매형께서 늘노천에서 잡은 것이라며 가물치를 가져와 처음으로 그 고기를 맛있게 먹은 일이 있어서입니다.

 

  제가 큰 누님께 각별하게 고마워하는 것은 저를 돌보느라 많이 업어주신 것입니다. 32녀 중 가장 손 위인 큰누님은 막내인 저와는 12살이나 차이나서 저를 업어 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살림이 넉넉지 못해 어머니께서는  저를 기르는 데만 전념할 수 없어 집안일은 물론 들일도 맡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틈틈이 저를 돌보는 것은 큰 누님 몫이었습니다. 큰 누님께서 어머니를 도와 저를 돌보느라 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마치고 끝내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작년에 작은형님이 돌아가시고 32녀 중 살아남은 사람은 저 혼자입니다. 형님과 누님은 물론 형수님과 매형분도 모두 돌아가셨는데, 집사람도 24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나 1948년 건국 동이로 태어난 저만 외톨이로 남아 있습니다. 명절 때만 되면 돌아가신 누님과 형님들이 생각나는 것은 제가 막내로 태어나 이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받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빈한한 살림에도 제가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형님과 누님 모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해 가능했습니다.

 

  늘노천 따라 걷기를 시작한 곳은 파주시 법원읍의 직천저수지로 마지저수지로도 불립니다.  직천하면 떠오르는 분은 초등학교 은사님입니다. 1959년 초등학교 5학년 때 직천초교에서 전근 오신 김세영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셔서 파주 땅에 직천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제 고향 파주 광탄에서 멀지 않은데도 직접 직천 땅을 걸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지명을 알고나서 65년 만의 일입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중학교에 진학시켜야 한다고 어머니를 설득해 제가 군청소재지의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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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차례를 지내느라 파주시 광탄면의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차례를 끝내고 귀가하는 길에 큰아들이 운전하는 차로 늘노천이 시작되는 파주시 법원읍의 직천저수지로 이동했습니다.

 

  오전1047분 직천저수지를 출발해 약 17Km에 달하는 늘노천 따라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저수지 하부의 댐 옆에서 하차해 북쪽으로 내려가 원두막매운탕 앞 삼박교에서 늘노천 좌안의 반월로를 따라 북서진했습니다. 직천교를 건너 차도에서 벗어나 늘노천 우안의 시멘트 길을 따라 걷다가 이내 반월로로 복귀했습니다. 얼마간 늘노천과 떨어져 진행해 웅담교회에 도착한 시각은 1142분이었습니다. 바로 옆 ‘201 COFFEE & BEER’ 카페를 들러 냉커피로 더위를 식힌 후 곰시(?) 시내 뒷편에 정좌한 파평산의 위용이 한눈에 잡히는 웅담교를 건너 늘노천 좌안의 천변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웅담스튜디오를 거쳐 적성으로 이어지는 솔이홀로로 들어서 북진하다가 타이거CC를 막 지나 파평산 산자락에 자리한 두 개의 거암을 가까이에서 보고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이 거암들은 60여 년 전 늘노리의 누님을 뵈러 갈 때 버스 안에서 보았던 바위로 마치 곰 두 마리가 몸을 곧추세우고 포효하는 듯해 저는 곰바위라고 불렀었는데, 이번에 천천히 걸어가면서 가까이에서 보고 나자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138분 마지2교를 건너 적성면으로 들어섰습니다. 법원읍의 곰바위를 지나자 행정구역은 법원읍 웅담리에서 파평면 덕천리로 바뀌었습니다. 무건교를 지나 적성면의 마지2교에 다다르기까지 대전차장애물이 설치된 두 곳의 방호벽을 지나면서 제가 지금 걷고 있는 파주 땅이 우리나라 최전방지역임을 다시 한번 상기했습니다. 마침 추석날이어서 생각보다 오가는 차량이 많아 왕복 2차선의 좁은 차도를 따라 걷는 일이 무척 신경 쓰였습니다. 마지2교를 건너자마자 이제껏 걸어온 차도를 버리고 왼쪽으로 꺾어 늘노천 우안의 천변길로 들어서 서진했습니다. 시멘트로 포장된 천변 길은 2Km가량 떨어진 메디힐병원까지 거의 직선으로 이어져 단조로웠습니다. 하천은 잡초로 덮여 시원한 물흐름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천변길은 나무 그늘이 없어 마지막 여름 더위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걷느라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름이 해를 가려 직사광선을 쬐지 않아도 된 것과 뒤돌아볼 때마다 집사람과 마지막으로 등반한 감악산이 저만치서 저를 보고 반갑다며 인사를 해오는 것이었습니다. 제방 오른쪽으로 비닐하우스가 빽빽이 들어선 넓은 들판 너머로  몇 번 지났던 삼광중학교가 보여 반가웠습니다. 마지2교를 출발해 40분가량 걸어 1347분에 도착한 메디힐 병원에서 잠시 천변 길을 벗어나 편의점을 들른 것은 시원한 청량음료를 마시며 잠시 쉬어가기 위해서였는데, 천변길로 복귀하자 다시 더위가 엄습해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어갔습니다.

 

  1456분 파산서원(坡山書院)을 들러 파주가 자랑하는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을 뵈었습니다. 메디힐병원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 늘노천 우안의 천변 길은 덕천교까지 이어졌는데 그 거리는 마지2교에서 메디힐병원까지보다 조금 짧았습니다. 이 길은 천변 길 양가로 큰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어 천변을 따라 걷는 일이 한결 수월했습니다. 샘내와 늘노리를 경계 짓는 덕천교를 건너 조금 걸어가자 여기는 우계 성혼선생의 고향마을입니다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려있어 파산서원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큰 누님이 시집와 꽤 오래 사셨던 여기 늘노리에는 극장이 들어섰을 만큼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퇴락해 제 고향 광탄보다 훨씬 못해 보였습니다. 파평우체국을 조금 더 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서원교를 건넜습니다. 다리 건너 오른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파산서원으로 가는 길에 늘노천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보자 여기 늘노천에서 가물치를 잡아 장모님께 드린 큰매형님이 생각났습니다. 이 매형께서 초등학학교 4학년인 제게 사탕을 사주셨는데, 그때 처음 먹어본 달콤한 사탕 맛이 뇌리에 박혀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찾아간 파산서원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부친인 성수침(成守琛, 1493-1563)을 제향하기 위해 여기 파평면에 창건한 서원입니다. 서원 앞의 안내문에 파산서원이 잘 소개되어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조선 중기 학자인 청송 성수침(1493~1563)과 그의 아들 우계 성혼((成渾, 1535~ 1598), 형제 절효공 성수종((成守琮, 1495~1533) 및 휴암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서원이다. 조선 선조 원년(1568)에 율곡 이이 등 파주지역 유생들이 세웠고, 효종 원년(1650) 나라에서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후에 복구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불탔고. 1966년 서원의 사당만을 복원하게 되었다. 사당 주위에는 담장이 들러져 있고, 정면 가운데에 솟을삼문을 두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이 건물의 주춧돌과 기단석 등은 세울 당시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앞면은 툇마루로 개방해 놓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없어지지 않았던 전국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이 서원에서 강학장소로 쓰인 건물은 사당 옆 명륜당이 아닌가 합니다.

 

  서원교로 되돌아가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 늘노천 우안길을 따라 금파교 쪽으로 향했습니다. 2Km가 조금 더 되는 천변길을 따라 걸어 금파교에 이르기까지 세월교를 지났고 물가를 거니는 백로도 보았습니다. 웅담교를 건너며 보았던 파평산을 반대 쪽에서 올려다보자 경사가 완만해서인지 훨씬 넉넉해 보였습니다. 파평빗물펌프장을 지나 금파교에 다다르자 평화누리길 안내 리본이 눈에 띄었습니다.

 

  1655분 늘노천이 임진강에 합류되는 늘노천교 앞에서 늘노천 따라 걷기를 마쳤습니다. 금파교를 건너 두포삼거리로 이어지는 청송로를 따라 걷느라 늘노천과 헤어졌습니다. 금파교를 건너 만난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청송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파평중학교를 지나 고개를 넘자 비가 흩뿌리기 시작해 우산을 꺼내 들었습니다. “단양우씨 충정공/안정공 망제단입구를 지나 두포삼거리에 이르기까지 차도를 따라 걷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은 우산을 쓰고 갓길을 걸어 달리는 차가 일으킨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서였습니다. 두포삼거리에서 길을 건넌 후 오른쪽으로 꺾어 늘노천교까지 진행했습니다. 중앙분리대가 설치된 37번도로는 쌩쌩 달리는 차들만 보여 자동차전용도로를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도 되었습니다. 갓길을 따라 걷는 것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들어 늘노천교 시작점에서 임진강만 사진을 찍고 늘노천과 임진강의 합류점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두포삼거리로 돌아가 곧바로 버스를 타고 문산역으로 이동해 산본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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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누님이 시집가 사셨던 늘노리가 우계 성혼(成渾, 1535-1598)의 고향이라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우계 성혼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우계집, 주문지결, 위학지방등을 저술한 저명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초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과 교육에만 힘쓴 우계 성혼은 율곡 이이가 타계한 뒤 서인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후에 이조판서로 봉사했으나 국정운영에 관한 봉사소를 올리고 귀향하는 등 대체로 벼슬을 극구 사양했다고 합니다. 사후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다시 복권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제 고향 파주가 배출한 대학자로 우계 성혼 외에도 몇 분이 더 있습니다. 성학집요를 저술해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율곡 이이나 우계 성혼 선생과 같이 파산서원에 배향된 백인걸 또한 파주분이라는 것이 한없이 자랑스럽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