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한강 따라 걷기

한강 따라 걷기16(향산리삼층석탑-덕천교-별곡리정류장)

시인마뇽 2025. 5. 15. 14:38

탐방구간: 향산리삼층석탑-덕천교-별곡리정류장

탐방일자: 2025. 5. 13()

탐방코스: 향산리삼층석탑-가대교-가곡교-덕천교-덕천리파라글라이딩착륙장

                -도담정원-삼봉대교-별곡리정류장

탐방시간: 1026-1652(6시간17)

동행       : 서울사대 원영환, 이상훈, 최돈형 동문

 

 

  서울사대 동문들과의 마지막 한강 따라 걷기는 충북 단양군가곡면향산리의 향산리삼층석탑유적지를 출발해 단양읍내 별곡리정류장까지 진행했습니다.

 

  이번에 약15Km에 달하는 한강의 강줄기을 따라 걸으면서 만나본 최고의 명승은 단양군 매포읍 하괴리의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양의 제1도담삼봉(島潭三峯)입니다. 2008년 명승으로 지정된 도담삼봉은 카르스트(karst) 지형이 만들어 낸 원추 모양을 한 3개의 기암을 이르는 것으로 남한강이 휘돌아 만든 깊은 못에 자리하고 있어 그 풍채가 더욱 당당해보입니다. 도담삼봉은 장군봉을 중심으로 아담한 모양새의 첩봉과 처봉 등 우뚝 솟은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으며, 장군봉에는 삼도정이라고 불리는 육각의 정자가 있어 더욱 그윽한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이 유년 시절을 함께 했던 도담삼봉에 관련해 그럴듯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강 상류에 위치한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단양으로 떠내려왔으며, 그 후 정선에서는 매년 부당하게 단양에 세금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린 소년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을 떠내려오라고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소용도 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시오.”라고 정선군 사또에게 항의한 후부터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훗날 정도전은 자신의 호를 삼봉( 三峯)'으로 지어  도담삼봉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했습니다.

 

  정도전의 뛰어난 총기(聰氣)가 그의 앞날에 도움이 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총명한 정도전을 높이 평가해 함께 조선을 건국하고 개국공신으로 봉했지만,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은 정도전을 위험한 인물로 여겨 죽였습니다. 정몽주는 역성혁명을 꾀하는 이성계를 따르지 않아 조선이 건국되기 직전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척살되었고,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개국에 앞장섰던 정도전은 적자를 제치고 서자를 세자로 삼아 왕실의 적통을 저버렸고,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후 정몽주는 태종에 의해 복권되어 그의 충절이 널리 선양되었지만, 정도전은 조선 시대 내내 복권되지 못하다가 조선 말기인 고종 때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복권되었습니다. 명민하고 민첩한 데다 지략까지 겸비한 인물로  개혁의 주체로 조선의 건국이념을 제공한 정도전이 끝내 죽임을 당했습니다.

 

  평일인데도 도담삼봉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제는 정도전이 완전히 복권된 것이 틀림없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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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716분에 청량리역을 출발하는 KTX에 올라 평창역으로 향했습니다. 833분에 평창역에 도착해 이상훈 군의 차로 갈아탔습니다. 1시간40분 남짓 쉬지 않고 내달려 이번 탐방의 출발점인 충북 단양군가곡면의 향산리주차장에 이르자 두 주 전에 인사를 나눈 아담한 삼층석탑이 저희를 반겼습니다.

 

  1026분 향산리삼층석탑을 출발해 이내 작은 다리 향산교를 건넜습니다. 바로 앞 향산삼거리에서 보발천을 따라 왼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594번 구인사로로, 이 길을 따라 14Km 가량 걸으면 지난번에 강 건너서 보았던 온달테마공원에 다다르게 됩니다. 중간에 아직도 가보지 못한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를 둘러볼 수 있어 언제고 한번은 이 길을 따라 걸어볼 생각입니다. 향촌삼거리를 지나 남쪽으로 이어지는 남한강 좌안의 59번 국도를 따라 걷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머리 위에 남중한 태양이 내뿜는 5월의 열기가 온몸에 감지되었습니다. 반 시간쯤 걸어 도착한 가대여울은 여울이 넓고 쏘가리, 누치, 피라미 등의 물고기 자원이 풍부해서 견지낚시와 루어낚시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라는데, 정작 고기를 낚으려면 여기가 아니고 강 건너 문화마을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가대교를 지나자 이 강 좌안에 데크 길이 설치되어 남한강의 물흐름을 보다 가까이에서 안심하고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거의 개점휴업 중인 것처럼 보이는 썰렁한 S-Oil 주유소를 지나 여의마트 편의점을 들른 것은 아이스크림으로 몸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편의점 안  천정에 둥지를 틀고 뻔질나게 드나드는 드나드는 제비들을 보자 반가웠습니다. 어렸을 때는 다른 새들과 달리 유독 제비들만 사람 사는 집안에 제비집을 짓고 사는 까닭이 궁금했는데, 어른이 되어 생각해 보니 그 까닭은 흥부전의 제비처럼 저 제비들이 행운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하는 집주인들의 희망섞인  기대심리가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1236분 강변의 2층 누정인 여울대전망대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여의마트를 나와 남한강로를 따라 걸어 남서진했습니다. 제법 커 보이는 어떤 날팬션을 지나 다다른 2층 누각의 여울대전망대 아래 벤치에 앉아 함께 점심을 들었습니다. 매번 이상훈 군이 끓여온 미역국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싶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들었습니다. 강 건너 천애의 절벽은 걸으면서 볼 때는 몰랐는데 점심을 들면서 느긋하게 바라보자 절벽 중간에 굴 입구가 보였습니다. 오랜 세월 풍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석회암의 표층이 떨어져 나가 수직의 암벽이 노출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과연 그런 것인지는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제껏 저런 절벽을 적벽으로 불러왔는데 동행한 원영환군이 적벽은 규산암으로 이루어져 붉은 색을 띄고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다시 데크 길을 따라 걸어 가곡초교를 막 지나자 꽤 큰 정자가 보여 길을 건너 다가갔습니다. ‘佳曲亭’(가곡정)으로 명명된 이 정자는 편액이 걸려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래전에 지은 것 같지 않습니다. 강가 새별공원에서 잠시 쉰 후 데크길을 따라 한강탐방을 이어가다가 종종 발걸음을 멈춘 것은 남한강 강변에 내려앉은 5월의 풋풋함을 완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길가에 활짝 핀 노랑 꽃의 씀바귀와 고들빼기가 어떻게 다른 가는 최돈형 군이 두 꽃을 직접 가리키며 설명했습니다. 강변을 가득 채운 갈대들도 볼만했지만, 옛 물탱크 위에 홀로 식재된 분재 소나무 한 그루와 안내판의 아래 소개 글이 눈을 끌었습니다.

 

  “1940년대 일제 강점기에 단양, 영월지역의 석탄을 채광, 운반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현재의 길 건너(향기나라에 위치)에 기차역을 설치하고 증기기관차의 용수 공급 목적으로 물탱크 3기를 설치하였는데 이곳은 "물탱크 2"에 해당된다. 남한강의 원수를 펌핑하여 "향기나라" 야산의 정사각형 물탱크에 저장한 후, 저지대의 기차역에 자연유하식으로 용수를 공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45년 광복으로 본 당초 계획이 무산되어 지금은 이렇게 폐시설물로 남게 되었다.”

 

  가곡교로 이어지는 가곡교차로를 지나 건넌 작은 다리는 사평교로, 이 다리 아래에서 새밭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일천이 남한강에 합류됩니다.

 

  14시 덕천교를 건너 남한강 우안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얼마 걷지 않아 하늘을 나는 패러글라이더들이 여기 덕천리착륙장에 착륙하는 것을 보고 나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밀랍으로 날개를 붙여 주고 등을 떠밀어 하늘을 날게 된 이카루스는 너무 높이 날면 밀랍이 태양열에 녹아 추락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늘 높이 날다가 밀랍이 녹아 바다로 추락해 죽은 어리석은 인물입니다. 인류 최초로 하늘을 난 이카루스는 이문열의 소설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음을 죽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갖고 있는 본능적인 것이기에 우리 인류는 이카루스의 무모함을 비난하지 않고 그 용기를 높이 사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선도 개발했습니다. 저도 딱 두 번 패러글라이드를 타 본 적이 있습니다. 초보 중의 왕초보여서 밀랍이 녹아 없어질 만큼 하늘을 높이 나는 것은 꿈도 꿔보지 못하고 해발고도 70m 지점의 활공장에서 이륙해 날아본 것이 전부입니다만, 하늘을 날 때의 그 짜릿함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계방향으로 반원을 그리며 덕천리를 지나 하덕천교 앞에 이르렀습니다. 의외로 다리가 긴 데다 기온이 20도 가까이 올라가 하덕천교를 건너는 일이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걷다가 길옆 그늘진 곳으로 빠져 십분 가량 쉬어갔습니다. 길이 80m의 덕천터널 바로 앞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 시골길을 따라 800m가량 걸어 남한강 좌안의 도담행복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충주 댐 담수로 단양 시내가 침수되기 한해 전인 1984년 여름에 집사람과 같이 이 마을을 찾아와 배를 타고 도담삼봉을 둘러보고 강 건너 석문을 다녀온 것이 첫 번째 단양 방문이었습니다. 그때 도담삼봉에는 정자가 없었던 것 같고, 도담삼봉이 어느 정도 물에 잠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충주댐의 담수가 끝나기 전이어서 지금처럼 깊이 잠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강 건너 유원지에서 바라보는 도담삼봉보다 그 반대 쪽인 도담행복마을에서 조망하는 도담삼봉이 한결 여유롭고 고즈넉해 보여  좋았습니다. 도담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도담상봉의 의엿한 자태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덕천터널로 돌아갔습니다.

 

  1652분 단양시내 여성발전센터 앞 별곡리정류장에서 16번째 한강탐방을 끝마쳤습니다. 덕천터널을 지나 주홍색의 트러스교인 삼봉대교로 들어서자 남동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남한강과 그 뒤로 아파트가 보여 단양 시내가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삼봉대교를 건너 왼쪽으로 이어지는 남한강 우안의 삼봉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강변에 야구장, 축구장, 경비행기활공장, 생태습지가 들어선 단양생태체육공원을 지나 별곡리 정류장에 다다라  반시간 가까이 기다렸다가 구인사행 시내버스를 타고 향산리삼층석탑으로 돌아갔습니다.  영월을 들러 해단식을 겸한 저녁식사를 같이 한 후 평창역으로 이동해 2055분발 KTX에 오르는 것으로써 서울사대 동문들과의 한강 따라 걷기를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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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봉 정도전과의 악연으로 고생한 한 사람은 우현보(禹賢寶, 1333-1400)입니다. 본관이 단양인 우현보는 역동 우탁(禹倬, 1263-1342) 선생의 후손으로 고려 후기에 문하찬성사, 판삼사사 등을 역임했으며, 정몽주와의 친분으로 조선 건국 직후 유배되었다가 정도전 일파가 제거된 후에 다시 관직을 맡은 여말선초의 문신입니다. 우현보가 정도전의 정적이 된 것은 재야사학자 이이화가 저서 한국사이야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종의 딸이라는 내막을 우현보와 그의 자손들이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태조7826일자 조선실록은 정도전의 사람됨을 아래와 같이 기술했습니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謀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撰述)고려국사(高麗國史)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加筆)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韓山)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와 성산(星山) 이숭인(李崇仁)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趙浚)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위 실록에 따르면 우현보와 정도전의 악연은 정도전의 외조부인 우연(禹延)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외조부(外祖父) 우연(禹延)의 처부(妻父)인 김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外祖母)이었는데, 우현보(禹玄寶)의 자손이 김전(金戩)의 인척(姻戚)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遲滯)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거정(居正) 등을 사주(使嗾)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조선실록에 기록된 내용이 모두 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역사는 승리자를 중심으로 한 기록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을 주살한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해 조선의 전권을 장악했는데 그 시대에 쓰인 태조실록이 모두 참이라고는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도전이 조선조의 국가 경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킨 것만으로도 그의 웬만한 허물은 덮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우현보가 저의 선조이기는 하나 정도전의 불우한 출생의 비밀을 외부에 알려 제거하려 했다면 그 또한 떳떳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탐방사진>