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낙동강 따라 걷기

낙동강 따라 걷기28(구지오토캠핑장- 이오정- 이방사거리정류장)

시인마뇽 2024. 11. 24. 18:29

탐방구간: 구지오토캠핑장- 이오정- 이방사거리정류장

탐방일자: 20241112()

탐방구간: 구지오토캠핑장-중앙119구조본부-지능형자동차부품진흥원-이노정

                  -곽재우장군묘지-무심사-이방사거리정류장

탐방시간: 1010-1620(6시간10)

동행 : 나 홀로

 

 

  낙동강을 따라 걷는 길에 대구시 달성군의 구지면에 자리한 곽재우장군 묘역을 둘러보았습니다.

 

  묘역 앞 안내판에 따르면 이 묘역은 홍의장군 곽재우 선생의 중조부로부터 5대에 걸쳐 조상이 안장된 선영( 先塋 )입니다. 충익공( 忠翊公) 곽재우( 郭再祐, 1552-1617) 장군은 임종에 즈음하여 예장(禮葬)을 하지 말라 면서 "왜란 때 선왕의 두 능()이 무너지고 불탔으니 신하된 자가 어찌 묘의 봉분을 쌓겠는가? 내가 죽거든 구덩이에 묻기만 하라고 유언하여 충익공의 묘는 1617년 봉분 없이 평장(平葬)을 하였다고 합니다. 1731년 현풍현감 이우인(李友仁)이 충익공의 묘소를 참배한 후 실묘(失慕)가 염려된다면서 사림들을 설득, 충익공의 뜻을 받들어 봉분을 낮게 쌓았습니다. 이와 같은 보고를 받은 경상도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로부터 비문을,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으로부터는 글씨를 받아 역시 충익공의 유언을 존중하여 1732년 소박한 장식의 자그마한 묘비를 세웠습니다. 충익공의 묘는 정부인 상산김씨(商山金氏)와 합장묘이며, 유가면 가태리에 불천위 사우(祠宇)와 예연서원이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의병장 곽재우장군이 살아서는 국왕 선조로부터 자신의 의병활동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곽재우 장군은 사후에나마 후세 사대부들로부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세운 전공을 제대로 평가받아 낮게라도 봉분을 쌓고 묘비를 세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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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시달성군의 현풍공영버스정류장에서 이번 낙동강 따라 걷기의 출발지인 구지오토캠핑장입구까지는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낙동강 제방 안쪽의 넓은 밭이 푸르른 것은 단무지용 무를 재배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사분이 말씀해주어 알았습니다.

 

  1010분 안개가 낀 구지오토캠핑장을 출발했습니다. 안개로 가시거리가 100m를 넘지 않는 징리제 제방 길을 따라 얼마 만큼 걸어가다 햇살이 퍼지면서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해 강가로 내려갔습니다. 대구교육낙동강수련원이 당국의 허가를 받아 설치한 것을 모르고 수상횔동장의 부표에 올라가 사진을 찍다가 관계자로부터 한 소리 들어 얼른 사과하고 제방 길로 복귀했습니다. 그새 안개가 사라져 대구교육낙동강수련원 건물이 전모를 드러냈는데, 그동안 강을 따라 걸으며 보았던 강원도정선군의 한강에 가까이 위치한 아라리교직원연수원이나 충남옥천군의 금강 변에 자리한 충남학생수련원옥천분원에 비할 수 없이 규모가 커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징리제 제방길에 이어지는 화산제 제방길로 발을 들였는데, 넓게 자리한 갈대밭이 제 눈을 끌었습니다. 드넓은 갈대밭보다 더 눈을 끈 것은 길가의 버려진 밭에서 피어난 노란 호박꽃이었습니다. 십 수일 전에 낙동강을 따라 걸으며 봄에 피는 애기똥풀 꽃을 보고서 기상이변을 실감했는데, 이번에 호박꽃을 보고 나자 일시적인 기상이변이 기후변화로 발전할 것 같아 새삼 걱정됐습니다.

 

  1231분 이노정(二老亭)에 다다랐습니다. 호박꽃을 사진 찍고 제방길로 올라서자 왼쪽으로 규모가 엄청 큰 자동차주행시험장이 보였습니다. 이 주행장 울타리에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는 경고판이 붙어있어 이상하다 했는데, 알고 보니 이 주행시험장은  지능형자동차주행시험장으로 일반 주행시험장보다 몇 배는 커 보였습니다. 대암4제 제방길이 끝나고 강변의 구비 길을 지나 강변 누정인 이노정에 이르렀습니다.

 

  이노정은 조선 시대의 대학자인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이 서로 교류하고, 시를 읊으면서 풍류를 즐기면서 후학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곳입니다. 정자 이름인 이노(二老)는 한훤당과 일두를 가리켜 부르는 것이고, 제일강정(第一江亭) 또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은 이노정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노정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일두가 함양의 안음현감으로 부임한 1495년부터 무오사화 때 화를 입어 두 사람이 유배된 1498년 사이일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그 후 1885년에 영남 유림에서 두 분을 기리기 위해 다시 지었고, 1904년에도 건물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정면 4, 측면 2칸 규모의 겹집인 이노정은 앞 열에는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 · 우로 각 1칸의 방을 두었고, 뒷 열에는 2칸 온돌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1칸의 우물 마루가 대칭을 이루는 매우 특이한 평면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안내판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으로 낙동강이 조망되는 이노정에서 관리인의 허락을 받아 샌드위치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쌍용부페식당을 거쳐 구지취수장을 지나자 저만치로 우곡교 다리가 보였습니다.

 

  1324분 곽재우장군묘역을 들렀습니다. 구지 취수장을 지난 후 잠시 자전거길에서 벗어나 곽재우장군 묘역을 찾아갔습니다. 고개 위에서 묘역으로 들어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여러 묘지를 둘러 본 후 묘역 입구로 다가가 안내판을 보고서야 곽재우장군이 묻힌 묘지를 그냥 지나친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올라가 장군의 봉분을 사진 찍은 후 자전거 길로 복귀해 낙동강 따라 걷기를 이어갔습니다. 

 

  강변을 따라 S 자로 커브를 그리며 낸 데크 길을 걸어 대암양수장 앞에 이르렀습니다. 꽤 큰 2층 건물의 텅 빈 마당에 승용차 한 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양수장은 가동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개를 넘어 대암보건진료소를 지나 차도를 따라 걷다가 대암1제 제방길로 올라섰습니다. 우곡교를 다리 밑으로 지나 국가산담남로에 접해 낸 낙동강자전거도로로 들어서 그대로 직진하다가 대암22정류장 앞에서 제방길로 올라섰습니다.

 

  1520분 무심사를 들렀습니다. 대암2리 정류장 앞에서 올라선 제방길을 따라가다 오른 쪽으로 무심사로 갈리는 삼거리에서 잠시 멈춰서서 합천창녕보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무심사를 다녀와 이방정류장에서 이번 탐방을 마무리할까, 아니면 무심사를 거르고 합천창녕보까지 진행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무심사에서 산을 넘어 합천창녕보로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안내판에서 확인하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제방에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 부지런히 25분가량 걸어 무심사에 도착했습니다. 낙동강을 따라 걸으면서 사찰을 들른 것은 봉화의 적광사에 이어 여기 무심사가 두 번째입니다.

 

  무심사(無心寺)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은 경상남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녕무심사(昌寧無心寺) 대해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로 안내판에 아래와 같이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창녕 무심사 대혜보각선사서는 중국 송나라 임제종의 승려 대혜 종고가 2명의 승려를 비롯해 46명의 사대부와 주고받은 62통의 편지글을 모은 책입니다. 소식 · 왕안석  범중엄  엄우 등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에게 대혜 종고가 답장을 한 편지를 제자인 혜연이 모았고, 황문창이 보완하여 완성했다고 합니다. 대혜보각선사서 판본은 1200년경 우리나라로 들어왔는데, 18세기까지 여러 사찰에서 많이 간행되어 30여 종의 판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기 창녕 무심사에 소장되어있는 대혜보각선사서는 1책의 목판본으로, 1~2장이 훼손되어 새로 배접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본문에는 시주한 사람과 간행 기록이 새겨져 있어 선조 원년인 1568년에 전라도 천관사에서 판각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간행 기록이 명확하고 본문의 인쇄와 보관 상태가 뛰어나 우리나라 불교 선사 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무심사가 자랑하는 것은 이뿐이 아닙니다. 무심사는 낙동강과 면해 있어 자연경관이 빼어나 1982 TV문학관 바라암을 촬영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무심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낙동강 좌안의 바위 위에 세워진 앙증맞은 3층 석탑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아래 동서로 흐르는 낙동강과 김천시 증산면에서 발원해 78Km를 흘러내려 합천군 우곡면객기리에서 낙동강으로 합류되는 강 건너 회천이 한눈에 보이는데 이 절의 스님들은 절 이름 그대로 저토록 수려한 풍광을 무심하게 보아 넘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단청색이 뚜렷한 대웅보전 옆에 자리한 5층석탑은 강변 바위의 3층 석탑에 비할 수 없이 커 보였습니다. 무심사가 자랑하는 또 하나는 자전거꾼들에게 숙소를 무료로 제공해온 것인데, 요즘은 아쉽게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중단되었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해 사전에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 산을 넘어 합천창녕보로 가는 것은 포기하고 삼거리로 돌아가  차도를 따라 이방 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다다른 이방사거리에서 음료를 사들어 목을 축인 후 저녁 5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서대구정류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차들로 고속도로가 막혀 지체되었지만 1925분에 대구역을 출발하는 수원행 itx에열차에 오름으로써 28번째 낙동강 따라 걷기를 끝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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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인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장군은 경상남도 의령군의 외갓집에서 태어나 남명 조식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선생은 상주 김씨 집안 출신인 만호 김행의 여식과 결혼했는데, 이 부인은 남명 조식의 외손녀였습니다.  장군은 동강 김우옹과 동서지간이 됨으로써 경상우도 사대부들과 쉽게 교유할 수 있었습니다.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장군은 전쟁 발발 열흘이 지나지 않아 의병을 일으켰고, 의령  삼가  합천 등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군의 수송선을 공격해 물러가게 하는 등 왜군의 호남진출을 저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더 잘 알려진 곽재우장군은 전쟁이 끝나자 진주목사를 거쳐 경상 좌부사로 임명되어 영남지역의 군무를 총괄하다가 1600년 장계를 올리고 낙향했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장계를 올리고 왕명을 기다리지 않고 낙향해 버린 것이 문제 되어 유배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곽재우 장군이 제가 사는 경기도군포시에 소재한 고찰 수리사를 중건하고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이 절의 안내판이 전하고 있습니다.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한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이 먼 곳까지 와서 수리사를 중건하고 여생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안내판에 적힌 대로 불심이 돈독해 이 절을 중건하고 여생을 보냈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군포의 수리사가 장군의 고향에서 너무 멀어서 하는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의 국왕은 의병장의 전공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그들을 멀리했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이 일본에 패망하지 않은 것은 군사력이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중국 명()나라의 참전, 이순신 장군의 연이은 승리, 그리고 의병의 저항 덕분이었습니다. 왜군보다 훨씬 적은 청군이 침략한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맥 없이 항복한 것은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끈 3가지 승인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서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조선을 지원해 참전했는데,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해 병자호란을 일으켰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이순신 장군에 필적할 만한 명장(明將)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자겸은 봉화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했고 임경업은 청군이 지나버린 뒤에야 조선의 침공을 알았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후방에서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왜군을 괴롭혔는데, 병자호란 때는 청군의 후방인 평안도나 함경도에서 의병이 봉기하지 않아 조선 국왕이 항복을 한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